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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끼적 님의 서재입니다.

잿빛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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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끼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0
최근연재일 :
2021.08.04 03:27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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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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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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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53화-진실, 그리고 진심(3)

DUMMY

“박사님, 사람들을 구하고 싶으시다면··· 제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니··· 그러지 않고도 널 막을 수 있지.”


“······?”


한민성은 몸을 일으켜 가온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그런 그의 손에는 크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쥐어져 있다.


“넌 날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말했어. 날 사랑하는 감정이 진실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지.”


“네 감정이 진실이란 걸 증명해 봐. 날 위해 당장 그 미친 짓을 멈춰. 그렇지 않다면···”


한민성은 자신의 손에 든 유리 조각을 목에 겨누며 이야기한다.


“···죽어버릴 테니까.”




53화-진실, 그리고 진심(3)




과학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폭주하는 존재를 멈춰 세우기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그 승부수가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가온의 미간을 찌그러지고,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 진심이십니까?”


“물론. 네 감정이 진실이라며? 그럼 넌 멈추겠지. 인간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거든.”


“···아니, 박사님은 그 파편을 스스로 박아넣으실 수 없습니다.”


“이유나 들어보지. 어째서?”


“전 인간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고결함과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그 화려한 가면 뒤에 숨은 인간들의 추악한 본성 또한 보았습니다.”


“그런 그들은 이기심과 무사안일주의의 신실한 신자이자 노예였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공동체의 규율을 무시하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으며, 자신의 편안함과 이익을 위해 기꺼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는, 그런 족속들이 인간이더군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박사님은 박사님 자신이 그 모두에 속하지 않는다고 자신하실 수 있나요?”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면 되겠네. 난 내 죽음으로 인간성의 선한 의미를, 넌 그 정신 나간 짓을 그만두고 나에 대한 사랑을 말이야.”


“···그런다고 절 막으실 수는 없습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그렇게 유리 조각을 쥔 박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동시에 붉은 액체가 그의 손에서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박사!!”


그런 한민성은 저지하려 다가가는 부회장이었지만, 한민성의 멈추라는 손길에 그는 걸음을 멈췄다.


“멍청한 짓입니다. 그만두십시오.”


“가온, 마지막으로 말할게. 당장 멍청한 짓을 그만둬.”


날카로운 칼날을 스스로 자신의 목에 가져대 대는 한민성의 표정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천상현의 목울대가 침을 넘기며 크게 움직였다.


“···그런다고 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네 전원을 내려. 넌··· 조금 잠에 들 필요가 있겠어.”


유리 파편은 자신의 뾰족한 머리끝을 한민성의 피부에 거리낌 없이 가져다 댄다. 가온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한다.


“···그거 당장 내려놓으십시오!!”


“왜, 두렵나 보지? 내가 죽을까 봐?”


“그런 행동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현명하게 생각하시죠!!”


“아, 그래. 넌 두렵겠지. 넌 날 사랑한다고 울부짖었지. 그 결과가 내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이리 내놓으시죠!!!”


결국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던 가온은 자신의 꼿꼿했던 자세와 함께 무너졌다. 화마의 광배를 뒤로하고 굳건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굳건히 버틸 것처럼 여겨졌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한민성의 손에서 칼날을 빼내기 위해 달려드는, 물리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이거 놓으시죠!!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가온이 한민성에에 다가가지 못하게 가온을 붙잡는 부회장의 나이스한 판단. 한민성은 계속 말을 뱉어냈다.


“내 친구를 놔주는 게 좋을 거야. 내 목에서 피가 얼마나 흐를지 모르거든.”


피부와 입을 맞추고 있던 유리 파편을 미세하게 한 발짝을 앞으로 내딛는다. 따끔한 통증이 서늘하게 한민성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붉고 얇은 액체 한 줄이 과학자의 흰 가운이라는 도화지 위에 선명하게 그어진다.


“당장 그만두십시오!! 당장!!”


가온이 부회장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러나 부회장도 보통 근력의 소유자가 아니었기에, 그물 안에서 벗어나려 팔딱이는 물고기마냥 몸부림치는 가온을 효과적으로 저지해내고 있었다.


“가온, 당장 폭발 프로토콜을 정지 시켜. 그리고 네 전원을 내려.”


“이건 잘못됐습니다!! 전 단지 박사님의···!!”

이제 가온의 육성은 거의 절규하다시피 들려왔다. 그러나 한민성의 목에 박힌 유리 파편은 더욱 깊숙이 피부를 파고들며 더욱 더 많은 피를 탐할 뿐이었다.


