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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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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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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992,898

작성
15.08.0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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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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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
20쪽

03화 - 2

DUMMY

“여자애보다 늦게 나오고, 최악이네.”

“으…… 미안.”

약속 시간의 약속 장소. 10시에 딱 맞춰 왔건만 희세는 팔짱을 끼고 마음에 들지 않는 투로 이어폰을 빼며 말한다. 약속 시간대로 왔는데도 핀잔이라니. 절로 주눅이 든다. 우선은 같이 걷는다.

희세는 오늘, 엄청 예쁘다. 빛이 나는 듯 예쁜 모습. 그리 야하지도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수수하지도 않은 적당한 코디. 원래도 예쁜 희세지만 꾸미고 온 모습이 더할나위 없이 예쁘다. 요즘들어 머리를 묶은 모습을 많이 보여줬는데 오늘은 풀어서 곱슬거리는 긴 머리카락이 희세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뭐하고 놀지, 생각은 했어?”

“……남자애가 데이트 코스를 정하는 것은 굉장히 전근대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놀자고 먼저 제안을 한 것은 희세 본인이기에, 나는 너에게 데이트 코스를 위임하고자 했습니다. 딱히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너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에 생각한─”

“되게 시끄럽네. 남자든 여자든 실속 없이 말만 많은 건 안 좋다고 보는데. 남자냐 여자냐를 떠나서.”

“……결국 난 뭘 해도 까이는구나.”

“흐흣. 뭐, 내가 먼저 놀자고 했으니까 노는 건 확실하게 생각했으니까. 상관없어.”

평소 양성평등에 대해 강하게 주창하는 신여성(?) 희세이니만큼 그것을 이용해 장문의 변명을 꾸려왔다. 느긋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미리 생각을 해 두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역관광은 다른 역관광을 불러온다. 남·여이기에 앞서 ‘사람’으로서의 잣대까지 들이밀면 나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다. 한숨 쉬며 말하니 희세는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놀이공원 갈 거야.”

“놀이공원?!”

“어. 왜, 못 가?”

“아, 아니, 못 갈 건 없는데. 갑작스러워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달까.”

“어린애네. 놀이공원 가는 데에 마음의 준비를 하다니. 그냥 가면 되는 거잖아?”

“어…… 뭐, 그렇지. 가자! 놀이공원!”

예상치 못한 희세의 말에 흠칫 놀란 나. 놀이공원에 가는 게 그리 큰 일인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작은 마음을 가진 나로서는 큰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일이다. 일단 요금도 요금이고, 뭘 어떻게 놀까, 언제 돌아올까 하는 디테일한 계획을 세우고 놀러가는 스타일이니까, 내 성격은. 하지만 희세 앞이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가슴을 편다. 잠깐만, 현금이 얼만큼 있었더라…….

“들고 있는 건 뭐야?”

“……비밀.”

“도시락?”

버스 기다리는 시간. 보자기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에 싸인 무엇인가 들고 있는 희세. 어깨에 매고 있는 가방까지 더해서 상당히 불편하고 무거워 보인다. 들어줄 요량으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흠칫 놀라며 손을 피하고 작게 말하는 희세. 가만히 희세를 보다 말을 꺼냈다.

“……짜증나네. 눈치도 무드도 없는 아저씨.”

“아니…… 아저씨라고 무드도 눈치도 없는 게 아닌데. 너무 뻔히 보이잖아, 도시락이라는 게.”

“그럴 땐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게 미덕 아니야? 아는 애가 그래?”

“네 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지요.”

졸지에 18살이란 어린 나이에 아저씨가 된 나. 불만스럽게 말하자 희세는 더욱 불만스런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냥 넘어가 주는 게 미덕이었나. 한 가지 배웠구나. 지금은 망했지만. 얼른 희세의 손에서 보자기에 싸인 도시락을 뺏는다. 꽤나 묵직하다. 하긴, 두 명 분 음식이니 가벼우면 그건 그것대로 슬프지. 가방까지 같이 들고 있으니 꽤 무거웠을 텐데. 데이트 초반에 들어줘서 그나마 다행이다. 원래 여자애랑 다니면 남자애는 기본적으로 짐꾼의 역할을 해야지. 그게 미덕이지.

“…….”

“……흣.”

