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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3,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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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4.07.09 16:06
조회
1,586
추천
44
글자
22쪽

30화 - 3

DUMMY

“어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뭐 답이 없다. 희세 때문이다. 봐, 지금도.

“흥, 재수 없어.”

“넌 더 하거든! 왜 자꾸 시비야아!”

“별 거 없어, 사뿐사뿐 푹신푹신 재수 없으니까 재수 없다고 하는 거지.”

“으으읏…… 내가 언제!”

단순히 성빈이가 지나가는데도 저렇게 시비를 건다. 성빈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큰 소리로 대꾸한다. 성빈이도 처음엔 웃으며 응대했지만 북녘 땅 동포들이 인사치레 하듯 저렇게 지속적으로 도발을 하니 아무리 착한 성빈이라도 견딜 수가 없을 거다. 도발이나 비꼼, 사람 성질 긁는 것에는 희세가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착하디 착한 성빈이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희세의 페이스에 메여, 화를 내고 에너지 소모를 하는 건 성빈이 쪽이다. 희세는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놀리듯 성빈이를 희롱할 따름이다.

아까 체육시간부터 저러고 있어. 희세의 삐딱한 감정은 체육시간의 특수한 상황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내 의도는 아니지만 성빈이 가슴에 얼굴을 파묻게 됐으니까. 그런 쪽으로 굉장히 예민한 희세니까, 뭐라고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의외인 건 성빈이다. 희세가 평소에 무조건 나에게만 시비를 걸었던 건 아니다. 뭐, 그렇다고 매일매일 누군가에게 시비를 거는 나쁜 애는 아니지만. 이렇게 말하니까 꼭 아무한테나 매일매일 시비 거는 애처럼 보이잖아. 어찌됐든,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성빈이에게도 가끔은 짜증스럽게 말하는 희세인데, 평소의 성빈이라면 웃으면서 성빈이가 지는 쪽으로 유도해 희세의 비위를 맞춰주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비록 계속 희세의 현란한 도발에 말리고 있지만, 분명하게 맞서서 얘기하고 있다. 사실 둘이 굉장히 귀엽게 말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남자애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있으면 분명하게 말싸움이다. 곧 주먹이 오가게 되겠지.

희세가 성빈이에게 시비를 거는 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어제, 내가 성빈이하고 논 걸 알아서. 이런 꼬장이 있을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고 있다. 그럼 성빈이는, 뭣 때문에?

“오빠.”

“응? 왜.”

“잠깐만요, 잠깐만 저 좀 봐요.”

계속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성빈이와 희세의 말싸움을 멀거니 구경하듯 보고 있는데 문득, 미래가 다가와 말한다. 왠지 모르게, 미래가 말을 거는 건 굉장히 오래간만인 것 같은데. 예전과 다름없이 장난기 있는 웃음을 지으며 내 팔을 잡아 끈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미래를 따라간다.


“왜?”

“아아, 어험. 음.”

미래는 항상 얘기하는 복도 구석 사람이 별로 안 다니는 계단으로 나를 이끌고 왔다. 볼멘소리로 물으니 미래는 뭘 말하려는지 헛기침을 하며 판을 차린다. 그러더니 씨익, 즐거워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좀 무안해서 ‘뭣 때문에 불렀는데.’ 하고 말했다. 미래는 그래도 한참 말을 안 하다 입을 뗀다.

“일단, 제가 어색하니까 편하게 말할게요.”

“뭐를…… 편하게 말해?”

“아, 이제부터 웅도라고 하겠다고.”

“어어…… 어, 야…… 난 이젠 그게 적응 안 되는데.”

“에헤헤. 뭐. 뭐 웅도새꺄. 병X 크히히히히히.”

“……너 진심으로 때려도 되?”

