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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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면과 유니온의 망토를 가방에 넣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문에서 저택의 입구까지 이어진 긴 길을, 주변에 펼쳐진 정원을 보며 느릿하게 걸었다.
… 평소, 잘 조형된 정원을 보며 느꼈던 즐거움이 지금은 많이 없어진 기분이다. 아름답게 느껴졌던 꽃의 화사한 색이 이제는 더 이상 선명하지 않았고, 향기롭다고 느꼈던 꽃의 향기가 더는 향기롭지 않았다.
나는 정원에서 시선을 떼고 바닥을 보며 걸었다. 바닥엔 일정한 모양의 벽돌들이 통일성을 갖추어 일정한 방향으로 길게 깔려 있었는데, 계속해서 걷다보니 그런 통일성이 훼손되어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벽돌 하나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깨어져 있다.
… 그냥 지나쳐도 무방할 사소한 일이었지만, 나는 거기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문득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보니, 미열과 촉촉한 식은땀이 느껴졌다. 그렇게 현재 내 몸이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걸 깨닫자, 거기에 더불어 미약한 현기증 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픔을 인식함으로서, 더욱 아파지다니….
통증은 물론 중요한 감각중 하나지만, 그렇게 객관적으로 중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그 통증을 겪음으로써 괴로움을 느끼는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
최근들어 이런 통증을 느끼는 주기가 점점 더 짧아져 가고 있는것 같다. 가장 최근에 이러한 이유없는 통증을 느꼈던 때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였지.
"으응- "
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어 쓸데 없는 생각들을 털어버리고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금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통증을 잊기 위해 바닥에 깔려 있는 돌들 중, 내 보폭과 얼추 비슷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돌들만 밟는데 집중했다.
무척이나 쓸데 없는 짓이지만… 이런 사소한 거에라도 집중해야 지금 내게 엄습한 이 기분 나쁜 감각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다.
그렇게 정원을 지나 저택 바로 앞까지 도착했는데, 레르그란트가 저택 밖에 나와있는게 보였다. 글로리아뎀에서 꽤 빨리 돌아온 모양인지, 그는 드물게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 다소 지친 얼굴이네.
아버지 대신에 해야할 일들이 무척 많겠지.
동생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려던 나는, 그의 옆에 내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여자?
레르그란트가 저택에 여자를 데려오다니, 처음 보는 일이라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인데… 레르그란트 녀석, 연상을 좋아했었나.
"아, 잠시 외출하셨던 모양이군요.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녀석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말을 걸어왔다.
"응, 엘렌을 만나고 왔어."
… 나는 반사적으로 나온 내 거짓말에 스스로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당연한 사실을 언급하듯, 그러한 거짓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온 까닭이었다. 거기다 내 거짓말에 엘렌을 언급하는건… 지금껏 무척 자제해 왔는데.
"그렇군요. 아, 이쪽은- "
옆에 있는 여자를 소개시켜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막 이어지려는 레르그란트의 말을 끊었다.
"여자친구?"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여성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 역시 달아오른 뺨과 마찬가지로 붉은 색이었는데… 하늘에 진 노을빛을 받아 더욱 붉게보여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레르그란트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데 내 기대와 다르게 레르그란트는 그저 픽- 하고 가벼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보십시오."
옷…?
레르그란트의 지적에 다시 한번 그녀를 주목해 보았다.
"아…."
남성인 동생의 것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한 성배 기사단의 제복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레르그란트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동료, 겠구나.
왜 미리 알아채지 못한 거지. 성배기사단의 제복은 무척이나 화려한데.
… 몸이 좋지 않은 탓인걸까.
아무튼, 나는 예의바르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처음 뵙겠어요. 네네아리케 엘 에스카랸 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될 지도 모르는 오해를 해서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흐응-
왠지 모르게 다소 주늑든 표정이다.
"저는 로네아 라고 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레르그란트와 같은 성배의 기사입니다."
… 이름은 그게 끝인가. 성은 어디있지?
조금 기다려 봤는데도 그녀의 소개는 정말 그걸로 끝이었다. 가문이나 출신을 알 수 있는 성 같은건 그녀에게 없는 모양이었다.
내 의아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그녀의 옆에 서있던 레르그란트가 덧붙였다.