버스 안.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 조금 얘기하다 ‘시끄러워.’ 하곤 이어폰을 귀에 꽂는 희세. 무안하게 만들곤 음악을 듣다 금세 잠들었다. 혼자 망상이지만 아마 도시락 만들고 준비하느라 새벽같이 일어나 졸린 모양이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나온다. 곤히 자고 있는 귀여운 희세의 모습과, 열심히 음식 준비하고 나갈 준비하는 희세의 모습이 상상돼서. 생각 외로 귀여운 모습이 많은 희세다.

‘찰칵.’

“……? 뭐야 너. 설마, 사진 찍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딴 미친 짓 한 건 아니겠지?”

“아, 아니. 자는 게 귀여워서 찍었는데…….”

“미쳤어?! 너 그딴 짓 하는 놈이었어? 놀이공원 가서도 귀엽고 예쁘고 섹시한 여자애 있으면 막 찍을거야? 그러다 잡혀가는 거 몰라? 하, 진짜.”

“아니이…… 모르는 사람은 안 찍지.”

“내 놔. 지울 거야.”

의도한 것은 아니고 스스로 손이 움직여 자고 있는 희세의 모습을 찍었다. ‘찰칵’ 소리가 나자마자 번뜩 눈을 뜨는 희세. 신이시여, 왜 휴대폰 카메라는 ‘찰칵’ 소리를 끌 수 없는 것인가요. 분명 소리를 무음으로 해 놓았는데…… 나 같은 변태를 없애기 위한 정부의 눈물겨운 노력이구나. 그렇구나.

희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잔뜩 나를 닦달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자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찍은 것이니. 희세는 내 휴대폰을 뺏어 가차 없이 사진을 삭제하려 한다. 아아. 안타깝구먼.

“……예쁘긴 하네.”

“자화자찬 하면 기분 이상하지 않아.”

“시끄러. 내가 봐도 예쁘고 귀여운 걸 어떡하라고.”

“아아. 그렇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죄가 되면 안 되지.”

마음에 드는 듯 방긋 웃는 희세. 피식 웃음이 나와 놀리는 투로 말하니 희세는 또 뾰로통한 투로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좋게좋게 말한다. 하지만 희세는 가차없이 사진을 지운다. 아아…….

“찍을 거면 같이 찍어야지. 같이 놀러왔는데. 붙어.”

“어…… 어.”

‘찰칵!’

“아, 잘못 찍었다. 한 번 더.”

“…….”

희세는 대뜸 내 쪽으로 붙으며 말한다. 움찔 놀라게 된다. 너무─ 너무 가깝잖아. 게다가 같이 사진 찍다니, 이 무슨…… 연인 같은 짓인데! 리유하고도 해본 적 없는데! 아니 리유하고는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야, 나나 리유나 쑥맥이니까…… 이제는 내 자아가 분열해서 마음 속에서 둘이 싸우고 있구나. 아아. 아아.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별다른 저항 없이 희세와 같이 사진을 찍는다. 볼을 잔뜩 부풀리고 귀여운 표정을 짓는 희세. 반면 시무룩한 채 뭔가 뚱한 표정의 나. ‘뭔데 그 표정! 안 웃어?!’ 하고 윽박지르는 희세. 최대한 미소 지으며 잘 찍히려 노력한다. 마음이 불편해서 아무리 해도 영 좋지 않지만. 아아, 이 죄악감. 죄책감. 어떡할까.


“이제 가자.”

“응! 가자.”

아아…… 내 용돈. 오늘 돈 많이 쓸 것 같다. 입장만으로 이미 내 한 달 용돈의 1/3이 허공으로 날아갔어. 안에서 먹을 것 먹고 이러면 돈이 더 들 텐데. 희세와 노는 환상적인 광경 앞에 현실은 냉혹하다. 뭐가 어떻게 됐건 사람은 돈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자본주의라고, 희세. 데이트고 뭐고 간에.

하지만 그런 말을, 남자가 감히 찌질하게 내뱉을 수 없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식이기에 묵묵히 감내한다. 내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지. 매점 빵도, PC방도 당분간은 끊어야지. 오늘 하루를 20일치 쾌락을 희생해 바치리라. 크아아아! 리유에 대한 미안함과 죄악감으로 불안하던 마음이, 현실에 눈을 떠 그런 걱정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의 돈을 지불했는데 찝찝하다고 안 놀면 내 돈이 너무 억울해!

“……!”

