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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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말 무도하기 짝이없는 녀석이군.
무턱대고 그럼 벗어주시겠습니까, 라니….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시간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일까.
거의 울음이 터질것 같은 기분으로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데, 레르그란트가 갑작스럽게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너어…!"
놀림을 당한것 뿐인가….
"더 골려드리고 싶었지만, 이 이상하면 눈물을 보이실것 같아 그만두겠습니다. 아까전 보여주신 자신감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요?"
역시, 이 녀석은 아까전에 내 가벼운 놀림을 염두에 두고 있던것이 틀림 없다.
쓸데 없는것 하나라도 지는걸 정말로 지독히 싫어하는 녀석이란 말야…. 하지만 방금전의 다소 강압적인 분위기가 장난이라 해도, 내가 레르그란트의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 때문에, 마냥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잠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정오가 되어, 태양은 하루 중 가장 밝은 빛을 지상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저 아래에 몸을 드러냈다간… 솜털 하나하나 까지 모두다 보이겠는걸.
"그것보다… 그렇게 창피해 하시면서 복장은 상당히 본격적으로 갖추고 오셨군요."
이 가운 말인가….
레르그란트의 말대로 상당히 본격적인 복장이지. 묶여 있는 끈을 풀고 가운을 벗으면, 안엔 속옷밖에 없으니까.
나는 괜히 가운 자락을 여미며 조금 무겁게 답했다.
"… 약속은, 약속이니까."
"흐응, 어지간히도 그때의 일이 신경쓰이시나 보군요."
레르그란트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내게 등을 보이기전, 그는 무척이나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의 일이라는건…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거겠지.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등을 돌리고 있는 레르그란트를 향해 말했다.
"그건 내가 너에게 빚을 진거니까 말야."
"빚… 이란 말이죠."
그래, 빚.
아무리 네론그라시아의 모습을 하고 레르그란트에게 조력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네론그라시아는 네네아리케가 아니다.
온전한 네네아리케로서는 절대로 그런 빚을 갚을 수 없다.
"저와 누님은… 혈연 관계지 않습니까? 가족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꼭 그런식으로 생각하셔야 겠습니까? 고작 팔에 입은 작은 상처 하나 뿐입니다."
혈연관계….
그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지만, 어쩐지 공허하게 들린다. 우리가 정말로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묶여 있는 걸까? 나는 오히려 그것을 가장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레르그란트 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나인가?
최근까지 얼음 거성에서 홀로 크며 마법사가 된 내게,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빚이라고 생각할 것은 없다- 라는건 그다지 와닿지 않는 이야기다.
… 아무튼, 이런 사소한 일이 또다시 말다툼으로 이어지는건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지.
나는 벽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리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다툼을 하려고 온건 아닌데 말이지."
"… 알겠습니다. 더 이상 그 이야긴 하지 않기로 하죠."
어쩐지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 분위기에 불편함을 느낄 무렵, 방문에서 정갈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레르그란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시녀 한 명이 손에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작은 찻잔을 하나 들고왔다.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그것에선 은은하고 차분한 향기가 났다.
"자리에 편히 앉아, 일단 그 차나 한잔 하시지요."
… 자기가 먹으려고 한게 아니라, 나를 주려고 가져오라고 한 모양이다. 나는 레르그란트의 말대로 시녀에게서 차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것을 한 모금 마시기 전, 다시 한번 차의 향을 맡아보았는데 어쩐지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레르그란트는 조금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차를 두 모금 정도 마시자, 창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게로 돌리며 아까전 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건네었다.
"어때요, 마음이 조금 차분해 지셨나요?"
"으응. 무슨 차인진 모르겠지만… 효과가 무척 좋네."
무슨 차인지 이름을 말해줄 법도 하지만… 레르그란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말을 꺼냈다.
"누님을 그리고 싶다고 한 제가 이런 말을 하는것도 조금 우스운 일이지만… 정 불편하다 생각하시면 누드화의 모델을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정말…?
무척이나 솔깃한 제안이긴 하다만… 그래서야 내가 지워야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진배 없다. 레르그란트에게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한건 다름아닌 바로 나였으니까.
그리고 이건 말만 달라졌을 뿐, 빚… 즉, 책임감을 느낄 필요 없다는 방금전의 말과 별로 다를바가 없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에 동의할 수는 없는 일이지.
"… 괜찮아. 모델이 되어줄게."
레르그란트는 조금 미묘한 표정이었다. 내가 모델이 되어준다는 말을 반기는것 같기도 하고 일견으론 무척 불편한것 같기도 했다.
상반된 두 감정이 한 얼굴에 나타나려니… 미묘하다는 것 외엔 어울릴만한 표현이 없다.
"그러시다면… 뭐, 알겠습니다."
그 이후 녀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걸어 잠그는 일이었다.
철컥- 하고 문의 잠금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에, 나는 몸을 조금 움찔하고 말았다. 굳게 닫힌 문은 잠겨있든 잠겨있지 않든 동일한 모습이지만… 문이 잠긴 지금은 어쩐지 조금 답답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 *
아까전과 다르게, 레르그란트는 아무말도 않고 캔버스 앞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시선은 완전히 창가로 가 있는게, 그림을 그릴 의도 같은건 전혀 없다는듯 싶었다.
그에게선 아무런 강요도, 압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 이것은 배려다.
여기서 옷을 벗을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은 아직까지도 전적으로 내게 있는 것이다.