미래는 선언하듯 말한다.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곧이어 미래가 반말을 쓰자 굉장한 어색함이 느껴진다. 분명 나랑 동갑인데, 이렇게 반말을 쓰면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미래는 내 반응이 보기 좋은지 킬킬 웃으며 깝죽거린다. 아아, 진심으로 여자애를 때리고 싶은 적은 처음이야. 그렇다고 다시 존댓말 쓰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이게 맞는데. 미래는 잔뜩 웃으며 ‘애초에 존댓말 쓴 건 오빠한테 존댓말 캐릭터 연기해서 점수 따려고 한 건데요! 이젠 소용 없잖아요! 아, 습관적으로. 헤헤헷.’ 하고 말한다. 굉장히 얄미우면서 한 대 때려주고 싶게 귀엽다. 미래도, 리유라는 동안계의 절대강자가 내 옆에 있어서 그렇지, 충분히 나이에 비해 어려보인다. 한 중2 정도 되는 사촌 여동생 같다. 리유는 거의 딸 같은 느낌이라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긴 하지만.

“어쨌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응, 뭔데.”

아직까진 적응이 안 돼 어색하지만, 어떡하겠어. 이게 맞는데. 미래는 내 어색한 표정에 피식 웃으며 말한다.

“성빈이하고 희세언니 중에. 누구로 고를 거야?”

“……뭘 골라, 고르긴! 물건이야!? 고기야, 고르게?”

“어머어머, 아주 대놓고…… 여자애를 고기…… 육노예로…… 어머어머…….”

“아 쫌!! 왜 그런 쪽으로만 상상력이 폭발하는데! 그리고 좀……! 여자애면 그런 말 좀 하지 마아!!”

미래는 안 그래도 그 둘 사이에서 시달려서 심란한 나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한다. 머뭇거리며 말하려다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미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은 샐쭉 웃으며 비꼬듯 말한다. 우와, 미래 얘 왜 이래. 한층 더 재수없고 한층 더 얄미워서 정말 때려주고 싶어.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큰 소리로 말하려다 간신히 톤을 낮춰 말했다. 애초에 사람이 많이 안 다니는 복도 끝이지, 아예 아무도 없는 건 아니니까. 미래는 까르르 웃으며 내 반응을 좋아라 살핀다. 어휴, 얘는 진짜 답이 없다.

“아,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오빠, 성빈이하고 희세언니 좋아하는 거잖아요? 아아, 자꾸 습관 때문에. 성빈이하고 희세! 희세하고 성빈이!”

“……상관 없잖아.”

미래는 자꾸 껄끄러운 그 쪽 주제를 꺼내려고 한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그렇잖아. 두 여자애를 동시에 좋아하다니. 나는 비록 여기서는 이렇게 변태 씨로 매도당하고 있지만, 어릴 적부터 굉장히 순정파였다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서, 둘이 백년해로 하는 거. 그걸 목표로 삼았는데. 그게 상남자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왜 하필, 나에게 하늘은 이런 시련을 주었을까. 성빈이, 희세, 둘 다 한 공간에 있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이상형들인데. 왜 둘 다 나랑 같이 지내서 이렇게 환장하게 만드는 거야! 하늘은 어째서 나희세를 낳고, 또 임성빈을 낳으셨단 말인가……!

거기다 말하는 대상이 미래인 것도 상당히 껄끄럽다. 정작 미래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미래 또한 나 좋아한다고 고백했었고, 나는 그걸 거절했잖아. 미래는 뒤끝 없이 훌훌 털어버린 것 같지만, 옹졸한 소인배인 나는 그러질 못했다. 솔직히 미래가 예전처럼 장난 걸고 그러면 예전처럼 못 대하겠어. 미래만 보면 미안해지고, 죄인이 되는 기분이니까. 근데 그런 미래가, 그런 이해관계 때문에 껄끄러운데 ‘그런’ 이성관계에 대해 물어보니까. 아주 설상가상이다.

“헛! 의외로 리유?! 이 로리콘! 짐승!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니아니! 전혀 아니야, 걘! 걘 내 딸이다! 그리고, 애초에 리유 우리랑 동갑이라니까?! 어째서 로리콘인데!”

