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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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덜컹.
작은 돌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마차가 위 아래로 요동쳤다. 몸이 무척 쇠약해져 있어 감각이 예민한 탓일까, 눈가가 찡그려질 정도로 엉덩이가 아팠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살살 문지르며 레르그란트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같으면 '품위 없는 짓은 삼가시지요' 라고 딴지를 걸어왔을 테지만 다행히도 그는 눈 앞에 있는 서류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터라 내 추태를 목격할 수 없었다.
아마 오늘 맺은 협정의 주요 내용을 다시 한 번 검토중 인 것 같았다.
"저택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테니 피곤하면 잠시라도 눈 좀 붙이시지요."
집중하는 와중에도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건지 서류에 눈도 떼지 않고 그렇게 말한다.
사실 레르그란트의 말대로 무척 피곤하긴 하다. 익숙치 않은 연회에 참여 하고, 정원에서 쓰러진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새벽이다. 곧 동이 터 오길 기다리는 늦은 새벽.
수 많은 국가와 단체 들이 모두 참여한 거대 협정인 만큼 의견을 조율하기가 쉽지 않았을터다. 실제로 얘기를 들어보니 내일도 오늘처럼 협정의 구체적 내용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있단다.
내일은 오늘처럼 늦어지면 안 될 텐데….
눈동자를 새파랗게 빛내며 날이 선 기색이 여전한 레르그란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곤해 보이는 낯빛은 숨길 수 없었다. 당장 눈 아래로 짙게 드리운 다크써클만 봐도 무척 선명하니까.
전선에서 돌아온 이후로 푹 쉰 적이 한 번도 없을텐데…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걸까나.
"괜찮아. 네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나 혼자서만 편하게 쉴 수는 없잖니."
내 말에 레르그란트는 서류에서 잠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웬일로 이렇게 기특한 소리를 다 하십니까?"
"네가 정말로 피곤해 보이니까 그렇지."
농담조인 레르그란트의 말에도 내가 정색하며 그렇게 말하자, 그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거두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쓴 웃음이 본래의 웃음을 대체했다.
그는 잠시 옆쪽에 서류를 내려놓고 양 손으로 눈 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마치 탄식하듯 말했다.
"으음, 그렇게나 티가 납니까."
"응. 눈 주위가 완전히 시커멓게 변한걸. 거기서 조금만 더 고생하면 팬더가 친구하자고 그러겠다."
팬더가 친구하겠다는 말에 레르그란트는 실소를 지었다.
"팬더는 무슨 팬더입니까. 하지만… 맞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슬슬 한계 입니다. 하도 피곤하니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안가는군요."
웬일로 이렇게 약한 소리를…. 어지간해선 꾹 참고 보는 레르그란트의 성격을 알기에 방금의 발언이 무척 놀랍다. 안쓰럽기도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고 있는 마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소 위험한 일이지만 이 마차는 흔들림이 적어 괜찮다. 아까처럼 덜컹 거리며 위 아래로 흔들리는 일은 무척 드물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건지 일어나자 마자 머리가 핑 돌며 그대로 고꾸라질뻔 했지만 이를 악 물고 참아내었다. 필사적으로 태연을 가장한데다 레르그란트도 피곤 때문에 평소와 같지 않으니, 내 상태가 드러날 일은 없었다.
정원에서 쓰러졌던 일도 겨우 숨겼는데 고작 이런 일로 들통 날 순 없지.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레르그란트에게로 다가가 재빠른 동작으로 그의 옆에 있던 서류를 전부 빼앗아 내 자리로 가져왔다.
"남은 건 내가 확인해 볼테니 너나 눈 좀 붙이고 있으렴."
내 강한 권유에도 레르그란트는 고개를 저으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누님 생각보단 훨씬 더 버틸만 하니까요. 웬일로 상냥하게 말씀해 주시기에 엄살 좀 부려 본 것 뿐입니다."
"흐흥, 허세 부리지마렴."
"허세 아닙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고집스럽지. 아버지를 닮은 걸까, 어머니를 닮은 걸까. 어머니는 내가 아직 아기였을때 돌아가셨으니 잘 모르겠고… 아버지는 고집스러운 분이셨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억이 없다.
아무튼 성격의 유전성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어 두고.
고집에는 고집이겠지.
"내가! 확인할거야!"
강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자 레르그란트도 더는 거절하기 어려웠는지 아무말 없이 나를 뚱하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억지로나마 일을 뺏어와 서류를 들여다 보기 시작하는데… 이 녀석은 잠시나마 쉴 생각도 없는지 멀뚱히 눈을 깜빡거리며 내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꼬아놓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레르그란트를 흘겼다.
