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영혼과 인공지능의 격돌(5)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으으···”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간만에 편안하게 잠들었던 과학자의 심기를 망할 반도체의 진동 소리가 건드렸다. 한민성은 이불을 머리끝 까지 뒤집어쓰고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아, 진짜!!”
짜증을 부리며 한민성이 일어났다. 창밖에는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빛이 너무 선명했다.
-AM 02:49-
“지랄, 이 시간에 웬 전환데···”
한민성이 눈을 반쯤 뜨고는 힘겹게 자신의 시계를 터치한다. 그리고 다시 몸을 침대로 던짐과 동시에 얼굴을 베개에 묻고는 중얼거린다.
“···여보세요?”
“박사!!!! 박사!!!!!”
전화 너머로 엄청나게 크게 들려오는 부화장의 육성. 덕분에 한민성의 잠은 싹 달아났다.
“뭐, 뭡니까?!”
“지금 당장 연구소로···!!”
‘뚜-뚜-뚜···’
“부회장?? 부회장!!”
“젠장!!”
그 길로 한민성은 옷걸이에 걸려있는 흰 가운만 걸치고 빠르게 집을 나섰다.
49화-영혼과 인공지능의 격돌(5)
도서관 저만치에서 아주 작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그리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소리의 한복판에 있던 가온은 아까까지는 저 소리가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었지만, 오히려 지금 가온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저 소음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약간의 트릭, 그리고 머리를 쓴 덕분이었다. 즉석에서 진행한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낸, 가온의 홀로그램을 이용한 교란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렇게 하란이 야심차게 준비한, 가온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 ‘그로어’를 간단히 따돌려낸 가온이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언제든지 그로어는 자신들이 쫓고 있는 가온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고, 그러한 사실을 가온도 잘 알고 있었다.
가온의 발걸음이 목표를 향해 다시 빨라진다. 그러나 이번엔 긴박하지 않은, 조금은 차분한 속도와 편안한 마음과 함께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온은 움직이던 다리를 멈췄다.
“결국 원점이네.”
가온은 자신의 앞을 버티고 서 있는, 익숙한 책장과 바닥에 던져져 있는 책들을 보면서 중얼거린다. 시간과 노력을 꽤나 들였으나 진도는 나가지 못한, 발전이 없는 상태 그대로였다.
하란을 찾아내기 위해 이 광활한 도서관을 가로지르는 대장정의 결과가 그것이었다. 약간의 허탈함이라는 것이 가온 주위에서 알짱거렸다. 하지만 가온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하려 계속 움직인다.
“보자, 그러니까··· 여기 알파벳 S가 있다는 건데.”
이 도서관에는 가온에게 필요한 알파벳 S가 하필이면 두 권밖에 없고, 그중 한 권은 도서관 반대편 책장에 깔려있다는 것, 그리고 이곳에 마지막 남은 알파벳 S가 있다는 것. 이것이 현 상황을 깔끔히 정리해주는 간결한 요약이다.
하지만 가온은 처음에 이 책장에서 알파벳 S를 찾아내지 못했다. 장서 보관 내역이 사실이라면, 이곳에 알파벳 S가 있어야 정상임에도, 아무리 찾아도 이곳에서 알파벳 S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가온이 처음에 이 책장에 호기심을 가졌을 때 처음으로 집은 책이 바로 지금 애타게 찾고 있는 그 알파벳 S가 적힌 책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이곳에 있는 게 분명한데, 보이지를 않으니 가온은 답답할 뿐이었다.
“어디 있는 건데?”
가온은 책장을 몇 번이고 훑었다. 인공지능의 뛰어난 시각 능력과 빠른 처리 속도는 모든 정보를 오차 없이, 그리고 빠르게 받아들이고 분석해낼 수 있었고, 그것은 지금 책장을 향해 열심히 눈알을 굴리는 가온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가온의 성능은 예사 안드로이드와는 아예 다른 차원이라도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그런 가온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없다고요, 이 사람들아!!!”
···음, 주위엔 아무도 없는데 말이지.
뭐, 어쨌든 가온에게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제로. 그렇다면 이 책장엔 알파벳 S가 없는 게 확실해졌다. 가온은 다시 한번 도서관 컴퓨터 앞으로 몸을 옮겼다. 그렇게 분주하게 홀로그램을 두드렸지만, 결과는 같았다.
-도서 소장 위치: MW-12, JW-19-
“허, 돌겠네.”
가온은 이쯤 되니 답답함을 넘어서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였다. 가온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이 문장을 만들기 위해 모아둔 책더미를 뒤졌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오!!!”
‘팍!’
결국 가온이 이성의 끈을 놓았다. 화가 치밀음과 동시에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내던진 가온이었다. 그러자 그 책이 책장 밑 공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걸 본 가온이 잠시 얼어붙었다.
“···설마?”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가온이 몸을 바짝 바닥에 붙이고는 책장 밑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까 밑으로 들어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시야를 조금 돌리자···
“찾았다!!”