"그녀는 평민 출신의 기사입니다."
"…."
레르그란트는 그것을 담담히 이야기 했고, 나 역시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성배의 기사가 될 수 있는건… 성배의 마력 파장에 동조할 수 있는 체질을 가진 사람들 뿐이다. 그리고 그런 체질은 무척이나 희귀하지.
… 간단한 이야기다.
성배의 기사만이 움직일 수 있는 거신기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전력이고, 그런 전력을 보유하는데 있어 귀족이나 평민 같은 신분은 그 의미를 잃고 마는 것이다.
성배와 마력 파장만 맞다면, 평민이라 해도 단숨에 성배의 기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로네아라는 여자는 담담하게 이야기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레르그란트와 나랑은 다르게, 그런 사실을 언급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이제 돌아가보도록 할게, 레르그란트."
"응, 그래."
로네아라는 여자는 내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 내 옆을 지나쳐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저택 밖으로 나가버렸다.
왠지 묘한 느낌이 드는 여자인걸. 처음 나를 봤을때, 조금 미묘했던 시선도 그렇고….
"저 사람… 너를 좋아하는거 아니니?"
나는 로네아라는 여자를 지금 처음보았을 뿐이고 대화를 나눈건 정말 잠깐이었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레르그란트는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나를, 잠시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것 같습니다."
… 그냥 넘겨 짚어보았을 뿐인데 그게 맞았구나.
흐응, 상당히 자신만만 한걸.
나는 거기서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으나, 아까전 부터 느껴지고 있던 현기증이 갑자기 강해지는 바람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바로 레르그란트가 염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무척 창백한데요. 일단 들어가서 휴식을 좀 취하시는게- "
감았던 눈을 뜨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프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건 아니다. 그것보다, 나는 지금 레르그란트에게 할 말이 있다.
"나… 잠시 북령주에 있는 본가에 다녀올게. 바로 내일 출발 할거야."
아주 잠깐이었지만, 레르그란트의 표정이 크게 굳는 것을 포착했다. 그 잠깐의 포착은,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동생 역시 나는 모르고 있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무엇 때문에 북령주에 다녀오신다는 겁니까?"
… 사실 그대로를 레르그란트에게 얘기해주는건, 역시 어리석은 일이겠지?
나는 아까전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짓을 말했다.
"그냥… 요즘들어 안 좋은 일도 있고 해서, 잠시나마 고향에 다녀와 보고 싶어. 이곳 이리스테야는 물론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따뜻한 대지지만, 나는 역시 북령주의 따뜻한 벽 난로가 더 좋아."
"흠, 벽 난로라… 무척이나 따뜻했었죠."
벽 난로라는 말에 어릴적을 회상하는지, 레르그란트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곧 그 미소를 조금 흐리며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저 역시 오랜만에 북령주의 모습을 눈에 담아보고 싶군요."
레르그란트도 함께…?
"하지만 너는 이곳에서 처리해야할 일들이 무척 많지 않니?"
그는 약간 피곤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동의했다.
분명, 지금 그가 처리하고 있는 일들 중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몇가지 있을텐데… 이렇게 피곤해 하는 기색을 보이니 미안해진다.
북령주에 다녀오고 나면, 레르그란트의 일을 조금 거들어 볼까 한다.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북령주에도 한 번 쯤은 다녀와야 합니다. 명색이 에스카랸의 본가가 있는 대지 아닙니까? 게이트 네트워크란 마도 과학의 이기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은 이리스테야에서 머물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 굳이 그런 이유를 대지 않아도 나로선 레르그란트가 나와 함께 가려는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약간 껄끄럽긴 하지만 어쩔수 없지.
* * *
유니온의 게이트 네트워크가 제국 전역에 뻗어있다곤 하나… 에스카랸의 본가 까지 그것이 이어져 있는건 아니었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운 도시로 먼저 이동한 뒤 마차를 잡아 타고 본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하아- "
두꺼운 털 옷을 여미며 마차의 창문에 입김을 불어 보았다.
내 입김에 창문엔 하얀 김이 끼고 말았다.
이리스테야는 이제 막 가을에 접어든 날씨였는데… 이곳은 벌써 초 겨울이 되기라도 한 듯한 날씨구나.
