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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일지도.

메칼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마니
작품등록일 :
2016.01.05 01:02
최근연재일 :
2019.03.13 00:57
연재수 :
178 회
조회수 :
130,354
추천수 :
5,473
글자수 :
930,491

작성
18.04.10 06:53
조회
159
추천
10
글자
12쪽

아무도 모른다(1)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DUMMY

“이봐, 물이 끓잖아! 어서 고기를 넣지 않고 뭘 해? 후안! 칼은 다 갈았느냐? 어이! 과일을 조심히 다뤄! 멍이라도 들면 어쩔 셈이야!”

양헨 성의 제용고(濟用庫) 관리 야팅은 실로 몇 년 만에 몸이 둘에 입이 넷이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빴다.

성에서 기르는 가축을 모두 잡아 부위별로 나누어서 어떤 것은 삶고 어떤 것은 소금에 절였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사들이고 곡식은 찧어서 용량별로 포장했다. 걸핏하면 사냥이랍시고 며칠씩 들을 쏘다니기 좋아하는 왕자 덕분에 건량만은 충분했다.

그러나 이번 원행에는 두 명의 왕자비가 동행한다. 왕자비들과 시녀를 포함해 40여 명의 인원이 보름동안 필요한 양식이었다. 그것을 날이 새기 전까지 준비해야만 했다.

“망할 놈이 저녁이 다 되어서 도착해 가지고 내일 당장 떠나라면 어쩌란 말이야.”

야팅이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큰 소리로 불평할 수는 없었다. 그 망할 놈이란 수도에서 온 국왕의 전령이니까.

석양이 질 무렵 국왕의 전령임을 뜻하는 깃발을 등에 지고 양헨 성에 온 그는 비보라고 해야 할지 낭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소식을 전했다. 국왕의 용태가 위중하므로 모든 왕자와 왕손들은 수도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국왕이 위중하다면 비보가 분명하지만, 양헨 성의 성주이자 국왕의 네 번째 아들인 츈 지앵에게 이 소식은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 태자였던 츈 지앵이 폐위되어 변방으로 쫓겨난 후, 태자의 자리는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왕자들의 암투 사이에서 표류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국왕이 위중하다니 이제는 태자가 아니라 왕위가 정해질 판이었다.

몇 년 전의 실책 이래 중신들로부터 신임을 잃은 츈 지앵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밍 야즈는 다르다.

말도 배우기 전에 클레타로 보내진 밍 야즈는 고작 열한 살인 지금, 타고난 천재성과 고귀한 품성으로 클레타 왕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밍 야즈가 매개가 되어서, 국경을 봉쇄한 채 교류도 없는 두 나라 사이에 비공식적일망정 밀사가 오간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밍 야즈에 대한 국왕의 애정도 공공연한 것이었다. 상황이 그러니 아홉 명이나 되는 왕자들을 제치고 밍 야즈 왕손이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된다면 츈 지앵의 처지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도 왕자님은 저지경이시니······.’

야팅은 츈 지앵의 거처가 있는 쪽을 힐끗 보고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사냥을 나갈 때가 아니면 그는 거의 성 북쪽의 거처에 틀어박혀 있었다. 거기에서 창기를 불러놓고 놀거나 술에 취해 지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도에서부터 함께 온 몇 명의 부하 외에는 거기에 드나들지 못하니 야팅도 직접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의 운영을 두 명의 왕자비가 도맡다시피 하고 있었다. 왕자가 모습을 보이는 일이 좀처럼 없으니 대부분 그 소문을 믿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왕자의 운명이 어떻게 변하든 양헨 성은 그대로일 것이고 양헨 성에 속한 야팅 역시 달라질 것이 없었다.

“후안! 칼은 아직도 안 된 거냐? 네놈을 기다리다 날이 새겠다! 이봐, 거기! 그래, 너희들. 이리 와서 고기를 날라. 동문의 창고로 가져가라.”

임시로 만든 화덕에 장작을 나르던 두 남자가 야팅의 지시를 받고 고기가 담긴 바구니를 하나씩 들었다. 바구니를 들고 떠나는 그들의 모습은 야팅의 시야에 잠깐 잡혔다가 이내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그런데 누구였지?’

