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3,373
추천수 :
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4.12.24 17:46
조회
1,521
추천
24
글자
25쪽

2014 크리스마스 스페셜 /// 정말로...? - 01

DUMMY

‘촤악.’

“여전히 늦잠꾸러기네. 좀 나아지는 것 같더니.”

“으으······ 으으으······.”

커튼 치는 소리와 함께, 언제나와 같은 아침이 시작된다. 눈을 찡그리며 괴로운 소리를 낸다. 높은 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뜨고 멍하니 허공을 본다. 새침한 표정의 희세. 단정한 교복차림의 모습이 아침부터 상당히 자극적이다. 희세는 서 있고 나는 누워있는지라, 조금만 노력하면(?) 팬티가 보일 것 같다. 아하하─ 아아, 안 되지. 잘못하다 밟힐 수도 있으니까. 요즘 희세, 더욱 난폭하게 됐으니까.

“좀 알아서 일어나 있고 그러면 안 돼? 내가 무슨 네 마누라야?”

“마누라 할래?”

“미친, 여자친구 있는 애가 그딴말 해? 리유한테 이른다?”

“아아아, 그건 좀 자제 좀. 또 잔뜩 토라진다니까.”

밥상을 차리며 희세는 한숨을 쉰다. 자연스럽게 농담을 던지니 정색하고 답하는 희세. 그런 면에서는 한결같이 정석대로인 희세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헤유. 진짜, 이딴 식모짓 왜 혼자 한다고 자처해서. 나도 참 바보 같다, 그치?”

“나 씻는다.”

“말 들어! 우씨!”

희세는 마치 우리 엄마가 ‘내가 왜 네 아빠 같은 사람 만나서.’ 하는 푸념 투로 말한다. 열일곱 살 여고생이 하기엔 너무 성숙한 한탄인데. 그런 한탄을 듣기에는 아침에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얼른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가며 한 마디 했다. 희세가 벌컥 화를 내지만 어쩔 수 없다. 씻어야지! 지각하는데.

“음······ 잘생겼는데?”

세수를 하고 가만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짜식, 좀 괜찮게 생겼는데. 암만, 여자 친구도 있는 몸인데. 학교에서 여자애들한테 인기 장난 아닌디. ······딱히 여자애들만 있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웅도. 수컷 웅, 길 도 한자를 쓰는, 사나이의 길을 걷고 있는 정웅도다. 뭔가 상당히 오래간만에 학교를 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리유랑 사귀고 나서는 모두와 어색하게 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격의 없이 친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까도 희세한테 ‘마누라 될래.’ 하는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희세도 왈칵 부끄러워하거나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치고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생기고선 희세가 더 이상 내 자취방에 와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너한테 환심 사려고 오고 그런 거 아니니까 계속 올 거야.’ 라는 고집 아닌 고집을 부려 본의 아니게 더 호의호식 하고 있다. 솔직히 희세 같은 절세 미소녀가 아침마다 와서 깨워주고 밥 차려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굉장한 영광이지.

“요즘은 어때? 좀 진전이 됐어?”

“음? 뭐가.”

학교 가는 길. 희세는 뒷짐을 지고 상체를 조금 앞세우고 말한다. ······무슨 일본 순정만화에서 여주인공이 주인공 남자애에게 청순하게 물어보는 자세 같네. 희세는 눈매가 날카롭고 가슴이 상당히 커서 잘 안 어울린다. 무엇보다 가방도 백팩이라 안 어울리고. 그런 자세를 취하려면 뒷짐지는 손에 가방을 들고 있어야 맛이지.

“모르는 척 하기는, 네 여자 친구 말에요 여자친구!”

“아······ 그······ 음······.”

“그렇게 대놓고 딱딱하게 굳는 표정 짓지 마, 더 비참하니까?”

희세의 말에 절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순식간에 죄인의 모습이 된 나는 말끝을 흐리며 희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희세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나는 감히 희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가 없다.

‘그 날’ 이후로. 사실, 그런 일 있기도 힘들긴 하지만. 여자애 네 명이 나를 좋아하고, 그 네 명이 전부 나에게 구애하는데 그 중에 한 명을 고르라니. 결국 고르긴 골랐지. 리유로.

리유를 선택하고, 나머지 여자애들과는 이제 영영 예전처럼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영원한 단절이 지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여자애들은 내가 생각하는데로 움직이지 않는다. 의외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예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나를 대한다. 희세도, 성빈이도, 미래도.

