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군도 (4)
"카시드님 바스케츠가 확실히 마음을 먹은 것 같습니다"
나사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저택의 주인 카시드는 높은 층고의 화려한 거실에서 푹신한 소파에 드러 누운채로 핫산의 보고를 받았다.
그는 2m에 이르는 거구의 근육질 몸이 팽팽하게 당겨진 느낌이었고, 짙은 갈색 피부와 짧게 자른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흐흐 귀찮게 구는 군"
"명령만 하시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대기 시켜 두었습니다"
"바스케츠는 그렇다 치고, 오슬릿 놈들은?"
"우리의 내전 낌새를 눈치채고 관망하는 자세로 변한 것 같습니다"
"온통 성가시게 구는 놈들 뿐이군"
카시드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시드 세력은 바스케츠뿐만 아니라 첩자를 보내 섬에서 첩보 활동을 하는 오슬릿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바스케츠가 훌리오를 납치 했다고?"
"훌리오가 실종되었는데 그를 납치 할 만한 사람은 바스케츠뿐입니다. 그리고 재봉사 멘데스도 함께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쪽 기술자들을 몰래 빼돌리려는 심산이군"
"그렇습니다. 조금씩 우리의 전력을 깎아 먹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울 생각인 게 확실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시드는 천천히 걸어 거실 한복판에 있는, 화려하게 장식된 무기 걸이로 향했다. 그 곳에는 카시드의 애병인 곡도가 걸려있었다.
보통 사람은 들지도 못할 거대한 크기의 곡도를 집어든 카시드는 뒤를 돌며 곡도의 날을 살폈다.
"바스케츠에게 내 힘을 보인지도 오래 되었지"
나사우가 카시드의 것으로 완전히 인정 받은 이후 카시드는 자신의 힘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어지간한 일은 부하들이 모두 알아서 처리했고, 다른 해적단은 카시드의 무력 때문에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카시드의 대단한 무력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 해질 수 있는 것과 동시에 바스케츠 입장에서는 평생 2인자로만 살다 죽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겹쳤다.
"직접 출정 하십니까?"
"그래. 불필요한 희생을 줄여야지"
카시드의 말에 핫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항상 수련에만 매진하고 섬의 일에는 관심을 끊고 있던 카시드의 진정한 무력이 오랜만에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혹시 벽을... 넘으셨습니까?"
핫산은 조심스레 카시드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카시드는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벽은 아직도 내 앞에 굳건하다"
"아.... 죄송합니다"
카시드는 군도를 장악한 이후, 자신의 경지를 한 단계 뛰어 넘기 위한 목적으로 수련에만 매진했다. 그는 끊임없이 강해지고 싶은 사람이었고 해적들의 왕이 된 것은 자연적으로 따라온 부상 같은 것이었다.
곧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눈앞의 벽을 쫓으며 십 년이란 세월을 달렸지만, 그 노력이 새로운 단계로 올려놓진 못했다.
"아니야. 세월을 갈아 넣었음에도 제자리 걸음인 내가 문제지. 놈들에게 가자. 안내해라 하도 오랜만이라 길이 가물가물하군"
"예! 두목님."
핫산의 안내에 따라 카시드가 자신의 저택을 나섰다.
당당한 그의 걸음걸이에 강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 * *
"이번 달 지출은 감당이 안되는 수준이에요"
"거 참 말이 많네. 지출이 많은 만큼 네년이 돈을 더 벌면 되는 거 아니야?"
바스케츠 해적단의 본거지.
젊은 나이에 바스케츠 해적의 재정적 실무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실비아는 해적단의 재무제표를 들고 바스케츠 전체 서열 5위이자 돈 관리를 책임지는 데츠에게 따졌다.
"서대륙 해안 영지들이 약탈에 본격적으로 대비하기 시작하면서 그쪽 수입이 줄어들었고, 쿠샨 제국의 경비 인력 강화 때문에 밀무역으로 인한 수입도 줄어들고 있어요. 지금 당장 그 손실을 메꿀만한 돈벌이를 찾기는 어려워요"
"기다려봐... 조만간 큰 건 하나 올 수 있으니"
데츠는 말을 하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바스케츠 해적단의 수뇌부였기에 거사가 머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십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카시드는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했고, 그가 없다면 더 이상 바스케츠 해적단이 눈치를 보며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큰 건이요?"
"그래. 아마 군도의 모든 수입을 우리가 독점하게 되겠지 흐흐흐"
"독점이라면... 카시드 해적단이 있는데 우리가... 설마?"
"쉿... 아직 거사 전이니 입단속 잘 하라고"
"소문으로 들은 거긴 하지만... 카시드의 힘은 모든 해적들이 덤벼도 상대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
"흥! 그것도 벌써 10년 전 이야기야"
"하긴 저는 그의 모습도 본 적이 없어요"
실비아의 나이는 고작 18세였다.
