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향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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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한민성 박사. 제 소개는 안 해도 되겠죠?”
“물론이죠. 위성그룹 1순위 후계자, 천상현 부회장님.”
3화-향방
접견실엔 대통령은 없고 위성 그룹 천상현 부회장이 앉아있었다. 그는 일어나 내게 악수를 권했다. 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위성 그룹. 세계 최고의 하드웨어 제작 그룹. 전 세계 안드로이드와 로봇 등 각종 제조 기술 일인자. 젓가락부터 로봇, 우주선까지 위성 그룹이 다 만든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겠는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기업이다. 그런 기업의 부회장이 지금 내 앞에 있는 천상현 부회장이다.
“누나분의 일은 유감입니다.”
“···감사합니다.”
“뛰어난 사람이었죠. 성격은 괴팍했어도, 최고의 기술자이자 과학자였음은 틀림없습니다.”
“누나를 잘 아셨나요?”
“알다마다요. 유토피아 프로젝트 때문이라도 많은 논의와 협력이 필요했으니까요. 그쪽 연구소와 저희 그룹 간에 관계 때문에라도 말이죠.”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정부 주도의 대규모 프로젝트다. 정부는 이 전례 없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추진과 성공을 위해 국가가 보유한 ‘최고의 인재와 단체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 ‘최고의 인재들과 단체들’에 선정된 것이 누나와 나의 유토피아 연구소, 그리고 위성 그룹이다.
유토피아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안드로이드의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 제작을 맡았고, 각종 하드웨어와 장비 제공을 위성 그룹이 맡았다. 그렇기에 두 단체 간에 지속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했을 것.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젊은 남자는 그렇게 해서 누나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군요.”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면···”
“······?”
“···한서월 박사의 사망으로 생긴 여파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알고는 있습니다. 당장 오는 길에도 난리 통을 봤는걸요.”
“사회적 혼란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유토피아 프로젝트에 대한 굉장한 기대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아시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지상낙원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것은 사람들의 유토피아 프로젝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기대를 불러왔다. 지금 광장에서 고철들을 부숴 버리자는 반(反) 안드로이드 세력 중에서도 유토피아 프로젝트에 대한 반감이 없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들은 단지 빼앗긴 일자리, 그리고 단지 ‘인간을 닮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혐오감에 불탈 뿐이다. 과거의 잔혹한 악습인 인종차별과도 닮아있다. 왜곡되고 도를 넘은 이유 없는 혐오는 결국 누나의 목숨을 앗아갔지···
“···여론은 한서월 박사의 죽음으로 인한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중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저희 그룹의 주가도 전례 없는 폭으로 요동치고 있고, 아까 임원들과 주주들도 푸념을 쉴 세 없이 늘어놓았습니다. 어찌나 시끄럽던지. 어쨌든, 중요한 건···”
“······?”
한민성 부회장이 한껏 뜸을 들였다. 그는 짜증 난다는 표정과 함께 입을 다시 열었다.
“···아버지는 공석이 된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와 인공지능 ‘가온’의 개발 총책임자로 당신을 내정하셨습니다.”
그는 아무래도 못마땅하단 표정이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곤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전 당신이 못 미덥습니다.”
남 싫단 소릴 당사자 앞에서 하는 위인은 드라마에서나 봤는데.
“아버지께선 한서월 박사의 대체자로 당신이 딱 맞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전 생각이 다릅니다. 아무리 당신이 그녀와 오랫동안 일을 같이했다 해도, 당신은 그녀와 다릅니다. 그녀는 굉장한 두뇌와 창의력, 그리고 뛰어난 실행력으로 무장한 사람이었죠. 반면 당신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당신과 한서월 박사가 쌓아 올린 업적들, 그것 중 당신이 한 건 뭡니까? 세상을 바꾼 그 모든 것들. 한서월 박사가 모든 걸 이뤄낸 거 아닙니까?”
굉장히 익숙한 시선. 이 남자 말대로 누나는 한 세기에 둘도 없을 천재 중의 천재가 맞다. 기술 발전 그래프의 경사를 한없이 끌어올린. 최고의 과학자. 덕분에 누난 항상 주목받았다. 그런 누나에 비해 내가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나도 그런 누나에 버금가는 천재라고. 이런 식의 저평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말이지.
“부회장님. <안드로이드의 역할과 의무,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라는 논문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알다마다요. 엄청나게 유명한 논문 아닙니까. 안드로이드라는 존재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정립한···”
“잘 아시네요. 그 논문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시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만.”
“한서월 박사 아닙니까?”
“아뇨, 접니다! 한! 민! 성! 저라고요!”
한민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 톤 높은 목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저는 세계적 주목을 받은 논문의 주인이자, 지금의 안드로이드의 하드웨어를 설계하고 구동시켰습니다. 또 위성 그룹의 상점에서 판매되는 커피머신부터 자동차, 홀로그램 시계, 우주선까지! 제가 개발에 관여하지 않은 걸 찾는 건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격 일 겁니다. 부회장께선 저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그 쉬운 인터넷 검색 한 번을 안 해보신 게 분명하군요.”
부화장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한민성은 숨을 가다듬고 이번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고 기술의 힘으로 지상 낙원을 건설할 이 위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건 과학자로서 크나큰 영광일 겁니다. 그런 만큼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라는 자리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였던 ‘한서월 박사’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자리였죠. 하지만 저 역시도 그에 걸맞은 수준의 과학자라 자부합니다.”
