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13화]
* * *
이틀이란 시간은 그동안 내가 뭘 했는지 기억도 안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면 그게 몇년이든 짧게 느껴지는게 인간인데, 하물며 이틀정도야….
기분이 이상하다.
약혼이라니…. 아무리 내 인생이 시한부라 해도, 약혼이란건 필연적으로 결혼이라는 연쇄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어 실제로 결혼을 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정말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데, 결혼이라는건….
나는 내 눈앞에 놓인 드레스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오늘 저녁에 내가 입고 나갈 드레스다. 카르츠라는 남자에 비해 너무 어려보이는 내 외모를 조금이라도 더 성숙하게 보이기 위해서라곤 하는데… 아무래도 천이 너무 적어보이는 옷이다.
정말로 이걸… 입으라고?
"아가씨, 슬슬 준비하셔야 될 것 같아요."
시녀의 말에 벽에 걸린 괘종 시계를 보았다.
"식이 시작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것 같은데…?"
내 심드렁한 어조에, 시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머, 무슨 말씀을…! 지금부터 꾸미셔야지 식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출수 있답니다. 자, 어서- "
"…."
으… 너무 싫다.
내 감정이야 어쨌든, 식은 올려야 하기에 나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시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시녀들은 자기들이 약혼식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도 굉장히 들떠 보였다. 그녀들은 부산스런 동작으로 내 머리를 빗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이름도 모르는 장신구 같은것을 내 몸 곳곳에 대어보곤 했다. 그리고 서로 떠들어 대며 심사평 따위를 말하기도 했다.
수식은 길었지만 내게는 그저 번거로운 일련의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시간이 가질 않길 바랬지만… 시간은 내 바램이야 어쨌든 무정하게 흘러갔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식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때 시녀는 드디어 끝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방 한 구석에 놓여져 있는 전신 거울로 걸어가 거기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아가씨, 너무 예뻐요."
살결의 노출이 야하다 싶을 정도로 심한데…. 너무 성숙함이란 것에 집중한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예쁘다고…? 내가 보기엔 창백한 얼굴을 한 인형 같은 여자애 밖에 안보인다. 생동감은 전혀 느낄 수 없는…. 나는 그대로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아버지와 동생과는 다른 호박색 눈동자 밖에 없다.
뭐, 내가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는 상관 없는 문제일테지. 이게 모두가 원하는 모습일테니까.
똑똑.
노크소리가 들린 후 약간 뒤에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저택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비가 다 끝나셨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직접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 뒤에 서있던 남자는 집사였다.
"테오렐…?"
그는 고개를 들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아가씨. 제가 여태껏 살면서 보아온 그 어떤 아름다운 여성보다도 더 아름다우십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더욱 아름다워 지실 테지요."
언제나 변하지 않을것 같은, 차분한 어조였다.
테오렐의 눈엔 작은 감격이 담겨 있는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내가 이 저택에 왔을때 부터 나를 돌보아준 사람이니까….
차라리 집사가 아버지보다는 나를 더 사랑하지 않을까.
"그럴… 까요?"
"그럼요. 여자는 결혼을 하게 되면 더욱 아름다워 진다고들 하지요. 비록 아가씨께서 지금 당장 결혼하시는건 아니지만요."
그의 말투가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깊은 비감을 느낀다.
나는 그에게 억지로 밝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저택 앞엔 화려하게 치장된 커다란 사두마차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건…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난 그 모습을 보자마자 또다시 숨이 막히는걸 느꼈다.
"아름답구나."
"네…."
아름다워 보이는다는 말 조차도 사무적으로 들린다. 나는 아버지가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으며 마차위로 올랐다. 아버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차는 글로리아뎀을 향해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집사와 가문의 기사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져 더이상 보이지 않을때까지 창문을 통해 계속 바라보았다.
"…."
글로리아뎀으로 향하는 동안,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차 안은 밖에서 가끔 덜그럭 거리는 소리를 제외한다면,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나를 왜이렇게 급하게 가문에서 배제시키려 하는걸까.
