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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일지도.

메칼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마니
작품등록일 :
2016.01.05 01:02
최근연재일 :
2019.03.13 00:57
연재수 :
17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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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30,491

작성
16.05.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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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168
글자
10쪽

<1부. 아르반의 메칼로 - 프롤로그>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DUMMY

남색 하늘 위에서 금빛의 달이 흔들린다. 아니, 방금 흔들린 것은 달이 아니라 머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병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안에 가득 차면서 졸음이 조금 달아났다.

습관적으로 좌우를 돌아보았지만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멀찍이 함께 번을 서는 동료의 모습이 검은 실루엣으로 보였다.

아무튼 잠깐이라도 졸았다 하면 귀신같이 알고 달려와 머리통을 후려치는 상관이 있으니 두 눈 뜨고 경계하는 중이지만, 이곳에 얼씬거리는 사람 따위 애초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지키는 곳은 왕성이 왕성이기 이전, 요새였던 때부터 존재한 낡고 높은 성벽로로 왕성의 동쪽 벽이자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 만들어진 초소였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은 한쪽으로 새까만 바다, 반대쪽으로 고요히 잠든 내성의 정경이었다.

성벽 밑 바다는 뾰족한 바위 주변에서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켰고 그 위로는 수직의 절벽이었다. 신들의 가호를 받는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쪽으로 배를 몰고 올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곳에 보초를 세우는 것은 편히 자도 될 병사들을 공연히 들볶는 짓일 뿐이다.

게다가 자정이 넘은 이 시각, 사방이 고요한데 멀리서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아련하게 되풀이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파도 대신 잠이 밀려와서 발밑으로부터 천천히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철썩 쿵 철썩 쿵 하고 소리가······.

‘뭐······?’

반쯤 졸면서 소리를 듣고 있던 병사가 눈을 번쩍 떴다.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소리가 거기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성안에서 들려오는가 싶었지만 아니다.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겨 그는 성벽 가장자리까지 갔다. 거기에서 상체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달빛을 받은 물결 표면이 하얗게 반짝였다. 그 사이에서 뭔가 어둡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병사는 홰에 불을 붙여서 불꽃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그것을 성벽 밑으로 집어던졌다. 노란 불꽃을 빙글빙글 돌리며 떨어진 횃불은 새까만 물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바위틈에 걸려 파도와 함께 흔들리는 작은 배를 잠깐 비추었다.

거기에는 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보고를 받은 당직 기사의 명령으로 두 척의 배가 병사들을 싣고 성의 남쪽 해안을 떠났다. 배는 뾰족이 솟은 바위 사이를 솜씨 좋게 피해서 빠른 속도로 초소 밑 절벽에 닿았다. 거기에서 그들은 작은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배 안에는 시체로 보이는 두 명이 누워 있었다. 병사 하나가 램프를 가까이 가져갔다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둘은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쥐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너덜거리는 한명에 비해 다른 하나는 핏자국으로 얼룩졌을 뿐 상처가 없다. 그 광경이 의미하는 것을 깨달은 병사가 욕지기를 느끼고 입안에 고인 침을 뱉었다.

죽은 사람이 입은 옷은 어부의 복장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이 배가 근처에서 침몰한 상선에서 나왔으리라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겨우 탈출했으나 표류하다 여기까지 밀려온 것이리라.

그들은 배를 해안으로 끌고 갔다. 거기에서 불태울 작정이었으나 장작과 기름을 준비하는 동안 기겁할 일이 벌어졌다. 시체 중 하나가 배에서 기어 나와 있었던 것이다. 멀쩡한 쪽의 시체였다. 겁이 없는 병사 한 명이 다가가서 확인한 다음 이 자는 아직 살아있다고 외쳤다.

병사들은 살아있는 자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지금 죽여야 할 것인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대부분은 이 참혹한 이방인을 불길하게 여겼다. 정황상 함께 있는 시체를 먹은 것이 분명하고, 살인을 했을지도 모르는 자였으므로 이 자리에서 죽이고 불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어가던 사람이 쉰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그 이름을 듣고 병사들이 다가가자 시체와 다름없던 사람은 파들파들 떠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가락에서 달빛을 받은 금반지가 노랗게 번쩍였다. 병사 중 한 명이 반지에 새겨진 문장을 알아보았다.

반지는 마른 손가락을 떠나 당직 기사에게 건네졌다. 당직 기사는 국왕의 친위기사 중 한 명인 율리스에게 그것을 가져갔다. 율리스는 기사에게 병사들의 입단속을 명령한 다음 자신의 입도 꽉 다물고 어두운 복도를 뛰었다.

그가 성안 깊숙한 곳에 위치한 왕의 침실에 도착했을 때 그 방의 주인은 네 번째 아내를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 율리스가 그를 깨우기 위해 다가갔지만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새벽에 소리도 없이 왕의 침실에 들어오는 건 암살자뿐이야.”

