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56화]
* * *
너무나도 어이 없는 얘기라서 나는 한 동안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물론, 히로이얀 제국은 여성의 승계권을 인정해 주고 있다. 실제로 여성이 가문을 잇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이 나라의 지배자가 엘레로페 '여황' 이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에스카랸 공작이 되는걸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우리 에스카랸은 검 한자루로 일어선 가문이라고 한다.
그 밑엔 드넓은 북령주의 대지와 군벌 출신의 가신들, 그리고 수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있다. 그 정점에 서있는게 에스카랸의 피이니, 그저 그 이름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갖겠지만… 그렇다고 에스카랸의 이름만 가진, 나 처럼 어린 여자가 공작의 자리에 오르는 걸 다른 자들이 기껍게 볼까?
그건 남자인 레르그란트라고 해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겉보기와 다르게, 레르그란트 역시 고작 열 여섯살이니까….
"…."
그러고보니, 새삼스레 레르그란트의 나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 녀석이 정말 열 여섯 이라고…?
물론, 전에도 그랬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누가 보아도 레르그란트의 나이가 그렇게 어리다고는 생각하지 못할거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대강 알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누님께서 공작의 자리에 앉게되면, 주변에서 누님을 어떻게 볼지… 그것이 걱정되는것 아닙니까?"
부정은 않겠지만… 나는 애초에 그 자리에 앉을 생각조차 없는데.
레르그란트는 시퍼렇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누님은 제 존재를 간과하고 계시는군요. 만약 누님이 에스카랸 공작이 되면… 제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놀고만 있을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마. 당장 네가 공작 위를 승계한다 해도 자리를 잡는데엔 많은 시간이 걸릴거야. 하물며 검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내가 에스카랸 공작이라니…."
조금 주저하다가, 마음속에만 있던 말을 그 뒤에 덧붙였다,
"혹시 잊어버렸나 싶어 상기시켜주는 겸 말해두겠는데… 너는 아직 소년이고, 나 역시 아직 어린 소녀일 뿐이야."
그러고보니, 우리는 고아구나….
농담같지만 농담같지 않은 이야기에 나는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 레르그란트는 내 말에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아니, 호응은 커녕 강한 반발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채 시선을 돌리며 전혀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소년, 소녀 라구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
물론, 나 역시 지금과 같은 시대에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 왜 아니겠어, 마스터 네론그라시아로서 활동하며 크게 체감한 부분인데. 하지만 에스카랸 공작이라는 자리는 고작 유니온의 마스터와 비교할 것이 못된다.
소녀 공작이라니… 웃음만 나올 뿐이다. 소년 공작 역시 이상하게 들리는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전자보다는 훨씬 낫겟지.
그때, 잠시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레르그란트가 입을 열었다.
"누님, 확실히 말해두죠. 저는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변명을 할 생각도, 손가락질을 받을 생각도 없습니다."
"…."
"나이가 어리다구요…? 그건 비겁한 변명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아니, 굳이 지금과 같은 시기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마땅히 해야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면 거기엔 나이와 같은 하찮은 요소가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뭐, 갓난 애기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마치 선언 같은 당당한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레르그란트는…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 있는 걸까.
"장담하건데, 저는 한 달 이내에 에스카랸의 모든 것을 손에 쥐게 될 겁니다. 아버지 보다 못한 아들이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는 사소한것 단 하나조차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열기에 차 올라 있던 레르그란트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어갔다.
왠지 숨이 좀 막히는 기분이라 입고 있던 블라우스의 단추 하나를 풀렀다. 레르그란트는 잠시 내 목덜미를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누님의 생각이 바뀌어 에스카랸 공작이 될 거라면… 제가 방금 말씀드린 한 달, 그 시간내에 에스카랸의 모든 것은 누님의 발 밑에 있게 될 겁니다."
무척 공허한 이야기네….
