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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일지도.

메칼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마니
작품등록일 :
2016.01.05 01:02
최근연재일 :
2019.03.13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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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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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여우들의 왕(2)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DUMMY

머리를 잃은 궁사의 몸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죽은 동료 뒤편에서 나타난 습격자를 보고 이안쿠는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상대는 아직 소년이었다. 앳된 구석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에 몸집이 날렵했다.

체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이도 어린데, 소리 없이 접근해서 단숨에 동료 하나를 해치웠다. 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상대가 신자라면 이미 체격이나 나이는 따질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 소년은 자신의 몸에 맞춘, 모양새가 아름다운 칼을 들고 있었다. 예복에나 어울릴 것 같은 클레타 식 검이었지만 저것은 겉보기에만 좋은 물건이 아니다. 만듦새나 검신에 피가 맺혀 흐르는 것만 봐도 이름난 장인이 만든 좋은 무기라는 것을 이안쿠는 알 수 있었다.

두 명의 적을 앞에 두고도 소년은 태연했다. 감정 없는 청록색 눈동자가 이안쿠와 동료를 한차례 훑어보았다. 도우러 온 것이 분명한 츈 지앵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싸울 줄 아는 자가 아닌가.’

이안쿠는 흡족해서 창을 들었다.

“시앙 잔. 끼어들지 마라.”

옆에서 동료가 움직이려는 기색을 읽고 이안쿠가 먼저 말했다. 협공하기 좋은 위치로 이동하려던 시앙 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 쥬안이 죽었는데······.”

그러나 이내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물러섰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서다.

시앙 잔이 뒤쪽으로 물러나자 이안쿠는 들고 있던 창을 부웅 돌려 허공에서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악기처럼 부드러웠다.

주인보다도 긴 창이 허공에서 투명한 원을 그리다가 돌연 소년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갔다.

까앙 - !

귀를 찢을 것 같은 강렬한 소리에 이어 창 밑에서 화강암 바위가 쩍 갈라졌다. 그 자리에 바위가 있을 줄은 몰랐던 이안쿠가 이를 콱 물었다.

챙 - !

이번에는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이안쿠의 창과 소년의 칼이 낸 소리였다. 소년은 어느새 이안쿠로부터 열 걸음 거리로 떨어졌다. 거기에서 제 칼이 얼마나 상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창이 바위를 내리친 순간 소년은 신의 권능이 돕는 다리로 이안쿠에게 달려들었었다. 창이 돌아오는 것보다 빨리 칼이 이안쿠의 몸에 닿는다고 생각했겠으나 그렇지 않았다.

이안쿠는 제 키보다 큰 창이 펜대라도 되는 것처럼 거의 무게감 없이 그것을 휙 돌려 소년의 칼을 막은 것이다. 이안쿠로서는 칼과 함께 소년도 날려버릴 심산이었지만 상대의 반응이 빨랐다.

칼날을 확인하던 소년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

이안쿠도 같은 심정이었다. 상대의 속도가 빠른 것은 이미 알았던 바다. 그 점을 계산하고도 한 번쯤 놓칠 수는 있었다. 그러니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반격을 당하고도 놀란 기색이 없는 상대가 문제였다.

자신의 키를 훨씬 뛰어넘게 길고 손잡이 굵기는 평범한 창 이상이었다. 어지간히 힘에 자신 있는 사람도 꽤 애써서 들어 올릴 무게라는 것을 보기만 해도 누구나 알았다. 세라의 신자라도 이런 것을 가볍게 잡고 손가락 움직임만으로 휙 돌려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도 소년은 이안쿠의 완력에 놀라기커녕 제 칼이 상했다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단순히 생각이 부족하다기에는 숙련되어 보였고, 경험으로 쌓인 연륜이 여유가 되어 드러났다고 여기기에는 나이가 어렸다.

저 태도는 오만에 가까웠다. 누구에게도 제압당해본 적이 없고 누구에게도 위압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이나 가질 법한 무심함이었다.

신들이 그에게 허락한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저 오만함을 이 창으로 부술 수 있을까.