···다른 책 한 권이 그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굉장히 깊숙이 들어가 있는 책을 꺼내기 위해 가온은 팔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팔을 몇 번 더듬거리더니 곧이어 그곳에서 나온 가온의 손에는 그토록 찾던 알파벳 S가 당당히 적혀있었다.
아마 가온이 처음에 집었을 때 무심코 던진 것이 안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가온은 책과 자신의 팔에 묻은 굉장한 양의 먼지를 털어냈다. 책장에 새겨진 알파벳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됐어, 이제···”
가온은 빠르게 모아둔 책들을 집어 들고, 자신의 생각대로 책들을 책장에 꽂으며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t···o··· t···h···e···”
“됐어.”
마지막 하이픈은 끼워 넣으면서 가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온의 눈앞에는 자신이 만들어낸 문장이 제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었다.
-Show me the way to the main program-
‘팟!’
‘메인 프로그램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줘’라는 뜻의 가온의 문장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벽면에 붙어있던 횃불 여럿이 꺼지면서 조명이 어두워졌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길을 알려주는 거라고 생각한 가온은 불이 꺼진 공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팟!’
그러자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의 조명이 다시 꺼졌다. 가온은 그것을 따라 다시 움직였다.
*
조명이 어두워진 곳으로 가온이 움직이면, 다시 다른 곳의 조명이 꺼지는 방식. 이 공간은 그러한 방식으로 길을 안내했고, 가온은 그것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꽤 걸었는데, 라고 가온이 느낄 즈음, 도서관 중앙의 거대한 원형 홀에 다다른 가온이었다. 화려한 문양과 그림들로 장식된 돔 천장. 그 천장에는 희한하게도 다섯 개의 쇠사슬이 마치 우산살 모양과 비슷하게 매달려있었다. 그 천장 아래에서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날아오를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독수리 석상이 눈에 띄었다.
‘팟!’
가온이 그 석상을 향해 다가가자, 석상 주위에서 빛을 내던 횃불들이 일제히 꺼졌다. 가온은 다른 곳에서 불이 또 꺼지지 않았나 주위를 살폈지만, 이후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여기라는 건데, 뭐가 있나?”
가온은 석상 주위를 돌면서 특별한 게 있나 자세히 살폈다. 독수리의 뒤쪽에 약간 돌출된 부분을 발견한 가온은 그것을 가볍게 눌러보았다.
‘카가가강!!’
그러자 요란한 금속 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가온이 위를 올려다보자 매달려있던 쇠사슬 한쪽이 분리되어 맹렬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우와악!!”
가온이 빠르게 몸을 던졌다. 쇠사슬이 가온의 머리칼을 스쳐 갔다. 아마 조금만 늦었다면 가온은 그대로 산산조각 났을 것이 분명했다.
몸을 일으킨 가온의 눈에는 그 쇠사슬들이 석상 곳곳의 고리에 걸리는 것을 보았다. 두 개는 독수리의 날개에, 하나는 몸통 위쪽에,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뒤쪽에 연결된 쇠사슬들은 계속 움직이더니 이내 팽팽해졌다.
‘카가가강···’
이번에도 금속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까의 속도에는 훨씬 못 미치는, 아주 느린 속도였다. 그 소리는 팽팽해진 쇠사슬이 부들거리는 소리와 함께 더욱 커졌다.
“와우···”
그 쇠사슬들은 기어코 그 석상을 들어내서 천장 쪽으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독수리의 자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날아갈 듯한 자세에서, 날개가 펼쳐지고 몸이 펴지는 자세로.
천천히 올라가는 속도와 동시에 석상의 자세도 천천히 변했다. 과거의 가온이었다면 어떤 원리로 구동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장 먼저 가졌겠지만, 지금의 가온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흔치 않은 광경을 그저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팟!’
석상이 완전히 천장으로 올라가자, 석상의 독수리도 시원하게 창공을 가르는 듯한, 하늘을 나는 자세로 변해있었다. 동시에 이번에는 독수리 주변뿐만 아니라 중앙 홀 전체의 조명이 아까보다 더욱 강한 세기의 빛을 내기 시작했다. 환해진 주변의 분위기는 약간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기도했던 독수리의 자태를 더욱더 위엄있고 화려하게 해주었다.
“······”
가온은 잠시 멍하니 그 독수리를 바라보다가, 석상이 있던 자리로 눈을 돌렸다. 원래 석상이 자리하고 있던 곳에는 원형 구멍이 뚫려있었고, 그 안에는 나선형 계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명 하나 드리워있지 않은,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어두운 구멍 안, 그리고 그 구멍을 관통하는 계단. 가온은 망설임 없이 그 계단에 발을 얹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가온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경쾌한 발걸음은 거침으로 변모한다. 그런 가온의 표정은 굳건해짐과 동시에 일그러진다.
“···하란, 장난질은 여기까지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깊게, 더욱더 깊게 내려가는 영혼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진다.
49화-영혼과 인공지능의 격돌(5)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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