“……왜. 창피해?”

“……여자아이가 더 적극적이네.”

“이상한 말 하지마, 변태야?”

“아니, 말이 그렇다고.”

문득 조금 앞서 걷는 내 손을 잡는 희세. 눈이 크게 떠진다. 부드럽고 따뜻한 희세의 손 감촉에 더욱 놀라게 된다. 왕방울만해진 눈으로 희세를 보니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묻는 희세. 잠자코 드립을 친다. 더욱 거만한 표정으로 말하는 희세. 고개를 저으며 앞을 바라본다.

손을 잡는 건, 리유하고도 했다. 아니 지금 상황을 왜 꼭 리유하고 비교해야 해?! 그게 아니잖아! 외간여자하고 감히 어찌 손을! 지어미가 있는 사대부가 어찌 다른 아녀자의 손을 잡는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어! 아무리 네가 훌륭한 말이라지만, 나는 네 목을 자를 수밖에 없구나. 이 손목을 당장……

─그러기에는 희세 손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여자애들은 손부터 다른 것 같다. 희고 보드라워보이는 모양새는 눈으로만 감상해도 기쁘다. 잡았을 때의 그 감촉. 남정내들의 거친 손─애초에 다른 남자애 손을 잡을 일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끔찍한 일이지만.─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감촉. 리유는 조금 마른 편이어서, 손도 마른 편인데 희세는 조금 살집이 있는 글래머러스한 스타일이라 손도 촉감이 더 좋다. 그러면서도 리유에 비해 손이 그리 크거나 하지도 않다. 키에 비하면 손이 작은 편이겠지.

……누가 보면 나 손 페티시 있는 줄 알겠다. 그보다, 리유하고 비교하는 짓이라니! 어이 그만 두라고 정웅도! 그거 위험하다고! 아핫! ……우와, 진짜 미친놈 같다, 나.

“놀이기구 잘 타?”

“음. 무서움은 잘 안 타는 편이라. 그럭저럭?”

“헤에. 엄청 겁 많을 것 같은데. 평소 네 성격 보면.”

“전혀. 아닌데.”

“흐흥, 그럼 내기할까? 제일 무서운 거 타고 사진 찍히는 걸로 판단.”

“좋아. 무슨 내기?”

“음…… 이긴 사람 부탁 하나 들어주기?”

“뭐, 나쁠 거 없지. 좋아.”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걸으며 말한다. 희세는 피식 웃으며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한다. 나를 무시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나를 무시하는 건 용서할 수 없어!!

남의 자존심이 들끓는다. 평소 나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사실 겁이 조금 있긴 하지만. 내 겁은 ‘귀신’ 같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무서움이고. 어두움이라던가. 어쨌든 밤에 귀신 나오는 그런 걸 무서워하는 거지, 놀이기구가 빨라서 무섭다거나 하는 유치하고 어린 겁이 아니다. 당당하게 희세의 내기를 받아들인다. 딱히 희세에게 부탁할만한 일은 없지만, 나쁠 거 없잖아?

“으아아아아아아─! 아악, 아악, 아아아악─!”

“우우우우우~~!!”

상반된 나와 희세의 반응. 나는 앞의 손잡이를 꼬옥 잡고 가련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목이 쉰 듯 비명조차 잘 나오지 않는다. 눈물까지 질끈 나올 것 같다. 반면 희세는 시원한 쾌감이 담긴 비명을 지른다. 딱 봐도 놀이기구를 즐기는 표정. 어떻게 그럴 수가! 90도로 꺾여 내려가는데!

처음엔 별 거 아닌 것처럼 탔다. 오전에 왔지만 사람이 많은 오늘, 1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타는 첫 놀이기구이기에 기대도 많이 했고. 8명이 타는 작은 열차. 천천히 평지를 달리던 놀이기구는 이내 좌우로 빛 한 줄기가 지나감과 동시에 속도를 올린다. 오오. 이거, 최대 시속 72km라고 했었지? 그럼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144km로 달리는 자동차도 타 봤는데.

라는 건 오산. 인생은 실전이다. X만아. 그런 식이면 시속 몇백km로 달리는 비행기 타면 원심분해 되야지. 바깥이 그대로 개방된 것과 내부에서 타고 가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니까. 엄청난 속도감에 곧 나는 공포에 질리게 됐다. 특히 엄청 높은 곳에서 쑤욱 내려갈 때의 그 철렁임. 가슴과 영혼은 위에 두고 쭉 내려오는 기분이다. 가슴이 짓이겨지는 듯 아려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비명을 지르게 된다.

