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 (4)
"어서오십시오."
보르친스키 가족들은 집 앞에 나와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았나 보군'
오늘 낮 공장을 견학할 때만 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물어 보자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도 했었는데 로빈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웃어 넘겼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더라도 공장 근로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견학 온 사람들을 응대해야 한다면 짜증 날 수 있었다.
거기다 그 견학자가 이것저것 물어보며 성가시게 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왜 집 밖에 나와있나? 더군다나 가족들 모두"
"아... 손님을 잘 접대 하기 위해...."
"하하 들어가지"
로빈이 손짓하자 보르친스키는 집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
집은 제법 컸다. 한국의 단위인 평형으로 표현하자면 국민평형인 30평 내외의 집 크기와 비슷했다.
거실과 식당 그리고 방이 3개가 딸린 집이었는데, 이세계의 평균적인 생활 수준을 생각하면 평민이 살기엔 최고 수준의 집이었다.
"식사를 준비해 뒀습니다"
"그래.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보르친스키가 준비한 식사는 스테이크였다.
손님의 정체를 알게된 보르친스키는 집으로 헐레벌떡 돌아가 아내와 함께 시장에서 소고기를 구입해 왔다.
방금 도축한 신선한 고기를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한 것과 동시에 시장에서 판매하는 반찬들을 추가로 구입했다.
국왕 전하가 좋아하셔서 유행했다고 알려진 김치를 포함해 다양한 반찬들을 구입해 식탁 위에 올렸는데 로빈이 보기에도 보르친스키 가족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잘 먹겠네"
"예 전하."
"하하하 누구한테 들었는가?"
"그...그게..."
식탁에 앉은 보르친스키는 로빈의 말에 저도 모르게 전하라고 말했다.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로빈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마도사에 다다른 로빈이 외모를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엄청난 존재감 때문에 보르친스키는 더더욱 확신했다.
"관리소장이.... 안술러프님께서 VIP가 방문할 것이라 언질을 줬다고...."
"하하 안술러프 그놈이 원흉이군"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잠행하며 국민들의 삶의 모습을 밀착해 알아보고 싶긴 했지만,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아르톰의 주요 공장을 둘러보려면 절차가 필요했다.
해서 안술러프를 불러 자신의 방문을 허락하라고 미리 알려 줄 수 밖에 없었다.
"고기를 잘 구우셨네요. 아내분 솜씨가 좋으셔요"
"감사합니다. "
에르트라스는 스테이크를 조금 썰어 먹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보르친스키의 아내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스테이크는 로빈의 입맛에도 맞았다.
와인을 졸여 만든 소스는 일단 서민이 먹는 음식 치고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밥도 잘했군"
"전하의 은혜 덕분에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테이크와 함께 나온 흰쌀밥을 먹으며 로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꼬들한 냄비밥의 느낌이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로빈은 일반 백성들도 빵 대신 밥을 먹기 시작하는 추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좋았다.
"억양을 보니... 발렘 출신인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여곡절이 좀 있었겠군"
"발렘에서 탈출해. 아드리아에 정착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
로빈의 지시에 보르친스키는 자신이 아르톰에 정착하여 살게 된 스토리를 천천히 읊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드리아는 최고의 국가이며, 이 모든 것이 국왕 전하의 은덕 때문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발렘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나?"
"발렘에서는.... 이것 반 만한 집에서 가축과 함께 지냈습니다"
"가축? 집 안에서?"
"그렇습니다. 발렘에서는 대부분 가정이 집 안에 소를 키웁니다. 물론 그 소는 평민들의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소를 위탁해 키우는 것이지요"
"하하... 냄새 때문에 고생 좀 했겠는데?"
"익숙해지면 괜찮습니다만.... 다시 그렇게 살라고 하면 도저히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부분은?"
"발렘에선 항상 배고픈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처럼 소고기와 밥을 먹는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아이들 많이 낳으면 영양실조로 죽는 아이가 생기기도 하는 곳이었습니다"
보르친스키가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세계 자체가 평민들이 살기 힘든 환경이었고 그 중에서도 발렘은 특히 더 힘든 곳이었다.
"다시 그런 삶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국왕으로 있는 동안에는"
로빈의 말에 보르친스키는 약간의 감동을 받았다.
