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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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를, 먹… 어?"
처음엔 표현이 잘못된게 아닌가 싶었다. 여기선 보통 죽이겠다, 라는 말이 나와야 되는게 아닐까. 솔직히 조금 당혹스럽다.
"응, 응!"
하지만 고개를 여러번이나 끄덕이며 내 반문을 열렬히 긍정하는 그녀를 보자 잘못 사용된 표현은 아닌것 같았다.
뒤이어 내가 생각한 것은 한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여러가지 뜻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음식물을 섭취하는 행위라던가 내 마력을 빼앗겠다는 것. 혹은, 성(性)적인 의미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걸.
내가 이런식으로 엘리노어의 표현에서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겉으로 비치는 그녀의 감정들이 지독히도 인위적이라는 것에 기인해 있다.
인간은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타인과 연결한다. 그 표현은 언어, 표정, 몸짓 등 여러가지가 있겠지. 서로의 진실된 생각을 모르는 우리는, 그렇기에 그 불모한 표현들을 붙잡을 수 밖에 없다. 또한 그 표현을 믿을 수 밖에 없지. 하지만 그녀의 표현은 그 누구에게도 믿음을 줄 수 있을것 같지 않다.
그녀의 표현은 거의 거부감이 들 정도로 인위적인 기색이 짙었으니까. 확신을 주지 못하는 표현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는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엘리노어의 '너를 먹겠다' 라는 선언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내게 먹힘을 당하는건 좀 아플거야. 나는 너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다리부터 씹어 먹을 거니까."
"…."
흐응, 정말로 먹겠다는 말이었구나.
"정말 너무 기대가 되는거 있지! 거기다 너는 도도하고 무감정해 보이니까. 내 이빨로 네 다리를 씹을때, 네 무표정한 얼굴에 그려질 다채로운 표정을 생각하면 정말 참을 수 없을것 같아!"
언젠가 마법사들은 모두 미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엘리노어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것처럼 보인다. 지독히도 인위적인 그녀의 감정들이 삐걱거리며 그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고, 뒤이어진 그녀의 목소리엔 그렇게 과잉된 감정들이 아무런 규칙과 절제없이 발산되고 있었다.
"펠그로엘드 님도, 분명, 하아… 좋아하실게 분명해! 그 분은 내게, 네 얘기를, 흐으, 많이 해주시곤 하셨거든. 그런 네가 이제 내 뱃속에 들어가 나와 하나가 되었다는 걸 아시면…! 정말 깜짝 놀라실거야!"
헐떡거리는 숨소리, 살기로 번들거리는 적갈색 눈동자. 그 모습에선 이제 거의 광기마저 느껴진다. 이제 나는 그녀가 제정신이 아닐거라는 가설에 완전히 무게를 실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것 같으니, 궁금한 점이나 물어봐야겠다.
"으음, 그런데 나를 다 먹을 수 있겠니? 내가 작긴 하지만 그렇다고 네 뱃속에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닐것 같은걸."
엘리노어는 내 말을 듣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활짝 웃어보였다.
"나를 걱정하는 말은 처음 들어봤어! 보통 사람들은 내가 자신을 먹겠다고 말하면 미친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거든. 결국 모두 마지막에 가서는 눈물, 콧물을 질질짜며 제발 살려달라고 빌긴 했지만."
그녀는 과잉되던 감정을 잠시 갈무리 하는가 싶더니, 이내 끙끙거리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으… 그런 말을 들으니, 너를 굳이 죽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먹고 싶어. 근데 먹으면 너는 죽어버리잖아. 어떻게 해야되지?"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녀의 고민은 타당했다.
그녀의 마음대로 당해주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그 고민을 해결하는데 조심스러운 조언을 해줄 수는 있겠지. 나는 조금 망설였지만 곧 입을 열었다.
"팔, 다리만 먹으면 되지 않을까? 그럼 죽지는 않을것 같은데."
내 조언이 유효했던 걸까, 그녀는 고민이 해결된듯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머리만 남기고 먹어치우면 되겠구나!"
유감스럽지만 내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다.
"… 그럼 죽는데."