“뭐해 멍청아, 손 놓고 소리 질러야지.”

“내비둬!! 하악, 하악…… 내버려 둬!”

“아하하! 완전 멍청이, 겁쟁이잖아!”

“후우…… 후우…….”

중턱에 도착해 잠깐 천천히 달리는 타이밍. 희세는 깔깔 웃으며 말한다. 손을 뻗어 꼬옥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내 손을 풀으려 한다. 나는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 생명줄을 놓으려 하는 희세가 악귀처럼 보인다. 무서워 죽겠는데, 손까지 놓으면 어떡하라고! 희세는 깔깔 나를 비웃는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라마즈 호흡법으로 쿵쾅대는 심장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한다. 하지만 심장이 진정되기 전에, 작은 열차는 다시금 출발한다. 끄으으으으으……아아아악!!

“아하, 아하하! 표정 봐 미친! 중력이 느껴진다 너? 표정 너무 리얼해!”

“으으…… 으으으…….”

1시간 만에 처음 탄 놀이기구. 1시간 기다리고 3분 타다니, 되게 손해보는 것 같은데. 거기다 정신은 놀이기구 입구에 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인데. 나오는 길에 큰 화면, 거기에 우리가 한참 빙빙 돌고 있을 때의 사진이 찍혀 있다.

무슨 중력 테스트 기계(?)에 들어간 듯 잔뜩 얼굴을 구기고 있는 나. 딱 봐도 공포에 질려 있다. 반면 희세는 환히 웃으며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즐거운 모습. 희세는 놀이기구 탈 때와 마찬가지로 깔깔 나를 비웃으며 말한다.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건 덤이다. 나는 창피해하는 것도 자존심 상해 하는 것도 느낄 겨를이 없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저 앓는 소리를 낼 뿐.

“그럼, 내 소원 들어줘야 겠네.”

“……마음대로 하시게. 후회없는 인생이었네.”

“내가 뭐 죽이겠데?! 그렇게 심한 건 안 시킬 테니까.”

“이미 저 놀이기구를 탄 시점에서 내 목숨은 다했어. 왜 저런 걸 태우는 거야. 나 죽이려고?!”

“그렇게까지 네가 겁쟁이인 줄은 몰랐지!”

“겁쟁이 아니야! 중력이 싫은 거다! 원심력도! 관성도!”

“뭐야 그게! 히히힛.”

사람들이 많은 공터를 걸으며 말하는 희세. 나는 체념한 투로 사극에 나오는 고어체로 대답한다. 적절한 말장난을 하며 서로 깔깔대며 웃는다. 무섭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타라면 절대 다시 안 탈 거지만.


“드디어 이 짐덩어리를 먹을 수 있는 거구나.”

“짐덩어리?! 기껏 어렵게 쌌는데 뭐 짐덩어리?!”

“아하하, 무거운 건 사실이니까. 어디 먹어볼까─”

10시 넘어서 만났기에,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 됐다. 오늘은 주말이라, 아침 일찍 희세를 못 만났기에 아침을 못 먹어서 상당히 배고프다. 뭐, 평소였다면 주말에도 거의 찾아오지만─ 데이트 준비 하느라 오지 않은 희세라. 그래서 늦잠 자고 간당간당하게 오느라 아침을 못 먹었지만. 심드렁한 내 말에 잔뜩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희세. 정성이 무시당하니 당연히 성을 낼 만도 하지. 얼른 달랜다.

“오! 역시, 희세야. 우와. 장난 아니네. 몇 시간은 걸렸을 것 같은데?”

“몇 시간은 오버고. 1시간 조금 넘게 걸렸나.”

“우리 엄마도 이렇게는 못 쌀 것 같은데. 어릴 때 봤던 도시락은 분명 이렇게 정성이 들어있지 않았어. 와, 대단하네.”

크고 아름다운 3단 도시락. 차곡차곡 풀어 놓으니 하나의 예술작품같다. 왜 그, 모양 엄청 예쁘게 해서 파는 비싼 도시락 있잖아. 그런 것처럼 예쁘다. 게다가 하나같이 내가 좋아하는 요리들만. 희세랑 아침을 같이 먹다보니 어느덧 희세가 나 좋아하는 요리를 파악할 수준이 되었구나.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내 감탄과 칭찬에 희세는 말없이 살짝 얼굴을 붉힌다. 천하의 나희세라도 칭찬에는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다.