그렇게 되면 내가 에스카랸 공작이 된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람. 실권은 모두 레르그란트가 쥐고, 나는 꼭두각시로 있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 잖아.
… 내게 권력욕이 있는건 아니지만, 어쩐지 거부감이 드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고작 약혼을 자연스럽게 파기 하기 위해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해야한다니.
"레르그란트, 네겐 내 약혼이 무슨 의미라도 있는거니? 고작 약혼을 파기하기 위해 내가 공작의 자리에 올라야 할 만큼?"
"흥, 수단의 경중은 제게 별로 중요한게 아닙니다."
"말 돌리지마."
내가 냉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빤히 노려보자, 레르그란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누님이 정략 결혼의 희생양이 되는걸 원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런 올가미를 만든 아버지가 더 이상 자리에 없지 않습니까."
"너…!"
또다시 거짓말을 하는구나.
… 혹시 이 녀석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역시 아니야. 그렇게 판단할만한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건 아니었지만, 나는 확신한다.
이건 이성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닌, 다만… 직감일 뿐이지만, 나는 내 직감을 믿었다.
"…."
화를 내려다 그냥 시선을 창문 바깥으로 돌리는 것으로 막 치밀어 오르던 화를 삭혔다.
… 흥, 나 역시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니, 화를 낼 자격은 없겠지.
"아무튼, 지금 당장 답을 해주지 않으셔도 좋으니…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꼭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공작 위를 계승하기 전까지 선택권은 누님에게 있는 겁니다."
레르그란트의 말을 흘려들으며 창 밖을 주목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이리스테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눈이 보였다.
이미 내린 눈이 얼어 붙고 그 위에 또 다시 눈이 내리고 그 눈마저 언 뒤에 또다시 눈이 내린다.
… 그렇게 긴 세월동안 쌓여 얼어붙어 있는 흰 흔적이, 실제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였다. 저곳에 달려가 그대로 드러누우면, 부드러운 솜 이불에 몸을 묻는것처럼 푹 빠질것 같아.
"후- "
어느 순간, 레르그란트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숨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려올리는 없고… 사실은 녀석 역시 마차의 창문에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것 아닐까.
기회를 잡은 나는 동생을 마음껏 비웃어 주려 고개를 돌렸다.
내 예상대로 레르그란트는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유리 표면에 하얀 입김을 남겼다. 그리고 그를 막 비웃어 주려는 순간, 내 눈에 레르그란트가 이미 창문에 써놓은 말이 보였다.
'네네아리케 바보 멍청이'.
… 뭐야 이거.
"얘, 너는 나보고 어린애라고 놀리더니 너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니?"
잔뜩 비꼼을 넣어 그렇게 말했는데, 레르그란트는 오히려 웃는 기색이었다.
… 놀렸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웃는 것 만큼 약오르는게 없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레르그란트를 노려보며 손가락으로 그의 옆구리를 세게 찔러보았다.
"…."
끄떡도 안하네, 단단한 녀석 같으니-
"흥, 이제보니 너도 어린애인건 마찬가지잖아."
내 말을 들은 레르그란트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모르셨습니까? 누님과 저는 아직 성인도 안 된 어린애가 맞습니다."
… 왜일까 분명 맞는 말이고 방금까지 내가 언급했던 것이기 까지 한데, 레르그란트가 그렇게 말하는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 * *
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는 멀찌기서 보이는 에스카랸 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변이 무척 어둡고 바람이 세게 불어 성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덜컥-
세찬 바람이 창문 사이로 파고들어 오려는 소리가 들린다.
레르그란트는 창문에 쳐놓은 커튼을 살짝 걷고는 바깥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니르' 가 내리고 있군요."
누니르, 상당히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인걸. 이리스테야에서 눈은 그저 눈일 뿐이지만… 일 년 내내 항상 눈이 쌓여 있는 이곳에선 눈을 부르는 어휘가 여러가지다. 누니르는 이미 쌓여 있는 눈이 센 바람이 휘날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것 같은 눈을 이르는 말이지.