"하지만 팔 다리는 별로 맛이 없는 걸! 나는 네 야들야들 해 보이는 몸통을 맛보고 싶어. 피부도 뽀얗고 하얘서 씹느-ㄴ 마-ㅅ-ㅇ-ㅣ-ㅈ-ㅇ---------"
결국 그녀의 광기가 폭발하며 언어가 망가졌다. 완전히 살기로 가득찬 눈을 보니, 이제 그녀에게선 이성의 조각조차 보이지 않는다.
"■■■■■■■■"
마물과 같은 소리….
"너, 인간이긴 한거니?"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잘 여며진 그녀의 망토 속에서 갑작스럽게 짐승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그 짐승은 마치 어둠처럼 검었다. 굳이 비슷한 모습을 찾자면 늑대일 것 같은데, 불길한 붉은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다섯개나 달려있는지라 저걸두고 늑대 같다고 주장하기는 좀 힘들겠지. 아무튼,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마물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튀어나온 늑대의 눈이 나를 주목했다.
지금까지 엘리노어가 계속 주장했던것처럼 내가 꽤 맛있어 보이기라도 하는 건지, 흉악해 보이는 이빨 사이로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
얼굴만 있는 늑대는 그대로 목을 늘려 내게로 달려들었다. 목의 시작점은 여전히 엘리노어의 망토 속에 있어, 무척이나 기괴한 광경이었다.
나는 몸을 틀어 늑대의 이빨을 피하며 마력을 얇게 응집시켜 짐승의 목을 베어내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가벼운 공격에도 불구하고 마물의 목은 맥없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잘린 목에서 나온 검은 피가 흥건히 바닥을 적셨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엘리노어의 망토 밑으로 짐승을 닮은 마물의 얼굴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마물들이 기어 나오는지는 둘째치더라도, 입을 벌린채 눈이 돌아가 있는 그녀의 얼굴 때문에 그 광경은 한층 더 괴기스럽게 보였다.
늑대 마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새로이 등장한 마물의 얼굴들은 그들의 목을 마치 엿가락처럼 늘려 나에게로 달려 들었다.
"아…!"
이곳은 지상이 아닌 공중이기 때문에 내 움직임은 좌 우 뿐만 아니라, 위 아래까지 함께 고려되어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3차원의 공간에서 엘리노어의 공격을 회피하거나 격퇴해야 하는데, 내 왼쪽 눈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게 선택지를 줄인다. 거리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으니, 회피는 무리다.
나는 내게로 달려드는 마물의 머리를 정면에서 모조리 격퇴하기로 마음먹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내 발 밑으로 복잡한 마력 연산을 보조하는 마법진이 나타나 빛을 발했다.
복잡한 기교나 교란은 필요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엘리노어는 이성을 잃은채 마물화가 되어버렸다. 전에 본 그녀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세검을 잘 다루는 검사 같은 느낌이었는데….
생각을 접고, 내가 알고 있는 연산에 따라 마력을 배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마물들의 공격은 강력한 마력장을 전개해 완전히 막아두었다.
그들은 이마를 들이받거나 이빨을 이용해 내 마력장을 찢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마력장의 손상된 부분을 자동으로 복원하는 술식이 완성된 후였다. 내 방어를 깨트리기 위해선 엘리노어가 이성을 찾고 충분히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마법을 작성해야 한다.
"…."
알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감히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마법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마법중의 마법. 거의 신의 권위에 도전할만한 위상이라고 여겨져 신격 마법이라고 불리우는 마법.
나 역시 그 신비를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마력을 기계적으로 배치할 수는 있으니까. 뭐, 위력은 다소 떨어질테지만 이성적 판단을 잃어버린 엘리노어를 죽이는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오히려 이건 기회다. 그녀에게 이성이 남아 있었다면 신격 마법을 준비하려는 내게 절대로 여유를 주지 않을 테니까.
지금의 그녀는 그저 마물이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저 게걸스러운 욕망을 내게 부딪쳐올 뿐이다. 오히려 내게는 기껍지.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생명의 태어남과 죽음은 당연한 것. 농부가 농작물을 베어내듯, 어부가 그물을 끌어올리듯."
이미지를 구체화하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말을 하며, 내 정신을 근원으로 침잠시켰다. 그리고 근원에 들어 있는 정보에 근거하여, 내 손 안에 배치한 마력은 이 세계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태로 변이할 준비를 끝내었다.