이안쿠의 안에서 불길 같은 호승심이 일었다. 누구에게도 제압당해본 적이 없고 누구에게도 위압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그 역시 같았다.

이안쿠의 손 안에서 창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았다. 단지 한 손만으로 장난하듯 돌리는데도 무시무시한 바람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들려오던 바람 가르는 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소년은 그 모양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긴 창으로 그린 원을 피해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곡예사의 기술을 구경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 손으로만 창을 다루던 이안쿠가 이윽고 양손을 썼다. 그의 앞을 방패처럼 가로막았던 원은 이제 좌우로 기울어지며 그의 정면과 측면을 함께 가렸다. 이안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신이 내린 것 같은 투명한 방패에 보호받으며 전진한다. 회전하는 창이 일으키는 바람에 흙먼지가 일었다. 주변의 풀이 옆으로 쓰러졌다.

‘부딪칠 것이냐? 그럴 리 없지.’

그의 창은 전체가 무쇠로 만들어진 특별한 무기였다. 무게는 거의 성인 여성의 몸무게에 육박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안간힘을 써서 겨우 들 수 있었다.

그런 창이 바람을 일으킬 정도의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부딪치면 무사할 수 없었다.

‘물러설 테냐? 그래도 될까?’

물으며 이안쿠가 걷는 방향은 소년 쪽이 아니었다. 츈 지앵이 있는 곳이다.

‘선택해라, 소년 신자여.’

츈 지앵의 호위무사는 부딪치는 쪽을 택했다. 그 결과 그는 부서졌고 죽었다. 너는 어떨까. 이안쿠는 기대에 차서 소년과 츈 지앵을 번갈아 보았다.

호위무사의 시신을 붙들고 있던 츈 지앵이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호오라······. 왕자시여.’

이안쿠는 탄식했다. 언제나 온유하고 우아했건만. 지금 츈 지앵은 왕궁에서도 변방으로 쫓겨난 후에도 본 적 없는 강렬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려보며 그가 말했다.

“태양각에서 수직.”

클레타 어 같다고 생각하는데, 어쩐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어서 이안쿠는 아주 잠시 무슨 뜻인가 생각했다. 정말로 잠시였는데 갑자기 왼쪽 어깨에 격통이 일었다. 단단한 돌로 맞은 것 같은 통증이었다.

“이안쿠!”

시앙 잔의 외치는 소리와 동시에 머리 위로 뭔가 휙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굽히고 창을 위로 쳐들었지만 아픈 왼팔 때문에 속도가 느렸다. 목덜미에서 턱을 타고 섬뜩한 감각이 지나갔다.

갑자기 머리가 아찔해져서 이안쿠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쳤다.

‘무슨 일이 생겼지?’

시앙 잔이 달려와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보였다. 무기를 들고 있다. 보호하는 듯한 자세였다. 왜?라고 생각하는데 목덜미에서 따뜻한 것이 흐르며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고개를 숙이자 붉게 젖은 자신의 상의가 보였다.

“이안쿠! 정신 차려! 클레타 인들이 오고 있으니까 조금만 버텨!”

한 손으로 칼을 들어 전방을 겨누고, 다른 손으로 이안쿠의 목을 감싸 잡으며 시앙 잔이 외쳤다.

내 정신은 말짱해. 네 말도 들리고 저 오만한 소년이 츈 지앵을 끌고 가는 모습도 똑똑히 보인다고. 이안쿠는 대꾸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년과 츈 지앵이 점점 멀어졌다.



“저쪽.”

츈 지앵이 지시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는 어떻게든 걷고 있었다. 에밀리오를 지팡이처럼 써서 제법 빠른 속도를 냈다.

얼떨결에 지팡이가 된 에밀리오는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가, 이내 자신의 몸을 능숙하게 이용하는 츈 지앵을 내버려두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션의 무사들이라면 몰라도 츈 지앵과 에밀리오는 말도 별로 섞어보지 않은 사이였다. 마음이 맞을 리도 없거니와 2인 3각으로 걷는 것과 같은 일에 금세 합이 맞을 리도 없다.