지금 그만 둔다고 얘기해도 레르그란트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열어 주겠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빚을 져 약속을 했고, 이제 그 약속을 이행해야만 한다.
… 다행히 아까 전 마신 차 덕분에 마음의 떨림이 어느 정도는 멎어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가운에 매어져 있던 끈을 풀어 내렸다. 덕분에 가운의 앞섶이 벌어지며 환한 햇빛아래 속옷과 흰 살결이 드러났지만, 레르그란트는 여전히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채였다.
"…."
몸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완전히 벗어 옆에다 놓았다. 이제 내가 입고 있는건… 얇은 속옷 두개가 전부다.
… 이러다간 옷을 벗는데 하루 종일 걸리겠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상체에 입고 있는 속옷마저 벗어버렸다. 시야를 차단하는 것으로 수치심 등을 억누르는건 다소 유치한 일이긴 하지만… 유치한 만큼 효과적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상태여서, 눈을 희미하게 뜨자 봉긋 솟아오른 가슴이 보였다. 이런 모습을 환한 햇빛 아래서 레르그란트에게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다.
손을 아래로 내려 마지막으로 내 몸을 가리고 있는 속옷을 잡았다. 그것을 잡고 그대로 발목 아래까지 내리려는 찰나, 다급한 레르그란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거기까지면 됐어요. 더 벗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달아오른 얼굴을 겨우겨우 들어올려, 레르그란트를 마주했다. 그 역시 얼굴이 귓볼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고….
아-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겨우겨우 입을 열어, 레르그란트에게 말했다.
"하, 하지만… 누드화 인데도?"
… 부끄러워 죽을것만 같은 일을 하려니,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엔 어떤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레르그란트는 당장 그 간절함을 붙잡아, 마지막 속옷이 내 몸에 남아있는걸 합리화 시켜주었다.
"괜찮습니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은 상상으로 어떻게든 해보죠."
… 얘는 지금 자기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긴 하는걸까.
내 얼굴은 이미 더 이상 달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시뻘개져 있을 거다.
사, 상상이라니….
"… 실언했습니다. 아무튼, 지금 그대로도 괜찮습니다."
의외로 레르그란트는 빠르게 차분함을 되찾아갔다. 나는 조금… 아니, 굉장히 분한 기분으로 잠시 그를 노려보았는데 침착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여전히 새빨개져있는 목덜미… 그리고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녀석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고 있는거다. 내가 더이상 부끄러워 하지 않도록…. 그림을 그려야할 레르그란트 마저 낯뜨거움에 침착한 시선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내가 너무 힘들어 질테니까.
덕분에 어쩐지 나 역시 조금이나마 침착해질… 수는 없겠지.
"이, 이제 어떻게 하면 되니?"
"햇빛이 들어오는 창을 옆으로 한채 자연스럽게 서 계세요. 시선은 저를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건 지금까지 들어본 레르그란트의 목소리와 말투 중 가장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레르그란트의 가장된 침착은 어느새 진짜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가 원하는 위치에 선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그는 그것에 완전히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덕분에 어느정도 침착을 되찾았다. 하지만 곧 있어, 나는 또다른 불편을 느껴야만 했다.
거의 알몸이 레르그란트의 눈 앞에 드러나 있는 상태니, 작은 몸의 움직임 하나, 심지어 숨을 쉬는것 조차도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게 되면, 흉부가 자연스럽게 오르락 내리락 하니까. 옷은… 정말 많은 것을 가려주는 도구였구나.
"…."
그대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내가 느끼는 낯뜨거움도 조금씩 누그러져 가기 시작했다. … 여전히 죽을것 같이 창피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까전 처럼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어딘가 몸을 숨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내 몸을 그리고 있는 레르그란트에게 물었다.
"레르그란트, 너는 왜 하필… 내 누드화를 그리고 싶다고 한거니?"
… 레르그란트의 손이 잠시 멎었다.
갑작스럽게 말을 건 탓에, 방해가 된 걸까…. 조금 후회를 하고 있는데, 상당히 부드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그건 제 취미에요."
설마, 누드화가…?
"저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말이죠. 아름다운 것을 그리고 싶지만… 그것은 제 머리속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실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찾을 수 밖에 없었지요."
레르그란트가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내 몸에서 잠시 시선을 떼었을때, 나는 주변에 있는 녀석의 그림들을 다시한번 쭉 훑어 보았다.
… 확실히 모두 아름다운 소재들 뿐이다.
붉은 석양이 진 노을, 이리스테야의 풍경, 어디서 보고 그런건지 모를 폭포…. 모두 하나같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그것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있는것 같았다.
"누님은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여자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소녀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소녀의 흰 나신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어찌보면 제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죠."
레르그란트의 목소리가 매끄럽게 이어진다.
나를 두고 지금까지 봐온 여자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고 추켜 세우는게 조금 낯 간지럽긴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저 사실을 언급하는 듯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이리스테야에서 처음 누님을 봤을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 그랬구나.
- 작가의말
* 아무리 생각해도 예비군 훈련과 디아블로 때문에 내일 생존이 힘들것 같더군요. 그래서 자기전 꾸역꾸역 한 편 더 써서 올리고 갑니다 ㅠㅠ 이렇게 되니 1만자를 두개로 나누어 이틀에 걸쳐 연재한것과 다를게 없군요 ㅋㅋ;
* 누드화;;;
* 성원해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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