"응,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은가보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옷자락을 여몄다.
마차 안에 있어도 무척 춥다. 그래도 나나 레르그란트는 이곳 북령주 출신이라 추위에는 꽤 강한 편이었다.
만약, 이리스테야에서만 살던 사람이 이곳을 처음 방문하게 된다면… 이 혹독한 추위에 치를 떨지 않았을까.
… 나 역시 레르그란트처럼 커튼을 살짝 들추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얇은 창문 너머로, 레르그란트가 말한것 처럼 누니르가 흩날리고 있었다. 어두운 풍경 속에서 누니르가 흩날리는 모습이 왠지 음산하게 보였다.
그동안 항상 좋은 날씨만 지속되는 이리스테야에만 있어서 그런걸까. 이런것도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풍경인데… 좀 낯설게 느껴진다.
"…."
계속해서 흩날리는 누니르 사이로, 거대한 얼음 거성 같은 에스카랸 본가의 모습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서서히 등장하는것 같은 그 모습이 조금 무섭게 다가오는것 같다.
에스카랸 성….
그러고보니, 펠그로엘드가 처음 저곳을 방문했을때 위대한 시간이 깃들어 있는 성이라고 이야기 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척 보기에도 굳건해 보이는 에스카랸 성은 그 모습처럼, 아주 오랜 시간동안 존재해 왔었다. 정확히 얼마나 되는진 모르겠는데, 들은 바로는 지어진지 거의 육백년이 지났다고 한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사물엔 위대함이 깃든다는 뜻일까.
… 그렇다면, 나는 펠그로엘드의 말에 동의할 수 있겠다. 한 세대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각할 수 없는 시간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즉, 에스카랸 성엔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아- "
역사…?
"뭐 특별한 거라도 있습니까?"
그 희미한 신음을 용케도 알아챈 레르그란트가 그렇게 물어왔다. 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 역사,
에스카랸의 역사?
"흠, 도착한듯 하군요."
생각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레르그란트의 말대로 지금껏 쉴새 없이 움직이던 마차가 멈추어 있었다.
레르그란트가 마차의 문을 열었고, 그동안 차단되어 있던 매섭고 혹독한 바람이 그나마 따뜻했던 마차 내부의 열을 순식간에 죽이는게 느껴졌다.
덕분에 조금 멍했었던 정신이 갑작스레 각성되어, 나는 갑작스레 어딘가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으- 춥다."
어깨를 감싸안으며 이미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레르그란트를 따라 걸음을 내딛으려는데 작은 눈발 몇 개가 마차 안으로 들어오는게 보였다.
… 양이 적어 금방 녹을것 같았지만, 마차 바닥에 쌓인 그 눈은 내가 마차에서 내릴때까지 여전히 바닥에 남아 있었다.
"꺅!"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일먼저 내가 한 일은 강한 바람에 미친듯이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내 생각보다 더 거셌고, 때문에 한참동안 머리카락과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었는데 어깨쪽으로 부터 언제 있었는지 모를 후드가 내 머리위로 씌워졌다.
깜짝놀라 고개를 돌리자, 레르그란트의 손이 내 머리쪽으로 부터 멀어져 가는게 보였다.
"아, 고마워."
"별 말씀을."
레르그란트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걷는데 한 걸음을 옮길때마다 발 밑에서 뽀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주변을 조금 둘러보니 어느새 온 세상이 흰 눈에 덮여 있었다.
"…."
몇 년만에 다시보는 풍경은 변한 곳이 전혀 없었다.
싸늘한 냉기와 눈, 그리고 얼음속에 갇혀 멈춘듯한 이 풍경이… 마치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겨울의 감옥 같다는 생각을 했다.
레르그란트를 따라 쇠창살의 형태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을 통과했다.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문은 종종 불어오는 눈보라와 냉기에 본래의 모습을 잃고 주저앉아버려 기능은 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모두들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군요."
