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소영주 (1)
"200줄 차지!"
"완료!"
"샷!"
-파팍
의사의 두 손에 들린 제세동기에서 쏟아지는 전류가 온몸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내의 심장에 충격 되었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멈춰있었다.
"반응 없습니다!"
"250줄 차지!!"
"완료!"
"모두 물러서! 샷!"
이후에도 의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쓰러진 사내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 했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신체는 미동도 없었다.
쓰러진 사내는 38세의 한영호
빚을 갚기 위해 공사현장에서 일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자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오늘 오후.
그가 일하던 빌딩 건설 현장이 무너져 내렸다. 콘크리트가 다 굳기도 전에 계속 시공을 이어가는 강행군 때문이었다.
17층에서 작업 중이던 그는 무너지는 건물을 따라 5층까지 추락했고, 온몸이 부서지고 두개골이 골절 되며 안구가 터져나갔다.
그리고 힘겹게 뛰고 있던 그의 심장 또한 멈춰 버렸고 급히 이송 된 병원에서도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의사의 사망 진단이 내려졌고 한영호는 38세를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했다.
* * *
"여긴 어디지?"
정신이 들고 눈을 떠 보니 온통 새하얀 비현실적인 세상이 보였다.
분명 현장에서 무너져 내리는 건물과 함께 추락했던 것 까지 기억이 났는데 눈을 떠보니 이런 알 수 없는 곳에 서 있었다.
"죽..죽었구나...."
삶을 주마등으로 접할 정도로 한참을 추락했었다.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사후세계 일 것이고 천국인지, 지옥인지 그것이 문제였다.
"나름... 선하게 살았으니... 지옥은 가지 않겠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는 삶은 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타인을 돕거나 선행을 베푸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 내 삶은 그저 생존에 급급한 삶이었다.
초등학생이던 어느날, 대한민국에 불어 닥친 IMF 때문에 사업에 실패한 부모님이 일가족 동반 자살을 하기 위해 자동차를 몰아 강물에 빠졌을 때 나는 홀로 구조되었었다.
이후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리고 고등학생 이던 날 할머니가 췌장암에 걸리셨고 고등학생이던 내가 지불할 수 없는 큰 금액의 치료비를 내지 못했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제법 공부를 잘하긴 했지만, 서울 소재의 국립대를 갈 정도는 아니었던 나는 대입을 포기하고 숙식이 제공되는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사립대학교 중에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곳들도 있었지만, 대학을 다니다 군대도 가야 했고 공부에 매진할 정신상태도 아니었기에 그냥 일을 하러 갔다.
그렇게 이공장 저공장을 떠돌며 7년을 일해서 모은 3억으로 전세집을 구해 공장 기숙사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게 흘러갈 일이 없었다. 나는 전세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내가 계약한 집주인은 중개사와 짜고 집주인 행세를 한 가짜 집주인이었다.
진짜 집주인이 나타났고 나는 어찌 손 써볼 방법도 없이 집에서 쫓겨났으며 평생 모았던 3억원도 증발했다.
더 살고 싶지 않았고, 자살을 하려 하던 그 즈음에 나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예쁘지는 않았지만 마음씨가 착했던 그녀의 위로를 받으며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살아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내 삶에 그녀는 단 하나의 위안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기자기 한 삶은 2년이 채 되지 않던 날 끝났다.
내 소중한 여자친구는 대낮부터 음주를 한 미친 운전자가 인도로 들이닥친 사고로 인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녀는 가족이나 친척이 없었고 나와 같은 외톨이 신세였기에 손님 없이 텅 빈 빈소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 나 홀로 꿋꿋이 지켜야 했다.
이후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던 나였다.
"죽었으니... 이제 내 삶에서 해방인건가?"
삶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아직 젊은 나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이만큼 살았으면 충분했다 싶었다.
-또각 또각
온통 하얀색이던 공간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 존재는 무릎까지 오는 정장 치마와 단정한 차림을 한 여성이었다. 전형적인 사무직 여성의 옷차림이었는데 풍기는 분위기는 대기업 비서들 같은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한영호씨"
"예... 안녕...하세요"
"저는 환생과 윤회를 담당하는 존재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다름 아니라 한영호씨의 이번 삶이 우리 측의 착오가 있었습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그녀의 설명은 이러했다. 세상은 환생과 윤회가 일어나며 영혼들은 다양한 세계를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각 삶에서 획득한 업보(카르마)에 의해 다음 삶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했다.
