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47화]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 * *
"미스틱 유니온의… 마스터 로군."
굳게 닫혀 있던 아버지의 입술이 떼어지며 단어들이 나왔다. 그리고 그 단어들은 곧 문장이 되어 내게로 전해졌다.
그리 느릿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내게는 아버지가 언급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또렷히 뇌리에 각인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그만큼 내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얘기겠지.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것 같은 심장 박동을 감각하며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여전히 내 목소리는 다소 차가운 소년의 것인 채다. 거기에 소녀의 것인 내 본래의 목소리가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이 가면에 걸려있는 마법의 신비는 신뢰라는 단어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굉장한 고위의 것이었으니까.
… 아버지는 잠시 내 모습을 아무말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일 뿐이지만, 그 순간조차 내게는 억겁과 같은 시간으로 느껴져왔다. 망토안으로 숨긴 손 안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그 어떤 전투에서도 지금과 같은 긴장을 느껴본 적이 없단말야….
"흐음, 펠그로엘드에게 안부 전해주게나. 최근들어 그를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말이지."
하, 안부를 전해달라고….
아버지가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나?
하지만 비틀려 있는 내 속마음과 다르게, 입밖으로 나온 말은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의 그것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게."
아버지는 그런 말을 남겨놓고 내게서 돌아섰다. 잠시 이쪽을 보고 있던 세 명의 다른 공작들 역시 몸을 돌려 느긋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이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복도 벽을 타고 들려온다.
"유니온의 마스터라더니, 무척이나 어린 목소리로군.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어린애 같은데- "
"마법사에게 나이는 의미가 없네."
역시, 내 목소리로 짐작할 수 있는 나이 이야기인가….
나는 아버지와 다른 공작들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그쪽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긴장감의 고조로 인해 미친듯이 뛰던 심장박동이 조금 진정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꼭 쥐고 있던 손을 펴보니, 긴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 땀이 아니라 피 였던가….
그동안 마비되어 있던 통각이라는 감각이 지금 이 시간을 기점으로 아련하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
고통이란 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기에, 고작 이런 상처쯤은 신경에 그다지 거슬리지도 않는다.
나는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나고있는 손바닥을 내려다 보다가 이내 손을 망토 속으로 감추었다.
온통 아버지에게만 쏠려있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오니, 새삼스럽게 지금 내가 있던 이 복도가 조금 달라보였다.
… 아, 실제로 조금 달라지기도 했구나.
어느새 복도엔 시녀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나타나 복도 위로 떨어져 있는 나뭇잎들을 바깥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내가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그 속도를 조금 늘려 나뭇잎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 가만히 기둥에 등을 기대어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마법사라는 존재가 불편했던걸까, 그녀는 갑자기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남은 나뭇잎들을 제거하더니 내게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
평소와 같다면 저런 태도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테지만… 지금은 왠지 그렇지 못한것 같다.
나는 가슴이 먹먹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막연한 우울함 같은 기분을 느끼며 여전히 나뭇잎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밖을 바라보았다.
아, 또 나뭇잎 몇개가 복도 안으로 들어왔다.
시녀가 청소한 일이 헛수고가 되어 버렸는걸….
나는 복도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주워들어 그것을 바깥으로 버렸다. 나뭇잎은 팔랑거리며 밖으로 떨어질듯 하다가, 바람을 타고 또다시 복도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 정말이지 쓸모 없는걸.
여전히 기둥에 등을 기댄채 눈을 감으며 방금전 무척이나 짧았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수고하게, 라니-
물론, 그것은 별달리 대수로울 것도 없는 간단한 인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저택 내에선 내게 그런 간단한 인사조차 없는 아버지다.
차라리 네론그라시아의 모습을 하고 아버지를 접하는게 좋겠구나….
자신의 딸인 네네아리케보다 완전한 타인인 네론그라시아를 대하는 태도가 더 낫다니, 이미 아버지의 성향을 아주 잘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 한 구석 어딘가가 깊이 아려왔다.
나는 이렇게나 약해 빠졌다.
"…."
알듯 모를듯 하게 느껴지는 희미한 상실감을 묵묵히 빗겨내며 기둥에서 등을 떼고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발걸음은 이미 저택으로 돌아가려던걸 잊었고, 다만 아버지가 사라진 방향의 반대로 향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 흥, 산책이나 좀 하지, 뭐.
그렇게 무작정 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새 눈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문에는 신전의 천장에 있던것과 똑같은… 이 세계, 페트라-발름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규모는 신전에 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거의 압도감마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작 문에 압도당하기 보다는… 도대체 이 문은 어떻게 열고 닫는건지에 대한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이런 생각은 좀 불경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이런 문은 열고 닫는것 자체가 쓸데 없는 힘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문은… 아까 전 아버지를 포함한 공작들이 엘레로페 여황을 만난 곳인것 같다. 흐음, 이곳이 알현실인가.
나는 엘레로페 여황을 본 적이 한번도 없어서 그 추측이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대로 등을 돌려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쿠궁- 하는 뭔가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놀라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 쓸데 없는 힘 낭비라고 말하긴 했지만, 정작 바로 눈 앞에서 이 거대한 것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굉장하구나.
그나저나, 이곳이 알현실이 맞다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자는 엘레로페 여황일지도 모르겠네….
또다시 허리를 숙일 준비를 해야하는 건가.
누구든지 허리를 숙인다는 행위를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특히 나는 그 행위가 무척이나 싫다.
물론, 자존심 같은 것 따위도 그 이유중 하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허리를 숙이면 피가 머리로 쏠려 무척 어질어질 해지니까 말이지.