머릿속으로 그렇게 심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 미래는 끊이지 않고 개드립을 친다. 미래는 한순간이라도 드립을 치지 않으면 안 되나보다. 두 사람 때문에도 심각한데, 거기에 리유까지 끼어 버리면 난 미쳐버릴지도 몰라.

“어쨌든, 참 복 받으셨네요, 웅도씨. 여자애 네 명이 한 번에 좋아하고.”

“네, 네 명이나?! 누구, 누구? 나도 모르는데 누가 나 좋아해?”

“후우, 이 병X은……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님 그냥 상병X인거야.”

미래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4명이나?! 내가 모르는 누군가 날 좋아하는 애가 또 있어?! 눈앞에 있는 미래야 확실히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거절했고, 서…… 성빈이도 좀 확실한 것 같고. 리유는 나를 몹시 좋아하지만 그건 이성으로써 좋아하는 게 아니라 친한 오빠를 따르는 것 같은, 오누이 같은 정이고, 희세는…… 애증의 관계인 거지. 여튼 충격인데, 4명이나 되다니.

미래는 한숨을 푹 쉬며 인상을 팍 쓰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늘 웃으며 장난스런 말투로 말하는 미래인데 이런 투로 말하는 건 처음이라 굉장히 낯설다. 금방이라도 담배연기를 한 모금 내뱉으며 침을 뱉을 것 같은 기세다. 몰라 뭐야 얘 무서워……!

“나! 나는 확실히 좋아했잖아!”

“어, 어…… 그렇지.”

미래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팍팍 치며 말한다. 막상 미래가 자기 입으로 말하니까 역시 어색하다. 하지만 미래는 내가 어색하든 말든 아랑곳않고 말을 잇는다.

“성빈이도, 희세도. 하다못해 리유도! 다 너 좋아하는 거. 모르겠어?!”

“어…… 성빈이는,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어어. 어라라……? 우후후후,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성빈이가 먼저 꼬리를 쳤어어~?”

“……음.”

미래는 다그치듯 말한다.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애 두 명이 들어왔다. 머릿속이 혼돈이다. 미래에게 들어도 전혀 확신이 서질 않는데. 그 두 명까지 날 좋아한다고? 나는 다급하게 성빈이에 대한 걸 말했다. 이에 미래는 굉장히 음흉하게 웃으며 나를 은근하게 쳐다본다. 음. 뭔가 유도심문 같은 걸로 정보를 불은 것 같은 기분인데. 기분 탓이겠지.

“눈치 하나 없는 네가 먼저 알아챘을 리는 없고. 이 바보 똥멍청이가 좋아한다는 걸 알게 만들 정도면…… 어휴,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네. 아주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년이야, 성빈이.”

“뭐, 뭐가……! 그러면 너는, 고백은 네가 먼저 했잖아!”

미래는 마치 동네 아줌마나 할머니가 말하는 것처럼 혀를 끌끌차며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째 성빈이 험담처럼 느껴져서, 나는 울컥 하고 말했다. 나의 성빈쨔응은 그러지 않아(?)!!

“……성빈이가 먼저 고백했어?! 에에에에!! 꺄아──! 완전! 진짜! 남자가 뭐 그래!”

“……아니야! 고백 같은 거…… 아니라니까!”

“에에에에~ 부끄러워 하기는~ 히히힛.”

한 번 말리기 시작하니까 미래의 유도심문에 줄줄이 엮이는 것 같다. 미래는 눈이 커지면서 호들갑스럽게 크게 말한다. 나는 더욱 창피해져서 얼굴이 빨개져 말했다. 근데 이렇게 억울한 표정으로 말하면 내가 진실을 말해도 꼭 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미래는 잔뜩 웃으며 빤히 나를 쳐다본다. 더 이상 놀리진 않지만,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계속 쳐다본다.

