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2화]
* * *
신전 안에 마련된 엘렌의 방은 햇살이 잘 들어오는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방 내부의 장식은 거의 대부분 하얀 천이나 신을 향한 염원을 담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마드라네의 대사제라는 그녀의 신분 치고는 굉장히 수수한 것들이었다.
"여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겠니?"
"응, 천천히 기다리고 있을게."
엘렌은 치마자락이 사르륵 거리는 소리만 남겨놓고 방을 나갔다.
"…."
창문 밖으로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 신전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은 아주 조금이라도 신성(神聖)을 갖는다고 한다. 저기 있는 저 나무도 아마 신성을 가지고 있겠지.
음, 그래서인지 그럴까… 나무에 열린 열매가 아주 맛있어 보인다!
나는 탁자에 앉아 턱을 괴고 차를 가지러 간 엘렌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 나는 아마드라네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전에 찾아오는 이유는 순전히 엘렌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아무런 사심없이 순결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엘렌을, 나는 꽤 좋아한다.
"…."
짹, 짹-
"아!"
멍하니 탁자의 무늬를 보고 있는데,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날아와 창가에 앉았다. 온 몸의 깃털이 새하얀 새였는데, 눈동자만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새는 나를 보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귀여워라…."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창가쪽으로 다가가 새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헛 된 손짓이라는건 알고 있다. 야생의 새는 보통 사람의 손을 피하는게 보통-
"꺄앗-!"
인데, 새가 통통 튀어오르더니 내 손위로 앉아버렸다.
하얀 깃털에 푸른 눈동자….
문득, 생각난게 있었다.
이 새, 내 동생 레르그란트를 닮았다.
갑자기 치솟은 심술에 나는 다른 손으로 새의 부리를 살짝 톡, 하고 밀쳤다. 그러자 새는 짹-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손에서 창문 바깥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나는 혼자서 킥킥거리며 작게 웃었다.
다시 창 밖을 바라보니, 저쪽에서 예배를 끝마친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옷차림, 머리카락의 색, 성별… 모두 다른 사람들이지만 예배 시간때 만큼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아마드라네에게 기원했겠지.
절대자에게 의지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누굴 보고있니?"
"아니, 딱히 누굴 보고 있진 않은데…."
"흐응- "
어느새 내 등뒤로 다가온 엘렌이 묘한 눈초리를 내게 보내며 나와 마찬가지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멋진 남자라도 보고 있던거 아니었니?"
으와- 평소의 엘렌답지 않은 농담인걸….
"저기 저 남자인가?"
엘렌이 가리킨건 어두운 밤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엘렌이 일부러 지목할 정도로, 확실히 빼어나게 생긴 미남자이긴 했다.
"아, 저 남자… 어디서 본적있는것 같은데."
"얘는, 아무리 사교성이 없어도 그렇지. 카르츠 엘 세르간스라는 남자잖아. 검은 맹금(Black raptorial)의 단장을 맡고 있는."
헤에- 상당히 젊어보이는데…. 능력이 대단한 남자인가보다.
검은 맹금은 이리스테야 최고의 정예 기사단이다. 전에 글로리아뎀에 들렸을때 본적이 있는데, 기사들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거기다 세르간스라면… 재상을 맡고 있는 브라페르트 엘 세르간스 공작의 아드님이 잖아? 정말 대단한 도련님이네.
"어때, 저 정도라면 너와 어울릴것 같은데?"
엘렌은 빙긋 웃고선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무슨… 저런 남자는 나같은 어린애는 좋아하지 않겠지."
난 올해로 열 일곱 이긴 하지만 건강 문제로 계속 앓은 탓인지 성장이 빠르지 않다. 때문에 아직도 십 오륙세 정도의 작은 소녀로만 보일뿐. 오죽하면 처음보는 사람들은 동생인 레르그란트가 내 오빠인줄 안다.
"하지만 나는 네네아리케보다 예쁜 여자애는 본적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엘렌도 굉장한 미인이다. 나와는 다르게 성장도 빨라서 스타일도 좋고, 키도 크고…. 무엇보다 그녀는 스무살, 성인 이니까.
… 그런데 왜 자꾸 이야기가 이런쪽으로 빠지는지 모르겠다.
"내 신랑감 걱정해줄 시간 있으면 엘렌부터 애인이나 만들지 그래?"
"안돼. 나의 모든건 아마드라네 님을 위한 것이니까."
