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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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는 레르그란트가 북령주에서 볼 일을 모두 마칠때까지 방 안에만 틀어박혀 나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레르그란트는 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굳이 그를 찾아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벌써 수 일이 흘렀건만… 그 때 내가 느낀 충격은 여전히 가슴속에 잔류하며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근친 금기…?"
신화에서나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지.
아마드라네 교에서 이야기 하는건 아니지만… 고대의 기록을 보면, 태양 혹은 달 숭배 사상은 이 대륙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먼 하늘 위의 태양을 남신(男神), 달을 여신(女神)으로 생각했고 그 두 신을 남매라 여겼다.
그 남매가 서로 살을 섞어 낳은 자식들 역시 신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들은 밤 하늘에서 절대로 변치 않는, 별자리로서 형상화 되었지.
태양, 달, 그리고 별자리… 그들의 특징은 모두 영속(永續)하다는 점. 그런 불멸성이야 말로 신의 가장 큰 특징이니까.
… 흔한 이야기다.
너무나 흔해 빠져서, 먼 과거의 인간들이 남긴 기록을 찾아보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에스카랸은… 뭐지?
레르그란트는 그것을 운명이라 말했다.
운명….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기록에서도 운명이란 말이 언급되었었지.
운명이란 녀석은 아무리 인간이 발버둥쳐도 피할 수 없는 미래다. 때문에 에스카랸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운명이라 말한 아버지와 레르그란트의 표현은 실로 타당하다. 정말… 타당하기 그지 없지.
그 만큼 확고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 과거에 기대어 섣불리 미래를 말하는 것도 영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레르그란트는 그 운명대로 자신과 내가 사랑으로 이어질 것을 확신했다. … 동생은, 사랑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하, 사랑…?
낭만적인 이야기 따위가 아냐! 그 단어를 언급하는 것 만으로도 나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왔다.
"하아…."
천장을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실제 내 시선은 천장을 향해있지 않았다. 나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있다.
레르그란트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혈관에 흐르고 있는 에스카랸의 피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강력한 마법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이다.
펠그로엘드조차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라면 더더욱 말이지….
에스카랸의 피는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이 가문에 남매 만을 허락했고, 외부의 피가 에스카랸에 섞이는걸 거부해왔다.
여기서 알 수 있는건 명백하다.
이 피는… 인간을 매개로 영원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복잡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시간에 스러져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자식을 남김으로써 에스카랸의 피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간에 스러져도, 나와 레르그란트라는 자식을 남김으로써 에스카랸의 피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더 흘러, 나와 레르그란트가 시간에 스러져도 자… 식을 남김으로써-
"…."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도록 만드는 것은 남매간의 사랑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에스카랸의 피에 의해 명백하게 조작된 감정…. 레르그란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이 실은 자신으로 부터 나온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내겐 레르그란트를 사랑한다는 감정이 찾아온것 같지는 않다.
동생으로서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레르그란트가 말한 사랑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겠지.
"나 역시…."
그렇다면 나 역시 언젠가는 레르그란트를 이성으로서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일까? 에스카랸의 피에 의해, 사회적 통념이나 도덕 따위는 모두 무시해 버린채로 말이야.
… 어찌해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치, 죽음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잠이 들었던 걸까….
감았던 눈을 떠보니 찬연한 태양이 산 허리로 사라져가고, 하늘은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며칠 동안 내내 방안에서만 머물러 있어서인지 온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것 같다.
"…."
정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나는 내 방을 요새화 삼아, 영원히 밖으로 나가지 않기라도 할 작정인가 보다. … 사고의 대상이 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남 일을 생각하듯 이어지는 까닭은 나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
일부러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그것은 얇다란, 아무런 힘도 깃들어 있지 않은 연약하고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였다.
아, 나는… 지금까지 꽤 많은 것들을 회피하려 했고, 실제로 대부분의 문제들은 미결 인채로 내게서 빗겨 나갔다.
… 도망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내가 직면한 이 문제로부터, 이번에도 역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운명' 이라는 같잖은 단어까지 등장한 만큼, 이것은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문제다. … 지금껏 많은 것들을 회피해온 벌이 이제서야 내게 찾아오는 것일까.