눈 속에 반쯤 파묻혀 버린 동상이나 기타 구조물들을 다시 한번 눈에 새겨 넣고 있는데. 갑자기 레르그란트가 영문을 모를 소리를 했다.
누가 우리를 기다린다고-
"…."
문득, 앞을 본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까지 길게 이어진 길 양옆으로 날카로운 창과 검으로 무장한 병사와 기사들이 미동도 없이 도열해 있었다.
잔뜩 휘몰아치고 있는 누니르와 어둠 때문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의 끝이 어디인지 조차 보이지 않는다.
분명, 나와 레르그란트를 맞이하려 이렇게 나온것이겠지만….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 레르그란트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눈 앞의 풍경에 압도당한 나와 달리, 그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열해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조금 격정적이게 된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저와 누님의 성입니다, 들어가죠."
동생의 목소리에서도 격정에 찬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레르그란트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고 나는 약간 고개를 숙인채 그의 뒤를 따랐다. 길을 따라 도열해 있는 기사와 병사들은 우리가 지나갈때마다 고요히 무릎을 굽혔다. … 이런 거창한 환영식이라니, 일국의 왕이 부러지 않을 정도다.
"…."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레르그란트는 매서운 추위와 날카로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전혀 움츠러 들거나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는게 당연하다는듯 허리와 목을 꼿꼿이 펴고 앞만 보며 걸었다.
… 과연 대단한걸.
나는 너무나도 거창한 이런 환영식이 부담스러워 이미 쓰고 있던 후드를 더 눌러 썼다.
그렇게 한참동안 병사들의 사이를 걸어 성의 문 앞에 도착했다.
그곳엔 북령주의 고위 귀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한 중년의 귀족이 레르그란트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는게 보였다.
"북령주로 귀환하신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에스카랸 공작 님."
무척 매끄럽고 정중한 목소리였지만, 거기엔 숨길 수 없는 날카로운 기색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아직 공작 위를 승계받지 못했네만…."
그렇게 말하며 레르그란트가 손을 내젓자, 무릎을 꿇었던 귀족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다소 섞여 있었다.
"이곳은 황제 폐하의 직할령이 아닌, 에스카랸이 지배하는 대지입니다. 사실, 여황 폐하께서 하사 하시는 공작의 위(位)는… 아시다시피 무척이나 형식적인 이야기죠."
레르그란트게 그에 대해 무어라 대답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관심을 끄고 고개를 들어 올려 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성 역시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모습과 똑같다.
단단한 돌로 만들어졌지만, 겉은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눈으로 덮여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것 같은 착각을 불러오게 한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글로브부르크'…, 얼음 거성이란 뜻이다.
* * *
"어서오십시오, 아가씨. 그간 몰라보게 성장하셨군요."
"아… 오랜만이에요."
성 안으로 진입하자 제일 먼저 나와 레르그란트를 반기는건 이 성의 집사, 베크로 였다. 이리스테야에 있는 저택의 집사 테오렐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솔직히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베크로는 몸을 돌려 레르그란트에게도 인사를 건네었다.
"도련님도 정말 몰라보게 성장하셨군요. 이 늙은이를 기억하실진 모르겠지만…."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크로. 정말 오랜만이군요."
이 음산한 성을 아주 오랫동안 관리하고 있어서 일까… 지금보니 베크로 역시 이 성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성의 분위기와 걸맞게 그의 목소리 역시 무척이나 고요한 편이었는데, 덕분에 자신감에 찬 레르그란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훨씬 더 크게 들려왔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레르그란트는 그 말을 한 번 더 반복하며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오랜만이라는 말의 대상은… 비단 우리들 앞에 서있는 베크로 만을 향한건 아니겠지.
나 역시 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레르그란트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위로 옮겼다.
성의 천장은 무척이나 높아서, 적절한 조명이 없다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조명은 그럭저럭 밝아서, 희미하게 나마 천장이 보였다.
