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127화]
"잘 먹겠습니다!"
마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나는 완전히 축 늘어진채 눈을 감고 곧이어 찾아올 고통을 기다렸다.
그 짧은 기다림속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내 몸에 흐르고 있는 1/256 의 용혈이었다. 고작 그 정도 농도밖에 되지 않는 피지만, 그것은 인과(因果)마저 조종해 에스카랸으로 하여금 끝없는 근친혼을 이어나가게 하여 불멸성을 유지해왔다.
누구도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로 확고한 과거의 사실들이 쌓이고 쌓이게 되면 그것에 근거해 미래를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적어도 나나 레르그란트와 같은 남매를 낳을때까지는. 아니, 그때까지 죽지 '못'한다는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까. 하지만 그러한 불멸성이 의미하는 것은 내 온전한 안위가 아니다.
팔이나 다리 하나 정도 잘려도 사람은 살 수 있다. 아니, 심지어 사지가 모두 절단되어도 살 수 있다. 앞을 보지못해도, 아무것도 듣지 못해도,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도, 살 수 있다.
"…."
그러니까, 나는 별다른 긴장없이 고통을 기다린다. '적어도' 죽지는 않을테니까.
"손을 들어 올려요, 네론그라시아!"
아…?
그 외침은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나를 두고 네론그라시아라고 부르는걸 보면… 마스터 헤르닐일까. 하지만 손을 들어올리라는 그녀의 간단한 요청조차 응하기 힘들다. 신격마법 한 번에 엘리노어를 죽일 수 있을거란 확신에 뒤를 생각치 않은 탓이다. 마치 온 몸의 신경이 망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쾅! 쾅!
요란한 폭음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그 폭음은 생각보다도 더 가까이서 발생했던 것인지, 청각이 삐─ 거리는 이명으로 가득찼다.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감았던 눈을 떠보았지만 지독한 어지러움 때문에 시야가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 어느새 내 몸이 무언가에 쥐어져 허공을 날고 있는것 같긴 한데, 감각이 완전히 엉망이라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전혀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으…."
이지러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해 내 몸을 쥐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푸른 독수리?"
두 발로 내 몸을 완전히 감싸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독수리였다. 판단력과 인지마저 완전히 흐려져 있었기에 나는 이 독수리의 정체가 마스터 헤르닐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제 생각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겨우 부여잡은 정신을 놓아가고 있는데 저 아래에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드는 엘리노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설마, 일부러 놔준걸까.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펠그로엘드를 위해 나를 죽이겠다고 처음부터 마음먹고 있었던것 같았는데. 마스터 헤르닐은 물론 강하지만, 제 1 마법 사역자인 엘리노어의 손에서 이렇게 손쉽게 나를 탈취 했다는건 역시 이상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맛있는걸 가장 나중에 먹는 주의라서 말야! 잘가, 네네아리케! 다음에 보자!"
"…."
그녀와 내가 처해있는 모든 이해 관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그녀의 개인적 취향이 듬뿍 들어간 발랄한 외침이었다. 나는 완전히 정신을 놓으며 역시 엘리노어는 미친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 *
이상한 꿈을 꾸었다.
벌써 십 년도 더 된,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어린 나와 레르그란트가 함께 풀밭에서 놀고 있었다. 그곳은 에스카랸의 얼음 거성 내 유일한 정원이었는데, 무척 혹독한 기후의 지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봄이 되면 땅 속에서 자라난 풀 줄기가 힘겹게 꽃 봉오리를 피어올리기도 했었다.
"자, 다 만들었어."
나는 꽃을 뜯어 화관을 만들었다. 화관은 꼬마가 만든것 치고는 꽤 솜씨좋게 만들어 졌는데, 그것을 만드는 법은 성에서 일을 하는 이름 모를 늙은 시녀에게 배웠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싫어! 싫다구 했잖아!"
레르그란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신의 머리위에 화관을 씌우려는 나를 제지했다. 그 덕에 새하얀 원피스에 레르그란트의 손에 있던 흙이 묻어버리고 말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결국, 레르그란트의 조그만 머리 위로 빨강색, 노랑색,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화관이 씌워졌고 그것을 본 나는 손뼉을 치며 가볍게 감상을 말했다.
"예쁘다. 잘 어울려."
