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전 노예 (2)
"잘 지냈나?"
"물론. 너는 어때?"
"덕분에 앓던 이를 하나 잘 뺐지"
염전의 기반 공사를 마무리한 로빈은 훌리오와 멘데스를 데리고 군도로 날아왔다.
도착하자마자 훌리오와 멘데스를 가족들에게 보내고 카시드를 만나기 위해 그의 저택으로 왔다.
저택의 경비병들은 로빈을 보자마자 곧바로 카시드에게 알리는 것과 동시에 응접실로 그를 안내했다.
응접실 푹신한 소파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카시드가 부시시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군도의 인재 몇 명을 아드리아로 빼갔다고 보고가 들어 왔는데 어떻게 생각해?"
"미안하게 생각해"
"하하하 미안하게 생각한다니 참으로 당당해"
"영지에 워낙 인재가 없어서 말이지 군도에는 쓸만한 인재들도 많던데 좋게 좋게 넘어가 주길 바래"
"훌리오와 멘데스까지는 그렇다 쳐도, 안술러프까지 빼가는 건 선 넘었지"
카시드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조금 굳어지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술러프는 군도에서도 핵심 인재였다. 물론 그가 없다고 군도의 물품 공급에 장애가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안술러프만이 만드는 우수한 품질의 무기들을 공급 받을 수 없는 것은 컸다.
"추후에 자네가 호출하면 대가 없이 도와주러 오겠네"
"상대가 쿠샨 제국이라도?"
"그 누구라 해도 약속은 지키지"
"좋다"
로빈의 약속에 카시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걱정 중 하나가 쿠샨의 군도 토벌 이었는데, 만약 그 상황이 닥쳤을 때 로빈의 합류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쿠샨의 뛰어난 마법사들을 그가 막아내 줄 지도 모른다'
쿠샨은 뛰어난 마법사, 특히 흑마법사가 많았고 그들의 마법은 예측하기도 어려웠고 위력도 강했다.
전사들만 쳐들어 온다면 카시드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볼만 했지만, 마법사가 가세하면 혼자서 감당하긴 무리였다.
로빈이 마법사들을 처리해 준다면, 쿠샨의 토벌을 물리치는 것이 꿈 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럼 자네를 믿고 그 동안 훔쳐갔던 여러 물품들도 우리가 제공한 것으로 처리하도록 하지"
"알고 있었나?"
"하하 모를 수 있나? 대놓고 하늘을 날아 가는 모습을 보고 말이야"
"그럼 이왕 알게 된 김에, 조금만 더 지원해. 선박용 금속 재료가 많이 부족하다"
"이미 선박 재료를 많이 훔쳐갔는데 더 필요하다고? 해군이라도 만드나?"
"아니. 어선을 만든다"
"어선? 오오... 민생을 신경 쓰는 영주님이셨나?"
"신경 써야지 내 백성들인데. 고기잡이가 아주 짭짤해. 설마 고기잡이를 방해할 생각은 아니겠지?"
"절대 아니지. 내 휘하의 해적들은 요즘 라마르쪽 해안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아. 오슬릿과 그 아래의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남부 왕국들의 배를 털어 먹는데 신이 났어"
오슬릿의 해군이 로빈에게 박살이 나서 군도의 해적들을 대륙 남부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방파제가 사라진 지금, 해적들은 선박 가득 교역품을 싣고 움직이는 남부의 상선들을 털어 먹는 것에 신이 난 상황이었다.
덕분에 군도의 재정 상황은 역대급으로 여유로워 졌고, 다양한 물품이 넘쳐났기에 로빈의 도둑질에도 카시드는 웃고 넘길 수 있었다.
"잘 되었군. 그럼 미안한 마음 없이 필요한 물건들을 좀 가져가겠다"
"좋아. 그리고 말이야 이왕 말이 나와서 그런데 아드리아 해안 쪽에 조그마한 항구를 하나 만들어 줄 수 있나?"
"항구? 쳐들어 오려고?"
"그런게 아니라 자네와 연락을 해야 할 때 내 사람들을 보내야 할 것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늘을 날아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네 약속한 대로 쿠샨에서 쳐들어 오면 얼른 날 호출해야 할 테니"
"그렇지. 그리고 정기적으로 서로 안부 정도는 묻는 연락도 좀 하고 말이야"
카시드는 로빈과 꾸준히 교류하고 싶었다.
휘하의 해적들은 큰 고민 없이 지금의 약탈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카시드는 조만간 쿠샨의 위험이 닥쳐 올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은 1,2년 뒤가 아닌 4,5년 뒤가 될 수 도 있었기에 그 때까지 아드리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좋아. 어차피 언젠가 우리도 바다로 진출해야 했어."
로빈이 꿈꾸는 아드리아는 경제 교류가 활발한 영지였다.
경제 교류의 규모가 커지려면 해상 운송은 필수였다. 저렴한 운송 비용과 폭넓은 교류 대상이 생기는 바다로 나가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야기가 잘 통한 기념으로 한잔 하지"
-또르르
카시드는 기분 좋게 웃으며 로빈에게 와인을 권했다.
