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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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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2,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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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2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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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글자
20쪽

02화 - 3

DUMMY

“…….”

“…….”

정적만이 맴도는 등굣길. 원래대로면 나와 희세, 둘이서 재잘재잘 떠들며 걸어가는 평화로운 등굣길일 텐데. 보통은 내가 개드립을 치고, 희세가 태클을 걸거나 나무라거나 하는 대화. 또는 평범한 잡담. 그런 평화로운 등굣길은 내 일상의 소중한 한 부분이다. 자취생활을 하고부턴 거의 매일 이런 생활이었으니까, 이제는 때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학교 생활의 소중한 한 부분이 됐다.

그런데 지금은, 정적과 불신, 긴장만이 감돌고 있다. 나를 가운데로 하고 있는 희세와, 유진이 때문에.

갑작스런 유진이의 등장과 희세의 난입은 나를 엄청나게 당황하게 했다. 뭐, 희세는 ‘난입’한 게 아니라 평소대로 날 깨워주러 온 것이지만. 진정으로 난입한 건 유진이지. 언급이라도 했으면 어떻게 대처를 했을텐데, 전혀 그럴 틈도 없었으니까.


“아, 그, 그게 그……”

“……왜 네가 여기 있어? 이런 이른 아침에.”

“음─ 같이 등교하려고 찾아왔는데. 그러면 희세는 어쩐 일이야, 아침부터?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동거?”

“……그럴 리가 없잖아. 비밀번호는 웅도가 알려준 거야.”

“와, 되게 가까운 사이인가봐─? 비밀번호도 알려주고!”

“…….”

어떤 말도 못 하고 바보처럼 어버버 거리는 나.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으랴. 딱히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오해 사기 딱 좋은 입장인데. 의외로 희세는 덤덤한 태도를 잃지 않고 말을 꺼낸다. 게다가 말을 거는 것도 내가 아닌 유진이. 유진이는 방긋 웃으며 말한다. 그러면서 은근히 뼈 있는 말을 던진다. ‘동거’라니! 희세 자극하기 딱 좋은 말이다. 하지만 희세는 그런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대답한다. 여전히 희세의 비위를 살살 긁는 말을 하는 유진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그런 사실이 신기해서 말하는 것인지. 일단은 후자 같다만. 너무 심하잖아.


뭐, 그런 식으로 대충 어떻게 넘어갔다. 희세는 애꿎은 나에게 신경질을 내며 ‘얼른 씻어, 지금까지 뭐 했어.’ 하며 말했고, 어색한 상황을 넘어가고자 나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으며 ‘어, 응, 씻어야지.’ 하며 자리를 피했다. 내가 씻는 동안 희세와 유진이 둘이서 무슨 대화를 했을까.

씻고 나와서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식사를 했다. 제발 유진이가 그냥 갔으면 좋겠는데, 유진이가 아침을 안 먹고 왔다니 희세가 유진이 몫까지 밥을 차렸다. 이 와중에 유진이는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와서 같이 밥 먹는 거야? 우와, 꼭 신혼부부같다. 근데 이상해. 웅도 여자친구 있는데.’ 하며 희세 마음을 잔뜩 뒤집어 놓을 말을 한다. 희세는 마음 속에 참을 인자 100만 번 쓰기 연습을 하는지 꾹꾹 눌러 참는다. 평소 내가 알던 희세라면 100번이고 상을 뒤엎고도 남을 성격인데.

“뭔가, 내가 있어서 많이 어색해져버렸네.”

“아니, 뭐. 원래도 이런걸.”

“폐 끼치고 있는 건 사실이지. 중간에 끼어서.”

“아핫. 정곡 찔리니까 무안하네.”

유진이는 방긋 웃으며 말한다.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한다. 어색한 건 사실이지만 그대로 말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하지만 희세는 다르다. 본심 그대로 말해버린다. 유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얼음같이 차가운 분위기로. 유진이는 그런 희세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낸다. 혀를 쭉 내밀며, 한쪽 눈을 찡긋 하며. 나는 중간에 끼어서 더 어색해진다.

