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1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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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머리카락이 새하얀 백색의 되어버린것…. 이건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에스카랸에 흐르고 있는 용혈을 각성시킨 탓에 일어난 현상일까? 오직 용혈이라는 비상식의 힘 만이 마찬가지로 비상식 적인 현실을 설명할 수 있으니 일견 그것은 타당한 추측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결국 의혹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어색함 만큼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
따라서 남는 것은 오직 현상일 뿐이다.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던 세상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관장하는 신을 상상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그 존재가 고작 이 세계가 원활히 동작할 수 있도록 하는 단순한 시스템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리하여 신은 이 세계에 선행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 세계는 그저 우연에 의해 도출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단지 머리카락에 다시금 비누칠을 할 뿐이었다.
이미 염색이 벗겨지기 시작한 이상, 내 머리카락에서 검은색이라는 것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머리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얼룩덜룩한 이상한 색을 갖게 될 테니까.
"하아."
내 어색한 손놀림으로는 꽤 힘든 일이 될 터였다. 머리카락도 무척 긴데다가 검은기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선 비누를 몇번이고 문질러대야 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유감스러운 마음으로 물 표면에 둥둥 떠가는 비누 거품과 그 속에 녹아버린 검은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 그 동안 깨끗한 물에 살고 있던 물고기들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비누야 그렇다 치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염색 성분은 유해할테니까. 그런 생각과 동시에, 나는 이제는 느끼지도 못하는 미안함이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물 속에 거대한 규모의 마력장을 전개해 물의 흐름을 차단했다.
찰박-
물 속에 갑작스레 보이지 않는 구조물이 생성되자 물의 표면이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이 정도 규모의 마력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였다. 지금 내가 사역하고 있는 제 1 마법의 영역에서, 이것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아무튼, 이것으로 신경 쓰였던 오염은 당분간 고착화 될 것이다.
"네론그라시아, 당신…!"
내가 무슨짓을 한건지 알아차린걸까, 마스터 헤르닐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표정에서 해석한 감정은 바로 당혹이었다.
"당신, 굉장히 묘한 영역에서 성실한 부분이 있었군요. 뭐라고 해야 할까… 이 마력 배치는 그저 수질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 일 뿐인가요?"
… 단순히 내가 사역하고 있는 마력의 총량. 즉, 규모에서 놀란건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유를 위해 쓸데 없는 마력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을 책하는 건지 애매했다.
나는 간단히 긍정했다.
"네."
기가 막힌다는 뜻일까, 그녀는 한 동안 내가 끙끙거리며 머리를 감는 모습을 아무말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도와줄게요."
"네? 무슨- "
아까전 처럼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눈을 꼭 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헤르닐에게 손에 쥐고 있던 비누를 맥 없이 빼앗겨 버렸다.
"물 속으로 좀 들어가봐요. 감겨주기 편하도록."
헤르닐은 내 등 뒤에서 그렇게 말하며 양 손을 이용해 내 어깨를 아래로 가볍게 눌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말에 따라 물 속으로 몸을 묻었고, 곧 머리 쪽으로부터 간질간질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내 머리를… 감겨주고 있는 건가?
이건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던, 묘한 모양새였다.
"고마, 워요."
상상하지 못했던 만큼, 내 감사 인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
헤르닐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묵묵히 내 머리를 감겨 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꽤나 세심했다. 자극이 너무 심하지 않도록, 헤르닐은 보드라운 손끝을 사용해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문질렀다. 머리의 가장 윗부분에서 머리카락의 끝까지, 마치 쓰다듬는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물론, 전문적인 시녀의 손길 만큼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시녀의 손길은 의무일 뿐이지만, 그녀의 손길은 호의일 따름이니까.
"눈 꼭 감아요."
그리고 머리 위로 시원한 물이 끼얹어졌다. 바가지 같은건 보지 못했는데… 물화(物化) 시킨 마력장을 그 대용으로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으응…."
나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물 속으로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꽤 좋은 기분이었다.
"피부도 머리카락도… 정말 온통 새하얗네요. 이제 당신의 몸에서 색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은 눈동자와 입술 밖에 없겠군요."
검은 염색물이 점점 사라져 가는 머리카락이 꽤 인상적이 었던 걸까, 헤르닐은 손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보며 마치 무언가에라도 홀린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 하얗다라.
없다(無)는 부분에서 나와 꽤 어울리는 색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게, 세계는 그저 현상일 뿐이니까. 그것이 내 속으로 들어와 어떤 의미를 갖고, 백색의 나를 다른 색으로 물들이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무채색.
"내겐 어린 동생이 있어요. 꼭 당신 만큼 자그마하고 귀여운 여자애죠. 물론, 당신처럼 아름답지는 않지만요."