발렘출신이건 오슬릿 출신이건 심지어 군도에서 해적질을 하던 사람들이건 열심히 제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국민이라면 전하께서 모두 아드리아인과 똑같이 생각해 준다고 듣긴 했지만, 직접 눈 앞에서 들으니 약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빠... 나도 배고픈데..."
"어엇!"
그 때, 방에 있던 보르친스키의 아들이 고소한 냄새를 참지 못하고 거실로 나왔다.
보르친스키는 당황해 눈빛으로 아들에게 얼른 다시 방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아들은 가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해서 혹시나 실수 할 까봐 방에 있으라 한 것이었다.
"하하하 너도 와서 고기 좀 먹어라"
"우와! 정말요?"
"그럼 물론이다"
"감사합니다"
보르친스키가 안된다고 눈을 부라렸지만, 아들은 그것을 모른척 하고 로빈의 곁에 가서 그가 넘겨주는 고기를 넙죽 받아먹었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혼나더라도 이 고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너무 귀엽네요"
"아.... 죄송합니다. 배가 고팠는지.."
"아니에요. 한참 자랄 아이들이 많이 먹어야지요"
에르트라스는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 먹는 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살면서 단 한번도 인간 아이를 보며 귀엽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이해할 수 없게도 아이가 귀여워 보였다.
'으음?'
보르친스키의 아들을 보는 에르트라스의 눈빛은 마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여성의 눈빛 같았다.
로빈은 그녀가 아이를 귀여워 하는 것을 보며 지금 삶에도 전의 삶에도 한번도 가지지 못했던 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나와 그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나...?'
일단 폴리모프로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그녀에게 생식 능력은 없었다.
생물학적으로 유전 정보가 다른 드래곤과 인간은 수정 될 수가 없었고 그 이전에 드래곤은 암수가 교미를 해 아이를 낳는 시스템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절대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다.
없던 신체도 만드는 에르트라스의 능력이라면, 로빈과 그녀의 유전자를 잘 합쳐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수 있었다.
물론 태어난 아이의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만 갈까? 다 먹었지?"
"예. 그래요"
식사 시간 내내 경직되어 있는 보르친스키를 위해 로빈은 이쯤에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 잘했네. 보르친스키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전하"
"앞으로 열심히 일하고 행복한 삶을 이어나가길 바라네"
"감..감사합니다...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로빈은 정수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보르친스키의 가족들을 뒤로 하고 아르톰 기차역으로 향했다.
아르톰에서 볼 건 다 봤다. 많은 공장들과 농장들은 걱정할 것 없이 잘 운영되고 있었다.
로빈과 에르트라스는 새로 도입된 여객 기차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데이라로 향했다.
* * *
쿠샨 제국의 수도 쉬라즈
거대한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제국의 궁전 가장 높은 곳.
황제 다리우스가 머무르고 있는 화려한 공간이 있었다.
온통 금으로 장식된 그의 옥좌에 다리우스가 아닌 다른 자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쿠샨의 절대자인 다리우스가 자신의 옥좌에 앉아있는 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프톨레스.
수천년을 살아온 인간 마도사였다.
"가신 일은 잘 되셨습니까?"
"냄새나는 도마뱀 새끼들 사냥도 이젠 지겹다"
"그래도 그들의 마력을 모두 흡수하시지 않습니까?"
"무한해 보였던 그들의 마력도 신의 주문을 구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프톨레스는 마도의 경지가 깊어지며 거의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의 능력 만으로 필멸자에서 불멸자로 넘어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였다.
그는 쿠샨의 첫번째 황제였다.
평범한 흑마법사에서 출발해 제국을 건국한 황제가 된 그는 강함을 추구 하기 위해 황제의 자리까지 버리고 마도를 추구했다.
제위를 물려 받은 아들이 죽은 이후 수십 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동안에도 그는 끊임없이 마법에 매진했으며 나날이 경지가 심오해졌다.
그는 실전 되었던 고대의 마법을 부활시키기는 과정에서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용한 마법들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했고 그 마법들 중 일부를 체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에르트라스가 예측한 10서클 수준의 마법들이었다.
하지만 프톨레스는 이론으로 이해하고 있는 10서클 마법들을 제대로 시전 하지 못했는데 마법을 시전 하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마력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9서클의 마법을 난사할 수 있을 정도로 마력에는 자신이 있던 프톨레스였지만, 10서클은 아예 격이 달랐다.