“그치만, 그렇잖아. 나는 당연히, 웅도 혼자 있는 줄 알고, 같이 밥 먹고 등교하려고 했는데. 먼저 ‘선점’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전혀 몰랐으니. 다른 애들도 아마 전혀 모를텐데.”

“…….”

“저기, 유진아, 이거 다른 애들한테 말하지 않─”

“응, 당연하지! 눈치 없이 끼어들었지만 그걸 눈치 없게 다른 애들한테 다 말할만한 애 아니야, 나!”

“응, 고마워.”

“……칫.”

유진이의 상황 정리에 나도 희세도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솔직히 자랑스럽게 말할만한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또래 여자애가 아침마다 와서 깨워주고 밥 차려주고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만, 그런 애가 여자친구도 아니고, 정작 남자애는 여자친구도 있다는 사실 또한 굉장히 이상하다. 소문이 나서 좋을 게 없는 사실이기에, 살짝 유진이에게 입단속을 요청하려 했다. 내 말을 중간에 자르며 눈을 찡긋하는 유진이. 애초부터 그러려고 했다는 듯이. 그래도 안심이 된다. 눈치가 없는 건 아닌 유진이니까. 희세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로 ‘칫’ 하고 입을 다문다. 이러나 저러나 희세에게 미안하다.


“뭔가 희세하고 사이 나빠져 버린 것 같네. 어제오늘 해서.”

“으─ 타이밍이 안 좋았지, 아무래도.”

“응. 아무래도 나중에 사과해야겠네. 지금은 나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미안하네, 괜한 일 만들어서.”

“아니야, 내가 잘못 해서 그런 건데.”

반에서, 쉬는 시간. 유진이는 방긋 웃으며 내 자리에 와 말한다. 아무래도 희세에 대한 게 걸리는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나. 두 일 모두 유진이 입장에서는 예상치도 않게 괜히 희세라는 애와 사이만 나빠진 꼴이니. 괜히 내가 더욱 미안하다. 그래도 착한 유진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해준다. 빈말이라도 마음에 위안이 된다. 역시 유진이는 착하구나.

“……쟤 누군지 알아?”

“응? 쟤?”

“저 쪽 앞자리 창가 쪽에 앉은 애.”

“음─ 이름만 아는데. 김민서라고.”

“…….”

가만히, 나는 아까 수업시간부터 봐 왔던 여자애에 대해 물어본다. 유진이는 힐끗 여자애를 바라보곤 말해준다. 반 애들을 두루 아는 유진이도 이름만 알 정도라면. 유심히 여자애를 쳐다본다.

이름이 김민서구나. 약간 통통한 체구. 글래머형 희세나 마른 체형인 리유, 늘씬한 성빈이나 보통 정도인 미래만 봐 오니 더욱 통통해 보이는 몸집이다. 사실 보통 여고생이라면 저 정도 몸매가 정상이겠지. ……정상보다는 조금 더 통통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한 60kg 중반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통통함. 얼굴은 적절히 귀엽게 생겼다. 어르신들이 좋아할 것 같은 생김새. ‘수더분하고 복스럽게 생겼다’ 라고 하면 딱 적절한 묘사려나. 80년대 기준으로 말하자면 「부잣집 맏며느리」 타이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민서를 굳이 눈여겨보게 된 계기는,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2학년이 되고 새학기가 시작한 지 꽤 되어가는 이 시기, 보통 아무리 사교성이 없는 애라 해도 한두명 얘기할만한 친구는 생긴다. 설령 반에서 친구를 못 만든다고 해도 궁여지책으로 1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애하고라도 놀기 위해 다른 반에 찾아간다거나 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저 민서라는 애는. 어느 쪽도 아니다. 그저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다. 친구 한 명 없이, 오래도록 책상에만 앉아 있는 그녀. 게다가 묘하게, 민심(?)을 읽어보면 민서에 대한 평이 썩 좋지가 않다. 뚱뚱하다는 둥, 둔하다는 둥.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지만, 그녀에 대한 좋지 못한 얘기를 하는 걸 몇 번 주워들어서. 실제로는 민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까, 이전의 리유가 생각나서. 리유도, 전혀 따돌림 받을만한 아이가 아니었지만 원원히 이어져 내려온 굴레, 낙인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까. 뭐, 그런 식이면 ‘따돌림 받는 애는 따돌림 받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승낙될 수도 있는 것이니. 그런 건 없다. 그냥, 따돌림을 하는 건 사람의 비겁한 마음의 모습 중 하나다. 자기보다 약한 이를 만들고, 핍박하며 친목을 다지고, 자기들끼리는 확고한 위치를 만드는, 그런 역겨운 행동.