“······”
“뛰어난 괴학자의 뒤를 뛰어난 과학자로서 이어받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천상현 부회장은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이 없었다. 곧이어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오묘한 표정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했다. 곧이어 표정이 차갑게 돌아서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한민성 박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유토피아 프로젝트에서 손 떼시죠. 당신이 그만두지 않으면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이 세상에서 없던 일이 될 겁니다.”
“당신이 무슨 수로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까?”
“유토피아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위성 그룹의 협력과 지원을 끊을 겁니다, 그러면 어차피 망하게 돼 있지.”
한민성은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그에 앞에 앉아있는 오만한 사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의 누나와 자신이 일궈낸 것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협박까지. 하지만 그는 화를 삭이고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를 그렇게 옆집 애완 로봇 이름 부르듯이 쉽게 쥐락펴락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중요한 건 제가 그렇게 할 거란 거죠.”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럼 이해하지 마십시오. 전 당신 같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 이미 검증된 인재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비난하고 내쫓겠다고 협박하는 위인보다는 훨씬 나은···!”
“그만!”
양쪽의 목소리가 높아질 즈음 진중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침묵이 감돌기 시작한 접견실 안은 그의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천상명 대통령. 본래 위성 그룹의 회장이었으나 정치에 도전, 기업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힘입어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대외적으론 모든 실무를 아들 천상현 부회장에게 맡기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현 위성 그룹의 명예회장. 한서월 박사와 함께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고안해낸 사람이다.
“···각하.”
“···아버지.”
“너 이 녀석,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부른 손님께 이 무슨 무례냐!”
“아버지, 저는···”
“닥쳐라! 네가 아무리 지랄해도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힌민성 박사다. 그런 줄 알고 당장 꺼져!”
“······”
천상현 부회장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민성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더니 중얼거렸다.
“천천히 두고 보자고···”
검은 정장의 젊은 남자는 접견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한민성 박사, 정말 죄송합니다. 제 아들 녀석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대통령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한민성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박사. 내가 박사를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새로운 책임자로 결정한 것은 단순한 결정이 아닙니다. 난 박사의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박사가 한서월 박사와 함께 쌓아온 기술의 진보,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과학의 발전을 말이죠. 박사 같은 인재야말로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이끌어 갈 진정한 과학자입니다.”
“부디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새로운 리더가 되어주시죠. 박사라면 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박사의 의사입니다. 박사가 거절한다면...”
“···하겠습니다.”
한민성의 눈이 빛났다.
“대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얼마든지. 준비되면 연락해 주십시오.”
“저···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어차피 제 아들 녀석이 할 말 안 할 말 다 한 것 같으니.”
“그럼 이만···”
“박사.”
한민성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힘내십시오.”
졉견실 문이 닫혔다. 천상명 대통령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형식적인 위로밖에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한 걸까,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
*
그는 평소엔 술을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술을 찾을 때가 있었다. 바로 화가 머리끝까지 솟을 때 말이다. 한민성의 머리에서 부화장의 주먹을 부르는 얼굴과 말투가 떠나지 않았다. 그 징글맞은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화가 치솟았다.
그래서 오늘 그는 술이 먹고 싶었다. 그는 화이트에게 집에서 가까운 술집에 내려달라 했다. 그렇게 그는 바에서 술을 한참 들이켰다. 분침이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손님.”
“······”
“손님.”
“···응?”
“손님, 마감 시간입니다. 결제하고 돌아가 주십시오.”
“아라따···”
“결제를 진행해주세요.”
“우웅···”
한민성은 비몽사몽 그 자체였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 보였다. 그는 술값을 내기 위해 안드로이드와 눈을 맞추려고 시도했다.
“인식 실패. 제 눈을 똑바로 응시해주세요.”
“아우···”
“인식 실패. 제 눈을 똑바로 응시해주세요.”
“빨리해봐 새꺄···”
“홍채 인식 성공. 73,500원 결제 완료. 한민성 님.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코올 수치가 매우 높습니다. 택시를 불러드릴···”
“아뉘야! 돼써! 집이 코아핀데! 내가 갈끄야···!”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그뤠! 수고해···!”
바에서 집까진 단 세 블록. 하지만 알코올의 힘은 세 블록은커녕 세 발자국도 안돼서 한민성의 발목을 잡았다.
“꾸왁!”
그는 길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드르릉··· 드르릉···”
길바닥에 널브러진 그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선다...
*
눈부신 햇살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온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눈이 안 떠진다.
“우웅···”
오늘따라 침대가 왜 이렇게 불편한 거지. 난 몸을 뒤척인다. 그리고 그대로···
‘쿵!’
“으악!”
···침대에서 떨어졌다. 떨어질 정도로 움직이지는 않았는데...?
“뭐, 뭔데···?”
난 주위를 둘러봤다. 어색한 풍경이다. 당장 내 눈앞 시야를 메꾸는 탁자부터가 우리 집에 있는 게 아니었다. 카페에나 있을 법한··· 아니 잠깐, 카페잖아?
휴먼스타그램 감성의 인테리어, 여러 탁자와 의자, 코를 간지럽히는 커피 냄새, 한쪽 벽을 차지하는 죽여주는 전망의 통유리와 의자까지. 분명했다. 카페였다. 카페 중에서도 2층. 내가 어떻게 여기 왔지?
“어머, 일어나셨네요?”
난 뒤에서 들려오는 차분하고 잔잔한, 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었던 건 계단을 타고 올라오고 있는 긴 금발 머리의 젊은 여자였다.
3화-향방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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