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전하가 주신 권력 (2)
"낄낄낄 재무관님 오늘 영주놈 몰골 보셨습니까?"
"봤네. 뒷머리가 불에 타 거의 대머리나 다를 바가 없어졌더군"
"하하 화상을 입어. 펄쩍 뛰고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페테부크 내성 밖 관리들이 아지트로 사용하는 주점에서 에오르친 일당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주 로빈을 골탕 먹이고 있는 이야기를 하며 다들 즐겁게 떠들고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는 내성 복도에서 야간에 사용하는 횟불을 떨어트려 랜달의 어깨에 불이 붙게 만들었었다.
몸에 불이 붙자 랜달은 바닥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고, 하녀들은 그를 도와 주는 척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누구 하나 물을 길어 오거나 모래를 뿌려주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랜달의 머리카락이 대부분 타버렸고 어깨와 뒷목에 심각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수위가 너무 쌔.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아니 그놈이 하는 짓을 보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말입니다"
"아직도 페테부크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나?"
"말도 마십시오. 외성 보수 업체를 불러들이지 않나, 탐광꾼들을 불러 입찰 과정을 조사하질 않나... 심지어 하녀들을 모아 불온한 세력에 매수 된 사람이 있는지 조사하기까지 했답니다"
"허허... 아드리아 놈들 겁쟁이 인줄 알았더니..."
"그러니까 말입니다. 보통 놈이 아닙니다. 분명 연이어 일어나는 사고가 우리의 소행이라는 것을 충분히 눈치 챘을 텐데 말입니다"
에오르친은 관리들의 행동의 수위가 강해지는 것을 말리고 싶었지만, 자신들의 비리를 끊임없이 추적하는 랜달의 움직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겁을 먹고 이쯤에서 쓸데없는 행동을 접으면, 그도 좋고 우리도 좋고 모두가 좋을 텐데 젊은 영주 놈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조금 있다가 영주 집무실에 가야한다"
"또 호출입니까?"
"그래. 이번엔 세금 추징 기록과 최근 페테부크의 재판 결과를 가져오라 하더군"
"썅놈이! 뭘 그리 많이 시키는 겁니까?"
"내말이... 어차피 세금 기록은 다 가짜 장부고... 재판관 놈들도 군정이 끝난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는데"
에오르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다 문뜩 젊은 영주 랜달이 아드리아 대학에서 공부만 하다 부임해 사회경험이 없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혹시.... 모르는 거 아니야?"
"예? 뭐를 말씀이십니까?"
"본인에게 일어난 일들의 이유를 말이야. 영주놈이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냐 이말일세"
"아이고...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는 않던데 말입니다. 그래도 놈이 계산도 매우 빠르고 말도 조리 있게 하는 걸로 봐선 그건 아닐 겁니다"
"아니야... 정말 모를 수도 있어. 우리가 하는 이런 범법 행위에 대해서 대학에서 배웠을 리가 있겠나? 텃세라는 것이 뭔지 아예 모를 수도 있단 말이야."
"그렇다고 하면....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페테부크를 들쑤시는 것이 설명 되긴 하는군요"
"그렇지? 아니 자신을 죽이겠다고 돌 떨어트리고, 불지르는데 겁 먹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그놈은 정말 모르는 거야"
에오르친은 대화를 거듭하면서 확신이 들었다.
젊은 영주 놈은 모르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아니면 이런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영지를 조사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귀족도 아니고 기사도 아닌 평민 출신의 놈에게 휙 던져줄 정도로 아드리아는 발렘에 신경을 끈게 분명했기에 놈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 굴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가서 넌지시 알려줘야겠다"
"뭐를 말입니까?"