뭐, 민서가 따돌림 당하는 듯한 것도 리유와 비슷한 원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 비슷하게라도 따돌림 당하고 있는 그녀를, 나는 가만히 지나칠 수가 없다. 리유가 겹쳐 보이기 때문에. ……리유랑 외모는 정말 딴판이지만. 특히 덩치가.

“……유진이한테만 물어보는 건데. 민서는 혹시, 따돌림 당하는 거야?”

“음─ 따돌림…… 그런 것 같네. 나는 딱히 얘기해본 적이 없어서 신경 안 쓰고 있지만. 어떤 애들은 조금 싫어하는 티를 내긴 해. 뚱뚱하다고. 둔해보인다고. 민서도 성격 소심해서 그런 말들에 대꾸도 못 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음. 그렇구나.”

“어디 가?”

“매점.”

유진이는 ‘너에게만 물어보는 비밀’ 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며 방긋 웃는다. 그러나 물어보는 말이 말인지라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답해준다. 유진이는 따돌리는 건 전혀 모르고 접점이 전혀 없는, 그런 느낌이구나. 굳이 사족을 붙이자면 ‘방관자’. 어쨌든 한 반에서 따돌림이 발생하는 걸 묵인하는 게 암묵적 동의니까. 나도 마찬가지고.

유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한 나.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다. 별다른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고 유진이는 묻는다. 싱긋 웃으며 대답하곤 얼른 매점으로 뛰어간다.

“과자 먹을래?”

“어…… 어?”

“과자. 싫어하는 과자야? 내가 좋아하는 걸로 사왔는데.”

“……먹어도 돼?”

“응, 같이 먹으려고 사온 건데.”

“고, 고마워.”

나에게는 작은 지론이 하나 있다. ‘친구 사귀는 데에는 과자가 최고다.’ 라는, 조금 어이없는 것. 하지만 이건 안 통한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중학교 때에도 먼저 과자를 사서 애들과 나누어 먹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는지. 그리고 그 진리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민서는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의외로 목소리가 예쁘다. 아니아니, 이 놈의 외모지상주의. 통통하면 목소리가 예쁘면 안 되는 거냐. 얼굴도 예쁜 것 같다. 다만 통통해서 미모가 묻히는 느낌. 퉁퉁한 목살과 볼이 전반적인 턱선을 가려버리니 그냥 동글동글하니 귀여운 느낌밖에 안 난다. 눈매는 예쁜 것 같은데. 이것도 외모지상주의지, 여자애 얼굴 보자마자 평가를 하고 있으니. 희세가 알았다면 대번에 뭐라 했을 텐데.

민서는 경계하듯 주위 눈치를 살피다 고맙다고 말하며 손을 뻗어 과자를 먹는다. 싱긋 웃으며 민서 옆에 앉는다.

“……무, 무슨 벌칙 게임 같은 거야?”

“음? 무슨 소리야?”