“……어때?”

“개맛있어 미친! 이거는…… 오! 이것도! 아, 겁나 행복해졌어.”

“……헤헷.”

“너도 먹어! 엄청 맛있는데.”

“어어, 나는 알아서 먹어. 살 찌니까.”

“나는 잔뜩 멕이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며 조금 긴장한 표정이 되는 희세. 묘하게 귀엽다. 와구와구 먹으며 잔뜩 칭찬한다. 이런 때엔 기대에 부응하게 잔뜩 맛나게 먹어주는 게 남자의 의무지. 맛있는 음식들의 향연에 행복감이 온 몸으로 퍼진다. 희세는 요리 잘 하니까. 내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희세는 그녀답지 않게 수줍게 웃으며 좋아라 한다. 더욱 맛나게 먹는다.


“소원은, 스티커 사진 찍는 거.”

“하아?! 스티커 사진……?”

“어. 저 쪽 오락실 같은 곳에 있는 것 같은데.”

“뭐…….”

밥을 다 먹고, 한층 가벼워진 빈 도시락통을 들고 희세와 다시금 걷는다. 이제 손 잡는 것쯤은 예삿일이다. 문득 말을 꺼내는 희세. 살짝 놀라 시선을 돌려 희세를 바라본다. 도도한 표정으로 저 쪽을 가리키는 희세. 어쨌든 내기에서 진 건 나니까, 조금 꺼림찍한 기분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희세가 가리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어지는 것은 죄책감. 스티커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바라보는 나. 누가 봐도 풋풋한 연인의 모습. 어느 때보다도 예쁜 희세와, 마찬가지로 신경 쓰고 나온 나. 연애 1단계, 썸 타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다. 아니면 어쩌면 벌써 사귀고 있는 모습일지도.

……그런 걸 리유랑 한 번이라도 했어, 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리유하고는 이런 놀이공원 단 한 번도 온 적 없고, 리유하고는 도시락이라던가 하다못해 공원에서 같이 뭐 먹는 훈훈하고 아날로그적인 로맨틱한 짓 한 번 해본 적 없고, 리유랑은 이런 스티커사진 한 번 찍어본 적도 없는데! 가뜩이나 리유 없어서 너무너무 서글픈데! 으아아아!

이러면 중간에 끼인 나는 스스로를 비판하고 죄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희세에게도 미안해지고, 리유에겐 더더욱 미안하고 죄인이 되는 기분. 왜 여자친구가 있으면서 데이트에 응한 것일까, 무슨 정신머리로 대체 그런 짓을. ……희세는 왜 그런 걸까. 나, 리유랑 사귀고 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아아. 괴롭다. 마음이 아프다. 리유…… 희세…… 하아.

“……리유한테는 이런 거 안 해줬는데, 나랑은 해서 죄책감 든다, 그런 거야?”

“으헉!? 너 뭐야! 마녀냐! 왜 마음을 그대로 읽는 건데?! 텍스트 그대로 읽었어?!”

“얼굴에 뻔히 드러나잖아, 무슨 무기징역이라도 살 것 같은 죄인같은 얼굴.”

“……하아. 네 앞에서는 거짓말도 못 치겠구나. 아니, 말도 안 꺼냈는데. 거짓 행동도 못 하겠구나.”

“……흥.”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하는 희세. 깜짝 놀라 기겁하게 되는 나. 너무 정확하게 꿰뚫었잖아. 마음이 나체가 되어 알몸을 보인 듯 부끄럽다. 희세의 말에 나는 더욱 얼굴이 빨개진다. 속마음을 들킨 건 알몸을 보인 것보다 더 창피한 일. 거기다 그 속마음이라는 게, 희세와 놀면서 리유 생각을 하는 거. 아니, 리유 생각을 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그…… 하아.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모순에 부딪힌다. 애초에, 놀러오면 안 됐어. 말이 안 되는 일을 왜 하면서 스스로 죄악감에 시달리는 걸까, 나는.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알아. 그치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냥 놀아줄래.”

“……말이 안 되잖아.”

