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90화]
* * *
"허허,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지게 생겼군. 엘리노어와 자네한테는 무척이나 미안하군."
"저는 괜찮아요, 펠그로엘드 님."
마수사 엘리노어는 그의 말에 씩씩하게 대답했고, 에벨타르테는 어느새 입에 하얀 담배를 문채 검은 벽에 등을 대고 아무말이 없었다.
"…."
아까와는 달리 상당히 얌전해진 얼굴이 이야기가 끝날때까지 기다려 주려는 심산인듯 싶었다.
펠그로엘드는 그런 에벨타르테의 모습을 차분히 시야에 담고 있다가,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굉장히 긴 이야기라도 꺼내려는 심산인지, 에벨타르테가 부숴 놓은 난간의 잔해를 의자삼아 그곳에 걸터 앉았다.
"미안하구나. 나이를 먹으니 허리가 좋질 않아서 말이다. 제 아무리 강력한 마법도 신체를 대신하여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 줄 수는 없는 법이지."
"…."
썰렁한 농담이군.
펠그로엘드가 지니고 있는 신비는 세월을 희미하게 나마 벗겨낼 정도다. 나는 그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인간으로써 비 정상적으로 긴 세월을 살아왔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 왜 네게 마법을 가르쳐 준 거냐고 물었었지?"
"네, 어째서죠?"
"이제 거의 십년쯤 된 일이구나…."
먼 과거를 회상하는듯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나 역시도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
내뱉는 숨결조차 순식간에 얼어붙을 정도의 극한의 혹한 속, 에스카랸 성에서 나는 그를 만났었다.
망각이 그 때의 기억을 미화시킨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의 기억은 난로속에서 활활 타올랐던 불처럼 따뜻하게 느껴진다.
냉기로만 가득차 있던 그 거대한 성이 내 세계의 전부였고, 나는 무지의 장막 속에서 그가 가르쳐 주었던 신비를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며 알게 되는 세계의 이치. 이를테면,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과 같은….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한심하게 생각되는 어린 시절의 막연한 낙관들도, 그 당시에 습득하던 신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펠그로엘드로 부터 전해받은 신비가 그 모양을 확연히 갖추게 된 것은 그 좁은 세계에서 나와 미스틱 유니온에 들어오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 당시, 제국… 그리고 펠그로엘드가 내게 보여주었던 정의(正義)는 도무지 파고들 틈이 없는 단단한 금강석처럼 느껴졌었다. 그것은 숭고하고 영광스러우며 무엇보다…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크게는 이 히로이얀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듀카스텔 제국, 작게는 내 고향 북령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야만족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목적이 없던 내 마법은 당연하게도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수단으로 변모하였다.
… 그 단순한 것이 바로 정의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던 내게, 지금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보편적인 가치들 마저 눈부시게 빛나게 다가왔던 것이다.
내가 지체높은 북령주 지배자 가문의 장녀이며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 소녀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단번에 유니온이라는 거대한 단체의 마스터가 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을 히로이얀의 공리(公利)를 위해 써야한다는 사실에 이견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펠그로엘드는 나와 공유하고 있던 정의에서 눈을 돌려 버렸고, 그 덕분에 나는 내 정의를 뒷받침하고 있던 기반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때문에 나는 알아야 한다.
"나는 아일튼의 부탁을 받아 에스카랸의 인자를 채취하기 위해 북령주로 들렸었지. 왜 네 아버지가 내게 너희 가문의 인자를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는지는… 너 역시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나나 레르그란트와 마찬가지로, 에스카랸에 흐르고 있는 피에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두꺼운 만년설에 수 많은 유적과 신비가 덮여 있는 북부… 그곳을 수 천년 동안이나 굳건하게 지배하고 있던 에스카랸 가문에, 나는 이전부터 의문을 품었었단다. 때문에 그 당시 에스카랸 공작의 부탁은 나로서도 상당히 반가운 것이었었지."
수 천년….
나는 그 긴 세월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둠속에서도 환하게 빛나고 있는 내 은빛 머리카락을 내려다 보았다.
펠그로엘드가 품은 의문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한 혈족이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스러져가지 않고 일정한 대지를 그렇게 오래 지배한 경우는 전 대륙의 역사를 뒤져봐도 나오지 않을테니까.