“뭐, 뭐.”

“부른 이유는 하나 말하려고 부른 거에요.”

“……?”

미래는 갑자기, 다시 존댓말을 쓰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러니까 나도 헷갈리잖아. 진짜 진지하게 하는 건지, 이것 또한 하나의 놀림거리인지. 섣불리 말하지 않으려 경계하는 눈빛으로 미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오빠가 누구를 좋아하던, 그건 상관없어요. 오빠 자유 의지니까. 설령 두 명을 동시에 좋아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원래 남자는 그런 동물이니까. 아, 꼭 남자만 그런 건 아니고. 어쨌든! 상관은 없지만.”

“……어.”

미래는 나를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한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미래의 말을 들었다. 야무지면서 똑부러지게 말하는 투를 보니 적어도 장난치는 것 같진 않다. 약간 긴장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끝은 확실하게 해요. 저처럼 흐지부지하게 하지 말고요. 알았어요?”

“……응.”

“됐어요. 알아들었으리라고 생각할 테니까.”

미래는 내 어깨를 잡고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보다 한참 키가 작아 올려다보지만, 어째선지 나는 그 눈빛에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묘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섞인 감정 때문에 미래를 똑바로 보기가 힘들다. 미래도 이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조언을 해주는 게 아닐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미래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홱 뒤돌아 교실로 간다. 나는 착찹한 마음으로 걸어가는 미래를 쳐다보다 교실로 돌아갔다.


그 뒤로, 나도 모르게 희세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가자.”

“응.”

야자까지 모두 끝이 나고, 희세와 같이 하교하는 길. 기숙사까지 가는 성빈이를 바래다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또 희세가 시비를 걸 것 같아 애써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성빈이는 아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만 내가 희세를 가리키고 머리에 뿔 모양을 만들어 보이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안녕 하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뒤에서 툭 하고 희세가 나를 때린다. 그러더니 내가 방금 했던 것처럼 머리에 뿔 모양을 만들며 ‘뭐, 뭐? 확 그냥.’ 하고 주먹을 쥐어 보인다. 으으. 그래도 그 이상의 꼬장은 없다. 둘이서 어두운 밤길을 걷는다.

“……어흠.”

“……? 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걸으려니 굉장히 어색하다. 평소엔 둘이 어떻게 하면서 걸었지. 즐겁게 얘기하기도 하고, 장난치기도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어째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미래 때문에 의식하게 되잖아. 괜히 헛기침을 하며 희세 눈치를 보니 희세 역시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나를 노려보며 묻는다. 헛기침을 계속 하며 ‘어흠, 흠, 아니야, 그냥.’ 하고 말했다. 희세는 싱겁다는 듯 고개를 돌려 앞을 본다.

“낮에 까칠하게 한 것 때문에 삐친 거?”

“어……? 내가?”

“그래. 그러니까 아무 말도 안 하는 거 아냐.”

“아니……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왜.”

“알았어, 음…… 어.”

“알긴 뭘 알아.”

희세는 내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한다. 역시, 희세도 어색한 걸 느끼고 있었구나. 하긴, 평소에 하교하면서 장난치고 활기차게 얘기하던 내가 침묵하고 있으니. 늘 그렇잖아, 포지션이. 내가 무엇이든 말하면 희세가 태클 거는, 그런 패턴. 희세는 내 대답에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되게 어색하다.

“화 다 풀렸어. 그러니까, 말해도 괜찮아.”

“……꼭 여왕님이 ‘허락하도다. 고개를 들라. 이제 말해도 괜찮느니라.’ 하는 것 같네.”

“흐흥, 그래야 정웅도답지. 응, 내가 여왕님이지! 근데 여왕님은 좀 나이 많아 보이잖아. 기왕이면 공주 쪽이…….”

“공주는 이미지 상 성빈이 쪽이 더 어울…… 죄, 죄송합니다, 여왕님!”