“……중학교 때에, 그랬었거든. 나 같은 애랑 얘기하는 것도 싫다고, 자기들끼리 벌칙게임 해서 나한테 말 걸고 그랬거든. 돌아가서 히히덕대고.”

“와, 그딴 짓도 하는구나. 여자애들이 더 끔찍한데. 아아, 여성비하발언은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차이와 차별은 다른 차원이잖아요.”

“……응?”

“아니아니, 농담이야.”

민서는 주뼛거리며 끔찍한 경험을 얘기한다. 우와, 악질이네. 그러니까 본인이 뻔히 듣는데 ‘쟤 기분 나빠 쟤랑 얘기하는 것도 끔찍하다’ ‘와 그럼 벌칙게임 할래?’ 하면서 진 사람이 와서 말 걸고 그랬다는 거잖아. 그런 걸 당하는 민서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몇 마디 대화도 오가지 않았는데 벌써 그런 사례를 들으니 더욱 마음이 착찹해진다.

“……그럼, 왜 나한테 얘기를 거는 거야?”

“얘기 걸면 안 돼?”

“아니이…… ……이상하잖아.”

“나는, 딱히 발이 넓다거나 친구가 많다거나, 사교성이 좋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야. 그냥 평범한 병X이지. 이리저리 휘둘리고, 우유부단하고, 줏대도 없고. 그러니까 누구를 구제한다거나, 따돌림에서 벗어나게 한다거나 하는 그런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듯 하는 건 못하겠어. 그냥 나는, 네가 친구가 없어 보이니까 친구가 되어 주려고 온 거야.”

“…….”

민서는 불안한 눈초리로 말한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예전에 당했던 것 때문에 지금도 불안한 것 같다. 그렇게 거창한 이유도 아니고,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닌 나니까 편한대로 말한다. 불쾌하게 여긴다면 그건 내가 잘못한 거다. 동정따위 필요없다면 어쩔 도리가 없지. 다행히 민서는 조금 표정이 풀어진다. 작게 ‘고마워.’ 하고 대답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자 먹어. 쉬는 시간 끝나가니까 얼른 먹어야지.’ 하고 대답했다.


“옆에 앉아도 될까?”

“어, 어, 응.”

수학과 영어시간은, 쓸데없는 ‘특성화 교육’ 이라는 이상한 명분 때문에 교실을 옮겨 다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반, 2반 하는 우리가 보통 생활하는 반은 1년 내내 유지가 되는 반이고 같이 수업을 듣지만 수학과 영어는 수준별로 반을 나눈다. 수학 A반, 영어 B반 이런 식으로 갈릴 수 있다는 얘기. ……수준별로 나누면 뭘 어쩌려고. 낮은 반 애들은 공부 안 시키고 놀고, 높은 반 애들은 수준 높은 문제 풀게 하려고? 참 좋은 수준별 교육이다. 낮은 애들은 그대로 도태되고, 상위 녀석들만 살아남는…… 학교라는 곳에서 참 좋은 걸 가르치는구나. 아니 뭐, 말이 그렇다고.

어쨌든 반과는 다른 개념이기에, 희세와 성빈이와 만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내 성적이 막는다. 아아. 희세와 성빈이는 공부를 잘 하기에 당연히 수학도 영어도 A반이다. 나는 수학은 C반, 영어는 B반. 각각 수학은 잘 못 한다는 것, 영어는 중간은 간다는 뜻. 다른 것도 아니고 성적 때문에 희세와 성빈이와 같은 반이 되지 못하다니.

영어 시간이 되어 나는 잠자코 앞자리에 앉아 있는 민서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꺼낸다. 이미 앉으면서 ‘앉아도 될까?’ 하고 물어보는 것부터가 이미 넌센스인데. 민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까지는 조금 어색한 것 같다.

“그렇게 당황할 건 아니잖아? 왜, 나 뭐 이상해?”