"더 까불면 더 당한다고 말이다"
"어어..?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거 자백하는 거나 다름 없습니다"
"지가 알면 어쩔 건데? 중앙 정부와 끈이 있는 놈이라면 벌써 누가 내려와도 내려와서 우릴 조사했을 것이야. 하지만 놈이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났어. 그 사이 목숨을 잃을 뻔한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고.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하긴. 확실히 뒷배가 없는 놈인 것 같긴 합니다"
"그래. 내가 잘 말해서 타이르고 오겠다. 놈이 마음을 고쳐 먹고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우리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 아니냐?"
"맞습니다. 적당한 허수아비 하나 영주로 앉혀두는 것이 우리에겐 딱 이지요"
결심을 굳힌 에오르친은 아직 술이 남아있는 술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주점에서 나왔다.
그리고 대충 구색만 갖춘 결재 서류를 챙겨 랜달이 기다리고 있는 내성 영주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얼굴 이곳 저곳이 멍들어 있고, 머리카락은 불에 타 다 날아갔으며 목에 흉측해 보이는 화상 자국이 있는 랜달이 보였다.
'지독한 새끼...'
이 정도 했으면 겁이 나서 제발로 도망갈 법도 했지만, 랜달은 굳건했다.
그는 오늘도 열심히 서류를 보며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고 들어온 사람이 에오르친인 것을 확인하자 작성하던 서류 몇 가지를 서랍 속에 밀어 넣었다.
"재무관님 오셨습니까?"
"예 영주님. 말씀하신 자료들 가지고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주십시오"
랜달은 절뚝 거리며 일어섰다.
의자가 부러져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골반을 크게 다쳐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다.
에오르친은 공손히 두손으로 서류를 건넸는데 서류를 받는 랜달의 팔이 덜덜 떨렸다.
'다리는 의자 때문에 그랬고... 이 놈 팔은 또 왜 이래?'
부실한 의자를 줘 넘어지게 하는 계획은 에오르친도 알고 있었기에 다리를 절뚝 거리는 것은 그러려니 했지만, 서류를 제대로 받지도 못할 정도로 떨리는 팔은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팔이 심하게 떨리시는데... 괜찮으십니까?"
"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삼일 전부터 몸 오른쪽에 전체적으로 경련이 오고 있습니다."
"아... 예..."
이제보니 랜달의 오른쪽 얼굴의 근육이 경련하고 있었다.
입술이 들썩 거리며 과로로 인해 헐어버린 잇몸이 살짝 보였고, 눈 뜨는 것도 불편한지 반쯤 감긴 눈에선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랜달의 몸 오른쪽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척추를 다쳤기 때문이었다.
중추신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였고, 지금 이세계의 의학으론 치료하기 어려웠다.
'이거.... 완전 산송장인데..'
총제적 난국인 랜달의 몸상태를 보자 에오르친은 한편으로 안쓰럽다는 마음도 약간 들었다.
"영주님..."
"예 재무관님"
"그.... 페테부크에 오신 뒤에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시는 것 같습니다"
"아... 제가 다치는 것 말씀이십니까?"
"예... 영주님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으십니다. 해서 말씀인데... 발렘의 격언에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이군요"
"영주님 열심히 일하시는 것도 좋지만, 건강을 위해 잠시 쉬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영지의 일은 제가 전담해 처리하겠습니다"
"하하 마음만 받겠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저를 믿고 여기에 보내 주셨는데 건강이 좀 나빠졌다고 해서 쉴 수야 없지요"
"으음... 영주님 이건 정말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에오르친은 조금 고민하는 척 하며 말을 흐렸다.
그러자 랜달은 괜찮으니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물론 흉측한 몰골인 랜달이 웃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다.
"페테부크에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오오 구전 되어 온 전설 같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 미신은 발렘인을 지켜주는 유령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오래 걸립니까?"
"삼분이면 충분합니다"
"말씀하시지요"
에오르친은 페테부크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발렘인들이 사는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와 그들을 괴롭히자 페테부크의 유령이 나타나 외부인들을 벌하고 그들을 마을에서 쫓아 냈다는 이야기였다.