오히려 신경 쓰는 쪽은 나와 리유 쪽이랄까. 나야 한 찌질함 하는 찌질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리유 쪽은 되려 의외다. 리유도 예전엔 다른 애들한테 잘 엉겨붙고 어린애 같은 티를 많이 냈는데 요즈음은, 뭔가 거리가 있는 느낌이랄까.

“어떻냐고! 어색해하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 하지 마.”

“······아니, 그렇잖아. 어색한 걸 억지로 안 어색하다면서 강한척 하는 것도 거짓말이잖아. 나는, 너랑 어색해!”

“어색하단 걸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지 마! 애초에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어색한 게 아니잖아?!”

“······미, 미안하잖아.”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아 진짜. 또 이상하잖아.”

애써 밝은 분위기를 만들려 했지만 결국엔 또 조성되는 이런 분위기. 아아, 희세 쪽에서 힘들여 어색하지 않은 태도로 말해주는데, 나란 놈은 기어이 이런 공기를 만들고 만다. 희세도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나처럼 완벽한 여자애 차 버리고 만날 정도면. 정말 내가 부러워서 눈 돌아갈만큼, 열등감 느껴서 리유한테 질투심 느낄만큼 사랑해야 되는 거 아냐? 그래야, 내가 덜 억울하잖아.”

“······미안합니다, 그렇게도 못 하는 어중간한 남자라.”

“······.”

희세는 잠자코 말한다. 희세의 말 한 마디 마디가 마음속에 박히는 것 같다. 그렇지, 그 말이 맞지. 근데 나란 놈은, 이런 사람이다. 사람은 원래, 쉽게 바뀌는 게 아니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요즈음은······ 모르겠어, 그냥 똑같은 것 같은데.”

“똑같다니.”

“그냥······ 예전같은?”

한 푸닥거리가 끝나고, 대화의 결말은 흐지부지하게 안 났다. 다른 분위기로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처음부터 이렇게 대답했으면 저 질척질척한 분위기의 대화는 없던 건데. 왜 구태여 솔직하게 심경을 말해서. 희세 또한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봐라, 그냥 내 기분 말하지 말고 대답이나 할걸.

“이보세요, 정웅도씨? 누가 우월하다, 열등하다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쟁쟁한 여자애 셋이나 제쳐두고, 솔직한 평으로 여고생 같지도 않은, 여자애로서 매력도는 0으로 수렴하고 오히려 한참 어린 애기 같은 느낌만 잔뜩 있는 리유랑 사귀면서, 아무 진척도 없다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폭풍디스질이야. 리유 들었으면 분명 삐쳤다, 그 말?”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는데. 왜, 너도 네 기분 맘대로 내뱉으면서 나한테 뭐라 그래?”

“아니······ 그, 그래.”

요즈음의 희세는 이렇다. 예전에도 날카로운 분위기에 안 좋은 소리를 하긴 했지만, 요즈음은 완전히 독설가. 그것도 말하기 껄끄러운 부분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그런 독설가. 난감해서 대답할 말이 없다.

“너, 그런 거야? 소아성애자.”

“아니라니까! 제발 그딴 오해는! 애초에! 리유는 우리랑 동갑이라니까!”

“······리유가 싫다는 건 아닌데. 암만 봐도 리유한테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결여돼 있어. 결여가 아니라 미성숙이지. 키 작은거야 여자애니까 작을 수도 있지만. 성격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어떤 것도 지금 네 나이 남자애에게 어필할만한 여성적 매력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네가 그 유명한······”

“그만! 분명하게 리유 싫어하는 것 같거든, 너?! 갑자기 왜 이렇게 리유 디스하는데!”

“그럼 너 같으면 좋아하는 남자애 뺏어간 년을 옹호해주고 싶겠어?! 싫은 게 아니라 더 싫다고! 짜증나잖아!”

“너무 솔직해!!”

한층 난폭해진 희세와의 등굣길은 이렇게 격하기 그지없는 대화가 오간다.


“좋은 아침. 응? 별로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어, 안녕. 좋은 아침. 그냥 뭐······ 그래.”

교실에 들어서서, 희세는 제자리로, 나는 내 자리로 가 앉는다. 먼저 와 있는 성빈이가 천사처럼 밝은 미소와 함께 인사한다. 희세에게 짓밟힌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 성빈이는 치유의 성녀지.