로빈도 웃으며 그가 건넨 와인을 의심 없이 받아 들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와인은 단 맛이 적고 깔끔한 와인이었는데 지구에서 먹었던 맛에 견줄 정도로 훌륭했다.
"와인이 입에 맞나?"
"아주 좋아. 혹시 안주도 좀 있나?"
"여봐라"
와인을 금방 해치고 안주를 찾는 로빈 때문에 카시드의 전속 요리사들이 바빠졌다. 그들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해산물을 손질하여 다양한 안주를 내왔고 로빈은 기분 좋게 이것 저것 집어 먹으며 와인을 마셨다.
"혹시 노예들을 좀 구할 수 있나?"
"노예? 인력이 부족한가?"
"염전을 짓고 있는데 일할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최근에 들어온 노예들이 있긴 한데... 몇 명이나 필요한가?"
"한 5천명 정도?"
"하하 그 정도는 어림도 없어. 염전이라면 건장한 남성들이 필요한 것 아닌가? 지금 남성 노예들의 숫자를 다 합쳐도 3백이 될까 말까 할 거야"
군도에는 노예들이 꾸준하게 잡혀 오고 있었지만, 그만큼 많이 팔려나갔다.
잡혀온 노예들은 대륙 곳곳으로 팔려나갔는데 검은숲의 오크들에게도 팔아 치웠던 것을 생각하면 해적들이 노예를 판매하는 데 얼마나 능숙한지 알 수 있었다.
"어디 구할 곳이 없을까?"
"없어. 5천이나 되는 노예를 동시에 판매할 수 있는 세력도 몇 개 되지 않는 데다가 노예들을 놀게 두는 곳은 없으니 당장 5천을 팔 수 있는 곳을 찾긴 어려워"
"흐음... 노동력이 필요한데..."
"노동력이라면..... 굳이 인간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그렇지. 왜? 드워프 같은 놈들로 5천을 구할 수 있나?"
"부르는 게 값인 드워프를 5천이나 구하는 것은 어림도 없고..... 혹시 리자드맨이라고 알고 있나?"
"으음... 도마뱀처럼 생긴 몬스터 말하는 건가?"
"정확해. 인간 대신 리자드맨을 써도 괜찮다면 좋은 장소를 추천해 주지"
"오오 상관 없지. 어디로 가면 살 수 있나?"
"판매하는 곳은 없어. 단지 그들의 주요 서식지를 알고 있을 뿐. 자네의 영지에서도 가까워 초록 비늘 해안이라고 검은숲과 바다가 북쪽에서 만나는 지점에 있지"
"판매하지 않는다면...?"
"잡아다 써. 말을 잘 듣게 만들 방법은 자네가 찾고"
몬스터를 길들여서 노동력으로 사용하라는 카시드의 제안에 로빈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직접 겪어본 몬스터중 지성이 높았던 놈들은 오크였는데 오크를 과연 길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힘들 것 같았다.
일시적으로 굴복 시킬 순 있지만, 그들을 지속적으로 통제하려면 강한 병력이 필요했고 아드리아에는 지금 그것이 없었다.
"후우... 썩 내키진 않지만... 일단 한번 가서 보긴 해야 겠군"
찡그린 표정으로 말하는 로빈을 보고 카시드는 웃었다.
사실 농담에 더 가까운 말이었는데 진지하게 생각하는 로빈이 신기했다. 몬스터가 괜히 몬스터가 아니었다. 리자드맨을 길들여 염전에서 일하게 한다?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여기서 농담이었다하고 넘기기엔 로빈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 졌기에 카시드는 초록 비늘 해안의 길을 잘 아는 해적을 불러 로빈에게 상세한 위치를 설명하게 했다.
* * *
검은숲 북동부 초록 비늘 해안
리자드맨이 군락을 이뤄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서식하는 모든 리자드맨은 악슬로틀 부족 소속이었다.
흔히들 리자드맨이라도 싸잡아 불리우는 이들은 사실 다양한 변온 동물 개체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크게 슬란, 사우르스, 스킹크로 나뉘어졌다.
먼저 슬란은 악슬로틀 부족을 이끄는 우두머리로 부족 전체에 딱 1명 존재했다.
슬란의 겉모습은 덩치가 큰 두꺼비였고, 이족 보행이 가능할 정도의 뒷다리가 발달해 있었다.
걸어서 이동하면 특유의 거대한 엉덩이 때문에 기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 수도 있었으며 발달한 두뇌 덕분에 이마가 툭 튀어 나와있었다.
슬란은 강력한 마력으로 주술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부족 전체에 텔레파시를 보내 모든 리자드맨들을 조종할 수 있었다.
그의 강력한 통제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떠받치는 사우르스 가마꾼들만 봐도 알 수 있었는데 아주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에도 항상 호위 사우르스들이 가마를 가져와 그를 소중하게 모시고 이동하곤 했다.
그리고 리자드맨의 번식을 관장하기도 했는데 암수가 없는 리자드맨은 슬란이 주술로 사우르스와 스킹크의 알을 만들어 냈다.