"그러니까 제가... 원래 이것보다 나은 삶을 살았어야 했던 운명이라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저희 측의 실수로 한영호씨가 악업을 쌓은 자들이 가지게 될 운명을 받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럼... 다음 생에는 이번 생 보다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나요?"
"그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저희가 잘못한 것도 있고 해서 한영호씨에게 한가지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원래 한영호씨가 살았어야 할 삶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미 그 삶을 살고 있는 영혼은 저희가 회수할 생각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몸에 제 영혼이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다 가지고 말입니다. 아... 걱정 마십시오. 당신이 들어가게 될 그 신체는 아직 청소년의 어린 신체입니다. 생을 즐길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그 삶은 어떤 삶인지....."
"지구와는 달리 검과 마법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곳이지요 한영호씨는 그곳의 귀족가의 아들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귀..귀족이요?"
"예. 큰영지를 가진 영주의 아들입니다. 영지민들의 복종을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이지요"
나는 시뮬레이션 게임도 좋아하고 장르소설도 즐겼기에 그녀가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삶도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영호씨에게 두 가지 선물을 드릴 생각입니다"
영주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뭐가 어렵겠냐 하다가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소영주끼리의 권력 투쟁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영지와의 갈등 국왕과의 갈등 같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 있을 수 있는 애로사항이 분명 존재할 것이었다.
"첫번째는 무한에 가까운 마력입니다. 한영호씨가 살게 될 세상은 마법의 힘이 존재하는 세상이지요. 넘치는 마력을 소유하게 될 한영호씨는 마법으로 세상을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두번째는 삶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과 능력을 구입할 수 있는 이계상점입니다. 물론 무료로 구입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영호씨도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여 재화를 획득해야 합니다만 이 상점으로 인해 이계의 삶이 훨씬 편해질 것이라는 것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과 이계상점. 그 두가지가 내가 새로운 세상에서 받게 될 보상이었다. 사실 아무것도 주지 않는 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에 뭐라도 준다고 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거듭 감사함을 느낄 뿐이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새 삶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행복한 삶 되시길 바랍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아드리아 로빈
내가 새롭게 얻게 된 이름이었다. 거대한 서부 대륙의 중남단에 위치한 라마르 왕국에서 국경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아드리아 가문의 외동아들이었다.
문제는 내가 영주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곳 아드리아 영지의 영주인 파르벨은 첫번째 부인 사이에서 자식을 두지 못했고 심지어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후에 들인 둘째 부인에게서는 다행이도 아들을 얻었는데 그것이 로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성장하는 로빈의 외모가 아버지인 파르벨과 전혀 달라 성내의 많은 사람들이 수근거리게 만들었다.
어느날 둘째 부인이 결혼 하고도 몰래 만나왔던 몰락한 남작가의 남자와 외도하는 장면을 파르벨에게 들키게 되고 남작은 파르벨의 검에 목이 달아났다.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가 파르벨의 검에 죽어버리자 그녀는 파르벨을 저주하며 로빈이 파르벨의 아들이 아니라 남작의 아들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공표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로빈은 둘째 부인의 불륜의 증거로서 남아있었고 그를 보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드리아 영지의 모든 사람들은 파르벨이 로빈도 죽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빈을 소영주로 인정하겠다"
오히려 파르벨은 로빈을 소영주로 인정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지정했다. 이에 아드리아 영지의 각료들이 반대했지만, 아드리아에서 파르벨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라마르왕국의 유일한 소드마스터였고 영지의 모든 기사들은 그의 명령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기에 불륜으로 생긴 아이라 할지라도 파르벨이 소영주라면 소영주인 것이었다.
하지만 소영주가 되어도 영지의 각료들 뿐만 아니라 많은 기사들 그리고 영지민들 까지 그 누구도 로빈을 진정한 후계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영주가 새로운 부인을 맞이 해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망나니로 살 수는 없지."
방에서 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 나에게 앙헬이 물었다. 그는 내 전담 집사였는데 나를 어떻게든 구슬려 놀고 먹는데에 관심이 많은 자였다.