마력이 근원에 접속되었기 때문일까, 내 주위에 복잡하게 배치되어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기능하는 마력들에 은은한 신성이 어리기 시작했다. 신성은 마물들이 극히 꺼려하는 기운이었기에 나를 공격하는 마물의 머리들이 주춤거리는게 느껴졌다.
"콜록!"
순간, 속에서 왈칵 하고 피가 올라와 나는 짧게 기침을 해야 했다.
신격 마법을 작성하는데 드는 모든 부담을 끝이 없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으로 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무리가 온 모양이었다. 나는 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결국 마법의 작성을 완료했다.
마력을 배치할때 농부가 농작물을 베어내는 모습을 떠올려서 일까… 내 손에 깃든것은 아무런 색을 띄지 않고 있지만 꺼림칙한 기운을 내뿜는 낫이었다. 얼마나 거대한지 내 키보다도 훨씬 더 컸지만 무게가 없어 이것을 들고 있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것은… 신이 물질계의 영혼을 거둘때 사용한다고 하는 영혼수확기(靈魂收穫機, Soul Harvester).
양 손으로 그것을 꼭 쥐었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신비. 그리고 그것을 내가 직접 작성했다는 사실에 나는 희미한 전율 같은걸 느낀것 같았다.
"이런 감정은 조금 남아있긴 하구나."
작게 중얼거리며 마력장 유지를 위해 주변에 전개해 두었던 마력을 모두 회수했다. 그러자 마력장에 막혀 안달하고 있던 마물들이 내게로 득달같이 달려 들었지만 손에 든 영혼수확기를 한 번 휘두르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신체의 강인함, 마력의 크기와 같은 요소들은 이 낫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닿는순간 그 즉시 죽어버릴 테니까. 가장 죽음에 가까운 존재가 바로 마물이지만 내가 들고 있는 낫은 죽음 그 자체다.
"■■■■■■■■"
엘리노어는 이성이 없는 상태에서도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망토가 찢어지며 그 속에서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이제 엘리노어의 몸은 완전히 마물들 속에 파묻혀 버렸다.
나는 그녀를 향해 날았다.
뱀 같은 형태의 마물들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공격하기 위해 쉭쉭 거렸지만, 내 손에 쥐어진 신격 마법 앞에서 어설픈 저항은 소용 없었다.
날카로운 이빨도, 거대한 뿔도, 단단한 가죽도….
푸확.
가볍게 휘두른 낫에 수십 개나 되는 마물의 머리가 하얀 재가되어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앞쪽으로 날아가 그녀의 앞에 섰다. 아니, 이제는 '그녀'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주저 없이 낫을 휘둘렀다. 분명히 무언가가 '베이'는 느낌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이것은, 생명의 수확.
키에에에엑-!
끔찍한 저주가 깃든 절규가 대기를 메웠다. 그녀의 몸에 들어있는 마물의 죽음이 중첩되고, 중첩되고, 또 중첩되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그 끔찍한 절규는 대기 뿐만 아니라 이 분지 전체에 울려퍼져 모두의 눈과 귀를 붙들어 놓았다.
"귀를 막아!"
재빨리 그렇게 외쳤지만 내 목소리는 마물의 절규 소리에 힘 없이 묻혀 버렸다. 그리고 쓸데 없는 희생이 나왔다. 이곳으로 부터 어느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귀와 입에서 피를 쏟으며 경련하기 시작했다.
절규에 섞인 강력한 음차원의 에너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눈치가 빠른 마법사 몇몇은 음차원 에너지의 파동을 보호할 수 있는 마력장을 전개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절규의 영향력에 휩쓸려 목숨을 잃어버렸다.
전장터의 한 가운데에 갑작스럽게 구멍이 뻥 뚫려버린 모습.
"…."
유감스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많은 죽음들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입가에 묻은 피를 대강 닦고 나서 아래로 떨어진 엘리노어의 시체를 확인하여 마물 통제의 마법적 방법론을 확인할 요량이었다.
엘리노어가 떨어진 장소에는 뿌연 먼지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녀의 몸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은 마물이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그 시체들이 가진 질량과 면적이 상당했다.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걷어봐야 하겠는-
쐐애액!