"하하 재무관님. 저는 맹세코 발렘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니 그 유령에게 말 좀 잘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제가 유령과 어찌 소통하겠습니까? 단지 영주님께 일어나는 여러 사고들을 보니 그 이야기가 거짓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씀 드립니다"
"저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유령이 한 짓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럴리야 있겠냐만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달 정도 휴식 하시면서 계속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나는지 아닌지 확인해 본다면...."
"재무관님"
"예 영주님"
"유령이 절 죽인다 하더라도 죽기 직전 그 순간까지 저는 제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왜 인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국왕 전하가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사람입니다. 제 아버지는 오크의 노예 였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아버지를 해방시켜 줬고, 그로 인해 저 역시 인간으로서 새 삶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요. 전하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지금 오크들의 밭을 갈며 영혼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겁니다. 그건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그렇군요.."
"제가 임무를 수행하다 그 유령에게 죽는다면, 전하께 도움이 되다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아......"
죽음도 영광이라는 말을 하는 랜달의 모습에서 에오르친은 마치 종교에 미쳐버린 광신도를 보는 것 같았다.
'이놈에게는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
죽음도 영광이라는 자다. 고통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아드리아 국왕에 대한 무서울 정도로 강한 충성심이 마치 신앙심처럼 랜들을 단단히 무장시키고 있었다.
"재무관님"
"예 영주님"
"그런데 혹시 그 유령 말입니다"
"아...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드린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에오르친은 겁을 먹지도 않을 랜달에게 더 이상 유령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이 놈을 다뤄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항상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대화를 하는 랜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매섭게 변하며 재무관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재무관님 아닙니까? 페테부크의 유령."
"예? 무슨...?"
"하하하 농담입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아니 영주님 아무리 그래도... 그런 농담을..."
"하하 죄송합니다. 이게 아드리아식 농담이 발렘에는 잘 통하지 않네요. 더 보고할 것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시지요"
"예. 영주님"
그만 돌아가라는 말에 에오르친은 얼른 몸을 돌렸다.
그도 더 이상 집무실에 있고 싶지 않았다.
'뭐야... 영주놈... 소름끼치게....'
농담이라면서 자신에게 유령이 아니냐고 묻는 랜달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에오르친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그 순간 만큼은 랜달이 새파란 젊은 영주가 아니라 권력 싸움에 닳고 닳은 고위 귀족 같은 느낌이 들었다.
"씨발.. 괜히 기분만 잡쳤네"
쓸데없는 짓을 했다 싶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처럼 영주가 죽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괴롭히고 가짜 서류를 내밀며 시간을 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에 에오르친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전하 찾으셨습니까?"
몰디아 로빈의 집무실.
호출을 받은 해리엇이 방문했다.
"우리 감찰단장님. 출장을 좀 가셔야 될 것 같아"
"예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이거 한번 봐봐"
로빈은 해리엇을 가까이 불러 자신이 보고 있던 보고서를 건넸다.
[페테부크 보고서]
그 보고서는 랜달이 올리고 실비아가 검토한 페테부크 보고서였다.
실비아는 로빈이 빠르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보고서 내용을 요약 했고 덕분에 해리엇도 금방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보고서를 다 읽은 해리엇은 랜달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그렇지? 그래서 나도 같이 가보려고. 이참에 발렘의 다른 영지들도 쭉 돌아보자고"
"예 알겠습니다 전하"
로빈의 집무실에 검은색 구체가 생겨났다.
구체는 점점 커지더니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정도로 커졌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검은색이 숲이 무성한 산 속의 모습으로 변했다.
페테부크 인근 야산으로 이어지는 게이트였다.
에르트라스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의 마법 대부분을 전수 받은 로빈은 이제 공간의 제약을 넘어 다닐 수 있었다.
무뢰한 에오르친 일당들에게 아드리아의 질서를 보여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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