그는 이미 깨어있었다. 귀찮은 듯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리는 그에게 율리스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반지를 내밀었다.

“폐하께서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왕은 반지를 받아 어둠 속에서 만지작거리더니 이윽고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알몸인 채 창가로 걸어간 그가 달빛에 반지를 비추어보았다. 잠시 반지를 살피던 그가 물었다.

“이것을 가져온 자가 이름을 말하던가?”

“폐하의 아명밖에 말하지 않았습니다.”

율리스가 대답했다. 왕은 콧수염 아래에서 붉은 입술을 크게 휘었다.

“그에게 쉴 곳과 좋은 술을 보내고 아침에 함께 식사하겠다고 전해라.”

“송구하오나 폐하, 의관의 말로는 그가 날이 샐 때까지 숨을 쉴 수 있을지 모르겠답니다.”

율리스의 말에 침대로 다시 돌아가던 왕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치자 율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둠속에서 빛을 내는 왕의 청회색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얗게 벼린 칼날이 눈길을 따라 번득였다.

마주보지 않았는데도 그의 시야 안에 있는 것만으로 율리스는 목덜미가 서늘했다.

“왜 놀로파의 신전에 데려가지 않았나.”

왕이 조용히 물었다.

“그는 인육을 먹었습니다. 표류하던 중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놀로파의 사제들은 부정한 자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며 치유를 거부했습니다.”

왕은 미간을 모으고 생각에 잠겼으나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앞장서게.”

그가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

율리스는 왕을 안내해서 어두운 왕성 안을 걸었다. 그들은 지키는 병사가 없는 곳을 골라 교묘히 성을 가로질러 남쪽 성탑 중 하나로 들어갔다. 성문에 가까운 탑이었다. 안은 등불 두 개로 환히 밝혀졌고 병사 한 명이 지킬 뿐이었다. 왕과 친위기사가 들어서자 병사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왕은 시선만을 움직여 병사가 지키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짚이 깔린 바닥에 허수아비 같은 남자가 누워있었다. 흐트러진 옷 사이로 드러난 남자의 몸은 생명과 물기가 증발해 하얗게 말라붙은 모습이었다. 멍으로 흉하게 얼룩진 가슴을 미약하게 움직이는 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징후였다.

“외상은 별 것 아닙니다만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고 내장이 심하게 상한 상태라고 합니다. 열흘 전 근해까지 폭풍이 다가왔으니 그때 휩쓸린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무렵 해류는······.”

“해류는 상관없어.”

왕은 딱딱한 목소리로 율리스의 설명을 막았다.

“그는 셈레의 신자(臣子)다. 어디에서든 반드시 목적한 곳을 찾아가지.”

왕은 남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상체를 기울였다. 죽어가는 그로부터 자신이 기억하는 옛 모습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어디에서도 단련되어 단단한 몸과 혈색 좋은 얼굴로 이따금 웃던 정직한 사내의 모습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눈을 떠라, 하코브. 여행자의 신에게 무덤으로 데려가 달라고 빈 것은 아니겠지.”

시체나 다름없어 보이는 남자에게 왕이 나직이 말했다. 자신이 명령하면 죽은 자라도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율리스가 이 사람은 도저히 대화할 상태가 아니라고 설명하려 했으나 그 순간 남자가 눈을 떴다. 왕은 십 수 년 전과 변함없이 온화한 갈색인 그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시메트라······.”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지금에 와서는 그 이름을 불렀던 사람도 몇 남지 않은 왕의 아명이었다. 왕은 멋들어진 콧수염과 함께 볼을 실룩이며 웃었다.

“테리아의 국왕을 그 이름으로 부른 것을 용서하겠다. 이제 원하는 것을 말해라. 하코브 네르세스.”

남자의 가문명을 들은 율리스가 왕의 뒤에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새삼, 허옇게 죽어가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왕의 친위기사를 놀라게 만든 남자는 갈라진 입술을 움직여 바람 새는 목소리를 냈다.

“다피나······ 로우벤······.”

두 개의 이름을 겨우 발음하고, 하코브는 더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숨과 함께 입술만 부들거렸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중이라고 믿는지 필사적으로 얼굴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르반에 있는 다피나와 로우벤인가. 너에게 빌린 5년을 그들에게 갚으면 되는가?”

왕이 물었다.

그 순간 죽어가던 남자의 눈은 잠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마치 재속에 파묻힌 숯이 바람이 불자 한순간 주황빛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그는 생기를 띠었다. 그러나 불꽃은 천천히 사그라들어, 마침내 왕과 그의 친위기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잿빛의 껍데기 속에서 차갑게 식었다.


작가의말

저를 아는 분도 모르는 분도 모두 반갑습니다.

메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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