"아!"
이미 마법적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린 상태에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극도로 은밀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 하더라도 평소와 같았다면 거리를 재어 마력장을 전개하며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한쪽 눈이 완전히 멀어버렸다는게 발목을 잡는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제대로 잴 수 없었다.
"아!"
어깨쪽에서 튀어오르는 붉은 피.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격통과 눈쌀을 찌푸리며 재빨리 반격을 가해 순간적으로 전개한 마탄 수 십발을 흙 먼지 속으로 날려보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먼지가 날아갔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딱딱해 보이는 갑각질의 무언가였다. 그것이 마치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하여 내 마탄을 막아낸것 같았다.
"살아, 있어…?"
피가 줄줄 흐르는 어깨를 감싸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신격 마법을 막아내거나 피한 것도 아니고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있는 생명을, 나는 도무지 상정하지 못했다. 아니, 통상적인 생명체라면 그 마법에 격중당하는 순간 목숨을 잃었어야 하는게 이 세상의 법칙이다.
"꺄하하핫! 그 얼굴도 좋은걸. 마구 괴롭혀 주고 싶은 표정이야!"
갑각질의 방패가 옆으로 열리며 옷이 온통 찢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엘리노어가 눈 앞에 나타났다. 그 생체 방패는 그녀의 팔에 마치 신체기관 일부처럼 달려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물의 일부 인가? 그렇다면, 아마 마물은 그녀의 일부. 혹은 그녀 자신인듯 싶었다.
나는 내가 입은 상처나, 손해를 본 지금의 상황으로 말미암은 내 패배 따위는 이상하게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아마 정말로 그녀에게 산채로 잡아 먹힌다 해도 별로 상관 없을것 같다. 다만 어째서 그녀가 살아있는건지, 그것만이 조금 궁금할 뿐이었다.
"어떻게 살아있는거니?"
하, 조금 더 절박한 어조로 질문을 할 걸 그랬나보다. 본디 사람은 자신이 우위에 선 상황에 있어야 관대해 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기껍게도, 그녀는 흔쾌히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간단해. 내 목숨은 하나가 아니거든."
"아?"
다소 얼빠진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 자신의 몸에 묻은 마물의 혈액을 대충 털어내고 있었다. 찢어진 옷이 제 구실을 못해 거의 알몸이나 다름 없는데도 그녀는 전혀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긴, 마물을 몸에서 쏟아내는 인간이 그런 정상적인 신경을 가지고 있으리란 기대는 하기 어렵겠지.
"그래도 대단한 마법이었어. 심상 세계를 구현화한 나를 정확히 9984 번 이나 죽였으니까. 내가 품고 있는 마물이 1만 개체가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죽음에 이르렀겠지."
"심상 세계 구현?"
대화를 지속해 나가며 상처 입은 어깨에 재생 가속 마법을 걸어두었다. 안그래도 꺼질듯한 내 생명력을 소진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전투를 속행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엘리노어는 가볍게 웃었다.
"뭘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마법사로서의 네 정체성, 근원과의 연결, 결코 닿을수 없는 이상향. 이 모든 서술의 대상을 말하는 거잖아."
아, 그렇구나.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심상 세계 구현화라는 마법은 차라리 마법이 아니다. 그건 가장 위대한 이적 중 하나다. 여기서 '위대한' 이라는 서술은 남의 인정을 바라는 표현이 아니다. 심상 세계 구현이라는 것은 그 마법을 행한 개인. 그 자신에게 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가치가 있다.
… 그 위대함이 엘리노어라는 마수사 소녀에게는 자그마치 마물 1 만 개체라는 얘기구나.
나는 비속어처럼 들리지 않도록, 어조와 목소리에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엘리노어에게 그녀의 심상 세계에 대한 내 솔직한 평가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솔직함이라는 건, 언제나 껄끄러운 편일까나.
"미친 년."
엘리노어가 여전히 웃는 낯인걸 보니, 다행히 내 평가를 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다.
- 작가의말
* 미쳤다고 하고는 있지만... 그런 미친년과 태평스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주인공도 정상은 아니죠 ㅠㅠ
* 초콜릿을 보고서야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인걸 알았네요ㅡㅡ;; 아, 어젠가.
* 봐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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