그녀의 원래 고향은 로빈의 영지 아드리아였다. 그녀는 아드리아의 해안 마을에서 살고 있다가 일가족과 함께 납치되어 해적 군도로 오게 되었다.
그녀의 두 부모 중 아버지는 약탈하러 온 해적에게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는 나사우에서 허드렛일을 하다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하며 나사우에서 살아 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담당하게 된 계산 업무를 시작으로 돈 관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능력만 있다면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해적들 사이에서 인정 받아 바스케츠 해적단의 회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덜컥!
실비아와 데츠가 이야기를 나누는 곳의 창문이 갑작스럽게 열렸다.
"뭐...뭐냐!"
데츠는 깜짝 놀라 칼을 집어 들고 창문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는 여유롭게 하늘에 떠있는 로빈이 있었다.
로빈은 데츠의 반응은 아랑곳 하지 않고 유유히 창문을 넘어와 둘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어디보자..... 으음? 너가 실비아냐?"
로빈은 품속에서 실비아의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를 살피다가 그녀를 보고 물었다. 물론 군주의눈을 시전하면 단숨에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있지만, 오늘은 왠지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뒷골목에서 입수한 초상화로 그녀를 찾고 싶었다.
"그...그런데요.."
"돈을 벌자마자 줄줄 흘려 세력을 키우지 못했던 바스케츠 해적단을 몇 년만에 튼튼한 재무 구조로 탈바꿈 시킨 젊은 회계사 실비아 맞지?"
"아.... 제 이야기 이긴 한 것 같은데..."
실비아의 소문은 이미 나사우에 파다했고 로빈은 그 소문을 따라 그녀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
아드리아에 재무관이 있긴 했지만, 앞으로 더 성장할 영지에 재무관으로는 부족했다. 영지의 돈관리를 담당하고 수익 사업을 관리할 인재가 필요했다.
"나와 함께 가야겠다. 영지에 가서 일을 좀 해줘야겠어"
"영지요?"
"뭔 개소리를 늘어 놓는 거냐!"
-카앙
마치 자신이 없는 것처럼 실비아와 대화를 주고 받는 로빈의 모습에 데츠는 화가나 칼을 휘둘렀다.
그의 칼이 로빈의 심장을 단숨에 쪼개 버릴 듯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풍벽을 넘어서지 못했고 로빈은 그를 힐끔 쳐다 본 다음 바로 마비 마법을 시전했다.
-쿠웅
마비 마법에 걸리자마자 데츠는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고 눈만 껌뻑거리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머리를 굴렸다.
'마..마법사인가...?'
잠깐 흥분해서 판단이 흐려지긴 했지만, 하늘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모습을 떠올려 봤을 때 그는 마법사였다.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방어하고, 흔히 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긴 주문을 외우지 않는 모습을 고려하면 그는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당신... 마법사 인가요?"
"맞아"
온몸이 마비 되어 한마디도 못하는 데츠를 대신해 실비아가 질문했다.
"마법사는 정말 귀한 분들이신데... 재주가 없는 저를 왜 데려가시는지..."
이름 : 실비아
직업 : 바스케츠 해적단 회계사
능력 : S급 상인, A급 회계사, A급 관료
상재 : 2543
회계 : 921
정치력 : 964
충성도 : -27 (미등용)
잠재력 : 전설적
재주가 없다는 그녀에게 로빈은 군주의눈을 시전했다.
'S급 이잖아!'
그녀의 상인으로서 능력은 S급이었다. 로빈이 군주의 눈으로 S급을 확인한 건 S급 기사였던 아드리아 파르벨 이후 처음이었다.
'그녀의 상인으로서 능력이 기사로서 파르벨 정도 된다는 소리지'
파르벨은 왕국 최고의 기사였고, 비록 결과적으로 양패구상이긴 했지만 다른 왕국의 최고 기사와의 대결에서도 승리했던 강한 기사였다.
그의 무력과 비교될 정도의 상인으로서 능력이라면 돈 버는 것에 매우 뛰어날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잠재력은 안술러프처럼 전설적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그녀의 능력이 더 상승할 수 도 있음을 의미했다.
"재주가 넘치지. 너는 꼭 우리 영지에 가야겠다. 곱게 따라갈래 아니면 저 놈처럼 된 다음에 끌려갈래?"
로빈은 데츠를 손으로 가리키며 실비아에게 말했다.
실비아는 눈만 껌뻑 거리고 있는 데츠를 한번 본 뒤, 로빈에게 말했다.
"곱게 따라갈게요. 그런데 제가 떠나갔다는 것을 알면 바스케츠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녀는 바스케츠 해적단에서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능력은 뛰어났지만, 무력이 없었기에 사실상 해적단의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때문에 상당한 공로가 있음에도 금전적 보상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고 휴식도 보장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실비아가 바스케츠를 떠날 수 없는 것은 그의 보복이 두려워서였다.