… 그렇게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열리고 있는 문 사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엘레로페 여황이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나는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까 말야.
물론, 그것은 지금 나오는 사람이 여황이어야 가능한 이야기-
"…."
아… 생각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한 명의 여자 때문에 완전히 얼어붙어버린 채였다.
그녀는… 틀림 없는 엘레로페 여황이었다. 설령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해도, 현세의 것이 아닌듯한, 너무나도 화려한 의복과 머리에 씌워져 있는 금관을 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선명한 금발, 선한 빛이 어려있는 선명한 녹색 눈동자… 그것들이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엘렌, 그리고 엘레로페….
설마, 아마드라네 교의 주교라고만 믿고 있었던 엘렌이… 내 친구 엘렌이, 실은 히로이얀 제국을 통치하는 여황 엘레로페 였을 줄이야….
"당신은…?"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으니, 당연히 그녀에게서 질문이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얼굴엔 희미한 미소 한 조각 조차도 띄지 않은채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자애로웠다.
… 머리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제쳐두고, 일단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채 고개를 숙였다.
"유니온의 마스터, 네론그라시아 라고 합니다, 여황 폐하."
답을 하고 나서, 나는 머리속을 무언가가 윙윙- 울리고 있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시간이 지나간다.
글로리아뎀의 바닥은 깨끗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대리석에 있는 자연적인 무늬들이 괜시리 오늘따라 무척 인상적으로 보인다.
아… 머리속이 온통 진흙탕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아.
"고개를 드세요, 내게 볼일이라도 있나요?"
나는 가슴 한 구석이 철렁, 하는 것을 느꼈다.
엘렌, 아니… 엘레로페 여황의 말투는 엘렌일 때와 전혀 다를게 없었다. 붙임성 가득한, 예의바른 목소리. 하지만 엘렌일 때와 다르게 현재 그녀의 얼굴엔 표정이라는게 전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과 말투 사이에, 메울수 없는 커다란 간극을 느낀다. 마치, 네네아리케와 마스터 네론그라시아를 보는것만 같다.
그래… 기만과 거짓이 오직 내 특기인것만은 아니지.
"아닙니다. 우연히 이 앞을 지나다가 여황 폐하를 뵙게 된 것 뿐입니다."
우연히 알현실 앞을 지나가…?
말도 안되는 졸렬한 변명이었지만, 엘레로페 여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애초에 유니온의 마스터가 이런곳에 있는 이유는 어찌되든 좋은듯, 전혀 관심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내가 지금껏 걸어온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여황이 내 앞을 완전히 지나가고 난 뒤 고개를 들자,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
하이 마스터, 펠그로엘드.
그는 엘레로페 여황의 뒤를 따라 걷다가, 이내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펠그로엘드, 그는 나와 엘렌의 관계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미소는 미소일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엘레로페 여황의 뒤를 쫓았고 이내 둘의 모습은 복도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
여전히 굽힌 무릎과 허리를 필 생각도 하지 못한채,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공허한 웃음을 짓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고 있던 가면을 단숨에 벗고, 후드를 젖혔다.
시원스런 공기와 함께, 후드 속에 잘 숨겨놓은 내 은발이 마치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이 사라진 복도 저편을 계속해서 노려보고 있었던 것 같다.
말이 추측형으로 끝난 이유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나 자신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엘레로페 여황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철저하게 정체를 은폐하며, 그녀에게… 아니, 그녀 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 모두에게 거짓된 모습만을 보여왔다.
그런 내게 화를 낼 자격따위, 있을리가 없지.
이 손에 쥐고 있는 가면을 금방이라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된다. 아무리 폭발한듯한 감정이 내면으로 부터 올라와도 나는 현재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건… 그냥 내가 바보같았을 뿐이다.
나는 항상 진실로 나를 대하는 듯한 엘렌의 태도를 받아들이며, 죄책감을 느껴왔다. 그리고 그 죄책감으로, 나는 내 거짓을 합리화 했었던건 아닐까.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바로 그 합리화에서 기반한 것이겠지.
비겁하다, 나는-
비겁하기 그지 없다….
"…."
그러고보니, 엘렌이 엘레로페 여황이었다면 그때 신전에서 보인 레르그란트의 의뭉스런 태도도 설명이 되는구나. 동생 역시 엘렌이 엘레로페 여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가식과 거짓의 파티 였었군.
비단 내가 쓰고 있는 마스터 네론그라시아의 가면뿐 아니라, 모두들 자신들 만의 가면을 한장씩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뭐, 그게 나쁜건 아니지…. 인간은 누구나 다들 가면을 한장씩 쯤은 가지고 있으니까.
어째서 엘레로페 여황은 엘렌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신전의 봉사활동을 해왔는지, 한 나라의 여제라는 자가 그런 행동이 가능한 것인지… 그런 의문은 가만히 머리속 한 구석으로 침잠해 있는 채다.
그래도 엘렌은… 나쁘지 않다.
다만, 이 순간 이후로, 내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조금씩 뒤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작가의말
* ㅎㅎ 이제 바쁜 일들은 대강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예비군 훈련도 다녀왔고 발표도 마쳤고, 디아블로도 노말까지 클리어 했습니다. 정말 바쁜 한주였습니다~
* 많은 분들이 예상하셨듯, 주인공의 친구인 엘렌이 히로이얀의 여제인 엘레로페 였습니다. 너무 뻔했나요? ㅠㅠ
* 성원해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오늘밤은 여유롭게 디아를 즐겨봐야 겠군요ㅋㅋ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