적적한 분위기를 달랠 요량인지, 그런 이야기를 꺼내며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씻어 나갔다. 달리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잠깐 눈을 떠 흔들거리는 물의 표면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꼭 나만큼 자그마하다, 라니.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씻겨주며 자신의 어린 동생을 떠올리고 있나보다. 나이로 따지면 그녀와 나는 고작 세 살 차이지만, 내 외견은 내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니까.
그녀는 지금 하늘에 떠 있는 희미한 별들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몸이 약해 겨울이 되면 항상 병치레가 많았었는데… 이번 겨울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몸이 아파 눈이와도 밖에 나가보질 못해 아쉽다는 내용의 편지는 더 이상 받고 싶지 않거든요."
"편지…? 동생은 이리스테야에 살고 있지 않나보죠?"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브라운 카운티에 살고 있어요."
아, 브라운 카운티라면….
나는 한숨을 삼켰다.
"이 평원 바로 뒤쪽이군요."
전선이 조금이라도 밀리는 순간, 그녀의 동생과 어머니가 살고 있는 브라운 카운티는 전화에 휩쌓이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동요할 만한 일이었지만, 겉으로 느끼기에 그녀는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것 같았다.
"맞아요. 그러니… 이 평원에서 일어날 대회전(大會戰)에서 히로이얀은 절대로 밀려선 안되요. 때문에 나는 이 전쟁에서 내 모든 역량을 발휘할 생각이에요. 물론, 고작 개인이 어찌한다고 해서 이 전쟁의 승패에 영향이 있지는 않겠지만요."
"브라운 카운티를 떠나 이리스테야로 피난을 가는건 어째서 고려해 보지 않은건가요?"
쏴아, 하고 머리 위로 다시 물이 끼얹어졌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지만 그 침묵은 그녀가 아직 물이 전부 빠지지 않은 내 머리카락에 다시금 비누를 칠하며 깨져버렸다.
"물론 제안해 봤죠. 하지만 어머니는 브라운 카운티를 떠나려 하지 않으셨어요. 동생의 몸이 약해 이리스테야 까지의 여행길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도 그 이유중 하나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브라운 카운티의 대지, 그 자체에요."
"대지 그 자체?"
"줄곧 살아온 땅이니까요. 지금껏 살아온 집이 있고, 지금껏 일구어 놓은 밭이 있죠. 어머니는 나와 달리 사교적이어서 절친한 이웃도 많을 거에요. 나는 유니온의 마스터로 일하며 적지 않게 받는 녹봉의 반절을 정기적으로 집에 보내지만 돈 같은건 아무래도 소용 없는것 같아요. 귀족인 당신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 작은 세계가 어머니와 동생에겐 전부인거죠."
"…."
내가 그녀에게 내 신분을 말했던 적이 있었나…?
그런 쓸모 없는 의문이 머리속에 나타났다가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여기서, 내게 언어는 쓸모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내 신분은 귀족이기에 그런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줄곧 살아온 땅이라니…. 나는 내 유년 시절을 보냈던 에스카랸의 성을 떠올렸다. 얼어 붙은 유리창, 칙칙하고 딱딱한 돌벽, 황량하고 메마른 풍경. 그 위를 덮고 있는 영원한 만년설.
내게 고향이란 익숙하지만, 그저 그 뿐인 느낌이었다.
나는 그 풍경을 세계의 전부로 해석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알 수가 없겠지.
"이기적인 일이겠죠. 네론그라시아, 헤림다르에서의 일을 기억하나요?"
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 있을까. 그건 자그마치 육 천명이나 되는 인간의 목숨을 잡아먹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와 그녀는 그 일의 배후였던 진정한 살해자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눈 앞에서 죽임을 당하려던 소녀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함께했던 기사는 나와 그녀같이 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분노했었지.
벨헬그… 라는 이름의 기사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이름이 벨헬그 였던가요?"
그녀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바보 같았죠. 소녀의 죽음은 유감스러웠지만 명색이 검은 맹금의 기사라는 남자가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다니 말이에요."
바보 같았다고 말하고는 있었지만, 결코 비웃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는 자조적인 한숨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요. 그는… 처음보는 그 소녀조차 자신의 영역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가족을 바로 뒤에 두고서야 전전 긍긍하게 되는 나같은 비겁한 사람과는 다르게 말이에요."
그래서 그녀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가족을 걱정하는 당연한 마음을 두고, 이기적이라고 칭했던가. 나는 고개를 숙이며 씁쓰레 하게 웃었다.
"… 저도, 할 수 있는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볼게요. 두 명의 노력이 전황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한 명보다는 낫겠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건조하기 이를데 없다. 호의에 마찬가지로 호의로 답하지 못하게 된다는 건… 좀 쓸쓸한 느낌이었다.
속으로 손을 뻗어 허우적 대봐도 그녀의 감정은 내게 잡히지 않는다.
놀랍게도, 등 뒤로 그녀가 작게 웃는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든든하군요. 자- 다됐어요."
- 작가의말
* 날이 엄청 싸늘해졌네요;; 다들 감기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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