자신이 쌓아온 마력으로는 제대로 된 마법 실현이 불가능했고, 아주 일부분만 구현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마력을 확보하기 위해 드래곤 사냥에 나섰고, 10서클 주문으로 무장한 그는 에르트라스를 포함한 드래곤들을 학살하며 그들의 마력을 강탈했다.
프톨레스로 인해 그린드래곤인 에르트라스외에도 대양에 살던 블루드래곤, 유희를 즐기던 골드드래곤, 화산에 살고 있던 레드드래곤도 죽음을 당했고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는 실버드래곤과 블랙드래곤만이 생존해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시킨 일은?"
"준비해 뒀습니다"
다리우스는 프톨레스에게 공손히 보고서를 올렸다.
[아드리아 왕국 국왕 로빈 조사 보고서]
다리우스가 올린 보고서에는 로빈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쿠샨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 채널을 총동원하여 작성한 보고서였기에 로빈에 대한 아주 디테일한 내용도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흐음.... 이거 신빙성이 얼마나 되나?"
"매우 높습니다. 여러번 재검토를 거쳐 교차 검증이 된 내용만 올렸습니다"
"그래?"
다리우스의 말에 프톨레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 마법으로 운하를 뚫었다.
- 수천개의 마정석을 동시에 충전한다.
- 수만명의 인원들을 동시에 하늘에 띄웠다.
- 거대한 보호막을 소환해 병력 전체를 보호했다.
보고서를 다시 천천히 읽어본 프톨레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날 위한 섭리의 선물인가?'
보고서의 내용이 맞다면 로빈이라는 자는 막대한 마력을 소유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력이 필요한 프톨레스의 입장에선 너무나 맛있는 먹이감이 아닐 수 없었다.
'전부 하급 마법들을 사용했다. 클래스가 낮은 마법 수준을 막대한 마력으로 극복했어'
실제로 본 것이 아닌 글로 접하고 있었지만, 마법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였기에 로빈이 어떻게 운하를 뚫었는지, 풍벽은 어떤 원리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하급 마법을 중첩해서 사용하거나 마력을 들이부어 위력을 강하게 만든 것으로 효율이 높은 고위 마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흐흐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단시간 내에 라마르 왕국을 전복하고 새 국가를 세운 것도 그렇고 주변의 발렘과 오슬릿을 병합한 것을 보면 놈의 능력은 확실합니다"
다리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프톨레스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몸을 관조했다.
'음... 아직은 무리인가?'
현재 프톨레스의 몸 상태는 100%가 아니었다.
가장 최근에 사냥한 골드드래곤 벨베키르스와의 전투에서 타임슬립을 잠시나마 저항한 그의 공격에 신체가 소멸할 뻔 했기 때문이었다.
벨베키르스는 현존 드래곤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드래곤에다가 마법적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골드드래곤이었기에 확실히 그냥 당해주진 않았다.
물론 신체가 거의 다 날아가도 자신을 리치화 하여 전투를 이어간 프톨레스가 결국 승리하긴 했지만, 신체와 마력 모두 회복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로빈이 고위 마법을 모른다고 해도, 그의 마력은 절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고서의 내용은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괜히 지금 덤볐다가 어처구니 없게 패배할 수도 있었기에 마음은 급했지만 한박자 쉬어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쉬는 것은 프톨레스 하나면 충분했다.
"다리우스야"
"예 시조님"
"아드리아를 침공하고 싶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아드리아는 제국의 새로운 위협입니다. 비슷한 규모의 발렘과 오슬릿을 통합해 거대한 경제권을 구축했습니다. 게다가 아드리아에 제국을 배신한 더러운 핏줄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리우스가 말한 더러운 핏줄은 카시드였다.
원래 군도에 쳐박혀서 해적으로 산다면 그냥 놔두려 했지만, 아드리아라는 떠오르는 강국의 검으로 활약하고 있다면 그냥 보고 놔둘 수 없었다.
"좋다. 허락한다. 마음껏 휘젓고 있거라. 나도 곧 가겠다"
"예. 시조님. 감사합니다"
고개숙인 다리우스가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땐 프톨레스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언제고 이렇게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갔기에 다리우스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일어서 뒤를 돌아 대전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황제의 이름으로 아드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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