난 아무것도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한채, 그저 마차안에 머물고 있는 침묵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차는 이리스테야의 커다란 가도를 달리고 달려, 어느새 창밖으로 신성함이 머무는 황궁, 글로리아뎀이 보였다.
그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레르그란트는 오늘 식에 참석하지 못할거다. 아직까지 국경지역으로 파견나가 있는 상태이니까."
"네."
요만큼도 관심없는 이야기다.
레르그란트가 식에 참석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나는 턱을 괴고, 시선을 아버지의 반대편으로 돌려 창문쪽을 바라보았다. 마차는 어느새 글로리아뎀의 거대한 게이트를 통과해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밤의 어둠속에서 자체적으로 발하는 빛에 의해 하얗게 빛나는 글로리아뎀의 내부는 그 어느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바깥으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약혼식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일까….
마차는 곧 멈추었고,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채 아버지를 따라 마차를 내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는걸 느꼈다. 처음엔 노골적인 호기심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시선들이, 무표정한 아버지를 발견한 뒤 분분이 흩어졌다.
아버지… 에스카랸 공작이라는 사람은 이렇듯,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검은 혹한, 북령주의 늑대왕, 히로이얀의 검. 그런 거창한 말들이 모두 아버지 한 명을 수식하는 말들이니까.
나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글로리아뎀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 도중에 아버지에게 말을 거는 자들도 있었지만, 모두 아버지의 차가운 태도에 찔끔- 하며 물러서기 바뻤다. 어떻게든 아버지와 친분을 만들려 하는게 눈에 보이는 자들이었는데, 그런 모습들이 상당히 가여웠다.
아버지의 단단한 등을 따라 길을 걸으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보니, 나 굉장히 야한 옷을 입고있잖아….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나는 아버지의 등뒤로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아버지를 의지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복장은 너무 창피하니까.
"안녕하시오, 에스카랸 공작."
"음… 크로샤드."
아버지의 앞으로 나오며 말을 건 자는, 굉장히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특히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두 마리의 금색 뱀이 기다란 막대기를 타고 오르는 모양새였다. 금색 뱀의 눈은 붉은 빛을 발하는 루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크로샤드 라면…. 아버지와 동일하게 공작의 위(位)를 지니고 있는 자다. 아버지가 북령주의 지배자라면, 이 자는 제국의 서령주를 지배하는 사람이다.
"따님의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아, 그쪽이…."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앞으로 나서며,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네네아리케 엘 에스카랸 입니다."
크로샤드 공작은 그가 쥐고 있는 지팡이의 손잡이 같이, 뱀의 얼굴을 연상케 하는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날카로운 독사같은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데, 그의 눈동자엔 얼핏 감탄이 머물다 간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어리지만… 미색이 아주 뛰어나군. 조금만 더 성장하면 나라를 뒤흔들 정도의 미녀가 되겠어. 세르간스 공작의 아들은 참 복이 많군 그래."
"감사합니다."
감사하다고 답하긴 했지만… 나라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크로샤드 공작의 말투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아버지, 크로샤드 공작과는 사이가 별로 안 좋은건가.
"나라를 뒤흔들 정도라니, 과장이 심하군 크로샤드."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과장이라니, 내 생각엔 그 표현도 좀 부족한 감이 있는것 같네. 그나저나… 정략혼으로 세르간스 공작가와의 결합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건가? 자네는 이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라도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으와- 저런 직설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크로샤드 공작은 굳이 언성을 낮추려고도 하지 않아, 이쪽의 대화를 주의깊게 듣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어렵지 않게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아저씨… 아버지 하고 사이가 정말로 안좋은가보다.
"비약이 지나치군. 내가 권력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게 자네이지 않나? 쓸데 없는 생각은 저리 치워두는게 좋을걸세."
하지만 아버지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권력이라는 힘은 아무리 강건했던 사람이라도 손쉽게 무너뜨리는 묘한 힘이 있는다는것 같아서 말일세."
"쓸데 없는 소릴."