사방이 바다인 나사우에서 그에게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 친다고 해도 결국 배를 타고 도주해야 하는데 바다 위에서 해적을 따돌린 순 없었다.
유일하게 벗아날 수 있는 방법은 더 큰 세력인 카시드 해적단에 귀의 하는 것인데, 아쉽게도 카시드는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그때, 엄청난 굉음이 들리자 실비아는 깜짝 놀라 창 밖의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갈색 피부에 상의을 입지 않은 근육질 상체가 도드라진 거대한 사내 카시드가 서 있었다.
굉음은 카시드가 바스케츠 해적단 본부 건물 정문을 박살 내는 소리였다. 그의 손짓 한방에 거대한 정문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수많은 해적들이 무기를 가지고 바스케츠 해적단 본부를 포위하고 있었다.
"바스케츠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아아...."
실비아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혼란스러웠지만 더 이상 로빈의 제안에 시간을 끌었다가는 데츠처럼 온몸이 마비될 것 같았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로빈은 그녀를 공중에 띄웠고 열린 창문으로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 * *
"이게 무슨 짓입니까?"
"몰라서 묻나?"
정문을 박살 내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카시드를 바스케츠 해적단은 아무도 막아서지 못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그 어떤 해적단 두목도 뿜어내지 못하는 진정한 강자의 기운이었다.
그런 그 앞에 바스케츠가 나타났다.
나이로는 바스케츠가 더 들어 보였지만, 바스케츠는 카시드에게 경어를 사용했고 카시드는 아랫사람 대하듯 편하게 말했다.
"우리가 맺은 협약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행동할 수 없을 텐데?"
"협약은 네가 먼저 깼지"
카시드가 자신에게 경어를 쓰지 않자 바스케츠도 곧바로 평어로 말했다. 카시드는 그런 것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이런 무례를 저지른 적이 없다."
"네가 직접 저지르진 않았지. 핫산!"
"......!!"
카시드의 부름에 핫산은 잔뜩 고문 당해 온몸이 성한 곳이 없는 한 사내를 끌고 나왔다.
그를 눈으로 확인한 바스케츠를 포함한 해적단의 수뇌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놈의 이름은 말론. 바스케츠 해적단에서 우리에게 잠입 시킨 첩자지. 말론!"
"예...."
카시드의 우렁찬 목소리에 말론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카시드 해적단의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이미 모든 것을 불었고,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바스케츠 해적단의 계획에 대하여 공표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하라"
"예.. 바스케츠 해적단은 오늘로부터 일주일 뒤 새벽, 카시드 해적단을 급습하고 군도의 새로운 왕이..."
"그만!"
바스케츠가 말론의 말을 끊었다.
"원하는 게 뭐냐?"
"네 모든 것"
바스케츠의 물음에 카시드가 대답했다.
그의 눈에 카시드는 10년전에 봤던 그 자신만만한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그때처럼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의 밑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 바스케츠는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네 놈과 한판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스케츠는 등에 메고 있던 자신의 양날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카시드도 자신의 곡도를 꺼내 들며 미소 지었다.
쉽게 쉽게 가기 위해 습격을 통해 거사를 치르려 했지만 이미 물 건너 간 일.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가 답이었다.
"마치 내가 너의 라이벌이라는 듯한 그 말이 참으로 우습구나. 십 년 전 너를 포함한 다른 해적 두목들을 살려준 것은 그저 죽이는 게 귀찮아서였다."
조롱하듯 말하는 카시드를 보며 바스케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에 비해 한참 어린 놈. 어디서 굴러 먹다 온 지 모를 근본도 없는 카시드에 대한 쌓여있던 분노가 터져나왔다.
"십 년의 세월이 얼마나 긴 지 보여주마!"
양날 도끼를 들고 번개 같은 속도로 바스케츠가 카시드에게 뛰어 들었다. 십 년동안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바스케츠의 움직임은 대단했다.
도끼는 거대한 풍압을 만들며 카시드를 옆으로 베어 들어갔다.
카시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곡도를 들어 양날 도끼의 진로 앞에 세웠다.
-까가가가가가가강!
"........!!"
엄청난 기세로 날아갔던 바스케츠의 도끼가 카시드의 곡도를 만나는 순간 마지 두부처럼 잘려 나가며 깔끔하게 반으로 두동강이 나버렸다.
바스케츠는 너무 놀라 다음 동작을 잇지 못하고 몸이 경직되었다.
"죽이는 것이 귀찮기도 했고, 살려 달라고 비는 네놈들 모습이 딱하기도 했고"
말을 마친 카시드가 움직였다.
얼마나 빠른지 그의 움직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새 바스케츠의 머리가 카시드의 우왁스러운 손에 잡혀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봐줄 수 없지"
-빠삿!
카시드의 손에서 바스케츠의 머리가 터졌다.
그의 눈알과 이빨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고 그 비현실적인 장면에 이곳에 모인 모든 해적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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