“아, 아니! 그…… 영어 시간에 다른 애랑 앉는 건 처음이여서…….”

“하핳. 사실 뭐 딱히 상관없기도 하지만. 수업시간이니까 떠들 수도 없으니.”

“……응.”

민서의 반응에 나는 놀리는 말투로 말을 꺼낸다. 민서는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수줍어 보이는 모습이 나름대로 귀엽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옆에 아무도 앉지 않는 것과 친구가 앉아 있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그렇잖아, 다른 애들은 옆자리에 앉아서 작게 떠들면서 히히덕대기도 하고, 저들끼리 필담을 나누기도 하고 장난도 치기도 하는데 나만 혼자 덩그러니 있다고 생각하면. 좀 서글프지.

“맘 같아선 점심 같이 먹고 싶지만, 어제도 새로 사귄 친구 밥 패밀리에 데려갔다가 엄청 화내서…… 하하. 아쉽네.”

“괘, 괜찮아. 밥은 늘 혼자 먹으니까.”

“아…… 그러니까 더 미안해지네. 나중에 얘기해볼게, 정말 싫어해서. 친구가.”

“으으응, 괘, 괜찮아. 정말 괜찮아.”

뒷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얘기를 꺼냈다. 유진이를 데려갔을 때 잔뜩 화내던 희세의 모습이 떠올라서. 괜히 얼굴 붉힐 일 또 만들 리 있나. 사람은 경험의 동물인데. 민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그런 말 들으니까 더욱 죄책감이 든다. 이 애는 꼭 밥을 같이 먹어줘야 겠어! 하지만, 그 전에 희세한테 허락 맡아야지. ……무슨 모든 일을 아내한테 허락 맡는 공처가도 아니고. 내 스스로도 조금 한심해진다. 거기다 굳이 따지자면 아내 역할은 여자친구인 리유인데. 아, 리유…… 보고 싶네.

“오. 이거 봤던 애니인데. 얘 이름이…… 하루카였나?”

“으, 응!”

“이런 것도 있구나. 어디서 파는 건가?”

“응, 샀어. 1000원.”

“헤에. 이런 게 1000원이나 하나.”

얘기할 거리가 마땅히 없는데 마침 익숙한 게 보인다. 펴져 있는 민서의 책, 그 위의 책갈피. 익숙한 만화 캐릭터다. 예전에 본 적 있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캐릭터이기에 얼른 아는 척을 한다. 민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이러면 얘기하기 편하지. 자고로 친구라면 공통 관심사가 있어야 금세 친해질 수 있는 법이니까.

“이, 이거…… 남자애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 애니인 줄 알았는데.”

“뭐, 솔직히 못 미덥긴 했는데. 특히 상반신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게. 그냥 봤지, 친구가 추천해줘서.”

“……재미있었는데.”

“난 2기는 안 봤는데. 딱히 끌리지가 않아서.”

“2, 2기를 봐야지!”

딱히 오타쿠는 아니지만 친구가 추천해줘서 몇 개 애니 정도는 보는 나니까. 그게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민서는 금세 말문이 터져서 격한 말투로 말을 잇는다. 그래, 말하면 잘 할 수 있잖아. 방긋 웃으며 그 애니에 대해 민서와 얘기한다. 쉬는 시간이 금세 지나가고 곧 수업시간이 될 것 같다.

“어머─ 역시, 하렘왕 정웅도네요! 벌써 다른 애하고 또 친해지시다니!”

“하렘왕이라니. 그냥 친구 사귀는 것도 안 되냐, 나는. 애초에 여고잖아, 주위 애들이 다 여자인데. 친구 사귀는 것만으로 하렘이냐.”

“그렇죠! 그러니까 하렘왕이죠! 애초에 여고에 온 목적 자체가 그런 거 아니였어요, 오빠는?”

“아니야! 엄마가! 원서를! 아후…… 그 얘기는 됐다. 지난 일을 꺼내서 뭐하냐.”