“시끄럽고! 그냥 놀으라고! 정신 바짝 들게 해 줘 또? 저번 크리스마스 밤 때처럼?!”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 이 데이트 계약조건이 그건데!”

“아직 이 데이트를 다 안 했잖아! 게다가 지금 이딴 식으로 개차반으로 하면 내가 계약이행을 할 것 같아?!”

“뭐라고!”

결국에 우울하고 죄악감 느끼는 마음은 희세와의 말다툼으로 날아간다. 잔뜩 짜증을 내는 희세와, 마찬가지로 짜증으로 맞서는 나. 둘 다 서로에 대한 불만이 잔뜩 쌓여 속으로 생각하던 걸 내뱉으며 씩씩대며 싸운다. 아아, 뭔가 개판이 되는데, 이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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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9

  • 작성자
    Lv.97 연필유령
    작성일
    15.08.06 00:24
    No. 1

    하핳 개판이로구만. 은 무슨 웅도는 복받은 발암물질 주제에 말이 많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06 08:55
    No. 2

    있는 자(?)의 고민이죠. 이 쪽 바닥(?)도 빈익빈 부익부가 심각해요. 저는 주변에 한 명 없는데......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Kestrel
    작성일
    15.08.06 03:34
    No. 3

    역시 웅세(?) 커플링이 최고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06 08:54
    No. 4

    생각외로 희세가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기분 탓인 것 같지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5.08.06 08:05
    No. 5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06 08:54
    No. 6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75 널그리워해
    작성일
    15.08.23 00:59
    No. 7

    희세....작은 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크다고 싫어하는 남자는 못봤습니다...
    아 물론 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23 11:19
    No. 8

    그렇죠. 커서 나쁠 것 없죠. 남자도 마찬가지죠. 작은 걸 싫어하는 사람은 봤지만 큰 걸 마다하는 것은 듣도보도 못 했습니다.
    아 물론 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전서리
    작성일
    18.08.18 03:40
    No. 9

    데이트 인정입니까.근데 지금3시40분.피곤ㅅ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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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03화 - 3 +14 15.08.09 1,159 26 16쪽
» 03화 - 2 +9 15.08.05 1,106 21 20쪽
156 03화. 여자애랑 놀지만 데이트는 아닙니다. +17 15.08.03 1,282 20 21쪽
155 02화 - 4 +6 15.08.01 1,541 28 19쪽
154 02화 - 3 +10 15.07.29 1,220 20 20쪽
153 02화 - 2 +11 15.07.26 1,238 16 19쪽
152 02화. 친구를 사귀는 것이니까. +8 15.07.23 1,333 21 19쪽
151 01화 - 4 +8 15.07.20 1,305 25 19쪽
150 01화 - 3 +10 15.07.16 1,226 23 18쪽
149 01화 - 2 +6 15.07.13 1,417 18 18쪽
148 01화. 멀어진다 +8 15.07.12 1,566 26 21쪽
147 2014 크리스마스 스페셜 /// 정말로...? - 02 +27 14.12.24 1,659 29 28쪽
146 2014 크리스마스 스페셜 /// 정말로...? - 01 +8 14.12.24 1,522 24 25쪽
145 끝화. +32 14.08.20 2,277 35 32쪽
144 32화 - 5 +28 14.08.13 2,004 49 18쪽
143 32화 - 4 +11 14.08.12 1,712 36 20쪽
142 32화 - 3 +13 14.08.09 1,815 29 21쪽
141 32화 - 2 +4 14.08.07 1,625 38 18쪽
140 32화. 잡아라, 사랑의 망설임을! +13 14.08.06 1,698 37 21쪽
139 31화 - 6 +16 14.08.04 1,889 31 21쪽
138 31화 - 5 +12 14.08.02 1,965 38 23쪽
137 31화 - 4 +11 14.07.31 1,854 36 19쪽
136 31화 - 3 +10 14.07.28 1,610 33 18쪽
135 31화 - 2 +17 14.07.25 1,562 39 23쪽
134 31화.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앞으로 나아갈 때. +8 14.07.21 1,878 39 20쪽
133 30화 - 4 +18 14.07.10 1,577 38 19쪽
132 30화 - 3 +16 14.07.09 1,587 44 22쪽
131 30화 - 2 +17 14.07.06 1,755 49 22쪽
130 30화. 우유부단. +10 14.07.06 1,637 4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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