크로샤드 공작은 경직되었던 분위기를 풀려는듯, 씩 웃으며 말했다.
"농담일세. 그리고 에스카랸 양…."
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있다시피한 나는 살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리며 답했다.
"네."
그는 독사같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더니 말했다.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여자는 결혼을 하면 더욱 아름다워진다고들 하지. 다음에 볼때는 좀 더 성장해 더욱 아름다워진 모습을 기대하겠네."
테오렐이 했던 말과 똑같은 소릴….
그나저나, 아버지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딴판인걸. 저런 미소를 지으니, 독사같던 얼굴도 더이상은 그렇게 보이질 않았다.
크로샤드 공작….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것 같다.
"감사합니다, 크로샤드 공작님."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글로리아뎀의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아무리봐도 돌아가는 모양새인게, 약혼식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은 아닌듯 싶었다.
* * *
연회장은 내가 본 그 어느때 보다도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에스카랸 성에서 이리스테야로 온 직후에 딱 한번 와보았던게 다지만….
나는 의자에 앉은채, 내 옆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카르츠 엘 세르간스….
연회장으로 들어온 지는 꽤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와는 단 한 마디도 나누어 보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세르간스 공작이 앞으로 나와 약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있었다.
나는 세르간스 공작의 이야기를 모두 흘려 들으며, 테이블에 가져다 놓은 붉은색 음료를 한 모금 홀짝였다. 목마름이라는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나인데… 지금은 왠지 목이 타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들, 앞으로 나와주시겠는가?"
카르츠와 마찬가지로, 빼어난 미남자인 그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우며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세르간스 공작의 청원에, 카르츠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 역시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앞으로 나갔다.
… 떨린다.
항상 저택에서 적은 사람에게만 둘러 쌓여 지내온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마스터 네론그라시아 로서가 아닌, 온전한 네네아리케로서 나와본 적이 있었을까.
"모두, 이 잘어울리는 한 쌍이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하는 것에 대해 축복해 주시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시선을 어디다가 둘지 모른채 머뭇거리다가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런 나의 소극적인 태도가 우리 에스카랸 가(家)의 위상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와서 그런것 따위야-
"네네아리케."
… 가족외의 남자에게 그냥 이름으로 불려진 적은 처음이어서 무척이나 이상하게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카르츠 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 손을 조심스럽게 그의 손 위로 올렸다. 그의 큰 손에 비해 내 손은 아이의 그것처럼 너무나도 작았다.
그는 내 손가락에 녹빛 보석이 박혀있는 자그마한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
이것은… 약혼의 증명. 그리고 이것은 나를 옭아매는 구속이기도 하다.
내 손에 반지가 끼워지자, 다시한번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연회석 쪽을 바라보았다.
박수를 치고 있긴 하지만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크로샤드 공작이 말했던것 처럼, 정략혼으로 이어지는 우리 에스카랸 가문과 세르간스 가문의 결합이 그들에겐 달갑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카르츠가 조금 머뭇거리는 손길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푹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맨 살로 그의 손길이 여과없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시선을 의식해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움츠려들려는 어깨를 펴며 억지로나마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옆쪽에서, 박수를 치고 있던 세르간스 공작이 아버지에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아일튼. 자네도 앞으로 나와 뭐라고 한마디 해주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여느때와 똑같이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듯한 푸른 눈동자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이제는 질릴 정도다.
… 이제와 쓸데 없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기로 해서, 아버지의 태도야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이런저런 잡다한 의식이 모두 끝나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나는 카르츠와 함께 따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카르츠는 탁자에 나온 두툼한 스테이크를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작게 썰고는, 나에게로 내밀었다.
으… 부담스럽다.
"저, 세르간스 씨…?"
"다음에 볼때는 그냥 카르츠라고 불러달라고 하지 않았잖소?"
그는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다.
하긴, 이제는 약혼을 한 사이니까….
"알았어요… 카르츠."
무지 무지 어색하다. 그러고 보니, 가족 이외의 남자를 이렇게 이름으로만 부른것도 처음이구나….
