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64화]
조금 있어 로제랑은 내 방에서 도망치듯 나가버렸고, 그는 그때 까지도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
그가 나가고 난 방 안에서, 나는 그가 흥미롭게 관찰하던 수족관을 들여다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남자에게 안아달라는 소리를 하다니….
불과 얼마전의 나였다면, 그런 민망하고 창피한 화제를 입에 올리지도 못했을 텐데.
… 내가 겪고, 알게 된 상황들이 계속해서 내게 큰 충격을 준 탓일까, 로제랑을 대상으로 했던 내 유혹은 별 대단치도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이 운명을 벗어날 유용한 수단으로 생각되기도 했지.
수족관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관상어 들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표정이란게 없어진 나의 매마른 얼굴엔… 일말의 수치심 조차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 * *
"기원제에 참여하지 못하시겠다구요?"
저녁 식탁엔 낮에 주방장과 로제랑이 만들고 있던 요리가 올라와 있었다. 로우랜드의 요리라고 하는데… 확실히 이것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이랜드의 음식과는 다른 독특한 향을 풍기는데, 그 향이 썩 나쁘지 않다.
"응, 꼭 참여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말이야."
나는 냄비에 가득 들어있는 고기 중 한 덩어리를 내 앞 접시로 덜어와 그것을 포크와 나이프로 보기 좋게 잘랐다.
나이프로 자른 고기의 단면은 적당히 붉은 색으로 보기 좋게 익어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편찮으신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바로 의사부터 부르도록 하죠."
… 굳이 레르그란트에게 아파보이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내 체격은 내 나이대의 다른 소녀들에 비해 왜소한 편이고 얼굴색도 창백할 정도로 하얗다.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어딘가 항상 아파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음식을 감상하는 것을 잠시 그만두고 레르그란트를 바라보니,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는 것도 멈춘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런 레르그란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의사에게 보인다 해서 해결될리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니. 만약, 그랬다면 나는 금방 건강을 회복했겠지…. 뭐,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언제나처럼 좀 쉬고 나면 괜찮아 질거야."
"…."
레르그란트는 납득한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레르그란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접시에 잘 썰어둔 음식을 하나씩 입에 넣어 보았다.
… 음, 꽤 맛있는걸.
"그래도 의사를 다시 한번 불러 진단을 받아 보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설령 그다지 소용이 없다 해도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을 아예 쓰지 않는다는건 어리석은 일이지 않습니까?"
나는 화려한 금 접시에 담겨져 있는 탐스러운 과일 하나를 한 입 베어먹으며 말했다.
"내 건강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가온 의사가 지금껏 몇 명일거라고 생각해?"
"…."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에 묻은 과즙을 혀로 핥고선 계속해서 말했다.
"난 싫어. 그들이 주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약도 싫고, 내 살을 찔러대는 뾰족하고 차가운 바늘들도 싫어.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을 쓰지 않는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지…? 소용 없는걸 알면서도 그런 고통들을 감내해야 하는건 내게 무척 괴로운 일이야."
"그렇습니까…."
레르그란트는 다소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에스카랸 공작이라 불리는 동생인데… 저런 모습을 보니 조금 가책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가책은 정말이지 잠깐이었고, 나는 내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에 대해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몸이 나아질때까지 저택에서 푹 쉬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 저택에서 나가는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말 없이 자주 사라지는 것을 의식해서 인지, 레르그란트는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이제 에스카랸 가(家)의 주인이 레르그란트 인 만큼, 아버지가 있을때 보다 내 행동 반경이 더 제한될 수도 있겠구나.
그건 내게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얘는…. 아프다고 한 사람이 어딜 가겠니?"
내일 있을 기원제야 단 하루니 별 문제 없겠지만… 앞으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이중생활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상당히 오랜만에 책상앞에 앉았다. 책상의 책꽂이에는 꽤 많은 수의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책들의 윗부분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시녀들이 꽂아져 있는 책까지는 신경쓰지 못했는지, 약간의 먼지가 묻어나왔다.