뒷자리에 혼자 앉으며 끼어드는 미래. 특유의 얄미운 미소를 띠곤 말한다. 미래의 드립에는 대답할 가치가 없지만 그래도 꾸준히 태클은 걸어준다. 민서는 눈이 동그래져서 그런 나와 미래를 바라본다. 아마 미래가 존댓말 쓰고 ‘오빠’ 라고 하는 게 신기해서 그런 거겠지.

“게다가 취향이…… 그렇군요. 오빠는 여자 보는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어요. 취향이니까 존중해줘야죠? 데헷☆”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민서가 뭐!”

“응, 나, 좀 뚱뚱해서…… 66kg야.”

“넌 또 왜 천연덕스럽게 몸무게 밝히는데! 여자애면 몸무게 함부로 얘기하지 마! 1kg라도 줄여야지!”

“히익, 미, 미안…….”

미래는 가만히 민서를 쳐다보더니 마음속으로 요상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방긋 웃으며 말하는 미래에게 얼른 소리친다. 외모지상주의는 안 된다니까! 애초에 우리가 누구 외모를 따질 외모가 안 되는데! 그렇다고 잘 생긴 사람이 못 생긴 사람 못 생겼다고 핍박해도 된다는 논리는 아니지만.

이 와중에 민서는 방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몸무게를 밝힌다. 보통 여자애면 죽어도 자기 몸무게는 밝히지 않을 텐데. 많이 얘기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말을 걸어줘서 금세 저항감이 풀린 것일까. 그래도 너무하잖아, 이런 무방비는. 벌컥 화내듯이 말하니 민서는 금세 풀이 죽어 대답한다.

“민서 기분 나쁘면 어떡하려고. 사과해.”

“아, 아니야, 나는 괜찮아.”

“응, 미안. 외모 가지고 놀리려는 건 아니야. 근데 좀 통통한 건 사실이잖아?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욕이 되면 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 거야?”

“너 진짜!”

“아아, 아니 맞아. 뚱뚱한 거 맞으니까.”

“하아…… 그래도, 사람이.”

“에에─ 기만자─! 위선자─! 이중인격─!”

“……이중인격은 뭔데.”

어린아이 타이르듯 미래에게 말한다. 리유와는 또 다른 면으로 철이 없는 미래니까. 너무 직설적인 저 화법 때문에. 미래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뒤에는 더더욱 심한 극딜을 넣는다. 눈썹을 모으고 화를 내려 하니 민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내가 미래에게 뭐라 하는 게 싫은 모양. 그러니까 화를 낼 수도 없다. 미래는 그런 민서의 반응을 등에 업고 나를 잔뜩 놀려댄다.

“미안. 내가 원래 이런 병X이라. 오빠한테 존댓말 하는 것도 컨셉이야. 이런 또라이니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고 이상한 말 해도 이해해줘. 근미래라고 해!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니까, 잘 부탁해!”

“으, 응. 김민서야.”

“참 적절한 자기소개네.”

미래는 다시금 민서에게 말한다. 아까보다는 훨씬 공손한 태도. 그래도 너무 직설적이고 버릇없긴 하다. 민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래의 행동에 감탄한다. 어쨌든 미래도 민서와 통성명을 하고 친구가 됐네. 본의 아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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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5.07.30 00:06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7.30 19:32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97 연필유령
    작성일
    15.07.30 08:25
    No. 3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현재 패치 상황: 뭔가 뒤통수 치기 딱 좋은 포지션을 얻은 여캐 한 명 추가, 아직은 캐릭터성을 잘 모르겠는 인물 한 명 추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7.30 19:33
    No. 4

    어머...... 투명바지를 입은 느낌이에요. ㅠㅠ 역시 저는 그런 능력이 안 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olfam
    작성일
    15.07.30 15:21
    No. 5