“요즘은······ 어때?”

“성빈이 너까지 그런 질문이야. 제발.”

“어? 어? 나 뭐 잘못 질문했어? 궁,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아니야, 네 잘못은 아니고. 후우.”

성빈이는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희세와는 다르게 직설적으로 물어보진 않고 조심히 내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안 그래도 그 얘기 때문에 등교하며 호되게 데인 나다. 절로 격한 말이 나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성빈이를 보고 한숨 쉬며 사과한다. 희세에게 한 말과 비슷하게, 별다른 진전이 없다고 대답했다.

“오라버니♡ 오셨나요, 학교에. 여전히 힘세고 강한 아침이네요, 이른 때의 접속에도 불구하고?”

“이제 네 컨셉은 무슨 뜻인지도 알 수가 없네. 대충 아침 인사인 거지?”

“아하핫! 역시 오라버니네요.”

“뭐냐 그 취급. 기분 이상해지는데.”

성빈이에게 막 요즘 리유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찰나, 호들갑스럽게 존재감을 과시하며 미래가 다가온다. 콧소리를 잔뜩 넣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번역체의 말로. 여전한 장난이다. 미래는 그래도 희세나 성빈이보다는 비교적 예전과 같은 태도이다. 나한테 하는 것이나. 내가 미래에게 하는 것이나.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지만.

“저······ 오라버니?”

“어, 왜.”

손발이 오그라드는 존댓말도 이제는 아무 생각도 안 들 정도다. 미래의 이런 행동들이 다 ‘컨셉’ 인 것은 예전에 다 알게 됐으니까.

“요즈음 두 분 사이는 어떤가요? 포옹? 키스? 헉,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너무 빠르지 않나요? 게다가 그토록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짐승같은 욕망 아래 깔아 뭉개다니요······ 너무······ 너무 부적절해요! 불건전해요!”

“혼자 어디까지 가는 거야. 돌아와, 현실로. 손도 안 잡았어.”

“엣?!”

“어?!”

“엥?!”

미래는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망상의 실타래를 풀어 놓는다. 끈적한 표정으로 엄한 상태까지 망상의 자락을 펼친다. 가만히 손날로 미래의 머리를 톡 치며 말하니 그제야 망상에서 돌아온다.

그와 동시에, 미래를 포함하여 옆자리 성빈이, 앞에 있던 희세까지 소스라치게 놀라 나를 쳐다본다. 뭐, 뭐야 얘네.

“손도 안 잡았다고? 지금까지?!”

“거짓말. 사귄지 얼마가 지났는데.”

“조선시대에요, 오빠?! 쓰레기 주제에 그렇게 순정남인 척 하지 마요! 아니, 이건 순정남도 아니고 그냥 X신이에요, X신!”

“아니, 아니이! 왜들 남 연애사에 이렇게들 관심이 많아! 나라고······”

희세는 놀란 투로 말한다. 성빈이는 성빈이답지 않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한다. 미래는 격한 말까지 쓰며 말한다. 세 명이 동시에 말하니 더욱 혼란이 가중돼 말했다. 셋이 아주 나를 잡아먹을 기세다.

“와! 왜 다 모여 있어! 나도 학교 일찍 와야겠다!”

“아니, 뭐 그냥.”

“······.”

적당한 타이밍에 리유가 교실로 들어와 말한다. 나쁜짓을 한 건 아닌데 괜히 찔려서 당황한 티를 역력히 내며 둘러댔다. 여자애들은 순식간에 정색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더 어색하다. 리유는 ‘응? 왜 다 무서운 표정이야? 웅이가 이상한 말 했어?’ 하고 물어본다. 희세는 ‘변태새끼 어디 가겠어.’ 하고 말한다. 더욱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리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입을 꾹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한다.


“웅! 웅! 빵 사줘!”

“내가 빵셔틀이야. 매일 빵 사다 바치네.”

“아니지! 같이 가는데, 어떻게 빵셔틀이야!”

“돈은 내가 내잖아. 이래봬도 쪼잔한 남자야. 아유, 그래 오늘까지다.”

“웅웅! 히히힛.”

쉬는 시간. 리유가 폴짝 토끼처럼 내 자리 앞으로 다가와 말한다. 늘 얻어먹는 리유 덕분에 내 지갑사정은 벌써 홀쭉하다. 하나 귀여운 표정을 하고 애교를 부리는 리유가 눈앞에 있는데 안 가기도 그렇다. 결국 매일 같은 결말이지만 자리에 일어나 리유와 함께 매점에 간다.