내가 지닌 지위도,
마법도,
물론,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는것 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는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다.
… 내 나름대로의 답을 내려야 한다.
"…."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어렸을 적의 내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검을 손에 쥔 채, 나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 역시 내 방과 똑같이 성의 내부인건 마찬가지지만… 며칠 만에 방 밖으로 나온 만큼, 복도의 공기조차 무척이나 상쾌하게 느껴졌다.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시녀 한 명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시녀의 시선은 명백한 당황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곧 내 얼굴에서 내 손에 들려 있는 검으로 이동했다.
나는 그녀의 당황 사이로 질문을 던졌다.
"레르그란트는 어디있지?"
"고, 공작님 께서는 지금 정원에 나가 계십니다."
아무런 풀도 꽃도 볼 수 없는 이 성의 정원에…? 하지만 마침 잘 되었다.
나는 대답없이 시녀를 지나쳐 곧바로 레르그란트가 있다는 정원으로 향했다.
* * *
며칠동안 쐬지 못한 북령주의 공기는 역시나 매서웠다. 그리고 그 차가움은 다소 무뎌졌던 정신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 성 밖으로 나와보니 하늘이 무척 높아 보였다.
게다가 저 노을….
이리스테야에 있을 때, 저 노을은 항상 내게 기분좋은 나른함을 안겨 주었었지.
하루를 충실하게 보냈든, 보내지 않았든… 내게 저 붉은 노을은 항상 하루의 끝을 알리는 일종의 기호 같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평소보다도 높아 보이는 하늘 탓인지, 아니면 온 몸을 파고 드는 이 냉기 때문인지, 오늘 만큼은 저 노을이 하루의 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가,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
사실 정원은 정원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무척이나 앙상한 모습이었다.
여름이 가까워져 날이 어느정도 따뜻해 지면 이 정원에도 꽃이 피어난다고 하지만…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역시 비교적 싸늘한 기후가 지속되는 북령주인 만큼, 실제로 꽃을 보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야말로 구색만 갖추어 놓은 정원이라고나 할까….
그 정원 안에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레르그란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주변엔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몇 명 서있었는데, 그들은 어느새 정원 가까이에 다가온 나를 발견하고도 그 사실을 레르그란트에게 알리려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기사들의 말없는, 그러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점점 더 레르그란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녀석은 정원의 어딘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엔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들만 가지고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실감을 느낄 것 같은 모습이다.
레르그란트는 저 나무를 보며 어떤 상실감을 느끼고 있기라도 한 걸까…. 더 이상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한?
"레르그란트!"
나는 그의 이름을 목소리를 높여 힘차게 부르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동생에게, 나는 가지고 있던 세검을 뽑아들며 힘차게 찔러 들어갔다.
"이 나쁜놈아아- !"
한바탕 소리를 지르니, 희미하게 나마 마음에 유쾌함이 찾아오는것 같았다.
"누님, 도대체 이게 무슨…!"
갑작스런 기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레르그란트는 순식간에 허리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 찌르기를 튕겨 내었다. 하지만 내 검은 무척이나 가벼웠고, 때문에 레르그란트의 검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은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는 빗나가 버린 검을 회수한 뒤, 다시 한번 검을 레르그란트에게로 휘둘렀다.
휘익,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무척 경쾌하게 들려왔지만… 방금전과 마찬가지로 레르그란트는 내 검을 전혀 어렵지 않게 튕겨내었다.
그는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리며 당황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레르그란트의 호위를 맡은 기사들은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채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감정을 제어하는데 능숙한 레르그란트 조차 아직까지도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듯, 그 질문엔 짙은 당황이 배어나왔다.
나는 검을 든 손은 여전히 레르그란트를 겨누고 있는채로, 빈 손을 이용해 품속을 뒤져 하얀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손수건을, 마치 기사들이 결투 신청을 할 때 처럼 레르그란트 에게로 힘차게 집어 던졌다.
