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120화]
* * *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나를 보고 당황하던 레르그란트는 결국 양 팔을 벌려 나를 제 품에 꼭 끌어 안았다. 이건 위로, 겠지. 하지만 무엇에 대한…?
"솔직히 그 눈물의 이유조차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아무튼 누님이 우는걸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군요. 그 어떤 심한 상황에서도 눈물 만큼은 보이지 않던 누님이었는데…."
그랬었던가.
눈물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러고보니 레르그란트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줬었던 적은 별로 없었지.
"…."
레르그란트는 별 다른 말 없이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게 나 조차도 이유를 모르는 눈물에 큰 위로가 되었는지, 내 눈에선 서서히 물기가 잦아 들어갔다. 하지만 레르그란트는 여전히 나를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그는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처음 볼때는 당황해서 물어볼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응?"
"이 와중에 머리카락을 왜 백발로 바꾸신 겁니까? 염색을 통해 기존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에 취미라도 생기신 건지요?"
대답이 궁한 나는 이 질문을 어떻게 해야할까 하다가 그냥 계속해서 우는 척을 했고, 레르그란트는 당황하여 다시금 내 등을 쓸어주었다.
* * *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 역시도 작전 회의에서의 진행은 지지부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히로이얀과 상대인 듀카스텔 사이에 낀 저 마물의 군대를 해결하기 전까지, 어느 쪽도 섣불리 먼저 공격해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지루한 교착 상황도 오늘 까지였다.
히로이얀의 지배자, 여황 엘레로페 야크하이나 엘 엘브릿드로 부터 지체하지 말고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유니온의 게이트 네트워크가 모두 파괴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명령은 쾌속 비공정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창과 검을 맞대기 시작하는 시기는 당연히 군대를 직접 이끌고 있는 사령관이 결정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히로이얀의 최동단인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여황이 어찌알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것은 다분히 작위적이다. 엘레로페 여황은 마물의 군대가 사이에 끼어 있음을 알고도 억지로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의도다.
"아, 아무리 여황 폐하의 명령이라도…."
"이미 내려진 여황 폐하의 명령은 절대적이오! 우리는 당장 듀카스텔을 쳐야 합니다!"
"책임감 없는 소리 하지 말게! 펠그로엘드가 이끄는 진정한 살해자들의 의도조차 모르는 판국에 듀카스텔과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자니, 제 정신인가?"
… 그리고 작전 막사 안은 다시 여러 의견들로 들끓기 시작했다.
귀가 멍멍해 질 정도의 소음에 정신 역시 멍해질 무렵, 갑작스럽게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그 시끄러움을 압도했다. 나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엉덩이를 잠깐 동안 들었다 땠고, 목성이 터져라 상대편과 말싸움을 하던 여러 귀족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 소리를 낸것은 레르그란트가 허리춤에 매고 있는 검집이었다. 그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냉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더 이상의 의견 교환은 필요 없소. 여황 폐하의 명령이오. 오늘안에 전 군을 움직여 듀카스텔을 치겠소."
"하지만 사령관 각하…!"
"그만. 이미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치 않다고 말했소."
레르그란트는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사령관인 그가 그렇게 말하자 반론은 즉시 사그라 들었다. 그 덕분에 계속해서 전쟁을 시작하자고 주장하던 이들은 득의양양해졌고, 신중을 기하자는 입장에 선 이들의 얼굴엔 실의의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카르츠의 모습도 섞여 있었다. 그 와중에 잠깐동안, 그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듯, 복잡한 감정이 어린 눈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는 내게서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여전히 고요했다.
"사령관 님!"
그때, 밖에서 다급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보내라."
레르그란트의 허락이 떨어지자 작전 막사 안으로 병사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꽤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듀카스텔로부터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 * *
말 몇마리가 긴 먼지를 끌며 진영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떠오른 태양의 방향, 즉 동쪽에서 오고 있었기 때문에 태양을 등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들이 가까이에 오고 나서야 그들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식별할 수 있었다.
듀카스텔 측에서 온 사람은 총 아홉명이었는데, 놀랍게도 나는 그 중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흑색의 좌…."
레르그란트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마치 신음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히히힝- !
말은 레르그란트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고, 곧 듀카스텔 측의 인원들이 말에서 내렸다. 주변을 히로이얀의 병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데도 전혀 주늑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이 진영을 압도하겠다는 듯 오연한 모습이었다.