“여어, 변태 씨. 리유하고 어딜 가. 유괴?”

“뭔 소리여, 매점 간다 매점.”

매점 가는 복도. 매점 수익의 상당부분을 보장해주는 정희가 이미 사들고 온 빵을 먹으며 이 쪽으로 온다. 나와 리유를 보고 한 마디 던진다. 여전히 ‘변태 씨’ 라고 하는 것도 기분이 언짢지만 무엇보다 유괴라니. 가뜩이나 희세한테 로리콘으로 찍힌 것도 억울한데, 정희까지 이런 식이라니. 정희는 내 대답에 리유를 힐끔 쳐다본다. 그러더니 악마 같은 미소를 짓는다.

“에헤─ 맞다, 둘이 사귄다고 했었지. 아하~ 좋겠네, 좋겠어. 청춘이야!”

“아니, 그······.”

“······.”

특유의 놀리듯 비꼬는 듯한 말에 왈칵 얼굴이 붉어진다. 분명 사귀는 게 맞긴 한데, 그것도 한 달 이상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런 말을 들으면 공연히 부끄러워지는 나다. 힐끔 리유의 눈치를 살피니 리유 역시 얼굴을 붉히며 땅바닥을 쳐다본다.

“어허! 설마 여자 친구인 걸 부정하는 거? 완전 쓰레기네, 변태 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왜 손도 안 잡고 쫄쫄 가? 얼른 손 잡아, 여자친구면 당연히 손 잡아야지!”

“······제힛······ 이, 이제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거든?!”

“······!”

착 가라앉은 정희의 큰 목소리에 지나가던 여자애들도 수군거리며 나와 리유를 쳐다본다.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저들끼리 깔깔대며 웃는다. 으아, 더욱 부끄러워진다. 애들의 웃음이 비웃는 건 아니고, 단순히 부끄러워하는 나와 리유의 모습이 즐거워 그런다는 건 알겠지만······ 어디 도망가 숨고 싶다!

하지만 남자의 괜한 자존심이 객기를 부리게 한다. 사실, 별 것도 아니다. 리유는 나랑 사귀기 전에 손 잡는건 물론 포옹이나 심지어 뽀뽀도 했다. 뽀뽀까지 했다고 뽀뽀! 키스 전 단계라고! 키스는 그것(?) 전 단계고! 거의 최종진화 전전단계까지 온거다잉?! 흥분한 나는 굉장한 기세로 리유를 쳐다본다.

“가자! 얼른 와!”

“오올~~~ 겁나 상남자네, 정웅도! 짐승이여! 리유 조심혀, 쬐끄마니까 다칠라!”

“······.”

덥썩 리유의 손을 잡는다. 리유는 깜짝 놀라 나를 올려다본다. 투명한 듯 하얀 리유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됐다. 나도 화악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허세스런 표정으로 감춘 체 앞서 간다. 리유는 잘 따라오지 못해 몸을 휘청거린다. 걱정돼 천천히 가고 싶지만 옆에서 뒤에서 부추기는 정희와 다른 여자애들의 시선 때문에 뭇 나쁜남자인 양 뚜벅뚜벅 걸어간다. 정희는 좋아 죽겠다는 듯 환호하며 말한다.

“미안, 기분 나빴어?”

“아아니, 괜찮아. 창피해서, 히히.”

“사실 나도······ 하핫.”

“······.”

매점에 가니 다행히 애들이 없이 한산하다. 얼른 손을 놓고 평소의 찌질하고 다정한 내 모습으로 돌아온다. 리유 역시 진땀을 흘리며 대답한다. 감도는 침묵. 어색······한가?

“나, 남자친구니까, 손 잡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 그렇지.”

“······아, 나 이 빵 먹을래!”

“어, 뭐 맘껏 골라.”

리유는 나를 쳐다보고 말한다. 리유답지 않은 진지한 눈빛. 게다가 그 말을 하는 목소리도 왠지 성숙한 듯 바뀐 목소리 같다. 귓전으로 파고드는 그 목소리와 눈으로 들어오는 그 눈빛에 마음속 어딘가에서 울컥, 피가 솟아오르는 기분이다.