그러나 츈 지앵은 자연스럽게 에밀리오에게 기대어 보통 사람 정도의 속도를 냈다. 지금까지 호위무사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이동하던 때와는 달랐다.

마치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아는 것 같았다. 에밀리오의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지도를 보듯 읽는 것 같기도 했다.

“무 롱은?”

거친 숨을 내쉬며 츈 지앵이 물었다. 에밀리오는 간단히 대답했다.

“알아서 하겠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과 헤어질 때까지는 살아있었다는 뜻이 섞인 대꾸였다. 츈 지앵은 동료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대답에도 탓하지 않았다.

에밀리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채로 걸었다. 츈 지앵이 방향을 지시하면 건성으로 따라가는 것 같았다. 결국 츈 지앵이 더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서 멈추게 되자 에밀리오는 그동안 참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주저앉았던 츈 지앵이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한 말.”

에밀리오가 다시 말하자 츈 지앵은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고른 후에야 대답했다.

“어려운 말을 써도, 아니······ 어려운 말을 더 잘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클레타 어는 전투가 아니라 사교와 학술에 소용되는 고급 언어로 배운 듯했으니.”

츈 지앵의 말에 에밀리오가 짜증내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상관없다. 아까 어떻게 그 자의 사각을 알아보았는지 묻는 거다. 내 눈에도 안 보였는데 어떻게······.”

신자도 아닌 네가, 라고 말하려다 에밀리오는 문득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 남자는 신자일지도 모른다.

특별히 어떤 금기를 지키는 것 같지 않아서 신자일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금기를 지킬 필요가 없는 신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일생에 단 한 번 금기를 지키면 다시는 지킬 필요가 없는 신이 있다.

츈 지앵은 그 신의 금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소트 시아페의 신자였군.”

에밀리오가 중얼거렸다.

소트 시아페는 화덕과 금속의 지배자로, 그의 신자들은 정교한 기술을 선물 받았다. 그래서 신자들은 대부분 장색(匠色)이 되었다.

이름 난 장인치고 소트 시아페의 신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사물의 본질을 헤아리는 눈과 톱니의 움직임처럼 정확한 손을 가지고 온갖 물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름답고 뛰어난 물건으로 보는 사람을 매혹하고 경탄하게 만드는 그들 자신은, 모순적이게도 사지 중 하나를 쓰지 못하는 불구였다.

소트 시아페의 금기는 ‘사지 중 하나를 버릴 것.’

물건을 만들기 위해 보통의 신자들은 사지 중 버릴 부분으로 다리를 선택했으므로, 대부분의 유명한 장인은 한 쪽 발을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였다.

소트 시아페의 금기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다른 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계속해서 금기를 지켜야만 신의 축복을 유지할 수 있지만, 소트 시아페는 금기를 지키는 순간 축복이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영민하구나.”

희미하게 웃으며 츈 지앵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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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Personacon Rainin
    작성일
    19.01.15 23:19
    No. 1

    한 번쯤 신과 신자들 목록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아마도 오랜만에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역시 에밀리오였지요. 워낙 인물들이 개성이 있는 와중에도 유니크한 녀석인지라 으스러지게(이 표현을 빼면 안 됩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녀석. 메칼로 놈님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정말이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9.01.17 00:16
    No. 2

    신과 금기의 목록은....망설이고 있어요. 스토리상 신이나 금기가 미리 밝혀지면 안 되는 부분도 있을 테니까요. 미리 알아도 재미있도록 쓰는 게 재주겠지만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9.01.16 01:38
    No. 3

    와 별의 별 신이 다 있군요 금기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퍽 까다로운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9.01.17 00:16
    No. 4

    소트 시아페는 전부터 등장한 신이었지만.....제가 너무 오래 연재를 중단하고 있어서 다들 잊어버리셨지....죄송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9.01.16 19:18
    No. 5

    와우. 다리 하나와 맞바꾸는 능력이라니.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9.01.17 00:17
    No. 6

    음, 개인적으로 저 정도면 할만 하잖아 싶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생긴 능력이 별로 마음에 안 들면 그건 또.....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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