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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일지도.

메칼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마니
작품등록일 :
2016.01.05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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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3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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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10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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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무도 모른다(2)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DUMMY

“살려두라고 했잖아, 에밀리오.”

방으로 들어온 메칼로가 바닥에 쓰러진 암습자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나무랐다. 에밀리오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암습자의 옷에 칼을 닦았다.

“상관없어. 옆방으로 두 명 들어갔고 밖에도 한 명 남아있으니.”

에밀리오의 대꾸가 끝나기 무섭게 옆방에서 나직하게 부르짖는 션 어가 들려왔다. 방에서 한 명이 뛰어나와 다급히 보고했다. 나가서 지켜보던 메칼로가 얼굴을 찡그렸다. 에밀리오가 무슨 일인지 물으려는 찰나 메칼로가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산디아가 계단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메칼로를 보자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로잡았으나 독을 먹었습니다.”

밖에 남아있던 한 명이 사로잡히자 자결했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잡은 자도 독을 삼켰다. 결국 한 명의 포로도 얻지 못했다는 말이군.”

산디아의 보고에 대답한 사람은 션의 남자였다. 옆방에 있던 두 명 중 하나로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건장한 체격의 무사였다. 그가 남부 억양이 심하지만 능숙한 클레타 어로 말한 것이다.

메칼로가 무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일단 지금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것 같기는 하다.”

그가 턱짓으로 에밀리오의 칼에 쓰러진 암습자를 가리켰다. 죽은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암습자는 가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독을 마실 기운도 없을 정도로 확실히 당한 녀석만 숨이 붙어 있다는 말이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끊어지겠지만.”

암습자가 살아있는 것을 보자 션의 남자가 재빨리 다가갔다. 그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암습자에게 위협적인 션 어로 다그쳤다. 배후를 묻는 모양이었으나 힘없는 비웃음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죽을 작정으로 독을 마실 각오를 한 자들이니 말 몇 마디에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몇 번을 물어도 태도는 똑같았고 약한 숨은 점점 느려졌다.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죽으리라고 생각한 순간, 죽어가던 자가 돌연 눈을 부릅뜨고 짧은 션 어를 내뱉었다. 그 짧은 말이 마지막 남은 생명이었던 것처럼, 이윽고 암습자는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 죽었다.

시체 세 구와 다섯 명 사이로 잠깐 침묵이 고였다.

고요한 가운데 건물 밖에서 우는 밤벌레와 내일 수도를 향해 출발할 왕자 일행을 위해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방금 왕자의 거처에서 네 명의 암살자가 절명한 것을 알 리 없는 양헨 성은, 내일의 원행을 대비하느라 늦은 밤인데도 활기에 차 있었다.

텁석부리 무사가 어두운 얼굴로 다른 한 명의 션 남자를 돌아보았다. 따로 떨어져 말없이 서 있던 또 한 명의 션 남자는 눈길을 받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신호인지 텁석부리 무사가 테리아 인들에게 말했다.

“비록 포로에게 진실을 캘 수는 없겠지만 자객이 올 거라는 당신들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증명되었소. 그렇다면 우리 역시 약속한 시간을 내줘야 하겠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으나 지금의 전하께 가장 부족한 것이 시간이오. 바로 그 시간을 이방인인 당신들과 나누기로 했으니 이 결정이 실수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오.”

남자는 말한 다음 메칼로만을 데리고 왕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넓은 방에는 침대 대신 곰 가죽이 깔렸을 뿐으로, 왕자의 신분에 어울리는 가구나 물품 대신 벽에 걸린 활과 동물의 박제로 장식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빈 술병이나 뼈가 담긴 그릇 따위가 아무렇게나 놓였고 벗어던진 옷이 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텁석부리 무사는 그런 너저분한 방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더니 곰 가죽 앞에서 멈추어 섰다. 가죽에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송곳니를 드러낸 곰의 머리가 박제된 채로 붙어 있었다.

무사가 곰의 머리를 잡아 올리자 그것을 고정시키기 위해 바닥에 박혀 있던 말뚝이 드러났다. 무사가 말뚝에 발을 올리고 힘줘서 밟았다. 그 순간 한 쪽 벽이 들썩거리며 손 하나가 오갈 정도의 틈이 생겨났다.

“호오.”

메칼로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무사가 틈 사이로 손을 넣어 벽을 돌리자 안쪽으로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넓은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가파르게 위를 향하고 있었다.

위로 올라가자 왕자의 방보다도 훨씬 넓고 컴컴한 공간이 나타났다. 높이는 겨우 허리를 펴고 설 수 있을 정도였다.

“놀랐는데. 토비아스가 봤다면 좋아했겠어.”

메칼로가 감탄해서 중얼거렸다.

비밀 공간이라고 하면 복잡한 내부 구조를 이용해 작은 방 정도를 숨기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 건물은 2층과 누각 사이의 한 층을 통째 감추고 있었다. 그것을 겉에서 볼 때나 안에 들어왔을 때나 위화감 없이 속이려면 높은 수준의 정밀한 설계가 필요했다.

게다가 단순히 넓기만 한 공간인 것도 아니었다. 창이 없지만 벽 사이의 장식이나 틈을 이용해 바깥의 빛을 끌어들이고, 넓은 공간 곳곳의 굵은 기둥은 무질서하게 배치된 것 같아도 교묘히 시선을 가렸다.

한밤중이지만 어렴풋이 앞은 보였다. 벽면 곳곳에서 새어 들어온 달빛이 방안 여기저기에 난해한 문자 같은 푸르스름한 얼룩을 새기고 있었다.

“허락받기 전까지 전하께 다가갈 수 없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주시오.”