엘렌의 목소리는 짐짓 냉엄하다. 냉엄하고, 또 성스럽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녹빛 눈동자가 투명하고 올곧다. 어떻게 저렇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녀의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신념같은 것이 깃들어있다. 그래서 나는 엘렌이 마치,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성녀같다고 생각했다.
* * *
"가끔 아주멀리 한달 정도 빈민구제 같은걸 나가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전쟁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보면, 죽은 이에 대한 연민 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알고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떠올라. 남겨진 사람은… 더 슬프겠지."
그렇게 말하며, 엘렌은 잠시 눈을 감았었다. … 죽은 이들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것 같았다.
'아마드라네여, 그대의 품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어린 영혼들을 부디 가여이 여기시옵소서….'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엘렌은 내게 물었었다.
"평화란건… 결코 찾아올 수 없는 걸까?"
그것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답할 수 없어서… 조금 분했던것 같다.
"…."
덜컹, 덜컹.
마차를 타고 다시 에스카랸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난 창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름답게 빛나는 선명한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투명한 호백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손바닥을 들어 내 모습을 가렸다.
"…."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치우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는 어느새 이리스테야 시내로 접어들어 있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빛들…. 저것은 모두 영구 발광 마법석이라는 마도 과학의 부산물들로 인한 결과이다. 저것은 인간에게서 밤의 어둠을 빼앗아 갔지.
눈이 부셔, 별빛이 보이지 않는다.
음… 근데, 잘때는 저 불을 꺼두는걸까…?
"하암- "
잘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하품이 나온다.
하품을 하고나서, 오늘 신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신전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해봐야 엘렌하고 얘기한것 밖에 없지만….
엘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아마드라네를 믿는다. 아마드라네를 믿고, 그 믿음으로 다른 이들을 치유하고, 구원한다. 그녀의 믿음은 전혀 흔들림이 없고, 강철같이 굳건하다. 그런 그녀는 내가 신전에 방문하는걸 반긴다. 나 역시 그녀와 같이 독실한 아마드라네의 신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음, 친구니까…?
아무런 문제 없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는건 얼마나 행복한일일까.
"…."
턱을 괴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 거대한 탑이 보였다. '
"아."
신전의 신성 때문에 살짝 억눌러 두었던 마력이 또다시 미약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 거대한 탑이 보였다. '
"그래…."
이리스테야의 시내를 지나고, 창밖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창가에 비친 나는, 조금 공허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것 같다.
' 거대한 탑이 보였다. '
나의 근원, 이상향(理想鄕)이 그리는건 푸른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거대한 탑이다. 그래서 나는… 신을 긍정할 수 없다.
그냥 그뿐인 것이다.
* * *
"아가씨, 공작님께서 찾으셨습니다."
시녀가 저택의 입구에서 내 겉옷을 받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 가?"
그 말을 듣자, 얼음 한 조각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 몸에 한기가 돈다.
무슨 용건이길래 나를 따로 부르는 걸까, '그 사람' 은….
아일튼 엘 에스카랸. 내 아버지의 이름이다. 나를 북령주에 홀로 남겨두고, 거의 십년동안 단 한번도 찾지 않았었지. 단 한번도 따뜻한 말 한마디 들은적 없고, 그래서 혈육의 정이란 말은 민망할 정도로 요원하기만 하다.
평생을 전쟁터의 핏물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내 아버지란 자는.
"조금 늦으셨군요, 누님."
레르그란트가 저택 홀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나선 계단을 걸어내려오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계단 위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 보는 푸른 눈동자가 매섭다. 그래, 저 짐승 같은 푸른 눈동자.
아버지도, 너도… 모두 그렇게 항상 살기어린 푸른 눈을 하고 있다. 초식동물을 앞에 둔 흉포한 육식동물 같이. 평화라는 말은 전혀 모르는, 오직 투쟁만을 위한 존재처럼.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레르그란트."
"…."
아버지의 방은 2층에 있었기에 그가 서있는 나선계단을 딛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레르그란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그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레르그란트가 작게 한숨을 쉬는 것이 들린다.
"… 너무 늦게 다니시는건 좋지 않습니다. 몸도 좋지 않으신데."
그건 평소 동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평소 녀석의 목소리는 좀더 감정이 결여 되어 있는, 차갑고 매끄러운, 단단한 강철같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흥, 별일이네….
난 대꾸없이 그를 지나쳐 2 층으로 올라갔다.
2 층 복도엔 여러개의 촛대가 매달려 있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가 어릴적 머물렀던, 북령주의 에스카랸 성이 떠오른다. 항상 싸늘한 한기가 감도는 복도, 그리고 희미한 촛불….