내가 몸을 받기 전에 로빈은 항상 그와 어울려 유흥가를 돌고 여자를 만나고 도박을 하는 것을 즐기는 자였다. 안그래도 근본없는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는데 방탕한 행동으로 그 수위를 더 높여왔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의 특징이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무관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자란 로빈이 그런 삐딱선을 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앙헬은 내가 로빈의 몸을 차지한 이후 예전 처럼 놀지 않고 책을 보거나, 운동을 하는 것에 신기해 하면서도 한편으론 불만을 가지고 있는 눈치였다.
"소영주님 보시는 책이 무엇입니까?"
"몰라도 된다."
"에이 왜 그러십니까? 요즘 좀 서운합니다. 소영주님과 저 사이에 점점 비밀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요"
"서운해도 어쩔수 없다. 오늘도 유흥가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니 얼른 나가서 네 일 봐라"
"예.... 소영주님.. 그래도 필요한 일 생기시면 불러주십시오"
"그래"
기운이 잔뜩 빠진 앙헬은 내 방에서 나갔다.
기초 마법의 이해
내가 지금 정독하고 있는 책의 이름이었다. 이 책은 이계상점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이계상점은 어디서든 내가 원하면 소환할 수 있었다.
이계상점을 처음 열었던 것은 이곳에 소환되고 나서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어리버리 일주일을 적응하는데 흘려 보내고 나서야 상점의 존재를 떠올렸던 것이다.
거래 레벨 1
기초 마법의 이해 [1포인트]
기초 화염 마법 [2포인트]
기본 냉기 마법 [2포인트]
상점은 반투명한 상태창으로 나타나며 여러가지 물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나는 소영주 방에 있는 보석과 귀중품을 선택해 판매 탭을 눌렀고 그 즉시 2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다.
꽤나 비싸 보이는 물품을 팔았지만 2포인트 밖에 얻지 못했기에 앞으로 거래 규모를 키워 거래 레벨을 올리려면 정말 고가의 물건을 많이 팔아야 할 것 같았다. 물론 판매하는 물품에는 제한이 없었다.
'거래 레벨이 오르면 더 많은 물품을 볼 수 있겠지?'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물품 목록은 포인트가 적은 물품들 뿐이었다. 그건 아마 거래레벨이 낮아서 그런 것 같았다.
'마력의 변환... 운용...'
나는 상점 창을 닫고 시선을 내려 기본 마법의 이해를 정독했다. 책은 마법사로서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이론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새 삶을 얻으면서 생긴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있기에 내가 마법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어느새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우 얻은 귀족으로의 삶은 생각보다 매우 위태로웠다.
영주 파르벨의 마음이 변하거나, 그에게 새로운 아들이 생기면 내 삶은 언제든지 비참하게 바뀔 수 있었다.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게 스스로 자립할 힘을 키워 놔야지...'
-우우웅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내가 가진 무한한 마력의 크기와 힘을 느꼈다. 바다와 같이 거대하고 웅장한 흐름이 내 몸을 감싸고 있음이 느껴졌다.
"빛나는 구"
마법중 가장 기초적인 1서클 마법인 빛나는 구를 시전했다. 기본 마법의 이해 책 속에 포함되어 있는 연습용 마법이었는데 꾸준히 연습하고 있었다.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눈이 부시게 밝은 구체가 생성되어 떠올랐다. 정확하게 내가 의도하고 계산한 만큼의 밝기과 크기였다.
"대성공이다"
비록 1서클 마법이긴 했지만 정확한 계산과 마력 조절에 성공했기에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벌컥
"소영주님!"
"무슨 일이냐?"
"으이이힉! 이게 뭡니까요?"
갑자기 내 방에 들어온 앙헬이 빛나는 구를 보고 놀랐다. 그에게 아직 마법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빛나는 구다"
"서...설마 마법입니까?"
"그래"
"소영주님.... 남몰래 마법을 연마하시는... 그럼 아까 보시던 책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용건을 말해. 왜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왔느냐?"
"아... 죄송합니다. 워낙 큰일이라서...."
"무엇이냐?"
"발렘왕국이 침공했다 합니다! 때문에 국왕 전하께서 영주님을 소환하셨구요!"
".......!!"
로빈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패막 영주 파르벨이 전쟁터로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Comment '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