······이상하잖아, 이런 거! 납득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고 해야 하나! 리유는 귀여운 여동생 같은, 귀여운 딸(?) 같은 애인데! 이런 요망한 말을 하면! 한 명의 여자애로 보일 것 같잖아! 범죄라고, 그거! 아니, 동갑은 동갑이지만! 이상과 현실의 이율배반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리유도 어색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마찬가지로 어색해하며 얼른 빵을 고른다. 나 또한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출하고자 얼른 빵 있는 쪽으로 가 공연한 말을 내지르며 더욱 어색한 분위기를 조장한다. ······결국 아무리 봐도 내 쪽이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 같다.


뭐, 이랬던 나날들인데. 사귀기로 한 건 벌써 한 달이 넘어가지만, 실질적으론 오히려 사귀기 전보다 더 어색해졌다. 리유에게 고백하고, 리유와 사귀게 되고 비단 희세, 성빈이, 미래하고만 어색해진 게 아니라 리유하고도 어색해졌다. ······여자친구인데?!

그게, 사람이란 게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내 입으로 말했지만 사귀기 전에 이미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뽀뽀까지 다 했는데. 막상 사귀고, 리유가 내 「여자친구」라는 인식이 드니까······ 이전까지의 ‘귀여운 여동생’이나 ‘귀여운 딸’ 같은 인식은 점차 사라지고 한 명의 여자애로 느껴지려 하니까. 하지만 이상은 그런 인식을 애써 놓지 않고 붙들려 노력하고······ 그래서 결론은 총체적 난국이다.

“정말, 둘이 답이 없구나. 사귀는 거 맞아?”

“응.”

“맞아.”

저녁 시간, 밖에 나와서 다섯 명이서 밥을 먹고 있다. 평범한 일상. 희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와 리유를 쳐다보며 말한다. 간단히 대답하는 나와 리유. 물론 둘이 서로 눈도 안 마주치고 있다. 자리배치도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리.

“근데 왜 그래? 짜증나. 짜증난다고! 이게 다 정웅도 너 때문이야. 네가 그딴 식으로 일관하니까!”

“······미안합니다, 다 내가 잘못이지요.”

희세는 팔짱을 끼고 나를 지그시 노려보며 말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침에 희세가 어색해지면서까지 말했던, ‘나를 찬 만큼 리유랑 알콩달콩 사귀어야지’ 하는 말이 떠올라 더욱 죄스러워진다.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는 수밖에 없다. 이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 건 아니긴 하지만.

“오빠, 진짜 찐따같네요. 실망이에요. 오빠 X신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딴 고자 병X 찐따 같은 남자한테 멀쩡한 여자애 셋이나 바람맞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너한테 듣고 싶진 않거든! 게다가 어디가 멀쩡한 여자애 ‘셋’이야! 둘만 멀쩡하고 너는 진성 또라이잖아!”

“데헷☆ 또라이라뇨, 미래는 그런거 몰라여~ 애초에 또라이라는 말은 저한테는 칭찬이랍니다☆”

“아오······.”

미래는 미래다. 그 나이 여고생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입담을 보이며 나를 내리깐다. 뭐, 여자애들끼리 저 정도 욕설은 할 수 있겠지만. 내 환상을 깨······ 아니다, 미래한테는 이미 많은 환상이 깨졌지. 잔뜩 딴죽을 걸어봐도 미래에겐 효과가 없는 듯하다······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웅도도 문제지만, 리유도 문제야. 응?”

“어, 나? 왜?”

희세는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구석자리 리유를 쳐다본다. 리유는 반짝 눈을 뜨며 천연덕스런 표정을 짓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눈빛.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그 눈빛은 차마 뭐라고 어떻게 혼낼 수 없는 그런 눈빛이다. 궁극기 같은건가, 저 눈빛은.

“너, 웅도 좋은 거 아니야? 사귀잖아. 남자친구잖아.”

“으, 응! 맞아! 웅도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아앗, 취소.”

“왜 취소하는데!! 그게 더 이상해!”

“아아, 그, 그럼······ 좋, 좋아 해에에······”

“억지로 말하지 마! 됐어, 뭐!”

“히이이이······.”