그러고보니 최근들어 책을 읽어본지도 상당히 오래됐구나….
미스틱 유니온의 마스터라는 직책을 맡게 되어 외부에서 활동하기 전까지 나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그런 나에게 책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 최소한 한 번씩은 모두 읽은 책들이지만, 책은 다시 커버를 펼치고 책장을 넘길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해주었었다. 이미 한 번 읽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간 겪은 경험과 쌓인 지식에 의해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남는다면 이 책들을 다시 한번 읽어 보는 것도 좋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여유를 부리기가 힘들겠지.
"후으…."
아무튼, 내일은 크게 걱정할건 없을것 같다.
레르그란트가 저택에서 나가는걸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말해놓고 몰래 이 저택에서 나가는것 정도야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기간이 길면 모르겠지만, 기원제는 고작 하루니까.
나는 걱정을 털어버리고 다시 한번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책을 한 권 빼서 지금이라도 잠깐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 그만 자기로 할까.
그렇게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나는 문득 이 책상의 서랍안에 있는 물건을 떠올렸다.
"…."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자그마한 상자가 들어있었다. 그 상자를 책상위로 올려 그 뚜껑을 열어보았니, 상자 안에는 고급스럽게 장식된 금속제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에킬레일….
아버지가 나에게 주었던, 마탄시(魔彈矢)의 프로토 타입이다.
나는 천천히 그것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민감한 손 끝으로 금속 특유의 차가움과 딱딱함, 그리고 매끄러움이 전해져 왔다.
그러고보니 나는 어째서 이런 유용한 물품을 그동안 잊고 있었던 걸까….
신전에서 일어난 일만 해도, 내가 이것만 잘 가지고 있었다면 좀 더 유연하게 해결할 수 있었는데.
… 역시, 아버지가 준 물건이어서 그랬던 걸까.
내가 아버지에게 가졌었던 감정은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 뿐이었으니까. … 나는 아버지에게 가졌던 감정을, 아버지가 준 물건에도 투영시켰던 것이다.
아버지가 더 이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인지, 나는 에킬레일을 전과는 조금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것이, 아버지가 나에게 유일하게 남겨준 유품이 되어버렸으니까.
나는 에킬레일을 꺼내어 그 안에 미리 마련된 마탄을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장전하였다.
철컥-
홈이 파인 곳에 마탄을 모두 집어넣고 장전을 완료하자 마탄시에서는 무척이나 차갑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아버지의 유품이고 어쩌고를 떠나서, 이것은 명백히 사람을 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겐, 계속해서 이런 물건들이 필요하겠지.
"…."
나는 건조한 시선으로 에킬레일을 내려다 보다가 그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 잘 갈무리 해두었다.
* * *
기원제가 시작되는 아침, 레르그란트는 아침 일찍 집에서 나섰다.
레르그란트가 저택을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방 안에서 쉬고 있을테니 그 누구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시녀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평소와 다르게 아주 날카롭고 차갑게 말해두었으니,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그 후,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른 뒤에 전날 챙겨두었던 에킬레일을 품 속에 넣고 창문을 통해 저택을 나섰다.
"…."
저택의 높은 담을 뛰어넘어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한 나는, 주변에 감돌고 있는 분위기가 벌써부터 다소 들떠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에스카랸 저택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주거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흥겨운 음악 소리가 먼곳으로 부터 들려오고 있는 참이다.
그 소리를 흘려 들으며 글로리아뎀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거리로 진입하자, 무척이나 인상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거리에 빼곡히 들어선 집과 상점들에선 평소보다도 훨씬 더 강한 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활기는 마치 주변의 풍경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들고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으, 으아앙- !"
나는 길가를 걷다가 나와 마주친 꼬마 한 명이 나를 본 뒤, 울음을 터트리는 걸 보고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밝은 풍경에, 미스틱 유니온의 마스터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존재이겠지.