“아 그러니까! 여왕님 말고 공주!!”

희세는 내 개드립에 그제야 씨익 웃으며 만족한 표정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성빈이’란 단어에 인상을 팍 쓰고 주먹으로 내 팔뚝을 팍 때린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왕녀’로 대체하기로 했다. ‘공주랑 왕녀는 무슨 차이인데.’ 하고 희세는 불만스럽게 말한다. ‘공주는 뭔가 하늘하늘거리는 아가씨고, 이웃나라 시집 가고 끝날 것 같은 느낌이잖아. 왕녀는 장래에 여왕이 될 것 같은 당돌한 느낌이야.’ 하고 말했다. 번지르르한 설명에 희세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한다. 희세 이미지가 그러니까.

그렇게 왁자지껄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웃기도 하고 서로 툭툭 치기도 하며 정답게 얘기하며 걷고 있다. 그래, 이래야 평상시 같지. 괜히 미래 때문에 의식해서 그런 거야. 의식할 필요가 없는데.

“아하하하하! 병X. 그건 진짜 병X같다.”

“그치? 아 내가 생각해도 좀 장애인 같아서~ 그래가지고…….”

내 말에 희세는 입을 가리고 웃는다. 방긋 웃는 모습은 누구보다 예쁘다. 이거, 모순인데. 분명 성빈이 미소 보고도 누구보다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그치만, 실제로 그런 걸 어떡해. 성빈이나 희세, 둘 다 어느 누가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뽐내는데. 웃긴 얘기를 하면서, 표정은 익살스럽게 웃으면서도 속은 진지한 마음으로 희세를 내려다본다.

등까지 오는 머리칼은 야자에 임할 때 단정하게 묶은 그대로다. 자기주장이 강해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는 약간 치켜 올라 있지만 오히려 그게 매력이다. 어떻 보면 기가 세 보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런 희세 눈이 더욱 좋다. 리유만큼은 아니지만 희고 잡티 하나 없는 고운 피부. 게다가 볼은 의외로 엄청 통통하고 부드러워보여서, 허락된다면 꼬집어보고 싶다. ……그랬다간 지구 종말에 이르겠지.

나는 희세를…… 좋아하나. 성빈이가 나에게 가진 마음을 표현해서, 성빈이에게 마음이 쏠렸는데 미래의 ‘확실하게 마음을 정해라’ 라는 말을 들으니까 희세에게까지 신경이 쓰인다. 확실히, 희세에겐 별다른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건, ‘이렇게 완벽한 애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지배적으로 있었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아무래도 나 같은 애로는 좋아할 자격 같은 건 없지.’ 하는 생각도 더해져서. 그렇잖아, 희세, 누구보다 완벽하고 좋은 애니까, 나 같은 걸 좋아할 리가…… 나 같은 게 좋아할만한 애가……

“그…….”

“음? 그?”

희세는 무언가 말하려다 멈칫 하고 말하지 않는다. 거의 내 자취방 근처인데. 자취방에서 5분 조금 넘게 가면 희세네 집이다. 멈칫 한 희세를 보고 나 또한 자리에서 멈춰 섰다. 희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보고 말한다.

“아. 난 이런 거 잘 못 말하니까. 그래도 말할래.”

“음……?”

“늘 데려다줘서 고마워, 밤에.”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희세는 볼이 빨개져서 말한다.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볼이 빨개지니까 더할나위 없이 귀엽다. 여왕님 같은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이! 나까지 살짝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거기다, 말한 내용도 좀 뜬금없다. 갑자기 무슨 데려다줬다고 고맙다고 하는건데.

“바, 밤에 혼자 가면 엄청 무서웠다고! 근데 매일 데려다 주니까.”

“그거야, 가는 길이니까 그런 거고. 거기다 너는 매일 아침마다 나 깨워주고 밥 해주고 지극정성이잖아. 그거에 비하면 이건 일도 아니지.”