"어린애 같은 짓을 하시는군요."
레르그란트의 웃음 섞인 비꼼에 나는 하얗게 낀 김에다가 '레르그란트 바보' 라고 써놓았다. 김은 금방 사라지지 않아 꽤 오랫동안 그 글자가 창문에 남아 있었다.
덜컹-
… 돌을 밟은건지, 마차가 잠깐 크게 흔들렸었다.
덕분에 창 밖을 향해 있던 레르그란트의 시선이 마차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김에 내가 써놓은 말들을 본 모양이었다.
레르그란트는 기가차다는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누님은 정말 어린앱니다."
"…."
나는 답을 하는 대신에 다시 입김을 불어 다른 곳에 김이 서리게 한 뒤, 이번엔 마차 바깥에서 읽을 수 있도록 '레르그란트 멍청이' 라는 문장을 뒤집어 써놓았다.
내가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르그란트는 이제 완전히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이번엔 '네네아리케 천재' 뭐 그런거라도 써넣으실 작정입니까?"
"아니, 그건 좀 그렇잖니…."
조금 재미가 들린 나는 한 문장을 더 써넣으려다가 말았다. 그랬다간… 정말 어린애라고 불려도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을것 같다.
그렇게 소소한 흥미거리가 사라지자, 마차안엔 금방 침묵이 찾아왔고 우리는 서로 자신 쪽에 위치한 창문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본가까지는 거리가 꽤 되서 꼬박 하루를 이렇게 이동해야 될텐데…. 그러나 예전만큼 이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이 느낌은, 레르그란트와 나의 사이가 훨씬 좋아졌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해도 될려나.
잠시 눈이나 붙일까- 하고 눈을 감으려는 순간, 레르그란트가 침묵을 깨며 상당히 의외인 질문을 던져왔다.
"그러고보니, 세르간스와의 약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는 질문의 의도를 찾지 못한채 여전히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느냐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약혼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건 아니잖아?"
얼굴을 보지 않아 레르그란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는 화제였던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레르그란트가 다시 그것에 대해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의 침묵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시간인 모양이다.
"물론 약혼했다는 사실은 없어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약혼을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신다면 파기하셔도 괜찮습니다. 누님은… 세르간스를 사랑하는건 아니잖습니까?"
선명한 확신에 들어찬 말이었다.
…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거지? 레르그란트 에겐 그동안 나와 카르츠가 사랑에 빠질만한 가능성이 전혀 없는걸로 보였던건가.
나는 다소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랬다간 우리 에스카랸 가문과 세르간스 가문은 영영 멀어지고 말걸. 아무리 내가 그런 쪽에 관해서 잘 모른다지만… 가문과 가문간의 약속은 그렇게 쉽게 파기할 수 있는게 아니 잖니?"
"문제 없습니다."
하, 문제 없다고? 문제가 없을리가 없잖아….
나는 레르그란트의 너무나도 단정적인 태도에 의구심을 느끼며 마차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레르그란트는…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 그건 곧 에스카랸 공작의 자리를 갖게 될, 너 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거니?"
레르그란트는 내 질문에 답을 하진 않았다. 다만, 다소 뜬금없는 이야길 꺼내었다.
"약혼을 파기하는 것으로 인해 우리 가문과 세르간스 가문과의 교류가 경색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하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좀 더 자연스러운 방법이 있죠."
자연스러운 방법…?
약혼을 파기 하고 안하고를 떠나, 레르그란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뭔데?"
레르그란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누님이 에스카랸 공작이 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약혼은 자연스럽게 파기 될 수 밖에 없겠죠. 카르츠 엘 세르간스는 세르간스 가문의 장남으로써, 장차 세르간스 공작이 될 인물인데… 설마, 우리 에스카랸 가문에 데릴 사위로 올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에스카랸 공작?
지금 레르그란트는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걸까.
- 작가의말
* 연참대전이 끝났군요!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ㅠㅠ 특히, 타이틀을 만들어 주시며 연참대전 응원해주신 아르냥 님께도 따로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연참대전 마친 소감은... 조금 시원 섭섭한 느낌이네요 ㅋㅋ 덕분에 글을 빠르게 쓰는데 있어 적절한 동기부여가 되었었습니다.
* 성원해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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