울음을 터트린 꼬마는 내가 입고 있는 복장과 그 복장에 새겨진 유니온의 표식, '진리의 눈동자' 를 보고 이 활기찬 분위기와 상반된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꼬마야, 이 음침한 누나는 그냥 지나갈테니 이제울지 마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여전히 울고 있는 꼬마를 지나쳐, 좀 더 깊숙한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똑같이 인적이 드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원제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온 만큼, 인적이 드물었던 길도 이렇게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는듯 하다.
"…."
철저히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골목길만을 이용해 글로리아뎀에 도착했다.
쭉 뻗은 대로와 달리 골목길은 무척이나 복잡하게 꼬여있었기 때문에 글로리아뎀에 도착한 시간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늦어버리고 말았다.
* * *
기원제에 앞서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별로 없었다. 그저 하이 마스터의 자리를 임시로 맞고 있는 네비앙의 지시를 따라 내게 배정된 구역을 감시하는게 전부였다.
나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현기증에 힘 없이 벽에 등을 기대었다. … 레르그란트에게 했던 거짓말에 대한 벌일까, 오늘은 정말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감았던 눈을 희미하게 떠 커다란 광장의 모습을 시야에 담았다.
절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이 광장에서 빈 공간이라고는 엘레로페 여제가 이곳에 모인 국민들에게 연설을 하기 위해 만든 커다란 단상과 그 뒤쪽으로 배치된 귀족들의 자리 밖에 없었다.
"으음…."
흐트려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시야를 돌려 광장의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했다.
…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압도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엘레로페 여제가 올라올 단상 앞으론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검은 맹금' 기사단이 길게 도열해 있었고 단상의 뒤로는 거대한 거신기 다섯 대가 바닥으로 커다란 망토를 늘어트린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거신기의 앞쪽엔 거신기를 조종하는 성배의 기사들이 한 명씩 서 있는 채다.
그야말로, 황제 직할령의 모든 전력이 이곳에 모여있는 것이다.
"…."
나는 후드 자락을 좀 더 밑으로 끌어 내리며, 엘레로페 여제가 등장할 단상의 뒤쪽을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껏 내가 엘렌이 엘레로페 여황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엘레로페 여제는 대외적인 활동이 전무했다.
… 그녀는 네네아리케로서의 내가 기원제에 불참한다는 사실을 알리가 없을 테고, 그렇다면 오늘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다는건 내게 진실이 드러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엘렌은 어째서 내게 정체를 숨겼던 것일까.
그렇게 답이 나올리 없는 의문을 떠올리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수 많은 사람들의 기원들이 올라갈 곳이다. 듀카스텔과의 전쟁이나, 펠그로엘드와 진정한 살해자들의 문제… 해결되지 못한 것들이 산재해 있지만 오늘 만큼은 잠시나마 그것을 잊고 있어도 괜찮겠지.
오늘은 아무런 걱정없이 자신들의 소원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날이니까.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넓기 때문에 흔히 주신(主神) 아마드라네로 표현되는 하늘이니… 소원을 하늘로 올려보낸다는 표현은 적절한 것이겠지?
"후…."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소리내어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흉내를 내어보아도, 내게는 저들처럼 기쁨과 같은 밝은 감정들이 찾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소원을 비는것 뿐인데, 뭐가 그렇게 기쁜걸까…. 나는 오히려 소원을 빈다는 행위 자체가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그것에 아마드라네라는 존재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그 소원이 달성되는건 오직 자신의 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원을 빈다는 행위는 근거 없는 막연한 희망을 허공에 던지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다.
"…."
갑자기 가슴 속 깊은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서늘한 분노에, 나는 스스로에게 당황하고 말았다.
"와아아아- !"
곧, 그 감정은 마치 천둥과 같은 함성 소리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이 너무나도 거대해서, 나는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아득함 마저 느꼈다.
