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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일지도.

메칼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마니
작품등록일 :
2016.01.05 01:02
최근연재일 :
2019.03.13 00:57
연재수 :
178 회
조회수 :
13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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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3
글자수 :
930,491

작성
19.01.07 23:56
조회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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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10쪽

시간의 탑(1)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DUMMY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귀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앞에서 달리는 산디아의 발소리를 듣는 것과 자신의 발이 어디를 디디는지 확인하는 정도가 지금 메칼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출혈을 무시하고 산디아의 속도에 맞춰 달려서다. 허리에서 흐른 피가 무릎 아래까지 흥건하게 젖었다.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얼굴 근육에서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산디아는 언제 멈추는 거지? 이대로 달리다 죽게 만들 셈인가. 소리를 질러 볼까. 그런 생각이 멍하니 흘렀다. 슬슬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꼴사나운 지경까지 떨어진 것도 오랜만이다. 피식 웃으며 눈을 깜박인 순간 자신의 발을 시야에서 놓쳤다. 눈앞의 풍경이 휙 기울어지자 ‘드디어 쓰러지는군.’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기울어지던 풍경이 덜컥 멈추었다. 산디아의 어깨가 가슴팍 아래에서 그를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그녀는 메칼로를 천천히 앉히고 나무에 등을 기대게 했다.

“부상을 확인하겠습니다.”

옷을 걷어 올리자 가로로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그동안 흘린 피의 양이 꽤 많았다. 급한 대로 지혈하는 동안 메칼로는 말없이 호흡을 골랐다.

‘상처의 길이로만 따지면 이번 것이 최고인걸.’

‘누군가 베이리 산 에일 한 잔만 가져다주면 좋겠군.’

‘그 누군가가 말라깽이 여왕님이라면 더 좋겠고.’

산디아가 들었다면 어이없는 표정으로 혀를 찼을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했다. 그 누군가와 시원한 베이리 산 에일로 목욕하는 상상까지 닿을 즈음 코앞에서 조용한 노기가 피어올랐다.

막 지혈을 끝낸 산디아가 몸을 일으켰다. 올려다보자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다시는 그런 행동 하지 마십시오.”

용병단 부하들을 찍어 누를 때나 쓰던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당신을 지키는 겁니다. 또 그런 식으로 저를 모욕한다면 그때는 참지 않겠습니다.”

그런 행동이란 클레타의 용병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메칼로가 한 일이었다. 서로 떨어져 포위된 채로 공격당하고 있을 때 메칼로는 산디아를 돕기 위해 무리하게 움직였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부상이다.

“안 참으면 어쩌려고?”

메칼로가 실없이 물었다.

“당신과의 계약을 파기합니다. 파기의 조건은 충분합니다.”

산디아가 대답했다. 이 말에는 메칼로도 실없는 표정을 거두어야 했다. 본래도 흰소리는 안 하는 그녀였지만 이번은 단단한 진심이었다.

“알았어. 미안했다.”

메칼로의 말에 산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받았어도 굳은 낯빛이 풀리지 않았다. 화도 덜 풀렸고, 마음속도 복잡했다.

[위태롭다. 그는 균형을 잃었어. 헬리온 클라우스. 토비아스. 로레단에 닿을 때까지입니다. 지킬 수 있을까? 제이나 카타르. 위험. 대 신자용 전술. 네 명의 한 조로 두 개 조 이상. 사망 둘, 부상 여섯 명. 괜찮아. 적과의 거리는? 메칼로 님과의 거리는? 다른 생각.]

“아까와 같은 속도로 흔적 없이 걸을 수 있겠습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산디아가 물었다. 메칼로도 뒤따라 일어섰다.

“왜? 어차피 션의 왕자가 남긴 흔적 때문에 들킬 텐데.”

“그들과 다른 길로 갈 겁니다.”

그녀의 대답에 메칼로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토비아스가 너에게 뭐라고 한 거지?”

메칼로가 물었다. 산디아와 대화할 때 그는 돌려 말하거나 답을 유도하지 않았다. 산디아는 언제나 느닷없이 정곡을 찌르는 메칼로에게 매번 놀라면서도 늘 그것을 받아들였다.

“······토비아스는 메칼로 님이 테리아를 떠난 뒤로 불안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산디아 님. 메칼로 님은 오랜 집착의 대상을 잃었습니다.]

“내가?”

“근래에 메칼로 님은 전에 없는 행동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같은 일도 전에는······.”

[션을 빠져나와 로레단에 닿을 때까지입니다.]

“아까는 확실히 멍청했다만 집중력이 떨어져서 바보짓 한 게 오늘이 처음도 아니잖아.”

“당신은 나보다 먼저 죽을 뻔했습니다.”

[바렌틴의 전사 앞에서! 클라우스의 방패 앞에서!]

산디아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아직도 내가 부족한가? 더 강해져야만 하는가?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나? 신자가 아니어서?]

마음속 소리가 뒤편에서 메아리쳤다.

“산디아.”

메칼로가 경고를 담아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메아리치던 목소리가 뚝 멈추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거리를 잰 다음 뒤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을 참으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메칼로는 모른 체했다.

그녀는 바렌틴의 전사였다. 그들은 지키려는 대상 앞에서 자신이 무생물인 방패나 성벽쯤으로 여겨지기를 바랐다. 부서질 때까지 침묵하는 것이 그들의 긍지였다.

“그래서, 토비아스가 나 없는 곳에서 너한테 뭐라고 험담을 했는데? 넌 돌려 말하는 재주가 없으니까 들은 대로 말해 보라고.”

가볍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힘이 없으니 어쩐지 우울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되었다. 산디아의 얼굴이 난처함과 죄의식으로 뒤섞여 어지러워졌다.