아, 물론 결투를 신청할 때 기사들이 던지는건 장갑이다. 하지만 내게는 장갑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
으음, 나름대로 힘차게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손에서 벗어난 손수건은 레르그란트에게 닿지 못한채 힘없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 쳇, 손수건의 무게와 공기 저항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조금 더 가까이서 던졌어야 했는데.
아무튼, 행동으로서 내 의도를 보였으니 이제 언어로서 그것을 확고히 해야할 차례다.
"결투다, 레르그란트!"
나는 여전히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채 바닥으로 떨어진 손수건을 내려다 보고 있는 레르그란트에게 그렇게 힘차게 외쳤다.
그 말을 들은 레르그란트는… 한 동안 할 말을 잊어 버리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기사인 저와 누님의 결투라니요…. 그것보다 들고 계신 검이 상당히 위태로워 보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건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것을 내려놓고- "
"네가 이 결투에서 지면, 내가 에스카랸 공작이 되겠어."
레르그란트의 말을 끊으며, 단숨에 그렇게 말했다.
… 흐흥, 주변에 있는 기사들의 얼굴이 아주 가관인걸.
덕분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유쾌함에 입술 사이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걸 막기 위해 상당히 신경을 써야했다. 그리고 곧, 레르그란트가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운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누님이 결투에서 졌을 때의 조건은 없는 듯 하군요."
치사하기는….
아, 물론 이 결투에서 내가 정말로 레르그란트에게 검으로 이기려는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연약한 여성인 누님을 상대로 에스카랸 공작과 동일한 무게의 조건을 거는건 좀 가혹한 일인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결투에서 이길 경우에는- "
레르그란트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깐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내 손수건을 집어 올린 뒤, 말을 이었다.
"이 손수건을 갖도록 하죠."
… 왠지 꺼림칙하지만 어쩔 수 없지.
* * *
나는 세검의 가벼움을 이용해 나름대로 재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레르그란트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 한참 부족한 것이긴 하지만, 내 움직임은 어렸을 적에 배웠던 검술을 확실히 따라가고 있었다. 기억에서 거의 잊혀졌을 정도로 오래된 것들인데 막상 몸을 움직여 보니, 검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다.
음… 이런걸 보면 머리보다는 몸으로 체득한 것이 훨씬 더 오래 간다는 말은 아무래도 사실인것 같단 말야.
챙- !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검은 맥 없이 튕겨나왔다.
레르그란트의 검으로 부터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내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하아…!"
검을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튕겨져 나간 검을 빙글 돌려 다시한번 레르그란트에게로 휘둘렀다.
… 본래 베는 용도로 쓰는 검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
곧 카각,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내 검의 진행 방향이 레르그란트의 검에 의해 차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을 필요 이상으로 세게 쥐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검은 빠르고 날카롭지만… 무척 가벼운 만큼 이런 식으로 막히게 되면 좋지 않다는걸, 누님도 잘 알고 계실텐데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레르그란트 녀석은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그 당연함이 너무나 얄미워 적어도 한 방 정도는 먹여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요원하기만 한 일이겠지.
"시끄러!"
나는 그 외침을 마치, 기합 소리처럼 사용해 힘을 내어 레르그란트의 검을 밀어내었다. 아니… 이 경우엔 레르그란트가 검을 거두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내 힘으론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의 검을 어찌할 수 없다.
이번엔 레르그란트로부터 적극적인 공격이 들어왔다.
그의 검은 그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큰 호선을 그리며 내게로 휘둘러 졌고 나는 가까스로 그 검의 옆면을 쳐내는 것으로 방어를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르그란트는 내게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을 생각인듯 했다.
나는 쉬지 않고 휘둘러지는 그의 검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야 했다.
"누님은 언제나 쓸데 없는 부분에서만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쓰, 쓸데 없는 부분…?
안 그래도 별로 없는 내 자신감을 그런식으로 폄하하다니. 하지만 레르그란트의 말에 무어라 대꾸할 여유같은건 없었다.
캉!
… 상대적으로 두꺼운 레르그란트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더니, 지금과는 달리 둔탁하고 거친 소리가 나며 팔이 아려왔다.