너무나도 시끄러웠지만, 그렇다고 귀를 막는다고 해서 이 거대한 소리가 막아질것 같지는 않기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엘레로페 여제가 올라오고 있는 단상위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
엘레로페 여제는 그 어느때보다도 화려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단상까지는 거리가 꽤 되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금발 위에 씌워진 금관과 커다란 루비가 박혀 있는 지팡이, 그리고 붉은색과 금색이 화려하게 조화된 의복에서 소박한 복장만을 고수했던 엘렌의 모습을 연상하기 힘들다는 것 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크고 화려한 십자형의 목걸이는 그녀가 바로 아마드라네 교의 교황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무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나는 다시금 엘렌이 바로 엘레로페 여제라는걸 상기할 수 밖에 없었다.
거대한 제국 히로이얀, 그리고 히로이얀을 이루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아마드라네 교….
그 거대한 권력과 힘의 정점에 서있는게 바로 엘렌이었다니.
"아- "
음성을 증폭 시키는 마법 물품에 의해 이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만큼 커진 엘레로페 여제의 목소리가 광장을 울리자, 커다란 환호성을 내던 사람들이 거짓말 처럼 잠잠해 졌다.
… 대단한걸. 마치, 마법같다.
나는 엘레로페 여제의 주변을 자세히 살폈다.
여제의 가장 가까운 곳에 그녀의 호위를 맡은 마스터 네비앙이 어느샌가 자리해 있었고, 그 주위엔 내 동생을 포함한 네 명의 공작들이 서 있었다.
다른 세 명의 공작들에 비해 현저히 어린 나이의 레르그란트 였지만 그로 인해 주늑들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귀족들의 사정을 잘 모르는 평민들은 별 생각이 없겠지만… 단상 뒤에 위치한 많은 귀족들은 새로이 에스카랸 공작으로 등장한 레르그란트를 굉장히 눈 여겨 보고있는 눈치였다.
"들어라, 신성 히로이얀 제국의 신민들이여."
순간, 커다랗게 증폭된 누군가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퍼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엘레로페 여제라는건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나는 순간 그런 의심을 품고 말았다.
지금 엘레로페 여제의 목소리는 가느다란 여성의 것이긴 하지만 평소 엘렌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압적이고 오만한 기색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었다.
… 누군가는 그것을 위엄이라 포장하기도 하겠지만, 내게는 그저 그렇게 들릴 뿐이었다.
"오늘 이렇게 기원제에- "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광장 위쪽으로 여제의 목소리가 지나간다.
수 많은 히로이얀의 시민들이 마치, 그녀의 말이 신의 말씀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고 있었다.
… 그녀에게는 히로이얀의 여황이라는 권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아마드라네 교의 교황이라는 신권(神權)역시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겠지.
아무튼, 정말로 대단한 광경이다.
황제 직할령에 있는 모든 현대적 전력과 여황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수 많은 신민들…. 이 장면 만으로도 히로이얀이라는 거대 제국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단숨에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내가 애국자였다면… 이 장면에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느낄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실 없는 생각을 하며 내게 부여된 지역을 대강 둘러 보는데, 무척이나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
모두 제자리에 멈춘채 엘레로페 여제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는데, 홀로 앞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수상쩍게도 빛이 바랜 망토와 후드를 깊이 눌러쓴채로 말이야….
그렇게 모습을 가린채라, 성별은 확신할 수 없지만 큰 키와 골격으로 보아 그 수상한 인물은 남성으로 예상된다.
으응… 단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한 광경' 이라고 표현하는게 조금 성급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표현을 바꾸지 않겠다.
그의 주위엔 남들과는 명백히 다른, 기묘한 무언가가 감돌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 일반인 에게 있어 '감' 이라는 녀석은 그다지 신뢰할 수 있는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마법사에게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아무튼,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나는 망토 속에 숨겨둔 마탄시 에킬레일에 손을 얹은채 그 수상한 인물에게로 접근해갔다.
" -무슨 소원을 빌지 모르겠으나 나는 히로이얀 제국… 아니, 거기서 더 나아가 데른-헤모가르트 연맹과 우리 히로이얀 제국과 오랜 다툼을 벌여온 듀카스텔 제국까지 포함한 전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겠다."