“그,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빚지는 건 싫으니까.”

“아아. 그래.”

희세는 부끄러워하며 말한다. 앞으로 멋대로 빠른 속도로 걸어간다. 어이어이, 말은 좀 하고 가지. 나는 황급히 희세를 쫓아 옆으로 따라 붙었다.

“응, 그건 고맙다고 하고, 나도 고마워. 매일 아침마다 깨워주고, 아침밥 차려줘서.”

“그, 그건! 별로 고마움 받을 만한 일은 아니야.”

“……뭔가 ‘고마움’의 개량단위가 이상한 기분인데.”

“맞아! 학교 가는 길에 깨워주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어떨 때 보면 참, 희세도 종잡을 수가 없다. 평소엔 칭찬하거나 치켜 세워주면 되게 좋아하고 또한 그걸 떳떳하게 즐기는 당당한 성격인데, 지금은 또 칭찬해주니까 잔뜩 부끄러워하면서 자기 한 일을 애써 축소하려 한다. 난 그냥 데려다주기만 하는 거고, 희세 쪽이 훨씬 수고롭고 대단한 일인데. 아니라고 하려고 해도 희세 쪽에서 저렇게 완강하게 주장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희세는 여전히 볼이 빨갛다.

“아. 매일 나 깨워주고 밥 먹이고, 그러면 엄청 귀찮지 않아?”

“……귀찮지 않아.”

“그래?”

문득 궁금해져서 희세에게 물었다. 솔직히 굉장히 고역이잖아. 나야 희세가 와서 깨워주면 일어나면 되지만, 희세는 한 7시 10분 즈음에 오는데, 그 때 이미 단정한 교복차림에 좋은 냄새까지 난다. 샤워까지 하고 오는 걸 테니, 못해도 30분 이상은 준비하는데 시간이 소요될 거 아냐. 그럼 7시 되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데.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근데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나를 깨우러 매일같이 그 수고로움을 감수하냔 말이지. 어쩌면. 어쩌면…… 희세, 나 좋아하나?

……아하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이어이, 그 나희세라고? 여왕님처럼 고고하고, 고압적이고, 자존심 세고, 자존감 넘쳐흐르는 강인한 여자애가…… 날 깨워주러 매일 온다니까! 애써 현실부정 하지 마! 있는 그대로 봐! 아무리 착한 애라도, 관심이 없으면 그렇게까지 할 리가 없잖아! 성빈이처럼 애가 마인드가 부처님이면 또 모르겠는데.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애가 그러고 있잖아! 한 번이라도 의심할 법도 한데, 난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어…… 내 생각은 그런데. 아침에도 엄청 일찍 일어나야 되고, 밥도 지어 줘야 하니까 굉장히 수고스럽잖아. 근데 그렇다고 내가 뭘 해주는 것도 아니고, 늘 신세만 지니까. 나, 맨날 너한테 개드립이나 치고, 오늘처럼 기분 나쁘게 하는 경우도 한두번이 아니고. 그…… 납득이 안 가는데.”

“……뭔 소리야. 납득을 왜 네가 하는데.”

“아니, 그러니까…… 응, 아무 이득도 없는데 그렇게 봉사해주는 게 이해가 안 가서. 아, ‘봉사’라는 말이 기분 나빴다면 미안, 근데 돌려 말하니까 어째 의미가 전달이 잘 안 돼서.”

“……그건 네가 바보라서 그래.”

“어?”

줄줄줄 길게 변명하듯이 말했다. 희세는 볼멘소리로 대꾸한다. 결국 ‘이득’ 이라던지, ‘봉사’ 라던지 하는 자극적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말을 예쁘게 포장하는 법을 잘 모르는 나니까. 희세는 애매한 대답을 하면서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을 본다. ……왜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데! 그건 완연하게, 답변을 회피하는거잖아. 왜?! 뭣 때문에 답변을 회피하는 거야! 신경쓰여 미치겠네!!