* * *
연회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조금씩 홀짝이긴 했지만 거의 한 병을 다 비워버린터라 술기운이 올라왔다. 나는 술기운에 취해 멍한 기분으로 의자에 앉아 연회장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 가고 싶다. 저택으로 돌아가 내 방에서 언제나처럼 흔들의자에 앉아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었다.
나는 무릎위에 놓인 내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은색의 반지가 연회장의 화려한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것을 기점으로 모든것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옆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올리길 원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원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히로이얀 제국에서 성인으로 인정해 주는 나이는 열 여덟 살. 내 나이가 열 일곱이니, 내년이면 나는 바로 이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영원히… 소녀로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른 같은건 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어린 시절에 읽었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던 세계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 세계가 결코 꿈과 희망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른이 된다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으려나.
그래도 소녀인채로 남아있고 싶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술잔안에 든 붉은 액체에 비친 내 얼굴을 마주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꺅-!"
뭐지…?
연회장 입구 쪽에서 나즈막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집중되었다.
레르… 그란트?
그는 피가 묻은 은색 갑옷을 입은채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국경 지역으로 파견 나갔다더니… 누군가의 피가 묻어있는 저 차림새로 보아 그는 정말로 '이제 막' 전쟁터에서 복귀한듯 했다.
그는 무언가에 화가나기라도 한 듯, 연회장 안으로 진입하며 강렬하게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로 이곳을 쏘아보고 있었다.
"흠… 자네가 국경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누이의 약혼식에 참여해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은 잘 았겠네만, 그 복장은 좀 곤란하군."
세르간스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레르그란트가 그를 보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누님의 약혼식에 참여하고 싶었던 마음이 너무 컸던지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당히 뻔뻔한 대답이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저 녀석은.
세르간스 공작은 골치가 아프다는듯,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작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리고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던졌는데, 그 시선은 아버지보고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이 담겨있는듯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별 관심 없다는듯, 술을 한잔 더 들이킬 뿐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허공에서 레르그란트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왠지… 기묘한 느낌이다.
"…."
나는 동생의 흉폭한 푸른 눈동자를 계속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은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강렬한 분노만을 품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난다는 거지…?
"세번째 성배의 기사, 레르그란트."
카르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르그란트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레르그란트는 잠시 그의 손을 노려보는듯 하다가, 이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덜그럭, 하고 레르그란트의 갑옷에서 거친 쇳소리가 들려왔다.
"복장이야 어쨌든, 나와 네네아리케의 약혼을 축하하러 와주어서 고맙네."
"…."
레르그란트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눈동자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침묵이 불안했다.
"자네 누이가 저곳에 있네. 가서 직접 축하인사라도 해주지 않겠는가?"
카르츠의 말에 레르그란트의 시선이 다시 이곳으로 향했다. … 방금까지와는 달랐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본 사람을 대하는것 처럼. 나 역시, 그를 건조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고 얽혀, 엉망진창이 되어가는듯 했다.
"미안하군요, 나이트 세르간스."
레르그란트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말했다. 카르츠는 그런 그에게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엇이 말인가?"
"나는… 도저히 이 약혼을 축하해 줄 수가 없으니까."
레르그란트가 한 그 말은 카르츠를 향하고 있는게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는 듯 했다.
* * *
그 이후로, 레르그란트는 금방 연회장을 나가긴 했지만… 그가 연회장에 남기고간 흔적은 그리 작지 않았다. 분위기는 어수선해졌고, 더 이상 연회 같은 걸 진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아…."
계속해서 술을 마신 탓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숨은 거칠고, 사고 판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술을 마신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신듯한 느낌이다.
아, 이거 말이 되는 소린가…?
"네네아리케."
"네에- ?"
어라, 나… 방금, 이상한 목소리로 답한것 같은데.
"많이 취했소. 이제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는게 좋겠구려."
"네, 돌아가야지요."
나는 그의 말에 긍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몰려오는 술기운에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카르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부축했다.
"괘, 괜찮아요. 혼자 걸을 수 있으니까."