메칼로를 데려온 텁석부리 무사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어둠 속 기둥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메칼로는 그가 오른편으로 돌아 자신의 뒤쪽 기둥 옆에 숨은 것을 알아차렸다.

충고가 아니라도 섣불리 움직일 생각은 안 했다. 어둡고 낯선 이곳에서 여기저기의 기둥 뒤에 몸을 숨긴 호위무사들에게 동시에 공격을 당하면 그라도 상처 없이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다.

가뜩이나 션의 전사들은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테리아의 왕자 아델리안 클라우스······라고.”

암흑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수도 억양의 클레타 어였다.

‘위치를 못 잡겠네.’

목소리는 몇 번이나 벽에 부딪쳐 흐려진 채로 좌우 양쪽에서 함께 울렸다. 캄캄해서 전혀 보이지 않는 방 깊숙한 안쪽이 생각보다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왕명이 내려진 것과 함께 고에게 암살자가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고 경고하기 위해 왔다. 테리아 인이. 클레타에서.”

본래 힘이 없는지, 혹은 일부러 속삭여 말하는지 몰라도 남자의 것 치고 가는 목소리였다.

“고가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말을 듣고도 너희에게 기회를 준 이유를 아느냐.”

“수상쩍을 만큼 쉽게 승낙한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에 와보니 알겠군요. 불이라도 지르면 모를까 암살은 힘들어 보입니다. 암살을 대비하는 것에 관한 한 내 충고는 필요 없어 보입니다.”

메칼로의 대꾸에 어둠 속에서 숨소리와 거의 구분이 안 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고를 속이고 접근한 암살자일지라도 그 대담함만큼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묻노라. 션의 수도에서 일어난 비밀스러운 모의가 어째서 다름 아닌 테리아 인에게 날아갔는가. 클레타의 수도에서 여기까지 빠른 말로 달려도 열흘이 걸리는 거리를 어떻게 엿새 만에 올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니 고의 앞까지 왔으렷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클레타의 수도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바실리카 강을 따라 이틀 동안 남하, 클레타와 션의 북동쪽 경계까지 온 후 나흘 동안 국경을 따라 서쪽으로 달렸습니다.”

“바실리카 강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지류가 늘어 강폭이 넓고 수심도 얕아진다. 수도에서 하루거리라면 이미 배를 탈 수 없을 정도이거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잘 아시는군요. 사냥을 즐긴다더니 국경을 넘어 꽤 멀리까지 유렵을 가시나 봅니다.”

메칼로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자 기둥 사이사이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호위무사들의 반응에 비해 담담한 목소리가 어둠속에서 울렸다.

“사슴에게는 국경이 없지. 고의 질문에 변명할 말은 찾았는가?”

“츈 지앵 전하. 이 시기의 바실리카 강은 우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수심이 충분하고 물살도 빠릅니다. 이틀째에는 속도를 더하기 위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 뒤에 다시 나흘을 달려온 우리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션의 내정에 관심이 없습니다. 션의 수도를 떠난 전서구가 우리에게 온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더 자세히 말하라.”

어둠 속에서 츈 지앵이 요구했다.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두 가지를 원했습니다. 츈 지앵 전하가 안전할 것. 그리고 션을 벗어난 후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 그와 같은 일이 션의 내정이나 전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리로서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클레타 왕실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밍 야즈 왕손이 왕위에 올랐을 때 어린 왕을 대신할 섭정으로 당신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전하 역시 클레타에서 수학한 적이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온건한 성향으로 알려졌더군요.”

“그런데도 테리아가, 클레타 왕실이 싫어할 일을 하려고 여기까지 왕자를 보냈다는 말인가?”

츈 지앵이 날카롭게 물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사정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거래입니다. 일단은 전하를 무사히 클레타의 수도로 데려가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 모든 주장을 무엇으로 증명할 터인가.”

“전하께 드릴 서신 한 통이 있습니다. 전하라면 그 내용을 보는 것만으로도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대답한 메칼로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옷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것을 내밀자 어둠 속에서 손이 불쑥 나와 편지를 가져갔다.

조용한 가운데 멀찍이서 종이가 펼쳐지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빛이라고는 흐린 달빛뿐인데도 불을 켜지 않았다. 잠시 어두운 공간에 숨소리도 없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다 문득 짧은 션 어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있었다.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방안에 스며들던 달빛이 일시에 사라졌다. 벽에 두꺼운 천이 내려진 것이다. 그 직후 방 안쪽에서부터 불빛이 번졌다. 기둥에 걸린 등이 차례차례 불을 밝혔다.

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안에는 예상한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그 사람들에게 에워싸이듯 서 있었다.

“테리아의 왕자는 츈 지앵 전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텁석부리 무사가 말했다. 피차 한 나라의 왕자라고 해도 테리아는 션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나라였다. 그 차이를 메칼로는 우아한 궁정식 절로 인정했다.

다만 절을 한 상대는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방의 구석에서 사람들과 기둥에 가려 보일듯 말듯 서 있는 가죽옷의 남자였다.

“지금 누구에게······.”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으나 그의 말은 가죽옷의 남자가 한 손을 슬쩍 드는 것으로 끊어졌다.

“테리아 왕자는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모양이군. 이 이상 시험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터다.”

그 말에 텁석부리 무사가 션 어로 나직이 명령했다. 사람들이 금세 가죽옷의 남자, 츈 지앵을 중심으로 새롭게 열을 지었다.

츈 지앵은 걸음을 옮겨 넓은 방의 유일한 가구인 탁자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메칼로도 들을 수 있게 클레타 어로 말했다.

“무 롱. 술을 가져와. 테리아의 왕자에게 내 시간을 조금 더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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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9.01.28 21:01
    No. 1

    쭉 읽으니까 메칼로가 가장 정중한 태도를 보인 편이란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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