걷다보니 내 자취방도 지나고 어느새 희세 집 앞까지 왔다. 나는 꼭, 희세가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집으로 돌아간다. 희세가 날 아침마다 깨워주는 것처럼 나 또한 매일 데려다주는 게 의무처럼 돼 있으니까. 집 앞까지 침묵을 유지하며 걸었다.

“잘 가.”

“……왜 그런 지 궁금해.”

“어?”

별 미련 없이 안녕 하고 가려 하는데 희세는 대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고개를 들어 날 보고 말한다. 반듯하고 또렷한 눈빛으로,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 속삭이듯 말하는 희세의 목소리. 하지만 작은 소리이지만 너무나도 확실하게 귀에 와 박히는 목소리.

“너 좋아하니까.”


작가의말

일신 상의 사정으로 이틀이나 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녁에 올릴 수 있다면 한 편 더 올릴게요. 물론 못 올릴 수도 있습니다. 전 불성실하니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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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6

  • 작성자
    Lv.80 똑딱똑딱
    작성일
    14.07.09 17:44
    No. 1

    밀렸으니 번드시 저녁에 보고 싶네요(찌릿)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09 18:32
    No. 2

    ...그런데 불가능할 것 같네요. 낮잠을 자 버렸으니... ㅠㅠㅠㅠㅠ 저의 게으른 근성에 감탄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아싸라뵤
    작성일
    14.07.09 18:12
    No. 3

    핡! 드뎌 희세가 고백...
    밀린건 저녁에 또 읽고 싶어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09 18:32
    No. 4

    ...죄송합니다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2 지키미삼
    작성일
    14.07.09 22:08
    No. 5

    희세가 그래도 웅도 생각하닝꼐 희세로 끝~~~~----~-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09 23:25
    No. 6

    자고로 남자는 자기 위해주는 여자가 최고죠~ 그러면... 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4.07.09 22:34
    No. 7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09 23:25
    No. 8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56 비행병아리
    작성일
    14.07.10 08:27
    No. 9

    인제 웅도를 누가 차지하는가의 경쟁구도군요

    웅도의 체리를 먼저 갖게되는 여인이 승리자가 되겠죠?

    웅도의 성격으로 봤을때 웅도를 차지할려면 합법로리가 재일 유리(응?)...

    웅도의 성격으로 봤을때 여자가 기달리기보다는 먼저 들이대는것이

    웅도를 차지하는데 유리하겠군요

    아침부터 덮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희세가 조건이 좆네요

    아침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서 가슴으로 얼굴을덮어서 웅도를 질식사 시키는 희세를 볼 수 있겄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10 09:02
    No. 10

    ......아마 희세 성격상 죽어도 그렇게는 못할 거에요. 공과 사(?)가 뚜렷한 희세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여고생인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6 비행병아리
    작성일
    14.07.10 09:07
    No. 11

    성빈이의 육탄공세에 무너져가는 웅도를 보고만 있을 희세가아닐텐데요

    성빈이의 육탄공세에 대항하기 위한 희세의 육탄공세도 가능성이 있어보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10 17:19
    No. 12

    어멋... 그런 거(?) 좋아하시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3 오래보긴
    작성일
    14.07.10 20:39
    No. 13

    역시 치정관계는 꿀잼이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10 23:23
    No. 14

    ...치정관계라고 하니까, 뭔가 나이가 급격히 올라가는 기분이네요. 치정관계라고 하면 뭔가, 사랑과 전쟁이나 막장드라마 같은 느낌?
    아 물론 우학변도 막장이긴 막장이니까, 초록은 동색이니까, 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널그리워해
    작성일
    14.08.25 23:48
    No. 15

    아...자기전에 괜히 봤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전서리
    작성일
    18.08.18 00:42
    No. 16

    잠만.리유가 선생님성격가지고 육탄공..도아니고육탄돌격하면..좋을거같? (퍼퍽)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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