"누나! 남자한테 예쁘다는 말이 뭐야! 이런건 누나나 쓰란 말야."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레르그란트였지만 씌워준 화관을 벗지는 않았다. 뒤이어 나는 그런 레르그란트를 놀려댔고, 화가 난 레르그란트가 붉은 얼굴을 하고선 응징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쫓았다. 나는 가벼운 비명을 내지르며 정원 이곳저곳을 폴짝이며 뛰어다녔다.
서로가 엉키며 넘어지는 바람에 옷이 찢어지고 흙이 묻고 머리가 산발이 되었지만 나와 레르그란트는 꽤 즐거워보였다.
어릴 적의 나와 레르그란트가 저렇게 즐겁다는 표정도 지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마치 그동안은 전혀 몰랐었던것 같은 느낌이다. 밝은 미소엔 구김이 없고, 한 없는 행복함이 가득했다.
아….
그리고 그 광경에서, 그때는 몰랐었던 모습을 발견했다.
빳빳하게 다려진 제복을 입은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정원의 나무 수풀 너머 통로에서 나와 레르그란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무가 있어 어디론가 가는 길인 모양이었지만,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나와 레르그란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참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는 이내 발걸음을 재촉해 그곳을 떠나는데,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는게 보였다.
그것은 희미했지만 정말로 자식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미소같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말이지….
아.
이제 보고있던 장면이 변화된다.
마치 흐려지듯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광경은 어떤 방 안에서 힘 없이 주저 앉은채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그 옆에는 고급스런 가죽 커버로 감싸여진 노트가 한 권 떨어져 있었다.
이건… 그리 오래된 기억은 아니구나.
나는 어렵지 않게 그 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레르그란트와 함께 북령주의 본가로 돌아갔을 때의 일이지. 나는 아버지의 방에서 아버지의 일기를 발견 했었다.
떨어진 일기의 가죽 겉 면에는 딱딱한 무언가로 눌러 쓴 듯한 글이 있었다.
『 내게 있어 네네아리케와 레르그란트에게 사랑을 말하는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무덤에 들어갈때까지 그 아이들을 멀리하고 싫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존재 자체가 내겐 '죄' 였으니까.
때문에 나는 내가 살아오며 지금껏 한 번도 보인적 없었던 비겁함을 이곳에 내려놓고 간다.
사랑한다, 네네아리케.
사랑한다, 레르그란트. 』
… 울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자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 인간이 되었는지 실감이 간다. 다시금 아버지의 '비겁함' 을 보아도 나는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릴 수가 없다.
다시, 장면이 변화된다. 그리고 나타난 장면을 보고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나타난 광경은 아버지의 최후였다.
그때의 나는 펠그로엘드의 공격에 상처를 입고 쓰러진 아버지의 옆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옷이고 손이고 얼굴이고 온통 아버지의 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펠그로엘드에 의해 죽을뻔한 나를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구해주었다.
아버지는 입을 연다.
"혈육이란건… 참으로 묘하군. 그저 내가 범한 죄악의 결과물이라고 생각 했을 뿐인데, 결국 그게 내 목숨을 앗아갈 줄이야."
뒤이어 나의 울음섞인 씁쓸한 자조가 이어졌다.
"아버지, 어째서 저를 구한건가요. 나 같은건,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는 쓸모없는 계집애일 뿐인데."
* * *
참으로… 별스런 꿈이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와선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 옛 일이 어째서 갑작스럽게 꿈에 등장한 것일까. 꿈은 흔히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던데, 용의 피가 인간으로서의 내 가소로운 감정들을 먹어치워버린 현재까지도, 나는 나를 대신해 죽은 아버지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걸까.
"…."
눈을 뜨고서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잠에 취해 있다가 이대로는 다시 잠들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결국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어라."
몸에서 흘러내리는 이불의 촉감이 꽤 거칠었다. 침대 역시 평소와는 다르게 푹신하지 않았고 몸을 일으키는 동안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습관으로 형성된 인식과 현실적 감각 사이의 괴리에 나는 잠깐동안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여기는….
당연히 내 침실은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앞쪽으로 깔려 있는 오래된 카페트, 갈라진 책상, 자그마한 옷장 등. 비록 낡긴 했지만 그래도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소박한 방이었다.