"주인님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
"그 분의 시신은 이곳 북령주에 묻히게 되는지요?"
레르그란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글로리아뎀 내에 황립 묘지가 있습니다. 그곳은 히로이얀의 역대 황족들이 묻힌 곳이고… 아버지의 시신이 매장되기엔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베크로는 레르그란트의 대답에도 잠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잠시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말했을 뿐이다.
"황립 묘지라… 참으로 영광된 자리로군요. 암요, 주인님 께서도 만족하셨을 겁니다."
그의 말은 분명 긍정이었지만, 그 말에 내포된 베크로의 감정역시 긍정은 아니었다. 중얼거리는 듯한 그의 말엔 어쩐지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처럼 건조한 구석이 있었다.
죽은 뒤에 묻힐 자리….
글쎄, 이리스테야는 비옥하고 항상 햇빛이 잘 드는 대지이긴 하지만 역시 아버지는 고향에 묻히는걸 바라셨을까.
장례식 전에 잠깐 레르그란트와 그것에 관해 상담한 적이 있었는데, 레르그란트는 묘지 자리같은건 안중에도 없는것 같았다.
그래… 그건 이성보다는 다소 감성적인 영역의 것이니까.
레르그란트가 그러하니, 아버지 역시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먼길 오시느라 무척이나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리스테야로 가시기 전 쓰시던 방들은 모두 깔끔하게 치워두었으니, 이곳에 머무르시는 동안 그 방들을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먼길이라고 해봤자 단 하루였지만 말이지….
마도 과학으로 이룩한 유니온의 게이트 네트워크가 아니었다면 이리스테야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몇 주가 걸렸을지 모르겠다.
"아, 혹시 레르그란트 도련님은 주인님이 먼저 쓰시던 방을 쓰고 싶으시다면- "
아버지의 방?
유품은 모두 치워둔 걸까….
"아니, 아닙니다. 저는 제가 쓰던 방으로도 충분 합니다."
레르그란트는 단번에 거절했고 베크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머무르시는 동안 부디 편히 쉬시길."
그는 나와 레르그란트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보인뒤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성 내부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레르그란트는 잠시 아무말 없이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시신이 북령주에 묻히지 못한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군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지….
베크로는 아버지가 어린 소년이었을 무렵부터 이 성의 집사를 맡아 왔다고 한다.
나나 레르그란트나 누구든 에스카랸 공작이 된다면 베크로에게 주인님이라 불리겠지만… 그에게 있어 '주인님' 이란 말의 진정한 대상은 영원히 아버지일 것이다.
"역시 아버지의 시신은 이곳에 묻는게 좋았을까…."
베크로가 사라져간 어둠을 바라보며 입 밖으로 낸 그 말을, 레르그란트가 날카롭게 잘라내었다.
"쓸데 없는 후회입니다, 누님. 아버지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철저히 무관심한 분이었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든, 주변 사람에게든 말이죠."
"…."
"사실, 아버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례식은 화장이었겠죠."
… 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레르그란트의 말에 조용히 동의했다.
- 작가의말
* 막 글을 올리려 문피아에 접속했는데 투벅님이 정말 멋진 추천글을 올려주셨습니다ㅠㅠ 제가 딱히 보답해 드릴수 있는건 없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실연재 다시한번 약속드립니다. 이 자리를 빌어 투벅님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ㅋㅋ
* 그러고보니... 최근에 불현듯 깨달은게 있습니다. 그걸알고 나서 스스로도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저는 판타지 소설을 씁니다. 쓰게 된 동기야 어쨌든 그 전까지 저 역시도 판타지 소설을 즐겨 보는 독자였죠. 그런데 글을 쓰고 나서부터... 지금껏 단 한번도 다른 책을 본적이 없습니다. 본래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문득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더라구요. 뭐, 별건 아니긴 한데 갑자기 소름이 ㅠㅠ
* 아무튼, 성원해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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