나는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재빨리 검을 거두었다.
다행히, 이번엔 나를 적극적으로 추격할 생각은 없는듯 했다.
"…."
일부러 그러는건지, 레르그란트의 동작은 무척 컸다.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동작과는 반대로, 그의 검에 실려 있는 힘은 내 얇은 세검으로도 튕겨낼 수 있을 정도로 약한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화려하고 멋진 검술 대결이겠지만… 실상 레르그란트는 나를 엄청나게 봐주고 있다.
아마, 갑작스레 내가 검을 놓치고 레르그란트의 검을 받지 못한다 해도 내게는 아무런 위험이 없을 것이다. 그 만큼 녀석의 검에 실린 힘은 장난같은 것이었고, 이 결투는… 열심히 휘두르는 내 검에 레르그란트가 자신의 검을 살짝살짝 갖다 대는 것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제 그만 하시죠, 누님의 패배입니다."
물론이지.
결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이것을 시작하기 전부터 내 패배는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이얏- !"
하지만 나는 레르그란트의 말을 무시하며 그에게 달려 들었고, 결과는 참혹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레르그란트의 검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고, 균형을 잃어 바닥에 쓰러졌어야 할 내 몸은 녀석의 손에 부드럽게 붙들려 있었다.
… 이것 참, 꼴이 너무 우습게 되었는데.
당연한 결과였지만, 패배라는건 내게 언제나 분한 일이었고 그것이 얼굴에 노골적으로 들어났던 모양인지 레르그란트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뭘 그렇게 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계신겁니까?"
레르그란트가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부드럽게 놓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너… 정말 싫어."
녀석 역시 마찬가지로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답했다.
"유감스럽군요, 저는 누님을 정말 좋아합니다."
레르그란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품속에 넣어두었던 내 손수건을 꺼내며 마치 나를 놀리듯 그것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결과였고, 따라서 이런 결투라는건 좀 치사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이 손수건은 제가 갖도록 하죠."
… 흥, 갖든지 말든지.
나는 선명한 푸른색을 띈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 레르그란트."
"저 역시 믿지 않았었습니다."
않았었다….
명백한 과거형인 그 말이, 조금 아프게 느껴진다.
"그러니 그 운명이라는 녀석을 근거로 내게 엉큼한 짓을 하려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어. 나는 네가… 신사라고 믿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혹시 주변에 있는 호위 기사들이 우리의 대화에 주목할까봐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레르그란트의 결투를 남매간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전혀 주목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결투라는 명목으로 레르그란트에게 덤벼든 내가 귀엽게라도 느껴지는건지 멀찍이 서서 나를 힐끗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채였다.
잠시 주변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레르그란트를 바라보니, 녀석이 내 시선을 피하며 뺨을 긁적이는게 보였다.
"엉큼한 짓이라니요….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가신 것 같습니다만, 물론입니다. 저는 다만, 기다릴 뿐이죠."
"그래…."
분위기는 단번에 풀어져 버렸다.
나로선 어울리지도 않는 결투라는 요소를 들고나와 레르그란트와 서로에게 한 바탕 검을 휘두름으로서, 나는 내면에 형체 없이 자리잡고 있던 갈등을 어느 정도 구체(具體)로 끌어 내렸다.
… 덕분에 겉으로 보기에 갈등은 어느정도 해소 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무겁고 어두운 배덕감을, 도리어 가벼운듯 레르그란트에게 드러내 보였고, 그는 그것을 기다림이라는 대답으로서 받아들였으니까. 하지만 그 기다림이 보답받을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란다, 레르그란트.
- 작가의말
* 리리플 못달아 드려서 죄송합니다. 학교가기 전에 바로 올리는거라서... 시간이 없네요ㅠㅠ
* 그러고보니 벌써 이 글도 용량이 750kb 정도가 되었습니다. 영원으로 가는 문 완결 분량이 1.5mb 였으니 딱 절반 정도네요. 세월 참... 빠른듯?ㅠㅠ
* 봐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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