"내가 무엇 때문에 너를 대신해서 이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거니? 조금이라도 잠을 자라니까."
"아, 그게- "
어딘가 곤란한 듯한 기색이다.
의아함에 잠시 서류를 접어두고 레르그란트와 눈을 마주치자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눕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합니다."
"뭐가 문제니? 자리는 충분히 넓은데."
무려 사두마차다. 두 명이서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커서 누울 자리 정도는 우습지 않게 나온다. 당장 내가 옆으로 눕는다 해도 자리가 한참은 남을 정도인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베개가 없으면 잠을 자기가 어려워서…."
"아?"
베개가 없으면 잠을 못잔다니. 예상치 못한 귀여운 면모에 입술 사이로 삐질삐질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웃음을 참으려 했으나 결국 나는 입을 가리며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깔깔거리며 웃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참을 웃고 있는데 찌릿한 느낌이 나는 싸늘한 시선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게 느껴졌다.
"재밌습니까?"
"아, 아니 재미까지는- "
좀 심했나 싶어서 정색하고 웃음을 그치려는데 스스로가 원망스럽게도 또 다시 웃음이 삐질삐질 새어나온다. 결국 다시금 정신 없이 웃고 말았다.
이제 나를 보는 레르그란트의 시선은 그야말로 북풍한설이다.
춥다 추워. 시선만으로도 마차 내부에 겨울이 찾아온건지 절로 양 어깨를 감싸 안게 된다.
더 이상 스스로의 웃음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간 어떤 고약한 보복이 가해질지 모르기에 재빨리 이 상황을 수습할 필요성을 느꼈다. 으음, 이 상황에서… 해명은 적절치 않아. 뭔가 레르그란트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관심을 돌릴만한 획기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내 허벅지를 툭툭 치며 레르그란트에게 제안했다.
"여기 누워."
"예?"
"베개가 있어야 잘 수 있다며. 잠깐이나마 배게가 되어 줄 테니 여기 누워서 자."
어느새 싸늘하기 그지 없었던 레르그란트의 시선은 풀린 채다. 다만, 겉잡을 수 없는 당황이 그 싸늘함을 대신하여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걸 필사적으로 참아내었다.
"아니, 그건 좀…."
내 허벅지를 베고 누으라는 제안이 좀 창피했던 모양인지, 레르그란트는 제안에 응하려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꺼려하는 기색 역시 아니었다.
나는 부드러운 말투로 재촉했다.
"너무 웃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네가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안쓰러워서 그러는거니 사양말고 어서 눕지 그러니."
"으음, 정말로 괜찮습니다. 누님도 불편하실테고."
"아이 참,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젓는 레르그란트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 힘으로는 꿈쩍도 할 수 없는 그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잡아당기자 어쩔 수 없다는듯 내 옆으로 끌려나왔다. 옆 자리에 앉아서도 어쩔줄 모르는 레르그란트를 억지로 눕히고 결국 그의 머리를 내 허벅지 위로 올려 놓을 수 있었다.
창피한건지 민망한건지 그는 바짝 얼어붙은 기색으로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의 이마에 부드럽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얼마 안있어 저택에 도착할테지만 그때 까지만이라도 편히 자렴."
레르그란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이제 슬슬 잠이 들었나 싶어 다시금 서류를 살펴보려 할 때였다.
"이럴 때는 조금… 누나 같기도 하군요."
"하, 조금 누나 같은게 아니라, 누나 맞거든."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는게 재밌었는지 레르그란트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웃느라 생긴 진동에 그가 베고 누워 있는 허벅지가 간지러웠다.
다리를 조금 비틀며 간지러우니 웃지 말라고 그랬더니 더 크게 웃는다.
어느새 상황이 반전된 꼴이 우스웠다.
"그만 웃고 빨리 자. 피곤하지 않니?"
"네, 무지 피곤합니다. 그럼 정말로 자겠습니다."
레르그란트는 그렇게 말하며 대담하게도 고개를 돌려 내 허벅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 생경한 감각에 작게 야! 하고 비명을 지르며 레르그란트의 이마를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으나 그는 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 작가의말
* 아, 달달하다. 계속 달달 했으면 좋겠습니다.
* 평소보다 용량도 적고 애매한 곳에서 글이 끊겼습니다ㅠㅠ 본래 한 단락 정도 더 쓰고 업로드를 하려 했으나 연재 주기를 빠르게 바꿔 보고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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