희세의 말에 리유는 반짝 팔을 들며 말한다. 그러다 왈칵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취소한다. 상처받은 나.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니 리유는 더욱 부끄러워하며 말을 번복한다. 크게 상처받은 건 아니지만 그세 놀리고 싶은 마음이 돌아 삐친 척 한다. 난감해하는 리유. 귀여워, 역시 리유는 난처해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근데 무슨 손도 못 잡고 쩔쩔매. 너무 그렇잖아? 남자친구라는 자각이 없는 것 같아서.”

“······아니야. 남자친구 맞아.”

“에헤. 그렇단 말이지.”

희세의 말에 리유는 잔뜩 뾰로통한 태도로 대답한다. 삐죽 화가 난 듯한 표정의 희세. 씨익 웃더니 리유에서 나로 시선을 돌린다.

“그럼 이러면? 이래도 상관 없어? 웅도가 다른 여자애랑 노닥거려도?”

“야, 야······!”

“······!”

희세는 갑작스럽게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말한다. 팔짱을 끼는 건 상관없는데 몸을 잔뜩 밀착해 팔꿈치 언저리에 말캉 가슴이 닿는다. 그것도 너무 적나라하게 촉감이 느껴지게. 순식간에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다. 리유는 눈이 커지며 아무말도 못하고 희세와 나를 쳐다본다.

“어머, 그렇다면 저도. 에헷♡”

“······!!”

“에, 잠깐만, 다들 뭐하는 거야······! 리유 울 것 같잖아!”

반대쪽 옆에 있던 미래는 희세의 의도를 파악하고 방긋 웃으며 내 반대쪽 팔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낀다. 희세보다야 한참 작지만 미래도 어엿한 여학생이다. 결코 그 나이 또래 여자애들에 비해 딸리는 수준(?)이 아니다. 두 여자애가 팔짱을 끼고 몸을 잔뜩 밀착해서, 그 유토피아적 촉감과 진동하는 달달한 냄새, 샴푸냄새와 향기로운 냄새에, 취한 것처럼 어질어질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그런 와중에 눈앞에 눈물이 글썽글썽 울어버릴 것 같은 리유가 보인다. 보다못한 성빈이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말한다. 희세는 그제야 팔짱을 푼다.

“뭐, 리유는 확실히 자각하고 있구나. 울어도 소용 없어, 여자애는 울면 안 된댔지, 저번에?”

“아, 안 울거든! 그냥, 그냥······.”

희세는 냉정하게 말한다. 리유는 억울한 듯 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아아, 가련한 리유······ 간악하고 사악한 희세의 술책 때문에······ 이건 모두 희세 때문이ㄷ······

‘팍!’

“어헉! 크흑······ 너······!”

“가슴 닿았다고 헤벌래 하지 좀 마. 기분 되게 나쁘거든.”

“큿······ 뭐······ 라고······!

희세는 방심하고 있는 나의 명치를 있는 힘껏 때린다. 그대로 상에 엎어져 괴로워 버르적거리는 나. 희세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맞은 편 성빈이가 ‘괜찮아?! 많이 아파?’ 하고 걱정해준다. 아아······ 아아아······.


“둘이 말야. 조만간 크리스마스잖아. 뭐할지 생각했어?”

“아니.”

“내 이럴 줄 알았다! 어휴. 차라리 안 사귀길 잘한 것도 같다, 정웅도.”

“······죄송합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희세의 질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화악 데였다. 으으, 무서워. 미래는 비꼬는 말투로 ‘뭐 오빠가 그렇지요!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잖아요?’ 하고 말한다. 더욱 심장을 후벼파는 듯하다. 성빈이는 ‘웅도도 생각이 있겠지.’ 하고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미안, 성빈아. 아무 생각이 없었어. 애초에 17 평생 내게 크리스마스는 그저 경험치 2배 드랍률 2배 이벤트 기간(?)이었는걸.

“그럼······ 데이트라도 할까.”

“당연한 거 아니야?! 크리스마스에 연인들이 대체 뭘 하는데! 나나 성빈이나 미래는! 어휴.”

“미, 미안합니다!”

가만히 말하니 희세는 잔뜩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는 조건반사적으로 사과가 나온다. 미래는 ‘아하하, 그럼 셋이서 계라도 할까요? 남자친구 없는 미친년들끼리 수다 한마당!’ 하고 웃는다. 성빈이는 ‘와, 재미있겠다.’ 하고 받아준다. 정작 희세는 ‘싫어.’ 하고 짧고 냉정하게 대답. ‘아, 너무해요!’ 하는 미래의 대답. 나한테나 드립이 통할까 희세에겐 가차없구나.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할래?”