이 저택은 성보다는 훨씬 따뜻하지만, 분위기는 그곳과 별로 다를바 없다. 이곳도 여전히… 춥다.
난 괜히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앞으로 걸었다.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복도를 걷는 기분은 마치, 짙은 안개를 헤치고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꿈을 꾸는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시덥지 않은 감상에 빠져 걷다보니, 어느새 아버지의 방문앞에 도착했다.
뭐라고 해야할까.
잘 지내셨나요, 아버지…?
… 벌써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지도 반년이 넘어가는것 같다. 끊이지 않는 분쟁으로 아버지가 바쁜건 사실이지만, 사실 그따위 것이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어쨌든, 노크.
똑, 똑.
"… 들어오거라."
방 안에서 나즈막한 음성이 들렸다.
끼익-
기름칠이 잘 되지 않았는지,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렸다. 그 소리를 다시 듣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들어간 방안은 굉장히 어두웠다.
방의 구석에 커다란 침대가 하나 있었고, 중앙엔 큰 탁자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이외엔 일체의 장식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살풍경인 방이었다. 아버지의 방…. 다소, 주늑이 드는건 어쩔수 없었다.
탁자엔 복도에서 본것과 똑같은 촛대가 하나 올려져 있었고, 아버진 그 앞에 앉아서 투명한 유리잔에 피처럼 붉은 술을 따르고 있었다.
… 숨이 막히는것 같다.
쪼르륵-
마음대로 숨을 쉬는것조차 허락되지 않을것 같은 고요한 방 안에서, 액체가 둥그런 유리잔 안으로 쏟아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한잔 할테냐?"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 그는 나와 같은 짙은 은발에, 레르그란트와 같은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르그란트의 눈동자와는 느낌이 달랐다. 레르그란트가 싸늘함 속에 숨긴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도전적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는 그저 끝없이 침잠할 뿐인 지저와도 같았다.
난 그것에 괜히 압도되는 것을 느끼며, 이 고요함을 깰세라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시선을 힐끗 돌려보자, 벽에는 화려한 장식물들 대신에 긴 장검이 하나 걸려 있었다. 에스카랸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명검, '알렉트락스' 였다.
아버지는 따라놓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
"이제 몸은 좀 건강해 졌느냐?"
"네."
… 이상한 대화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이런걸 물어보는 사람이었나? … 답은 전혀 아니다. 나를 바라보는 싸늘한 푸른 눈동자. 그 안에 걱정이란건 조금도 존재치 않는다.
모두 거짓. 겉치레 같은 인삿말인 것이다.
"너도 이제 슬슬 결혼해야할 남자를 알아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서 아버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아…?"
놀란 나머지, 비명이 새어나려오는걸 손으로 입을 막아 참았다. 결혼, 이라구…?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냉엄한 시선은 반발을 용납치 않는다.
난 속으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너와 장래를 약속할 사람은 카르츠 엘 세르간스다. 세르간스 가(家)의 장자로, 꽤 쓸만한 청년이지. 곧 약혼식을 올릴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
'알아보아야 할 때' 라고는 했지만, 이건 그냥… 통보로군.
"…."
"아, 그리고 이것을 가져가거라. 에스카랸 가(家)의 사람이라면 자기몸은 자기가 지킬줄 알아야겠지. 그렇지 않느냐?"
그저 동의를 구할뿐인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마치 지독한 비난을 당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는 품속에서 손바닥 만한 상자를 꺼내어 탁자위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아버지가 한 말 때문에 상자를 열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용건은 끝이다. 이만 나가보거라."
"… 네."
조용히 문을 닫고, 아버지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나서 나는 힘없이 복도 벽에 등을 기대어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잔뜩 흘러내려와 시야를 가렸다.
… 놀람이 진정되지 않는다.
나와 결혼할 남자라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고…. 모두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일인줄 알았다. 내 상상력이 미처 거기까지 미치진 못했던것 같다. 왜냐하면… 내 생명은 그다지 길지 않을테니까.
손바닥을 들어 가슴에 얹어 보았다.
봉긋 솟아오른 조그만 가슴의 느낌과 함께,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연약한 심장박동이 전해져 온다.
두근, 두근….
나는 내가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거라는걸 잘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지.
난 금방 죽어서… 힘없이 시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사실 결혼 같은것 따위는 내게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근데, 카르츠 엘 세르간스라면… 오늘 신전에 갔을때 한번 봤었던 남자였지. 뭐였더라, 검은 맹금의 단장이라고 했었나.
흥, 알게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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