그의 도움을 거절하고, 혼자 걸으려다 바닥으로 넘어질뻔 했다. 넘어지는 꼴사나운 사태를 면한건, 카르츠가 내 허리를 잡아준 까닭이었다.
… 평소와 달리 굽이 상당히 높은 구두를 신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모양이다. 난 혼자 걸을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나를 부축하고 있는 카르츠가 편하도록 그의 팔에 완전히 기대었다.
"미안해요. 연회장 앞까지만… 부탁할게요."
그에게 완전히 기대다 시피해서 연회장 입구로 나가며, 나는 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 기색을 눈치 챈건지 카르츠가 입을 열었다.
"에스카랸 공작님께선 아까 전에 돌아가셨소."
"그런가요…?"
음, 아버지라면 그럴만도 하지.
나는 술에 절어 멍해진 시선으로 바닥을 보며 걸었다. 폭신해 보이는 붉은 카펫의 영역이 끝나고, 차가워 보이는 대리석 영역이 시작되었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연회장 바깥이었다.
여름 치고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 몽롱한 상태의 정신이 어느정도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소? 어린 여성이 마시기엔 도수도 세고, 양도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밤 바람을 쐬었더니 조금 괜찮아졌어요. 그리고… 이래봬도 평소에 달콤한 과실주 같은건 꽤 즐기는 편이니까요."
"그렇소? 상당히 의외로군."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는 키가 커서,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한참이나 올려다 봐야 겨우 그의 얼굴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의외인가요? 제가 술을 즐긴다는 사실이…?"
"뭐, 그런 셈이지. 당신은 아직 미성년자이니까 말이오. 거기다 이렇게 작은 여자애가 벌써부터 술을 입에 댈 정도로 힘든 일이있나, 싶기도 하고 말이오."
꼭 힘든 일이 있어야 술을 마시나? … 이 남자는 그런가보다.
그것보다, 왠지 상당히 무시하는 듯한 말투인데. 하지만 나를 내려다 보는 그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로 인해, 그런 생각이 서서히 지워져갔다.
이 남자는 원래 말투가 이런가 보다.
생각해보면 마스터 네론그라시아로서 이 자를 만났을때도, 가감없이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던것 같다.
"…."
"자, 에스카랸의 마차는 이쪽이오."
카르츠는 나를 부축해 가문의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마차에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완전히 술에 취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조금 놀란듯한 모습이었다.
"잠깐 실례하겠소."
"꺅!"
그는 마차문을 열고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내 목과 무릎에 팔을 넣어 나를 안아들어 마차 안에 앉혀주었다.
… 조금 놀라고 말았다.
"고마워요."
"별 말을. 그럼 잘 들어가시오, 네네아리케. 아, 그리고 술 덕분인가… 오늘, 꽤 귀여웠소."
음과 음이 합쳐져 단어가 되고, 단어와 단어가 합쳐져 문장이 된다. 그의 말은 최종적으로 문장의 형태로 내게 전해졌지만, 나는 그것을 온전한 문장으로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곧,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아주 천천히, 암호를 해독하듯 이해되었다.
그가 굉장히 낯뜨거운 말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 없을것 같다.
카르츠는 잠시 머뭇거리며 마차의 입구에 서있다가 상체를 숙여 조심스럽게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잠깐 동안 내 뺨에 머무르다 사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에 봅시다."
마차의 문을 닫은 뒤, 고개를 돌려 카르츠를 바라보았다. 창 문 밖으로 보이는 그의 표정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뚝뚝했다.
- 작가의말
2월 초에 눈 수술을 했던 터라 연재가 잠깐 지연됐었습니다. 죄송 ㅠㅠ 쪽지로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10만자가 되어가는군요... 정규연재란 신청해야겠습니다 ㅎㅎ
아, 그리고 이 글의 주는 연애가 아닙니다 ㅡㅡ;;
이미 완결까지 이야기가 모두 구상되어 있긴 하지만... 로맨스 요소가 있다고 해야되나 없다고 해야되나...;
영원으로 가는 문 처럼 좀 미묘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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