그들이 가고 난 뒤에야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야팅은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이 떠난 방향을 돌아보았으나 이미 건물 뒤편으로 사라진 후였다.

‘먼 마을에서 장작을 팔러 온 나무꾼인지도 모르지.’

급히 장작을 모으느라 성 아래 마을로 사람을 보내기는 했었다. 야채와 과일을 운반하는 짐꾼도 여럿 드나들고 있으며 마차와 가마를 점검하려고 불러온 수리공에, 급히 데려온 요리사들, 일꾼들까지 평소보다 세 배는 많은 사람들이 성안에서 북적거렸다.

‘어두워서 잘못 봤을 수도 있고.’

찜찜해 하면서도 야팅은 결국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마 그런 생각도 코앞에 닥친 바쁜 일정에 밀려 곧 사라져버렸다.

야팅이 다시 일꾼들 사이로 돌아다니며 소리 지르느라 바쁜 때, 그의 기억에서 사라진 두 남자는 고기 바구니를 들고 내성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앞에 경비병이 있었으나 내일 아침에 쓸 고기를 내성 주방에 가져다 놓으라고 명령받았다는 말에 두 사람을 들여보내 주었다. 중문을 통과한 그들은 방향을 바꾸어 성 북동쪽에 자리 잡은 왕자의 거처로 향했다.

그것은 성 안에 외따로 떨어진 3층짜리 건물이었다. 꼭대기 층은 누각이다. 지대가 높아서 거기에 서면 성 전체가 내려다보일 테지만 지금은 한밤중이라 아무도 없었다. 하인과 시녀들이 쓰는 1층은 소등했고 2층만 호박색 불빛이 창밖으로 새어나왔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관상용으로 심어진 나무들 사이에서 희끗한 손 하나가 튀어나와 까닥거렸다. 둘은 재빨리 그곳으로 갔다.

먼저 온 두 명이 나무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바짝 엎드려. 곧 경비병이 지나갈 테니.”

그 중 하나가 나직이 말했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나무 그림자에 숨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병사가 창을 들고 나타났다. 병사들은 긴장감 하나 없는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금방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나무 밑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직 병사들은 중문 근처에 다 몰려 있고, 내성을 순찰하는 병사는 저들뿐인 것 같습니다. 다시 오기까지 서너 식경은 걸립니다.”

“왕자의 거처는?”

“입구에 보초가 하나 있고 안에는 하녀와 시녀가 하나씩, 수도에서 함께 온 무사들이 둘 정도 있을 거랍니다. 그 중 하나는 세라의 신자입니다.”

“왕자의 호위로 너무 허술하지 않나.”

“양헨 성이 사병을 따로 기를 만큼 풍족하지도 않고, 츈 지앵도 정무에 관심이 없어 사냥을 다니거나 술에 취해 지낸다고 하니······.”

“더욱이 오늘 같은 날 암습을 예상하지는 못할 겁니다.”

목소리들이 나직이 오가다가 문득 끊어졌다. 명령을 기다리는 침묵에 굵은 목소리가 답했다.

“순행을 두 번 더 보낸 후 잠입한다. 왕자의 목을 취하면 즉시 도주하고, 우리가 성공하건 못하건 불은 예정대로 놓도록. 그 후에는 각자도생한다. 만에 하나 붙잡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겠지.”

그 말에 나무 밑 어둠 속에서 파리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목소리는 거기까지였다.

멀어졌던 병사들이 다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서너 식경 후 또 나타나서 잡담을 나누며 떠나갈 때까지 나무그늘에서는 숨소리도 풀잎 하나 움직이는 기척도 없었다.

이윽고 순행을 하는 병사들이 완전히 멀어지자 나무 밑에서 시커먼 것들이 떨어져 나왔다. 마치 지면 위를 흐르는 그림자처럼, 네 명의 암습자들은 소리 없이 이동해 왕자의 거처로 접근했다.