“······응.”

“······이건 좀 남자친구 같네. 그래, 그 기세로 좀 사귀란 말야.”

“아니 애초에! 내가 뭘 어떻게 사귀던! 내 자유의지잖아! 헌법 제 1조 1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

미래를 포함해 세 명이 떠드는 사이, 잠시 뒤로 빠졌다가 리유 옆으로 가 넌지시 말했다. 나를 올려다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 수줍게 대답하는 리유. 미래가 ‘올─’ 하면서 분위기를 돋운다. 팔짱을 끼고 희세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니, 안 해도 X랄, 해도 X랄이라니! 지금까지의 분노가 폭발해 잔뜩 소리쳤다. 그래도 별다른 소용은 없다.

어쨌든 이렇게, 떠밀리듯 데이트를 하게 됐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Lv.71 디플럭스
    작성일
    14.12.25 01:23
    No. 1

    음....? ㅇㅂㅇ 잘보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12.25 07:34
    No. 2

    깜짝! 스페셜인데......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졲갸
    작성일
    14.12.25 12:10
    No. 3

    스페셜 /// 정말로
    답답하다 // 정말로

    로 제목 바꿧으면 좋겟네..

    진도 저리뺄꺼면 리유랑 왜 이어준거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12.25 18:33
    No. 4

    외.. 외전이니까요~ 답답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줏대없이 사람들 요청대로 결말을 바꾸거나 한 건 아니구요, 그러면 사람들 말대로 했으면 희세로 이었겠지요.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 장면부터 이미 결말부는 생각이 끝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렘물을 쓴 숙명인 것 같습니다. 답답하셨음에도, 다 읽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창천의혼
    작성일
    15.02.25 19:15
    No. 5

    잠깐 왔더니 올라와 있어서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2.25 19:58
    No. 6

    감사합니다. 아직까지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5.08.04 06:57
    No. 7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8.04 22:53
    No. 8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9 03화 - 4 +15 15.08.10 818 21 20쪽
158 03화 - 3 +14 15.08.09 1,157 26 16쪽
157 03화 - 2 +9 15.08.05 1,105 21 20쪽
156 03화. 여자애랑 놀지만 데이트는 아닙니다. +17 15.08.03 1,281 20 21쪽
155 02화 - 4 +6 15.08.01 1,540 28 19쪽
154 02화 - 3 +10 15.07.29 1,220 20 20쪽
153 02화 - 2 +11 15.07.26 1,237 16 19쪽
152 02화. 친구를 사귀는 것이니까. +8 15.07.23 1,333 21 19쪽
151 01화 - 4 +8 15.07.20 1,305 25 19쪽
150 01화 - 3 +10 15.07.16 1,226 23 18쪽
149 01화 - 2 +6 15.07.13 1,417 18 18쪽
148 01화. 멀어진다 +8 15.07.12 1,565 26 21쪽
147 2014 크리스마스 스페셜 /// 정말로...? - 02 +27 14.12.24 1,659 29 28쪽
» 2014 크리스마스 스페셜 /// 정말로...? - 01 +8 14.12.24 1,522 24 25쪽
145 끝화. +32 14.08.20 2,277 35 32쪽
144 32화 - 5 +28 14.08.13 2,004 49 18쪽
143 32화 - 4 +11 14.08.12 1,712 36 20쪽
142 32화 - 3 +13 14.08.09 1,814 29 21쪽
141 32화 - 2 +4 14.08.07 1,624 38 18쪽
140 32화. 잡아라, 사랑의 망설임을! +13 14.08.06 1,698 37 21쪽
139 31화 - 6 +16 14.08.04 1,888 31 21쪽
138 31화 - 5 +12 14.08.02 1,964 38 23쪽
137 31화 - 4 +11 14.07.31 1,854 36 19쪽
136 31화 - 3 +10 14.07.28 1,609 33 18쪽
135 31화 - 2 +17 14.07.25 1,562 39 23쪽
134 31화.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앞으로 나아갈 때. +8 14.07.21 1,877 39 20쪽
133 30화 - 4 +18 14.07.10 1,576 38 19쪽
132 30화 - 3 +16 14.07.09 1,586 44 22쪽
131 30화 - 2 +17 14.07.06 1,754 49 22쪽
130 30화. 우유부단. +10 14.07.06 1,636 40 2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