가장 앞서 걸어나오는 것은 예상과는 달리 흑색의 좌인 에벨타르테가 아니었다. 얼굴에 커다란 상처가 섬뜩하게 나 있는 젊은 남성이었는데, 내가 그 옆에 가면 겨우 배에나 닿을 정도로 무척 큰 체구가 인상적이었다. 걸치고 있는 의상도 무척 훌륭해 그가 가지고 있는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깨에 두르고 있는 붉은 휘장엔 '2' 라는 숫자가 수 놓아져 있는 채다.
저 숫자는… 그가 듀카스텔의 '두번째 영광' 에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동안, 주변엔 팽팽히 날이 선 긴장감이 나돌았다.
나는 그 긴장감에서 슬쩍 빠져나와 레르그란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르그란트의 얼굴엔 희미한 만족감 같은게 떠올라 있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앞으로 나선 남자는 말에서 내려 잠시 주변을 둘러본뒤 우렁찬 성량의 목소리로 주변을 향해 외쳤다.
"Wakuo Asfe Compin Meister, 'Hjeh Likrom' kraksel o haiha, Hetcatny. Houn sete disthegh neekeeto heareh hai thooze zkertess!"
마치 야수의 으르렁거림 같은 목소리였다. 그의 눈동자 역시 맹수의 그것과 같은 노오란 색이었는데, 그 색은 내 호박색 눈동자와 꽤 비슷했지만 은은한 살기 같은 것을 띄고 있어 내것과는 같지 않게 무척 사나워 보였다.
… 듀카스텔 어는 잘 모르는지라 무어라 말했는지 해석은 되지 않지만, 적어도 그의 이름이 Hetcatny헤카트니 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곧 그의 옆으로 에벨타르테가 나섰다. 그는 레르그란트의 푸른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더니, 이내 멋쩍은듯 한 번 웃어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통역하겠소. 본인은 두번째 영광의 컴패니언 마스터, '높이 굽어보는' 크락셸의 장자, 헤카트니라고 하오. 우리들 사이에 낀 저 지저분한 무리들에 대해 논의하고자 이곳에 왔소."
"공교로운 시기에 찾아왔군. 이제 막 전군을 움직여 그쪽을 공격하려던 참인데 말야."
레르그란트와 에벨타르테는 한 번 검과 마법을 맞대었던 적이 있었던지라 약간이나마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리라 생각했지만, 레르그란트는 에벨타르테 쪽은 눈길도 주지 않은채 자신을 헤카트니라고 소개한 거구의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에벨타르테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이 자리에서 만큼은 그저 통역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려는 모양이었다.
통역된 레르그란트의 말을 들은 헤카트니라는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Hiroyan o cke Letetn aioo hehetn, admiran orokeh coike mo daita too. ato daihal miligig Monste sugi zenzok sisaklh dai? hihj iste mao krekgh joitomj queqngl. ybogh cvomgk qalsfm dmleo zwak!"
"으…."
뜻은 모르지만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험악한 어투에 험악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나는 작게 신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언어라는 건 그저 기호일 뿐인데. 이미 '히로이얀 어' 라는 언어를 기반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나이기 때문일까. 듀카스텔 어는 너무도 이질적이게만 들려온다.
"히로이얀의 총 사령관이 어린애라고는 듣긴했지만, 설마 이토록 어리석은 선택을 할 줄은 몰랐소. 저 엄청난 군세의 마물을 바로 옆에두고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모양이오. 차라리 볼일을 볼때 똥간에 쳐박아 버리는게 낫겠소."
해석된 내용은 역시 예상과 다르지 않게 참혹했다. 하지만 해석이 된 말이 훨씬 더 낫게 들리는 것은 헤카트니의 말을 번역하는 에벨타르테의 목소리가 심드렁하기 때문일 것이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주변을 경계중인 기사들은 모두 손을 검의 손잡이 위로 가져갔고, 지휘관들은 흥분해서 얼굴이 벌게졌다. 여러 영주들 역시도 천박한 말을 내뱉은 헤카트니의 혀를 뽑아야 한다는 둥, 그에 못지는 않지만 충분히 폭력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하하, 똥간에 쳐박아 버리는게 낫겠다니…!"
하지만 정작 레르그란트는 기분좋게 웃고 있었다.
- 작가의말
* 이제 방학을 했으니 바로 연재를 쭉쭉 이어나갔어야 되는건데... 그놈의 술을 일주일 내내 마시느라 늦었네요 ㅠㅠ
* 분량이 좀 적은데, 조금 더 썻다가 내일 올리려다가 그럼 너무 늦을거 같아서 바로 올립니다 ㅠㅠ
* 이미 지나버렸지만 다들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나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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