딱히 주목할 만한 것은 없지만 유독 내 시선을 붙잡아 둔 것은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괘종 시계였다. 그 시계 역시 낡긴 했지만 주변의 소박해 보이는 사물들과 다르게 그것만 유독 고급스러운 빛을 띄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각의 너머에서 결국 그 시계에 대한 기억을 찾을 때까지 멍하니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
빛이 바래져 가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끌어올리는 경험은 꽤나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뿌연 안개 사이를 뚫고 쏘아지는 한 줄기의 빛을 찾은것 같은 선명함을 느끼며, 나는 저 괘종 시계가 신경쓰였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저건 에스카랸 저택 2 층 로비에 걸려져 있는 시계와 동일한 모델이다.
"저 시계가 특별히 마음에 들기라도 한건가요, 뭘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거죠?"
"꺅!"
깜짝이야. 나는 작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막 잠에서 깬 직후라 감각이 둔감해진 모양인지 바로 옆까지 타인이 접근 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대체 뭘까 이 상황은….
의식의 소실로 인해 내 시간은 상당부분 잘려나가고 말았다.
"괜찮은가요?"
그런 물음과 함께 이마에 닿는 손이 서늘하다. 그저 열을 재는, 별 일이 아닌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한심하게도 나는 이제서야 내게 말을 거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가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었다.
마스터 헤르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이마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다행히 열은 내렸군요. 하지만 조금 더 쉬는게 좋겠어요. 당신은 지금 극도의 신경쇠약 상태에요. 별것 아닌 자극에도 화들짝 놀라게 되는건 그 때문이죠."
휴식? 아니, 지금은 현 상황을 파악하는게 최우선 사항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겨우겨우 입을 열어 입 안에서만 맴돌던 단어를 입 밖으로 내어 문장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이곳은 어디구요? 그리고 저 괘종 시계는 어디서 산거죠?"
어…?
괘종 시계는 여기서 나올 질문이 전혀 아니었지만 그녀가 말한 신경 쇠약 때문일까, 머리속에서 맴돌던 생각들이 아무런 가공도 거치지 않고 바로 입 밖으로 나온다.
내 질문 세례에 입술을 우물거리던 헤르닐은 일단 가장 미심쩍은 질문부터 해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괘종 시계는 이리스테야의 시내에서 산 거에요. 아까 전부터 꽤 신경쓰는것 같던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모양이죠?"
"우리 집에도 똑같은게 있거든요."
그녀는 고운 눈썹을 밀어 올리며 그래서? 라고 되묻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이내 어찌되든 좋다는 기색으로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아 괘종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저것 혼자만 유별나게 고급스러워 눈에 띄는 편이죠? 유니온에 입단하자마자 집으로 보낸 첫 선물이에요."
"여기는… 헤르닐의 집이군요."
별 생각없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려는 순간,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바로 앉아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균형 감각까지 엉망인지 창문까지 걸어가는 도중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나는 방금 전 보다는 훨씬 더 각성된 상태에서 상황을 확인 할 수 있었다.
"…."
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평범한 것이었다. 잘 닦여지지 않은 꼬불꼬불한 흙길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마을의 외곽 쪽으론 둥글게 냇물이 흐르고 있다. 냇물의 폭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나가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지어놓은 듯한 앙증맞은 다리(Bridge)도 보인다.
다만, 마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主體)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전혀 없다. 아무리 물동량이 적은 작은 마을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불길하기까지 하다.
"헤르닐, 이게 어떻게 된- "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엣치!"
기침이 나왔으니까.
어쩐지 싸늘하고 으슬으슬한 느낌이었다. 괜히 창문을 열어 바깥 바람을 쐬서 그런걸까. 나는 창문을 닫고 스스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헤르닐은 숨죽여 웃었다.
"일단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하는게 어떨까요. 당신 옷도 좀 제대로 걸치고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크고 얇은 상의 한 장밖에 없었다. 속옷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얇은 천 아래로 몸이 그리고 있는 굴곡이 여과 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같은 여자끼리였기 때문에 별로 상관은 없지만, 과연… 보편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좀 민망한 모습이긴 했다.
헤르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당신이 본래 입고 있던 옷은 전부 피 투성이라 세탁이 필요했어요. 그리고 맞는 옷이 없어서 제가 입던 상의 하나만 입혀 두었었는데. 뭐, 그 모습도 퍽 귀엽긴 하군요."
- 작가의말
* 한 편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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