심지어 에스카랸 가문의 역사는 이 히로이얀 제국의 역사보다도 훨씬 더 길다.
"나는 비단 너희 가문의 혈액뿐만 아니라 길고 긴 역사 역시 주의 깊게 살펴 보았단다. 그리고 거기서 무척이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지."
"놀라운 사실…?"
나 역시도 가문의 역사를 공부하긴 했지만 딱히 놀랍다고 할 만한 사실을 발견한 적은 없는데….
"그건… 크흠, 오랫만에 말을 길게 하려다보니 목이 마르구만."
별로 말을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쓸데없는 여유를 부리는 걸까.
"아, 차라도 한 잔 타올게요!"
더 기가막힌 것은 펠그로엘드의 옆에 얌전히 서있던 마수사 엘리노어가 마실거리를 가져오겠다고 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농담을 한 줄 알았지만, 차를 타오겠다는 말은 정말인듯 총총 거리는 발걸음으로 어두운 통로 속으로 사라졌다.
펠그로엘드는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네아리케, 네 가문 얘기를 모르는 사람 앞에서 공공연히 떠들 수는 없는 일이지."
그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에벨타르테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에벨타르테도 그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의 가정사에 관심은 없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나란 말 따위를 따를 생각은 없다."
펠그로엘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불편함에 답했다.
"글쎄, 그건 네네아리케가 판단할 일이겠지."
판단을 내게 넘기는 펠그로엘드의 말에,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아 에벨타르테와 눈을 마주쳤다.
… 아무리 내 가문에 대한 얘기가 주가 될지라도 지금 여기서 그를 밖으로 내몰 자격은 내게 없을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도달하기도 전에 마수사 엘리노어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펠그로엘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얘기를 계속해 주세요."
"정 그렇다면- "
펠그로엘드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내 요청대로 과거의 얘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내가 발견한 놀라움이란… 북령주에 대한 에스카랸 가문의 지배가 결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란 것이었다."
… 그저 내게 마법을 가르쳐준 이유에 대해 듣고 싶은 것이었는데, 그 이야기와 꽤 거리가 먼 이런 주제로 연결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괜히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진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아무튼, 그가 하고 있는 이야기에 집중해 보자면… 나는 그의 놀람에 공감하기가 힘들다. 욕망이란 것이 인간을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엔 이견이 없지만, 모든 흥망성쇠가 그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성공의 충분조건이지만 필요조건은 아니지.
"그게, 그렇게 놀랄만한 일인가요?"
"아무렴, 놀랄 일이고 말고! 나는 에스카랸이라는 이름에 대해 진심으로 탄복했단다. 그들은 결코 타자(他者)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단다. 물론, 에스카랸 가문에 전쟁이란 단어가 그리 멀리 있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외부의 시기나 욕망 때문이었지, 결코 네 조상들의 뜻이 아니었지."
왠지 민망한 기분이었다.
왜 아니 그럴까… 타인의 입에서 자신의 가문에 대한 열렬한 칭찬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뭐, 나로선 이미 버린 이름이긴 하지만.
"하지만 에스카랸 가문이 북령주의 지배자로 거듭난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었단다. 에스카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몰려 들어오는 도전을 압도적으로 격퇴하였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지역의 군벌들을 모두 발 아래에 두게 되었지. 네 피에 흐르고 있는 인자는 그 만큼 압도적이란다."
자신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인데도 펠그로엘드는 거의 환희에 찬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감탄이 가시지 않는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일튼의 피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지."
"그게 뭐죠…?"
펠그로엘드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네네아리케, 네 피에 흐르고 있는 것은 1/256 의 용혈(龍血)이란다."
- 작가의말
* 오늘 올린 분량이 1 만 5 천 자쯤 되는데... 7000/8000 자로 나누어 올릴 수도 있었지만 빨리 90화를 달성하고 싶어서요 ㅋㅋ 편수의 십의 자리가 바뀌는게 굉장히 기분이 좋네요 ㅋㅋ
* 이 글은 1 부 / 2 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현재 1 부의 3/4 쯤 진행된것 같습니다 ㅠㅠ
* 8시에 나가야 할 일이 있어서 리리플 못다는 걸 용서해주세요 ㅠㅠ
* 봐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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