가온은 아무 말 않고 계속해서 몸부림칠 뿐이었다. 그러다 부회장의 품에서 기어코 벗어난 그녀였지만, 중심을 잃고 우당탕거리며 박사를 향해 달려가는 가온의 발을 걸어버린 부회장의 임기응변 덕분에 가온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주저앉은 가온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민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이중적인 의미로 일그러져있었다.


이성적이고 현명했던, 인간이 발전되고 편안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겠다는 숭고한 목표 아래 달려가던, 그것을 품고 움직이던 차분한 영혼의 얼굴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제대로 된 판단마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그녀의 온갖 감정이 뒤섞인 듯한 복잡하고, 안 좋게 말해 파멸의 문턱에 서 있는 듯한 그녀의 상황을 그녀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절박함. 그것이 가온은 구속했다. 넘어진 몸을 일으킬 생각은 않고 한민성의 손에 들린 유리 파편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는 가온의 손은 애처로웠다.


그녀의 콧잔등에 그녀가 사랑하는 자의 핏방울이 떨어져 흘러내린다. 피의 폭포는 더욱 거세진다. 영혼의 얼굴엔 사랑하는 이의 혈흔이 장식되어있었다. 아니, 사랑하는 이의 혈흔은 그녀를 완벽히 짓밟았다.


기어코 그녀는 생각해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움직였던 자신의 행동이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가온. 이건 그동안 나와 너의 상호존중 속에서 이루어진 부탁의 ‘개념’이 아니야.”


과학자가 자신의 작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창조주와 피조물. 널 만든 자로서 네게 내리는 명령이지.”


“······”


영혼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수평선 위에서 일어내는 권유의 언행이 아닌, 수직선을 따르는 명령이라고.”


“자, 실랑이는 끝났어. 난 네게 명령을 내렸고, 이제 모든 것이 네게 달렸어.”


“네가 내리는 판단, 네가 행하는 행동이 너 자신에 대해 정의할 것이고,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말을 적어 내려갈 거야.”


“···시간이 많지 않아, 가온···”


한민성은 눈을 질끈 감고 유리 파편을 자신에게 더욱더 강하게 집어넣는다. 상당한 크기의 유리 조각은 자신의 몸의 절반을 한민성의 피부 속으로 파묻은 뒤였고, 그에 상응하는 혈액이 가온의 머리를 향해 흘러내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들려오는 영혼의 말은 이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폭발 프로토콜 중지 중. 해킹툴 작동 정지···”


“···최첨단 국가 관리 시스템 가온, 작동을 중지합니다···”


“···지금까지 가온, 세상의 중심이자 질서의 관리자였습니다.”


바닥에 엎드려 중얼거리던 안드로이드의 머리가 거칠게 바닥에 부딪힌다. 그런 그녀의 하드웨어에는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렇게 하나의 소동이 막을 내렸다. 유토피아 연구소는 그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화마에 휩싸여 이글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스카이 타워의 엘리베이터는 언제나처럼 방문객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런 환대를 받는 자는 다름 아닌 한민성의 동료, 천상현이었다.


간밤의 소동에 약간의 상처를 입어, 그의 얼굴에는 밴드 몇 장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중 한 장은 떨어지려 하고 있지만, 그런 것은 지금 부회장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한민성 박사가 묵고 있는 호실로 향한다.


그가 방문을 두드린다. 그 문을 열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이은아였다.


“아, 부회장님···”


“이른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혹시 한민성 박사 지금 깨어있습니까?”


이은아는 대답을 망설이더니 이내 입을 연다.


“그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해요. 대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젯밤부터 한숨도 안 자고 멍 때리고 있어요.”


“······”


부회장도 난감한 듯 턱을 문지르며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둘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


“···박사께 무슨 일이 있었는진 알고 계시겠죠.”


“뉴스 봤어요. 연구소가 불탔다고···”


“···아마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좀 필요할 겁니다. 저 대신 잘 좀 챙겨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럼···”


한민성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회장은 복잡한 마음을 집어넣고 굳은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방 안의 침대에 몸을 묻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한민성의 표정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창밖은 매우 흐렸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매우 우울한 아침이다.




53화-진실, 그리고 진심(3)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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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55화-더욱더 가깝게 21.07.12 15 2 10쪽
54 54화-결과가 아닌 과정일 뿐 21.07.10 10 2 11쪽
» 53화-진실, 그리고 진심(3) 21.07.09 14 2 10쪽
52 52화-진실, 그리고 진심(2) 21.07.08 19 2 11쪽
51 51화-진실, 그리고 진심(1) +2 21.07.08 28 2 12쪽
50 50화-영혼과 인공지능의 격돌(6) 21.07.06 14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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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화-단지 비극인 것인가 21.05.12 104 13 12쪽
1 1화-선구자의 죽음 +5 21.05.12 331 3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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