세계 평화…?
그 남자에게로 접근하던 나는 그 익숙한 말에 연설 중인 엘레로페 여제를 돌아보았다.
… 전번에, 내가 레르그란트에게 했던 말이지. 기원제에 아마드라네에게 빌 나의 소원은 바로 '세계 평화' 라고.
고요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히로이얀의 시민들 사이로 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숙적인 듀카스텔 까지 포함된 평화라는 말 때문이었다.
엘레로페 여제. 아니, 엘렌은 서늘한 시선으로 단상 아래에 자리한 수 많은 히로이얀의 시민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늘한 시선엔, 자신의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평화는 피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말을, 우리는 지난 역사들을 통해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
아니, 지금은 엘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녀에게로 접근하는 수상한 인물의 발이 아까보다 더 빨라져 있었다.
"저리 비켜!"
나는 나의 진로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며 점점 그에게로 접근했다. 그리고 그런 내 기색을 알아차린 유니온의 다른 마법사들과 가드(Guard)들도 내가 주목하고 있는 수상한 인물의 존재를 인지한 모양이었다.
"아, 뭐야 정말…!"
"꺅!"
내 거친 행동에 몇몇 시민들은 불평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그런 불평들은 내 망토에 수놓아져 있는 유니온의 상징, 진리의 눈동자를 보고 모두 분분히 물러나 버렸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기에, 이 '이상' 을 눈치챈 자들이 많지 않긴 했지만… 여황에게 가해질 수 있는 위험을 배제해야할 기사들이나 유니온의 마법사들은 적지 않은 자들이 이곳을 주목하고 있었다.
내가 쫓고 있는 남자는 더 이상 은밀한 행동이 불가능 하다는걸 알아차렸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덕분에, 곧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뒤쪽으로 돌아가 품속에서 에킬레일을 꺼내어 그의 등 뒤를 겨누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대신, 마탄시의 끝 부분으로 그의 등 뒤를 찌르는 행위는 내가 그를 제압했음을 아주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미스틱 유니온의 마스터 네론그라시아다. 후드와 망토를 벗어 모습을 드러내라."
그의 등 뒤를 잡자마자,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위협을 가했다. 나는 그가 내 위협에 공포를 드러내며 망토와 후드를 벗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취한 행동은 내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 네 진짜 목소리는 어떨지 궁금하군."
내 진짜 목소리?
"너어- !"
나는 경악하며 그의 등 뒤를 겨누고 있는 에킬레일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마탄은 그의 몸을 관통하지 못한채 힘 없이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그것은 마력장처럼 물리력을 이용해 마찬가지로 물리력을 가진 마탄을 막은게 아니었다.
마탄이 가진 운동량을 자신의 몸에 닿자마자 0 으로 만들어버린 것 뿐이다.
"꺄아악!"
"무, 무슨 일이야!?"
탕! 하고 울려퍼진 마탄의 발사음에 주변에 있던 이리스테야의 시민들이 깜짝 놀라며 나와 그를 중심으로 원을 만들었다. 이 명백한 소란에 엘레로페 여제의 연설은 멎었고, 아직 이곳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은 그 이상을 알아차려 버리고 말았다.
기원제는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그 사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 소년의 목소리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 그리고 순식간에 이런 엄청난 마력의 사역이 가능한 자… 그 두 가지의 교집합은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이 흑색의 좌, 에벨타르테 라는 사실 밖에 없다!
"늦었다, 어린 마법사."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단상위에 있는 엘레로페 여제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 손에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 마력은 순식간에 이 세계에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다른 수단으로 변환되어 그 손이 가리키고 있는 여황을 향해 발현되었다.
- 작가의말
* 시험이 끝났습니다~
앞으로 2 주 뒤에 또 기말고사긴 하지만요... ㅡ,.ㅡ;; 제가 멘붕할듯.
* 이제 빠른 스토리 진행을... ㅠㅠ
* 봐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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