그녀는 입을 우물거리다 말고, 말하는 대신 기억을 불러왔다. 집중한 그녀의 머릿속으로 토비아스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르반에는 클레타의 왕실을 통해 연락해 두었습니다. 패트로스 바그랏트가 어디까지 용납해줄 것인지는 그가 메칼로 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달렸겠지요. 하지만 어쨌든 본인이 동의했다고 해도 아르반의 왕위 계승자를 가로챈 겁니다. 얌전히 넘어가지는 못합니다.]

[균형이 망가진 겁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산디아 님. 메칼로 님은 오랜 집착의 대상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대신할 목표를 찾아낼 겁니다. 그게 뭐든 헬리온 클라우스 만큼 위험하겠지요.]

[필요에 따라서 이번 일 따위는 포기해도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메칼로 님의 목숨입니다. 당신만이라도 그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당신 외의 테리아 인들은 메칼로 님을 포함해 다들 글러먹었으니까요.]

[절대로, 그분을 혼자 두지 마십시오. 션을 빠져나와 로레단에 닿을 때까지입니다. 제가 아무것도 도와드릴 수 없는 것은 오직 그 때 뿐이니, 그 때까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사하셔야 합니다.]

“하.”

들으란 듯한 짧은 웃음이 메칼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클레타 인이 할 법한 말인걸.”

“토비아스는 클레타 인이니까요.”

[바렌틴의 조상도 클레타 인이었지······.]

“너는 테리아 인이다. 산디아 바렌틴. 나도 그렇고. 언제부터 테리아 인이 귀중품 목록에 제 목숨 같은 것을 적었지? 조금 전 나보다 먼저 죽지 못하게 될 뻔했다고 화냈던 거나 잊지 마.”

“다피나 님은 테리아 인이 아닙니다.”

산디아가 불쑥 대꾸했다. 메칼로는 갑자기 말을 잃었다.

“저나 다른 테리아 여자처럼 메칼로 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녀의 직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들 사이의 대화를 멈추게 만들었다. 말할 때도 말하지 않을 때도 계속 걸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갈림길에 다다랐다.

츈 지앵을 뒤쫓아 갈 것인지 그들과 다른 길로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산디아.”

메칼로가 문득 입을 열었다.

“토비아스가 알려줬나? 내가 너나 토비아스의 의견을 무시하고 계속 위험한 결정을 내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산디아는 삼키기 거북한 것을 입안에 머금은 것처럼 입술에 힘을 주고 있다가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그럴 때는 메칼로 님을 버리고 저라도 살아남으라고 하더군요.”

메칼로가 나직이 웃었다.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연 토비아스야.”

그러고는 멈췄던 걸음을 휙 옮겼다. 츈 지앵이 간 방향이었다.

등 뒤에서 산디아의 한숨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그녀는 몇 걸음 만에 메칼로를 앞지르더니 금세 츈 지앵의 흔적을 찾아냈다.

“션 사람들도 급해지니 어쩔 수 없군요. 흔적이 많은 걸 보면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에밀리오와 무 롱이 제 시간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과 어긋나면 최소한의 희망도 없습니다.”

“활잡이를 빼먹었잖아. 지금쯤 어디선가 따라오고 있을 거다.”

“하지만 화살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고. 스텔리안도 꽤 무리했을 테니······.”

대꾸하던 산디아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방금 바람······.”

그녀는 말하다 말고 재빨리 메칼로를 끌어당겼다. 둘은 낮게 엎드려 관목 사이로 몸을 숨겼다.

“싸울 수 있습니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가오는 방향은 다르지만 클레타의 용병 같습니다. 우리를 발견하고 오는 건지 단순한 수색인지 모르겠습니다.”

산디아의 대답을 증명해주려는 것처럼 머지않아 나무 헤치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의 내 속도라면 어차피 이동하다 들켜. 상대는 몇 명이지?”

“소리로 봐서는 대략 일고여덟.”

“해치우고 떠나자.”

메칼로의 말에 산디아는 조용히 양손에 칼을 잡았다. 일고여덟이면 제대로 맞붙어 싸우기에는 많았다. 기습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기습하기에는 너무 흩어져 있는 모양인데.”

말하고 나서 메칼로가 씩 웃었다. 신으로부터 마음을 읽는 능력을 받은 적 없는 산디아지만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 치솟았는지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지?”

“네.”

“그럼 너한테 맡기고 난 좀 쉴 테니 잘 부탁해.”

메칼로는 말하고 나서 정말로 털썩 주저앉아 근처의 바위에 편하게 등을 기대버렸다. 칼도 허리에 찬 그대로였다.

산디아는 그를 거기에 두고, 조용히 숲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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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Personacon Rainin
    작성일
    19.01.08 00:14
    No. 1

    1월5일에 올라온 저번 편은 제법 오랜만에 읽었는데도 바로 전 편 내용이 떠올라서 놀랐어요. 근데 사흘만에 올라온 이번 편은 '어라, 전 편 내용이 어땠더라?'라고 되묻게 된ㅋㅋㅋ.
    참 초지일관 삐뚜름한 메칼로 놈님(...의도적인 표현입니다)을 보고 있자니 유쾌하군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9.01.10 00:07
    No. 2

    메칼로는 아마 죽을 때까지 저럴 것 같아요. ( ̄▽ ̄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9.01.08 00:45
    No. 3

    메칼로식 대화법! 혼이 쏙 빠지는군요. 목숨을 여벌로 가지고 다니는건지.. 쯧쯧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9.01.10 00:08
    No. 4

    저녀석은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걸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작가가 해피엔딩을 좋아한다는 것도 아는 것 같아요. 마음을 읽혔나....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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