    친구가 되어줄게, 라는 표현은 어떻게 보면 꽤나 모욕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뭐 라노벨이니까 설렁설렁 넘어갈 수 있겠지만여

    그건 그렇고 저도 실제로 친구가 없는데... 누군가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술친구...(초롱초롱)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7.30 19:34
    No. 6

    네, 사실 안 그렇다고 아무리 해도 직접적으로 "네 친구가 되어줄게" 는 애니메이션에서나 가능한 말이죠. 실제로 갑자기 그러면 자존심 상할 수도 있을 것 같구요. 좋은 해결 방안과 좋은 필력이 없어서 그렇게 설렁설렁 넘어갔습니다 ㅠ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7 연필유령
    작성일
    15.07.30 22:11
    No. 7

    그.. 저도 글 쓰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런 캐릭터는 어떻게 갈 가능성이 있을까를 그저 유추했을 뿐입니다..ㅠㅡㅜ 작가님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7.30 22:39
    No. 8

    아뇨아뇨, 너무 쉽게 들켜버려섴ㅋㅋ 괜찮습니다. 그렇다고 바꾼다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냥 하던 대로 해야죠,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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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75 널그리워해
    작성일
    15.08.23 00:34
    No. 9

    친구가 되어줄게보다는
    그냥 말 안하고 누구누구야 뭐좀 빌려줘 이런식으로...말 트고 다가가게 되던데요 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23 11:16
    No. 10

    아, 그렇네요! 다음번에 수정할 때엔 그렇게 바꿔 써야겠네요. "친구가 돼줄게"는 너무 작위적이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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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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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03화 - 3 +14 15.08.09 1,159 26 16쪽
157 03화 - 2 +9 15.08.05 1,106 21 20쪽
156 03화. 여자애랑 놀지만 데이트는 아닙니다. +17 15.08.03 1,282 20 21쪽
155 02화 - 4 +6 15.08.01 1,541 28 19쪽
» 02화 - 3 +10 15.07.29 1,221 20 20쪽
153 02화 - 2 +11 15.07.26 1,238 16 19쪽
152 02화. 친구를 사귀는 것이니까. +8 15.07.23 1,333 21 19쪽
151 01화 - 4 +8 15.07.20 1,305 25 19쪽
150 01화 - 3 +10 15.07.16 1,227 23 18쪽
149 01화 - 2 +6 15.07.13 1,417 18 18쪽
148 01화. 멀어진다 +8 15.07.12 1,566 26 21쪽
147 2014 크리스마스 스페셜 /// 정말로...? - 02 +27 14.12.24 1,659 29 28쪽
146 2014 크리스마스 스페셜 /// 정말로...? - 01 +8 14.12.24 1,522 24 25쪽
145 끝화. +32 14.08.20 2,277 35 32쪽
144 32화 - 5 +28 14.08.13 2,005 49 18쪽
143 32화 - 4 +11 14.08.12 1,713 36 20쪽
142 32화 - 3 +13 14.08.09 1,815 29 21쪽
141 32화 - 2 +4 14.08.07 1,625 38 18쪽
140 32화. 잡아라, 사랑의 망설임을! +13 14.08.06 1,698 37 21쪽
139 31화 - 6 +16 14.08.04 1,889 31 21쪽
138 31화 - 5 +12 14.08.02 1,965 38 23쪽
137 31화 - 4 +11 14.07.31 1,854 36 19쪽
136 31화 - 3 +10 14.07.28 1,610 33 18쪽
135 31화 - 2 +17 14.07.25 1,562 39 23쪽
134 31화.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앞으로 나아갈 때. +8 14.07.21 1,878 39 20쪽
133 30화 - 4 +18 14.07.10 1,577 38 19쪽
132 30화 - 3 +16 14.07.09 1,587 44 22쪽
131 30화 - 2 +17 14.07.06 1,755 49 22쪽
130 30화. 우유부단. +10 14.07.06 1,637 4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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