문 앞에서는 창을 든 병사 하나가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다가간 한 명이 병사의 머리를 잡더니 단숨에 목을 돌려 꺾어버렸다. 병사는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다.

암습자 가운데 하나가 죽은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고 시체를 숨기는 동안 다른 세 명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와 하인들의 거처인 1층은 고요한 가운데 코고는 소리만 이따금 들려왔다.

한 명이 손짓으로 이상 없다는 표시를 하자 그들은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갔다. 왕자의 방은 환히 밝혀져서 종이를 바른 문 위에 격자형 문살이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한 명이 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오른쪽 손가락 하나를 세워서 흔들었다. 방안에 남자 한 명이 있다는 뜻이다. 그는 불이 꺼진 옆방으로 다가가서 이번에는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세워 흔들었다. 남자 두 명이 있으며 잠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왕자도 옆방의 호위무사들도 모두 깨어 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다른 쪽이 눈치 채게 된다.

명령을 기다리는 시선을 받고, 지휘자가 손짓으로 대답했다.

‘두 방을 동시에 들어간다.’

그의 결정에 한 명이 등에 걸었던 활을 손에 잡았다. 그가 시위에 살을 먹이고 왕자의 방 앞에 서자 다른 두 명은 불이 꺼진 옆방으로 향했다. 세 명은 서로를 마주보며 시선을 주고받다가 동시에 문을 열어 젖혔다.

방문을 열어 방안에 있는 사람이 보인 순간 팽팽히 당겨졌던 시위가 풀렸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았다. 암습자는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는 자신의 화살에 상대방의 심장이 꿰뚫릴 것을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시위를 놓는 순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화살이 떠나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의 모습이 정확히 눈에 보였다.

‘왕자가 아니야!’

암습자는 왕자의 얼굴을 몰랐지만 적어도 츈 지앵이 36세의 남성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눈앞에는 열여섯이나 열일곱으로밖에 안 보이는 이국적인 외모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그 소년의 손에 가늘고 긴 클레타 식 칼이 들린 것과 단정한 얼굴 위로 비웃음이 떠오른 것까지도 동시에 알아차렸다.

상대가 누구든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벼락 치듯 머리를 때렸다. 암습자는 평생 해본 것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정체불명의 소년은 의자에 앉아있다. 그것도 등을 느긋이 기울여 등받이에 기댄 자세였다. 서로의 거리는 적어도 열 걸음. 의자에서 일어나 칼이 닿을 거리까지 오는 것보다 화살을 쏘는 것이 훨씬 빠르다. 거기에 이 거리면 피할 수도 쳐내기도 힘들었다. 저쪽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두 번째 화살로 잡을 수는 없어도 부상은 가능하다고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손이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시위를 놓자마자 두 손으로 허리에 걸린 단검을 뽑아들었다. 상대는 소년이다. 완력으로는 이긴다.

그러나 활을 놓은 후로 그가 한 것은 오로지 생각뿐이었다. 단검의 칼자루를 잡아야 할 손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분명 화살을 피해 의자 밑으로 구르거나 화살을 맞고 쓰러졌어야 할 소년이 코앞에 있었다.

“아, 실수. 급소를 찔러버렸네. 대장이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어쩐지 즐거운 목소리로 소년이 중얼거렸다. 그와 함께 기분 나쁠 정도로 무감각한 몸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두 명의 무사 중 하나는 세라의 신자라더니······. 재수가 없었나······?’

그래도 다른 두 명이 왕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 테니 적어도 츈 지앵의 목은 확실히 벴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암습자는 힘없이 쓰러졌다. 서 있고 싶어도 몸이 버텨주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귀만은 멀쩡해서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긋한 걸음이었다.

이어서 옆방을 나서는 발소리도 들려온다. 역시 침착한 걸음이었으며 비단옷이 사락사락 부대끼는 소리도 들렸다. 그렇다면 방에서 나온 사람은 동료가 아니다.

암습자는 깨달았다.

암살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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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Rainin
    작성일
    18.04.10 10:43
    No. 1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아껴서 읽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8.04.11 00:21
    No. 2

    저도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쓸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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