그가 만들어낸 알은 노동자 계급인 스킹크가 적절한 온도로 잘 관리해 부화 시켰으며 태어날 때부터 사우르스인지 스킹크인지 정해서 만들어 졌기에 조금의 정체성 혼란도 없이 적재적소에 투입되었다.
결국 악슬로틀 부족이 유지 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두머리 슬란의 역할이 컸고, 만약 전쟁이나 다른 여러 이유로 슬란이 죽게 되면 리자드맨의 군락은 해체되고 그들은 완전히 원시적인 몬스터가 되어 배회하며 살아가게 된다.
두번째로 사우르스는 전사 계급이었다.
이들은 군락을 위협하는 모든 존재와의 전투에 앞장섰으며 부족의 핵심인 슬란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움직였으며 팔다리가 잘려도 끝까지 적을 향해 돌진하는 지독한 병기였다.
정신적인 강인함 외에도 그들의 단단한 비늘과 날카로운 발톱은 뛰어난 병장기 못지 않았고 튼튼한 꼬리는 후방에서 찾아 드는 위협을 방어했다.
거기다 스킹크가 생산한 흑요석 전쟁 무기까지 들고 있었기에 검은숲 북동부를 완전히 장악할 무력으로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스킹크는 악슬로틀 사회 전방위에 배치되는 일꾼이었다.
그들은 노동자로 각종 건설을 담당하기도 하고, 양육자로 알을 부화시키기도 하며, 해안가 양식장을 관리하여 식량을 생산하기도 했다.
악슬로틀 부족은 단 1마리의 슬란과 5백마리의 사우르스 5천마리의 스킹크로 이뤄진 군락이었다.
"으음?"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에 세워진 높은 탑
그 꼭대기 전망대에서 명상을 하고 있던 악슬로틀 부족의 슬란 이즐리트가 평소와 다른 마력의 흐름에 눈을 떴다.
-가마
이즐리트의 텔레파시를 받은 호위 사우르스들이 화려한 금장식이 돋보이는 가마를 가져와 공손하게 그를 태웠다.
-바다가 보이게 바짝 앞으로
명령을 받은 사우르스들은 가마를 끌고 전망대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가장자리에 서니 먼 바다는 물론이고 초록 비늘 해안이 한 눈에 다 보였다.
"저건...?"
마력이 요동치는 곳을 찾은 이즐리트는 홀홀단신의 인간 한명이 유유히 하늘에 떠 악슬로틀 부족을 살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부족의 양식장과 거주지 위를 날아다니며 관찰하다가 이내 신성한 신전과 부화장이 있는 부족 중심부까지 날아왔다.
"건방진!"
보아하니 호기심 많은 인간 마법사인 것 같았는데 그의 경우 없는 태도는 이즐리트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건방진 마법사를 사로 잡아 고문하며 죽일 생각으로 적당한 주술을 고르고 있던 이즐리트의 머리 속에 두려움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그 인가?'
40년 전 검은숲에 나타났던 강력한 인간마법사.
자신의 정신 조종 주술을 순식간에 파훼하고 오히려 역으로 정신지배를 걸어 자신의 기억속에서 에르트라스 둥지의 위치를 찾던 그자...
수백년의 세월을 살아온 이즐리트에게 거의 유일한 패배의 기억이자 두려움 그 자체였던, 그래서 일부러 기억 깊은 곳에 넣어두고 꺼내지 않았던 그 조각이 부족을 유유히 돌아보는 인간마법사를 보자 되살아났다.
"그 일리가 없다. 그는 이미 에르트라스님에게 소멸 당했다..."
이즐리트는 초록 비늘 해안의 주인이긴 했지만, 검은숲의 진정한 지배자인 드래곤 에르트라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가 공물을 바치고 안전을 보장 받는 의식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인간마법사가 에르트라스를 찾았던 그 해, 공물을 바치러 그의 둥지로 갔을 때 그를 맞이하는 것은 에르트라스가 아닌 그의 가디언이었다.
"에르트라스님께서는 침입자를 소멸 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부상을 회복 중에 있으시다. 공물은 여기에 두고 가거라. 자네의 마음은 주인님께 잘 전달 될 것이다"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이즐리트는 가디언의 지시에 따라 공물을 두고 부족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40년 동안 한번도 에르트라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언제나 둥지 입구에서 가디언이 공물을 대신 받았고 이즐리트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혹시.... 에르트라스님이..... 그 인간마법사에게 당했다면..?"
이즐리트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고 이제껏 이상하다 여긴 사건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을 때, 부족을 유유히 돌아보던 그 인간마법사가 전망대 앞에 떠올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르르르!"
호위 사우르스가 울부짖으며 오만한 눈빛의 인간을 향해 창을 내던졌다.
-팅!
그러나 그 창은 로빈의 풍벽을 뚫지 못하고 힘없이 튕겨져 나갔다.
"딱 봐도 네가 우두머리구나!"
드디어 찾았다는 반가움에 로빈이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본 이즐리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가 아니다!"
눈 앞의 로빈은 40년 전의 그 인간마법사가 아니었다.
둘의 생김새는 전혀 달랐기에 이즐리트는 두려움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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