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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3,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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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4.08.04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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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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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글자
21쪽

31화 - 6

DUMMY

“!”

아침이 되어 눈이 반짝, 리유는 눈을 떴다. 그리 이른 아침은 아닌 시각. 하지만 여행에 들떠 밤늦게까지 논 다른 애들에겐 한참 이른 아침이다. 허나 다른 애들보다 일찍 잠든 리유에겐 괜찮은 아침이다. 잠이 많은 편이지만 희한하게 아침에는 잘 일어나는 리유니까. 그리고 지루한 수업시간이 되면 또 꾸벅꾸벅 졸겠지만, 지금은 수학여행이니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 날. 다른 애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리유는 일어나 방을 나섰다.

“하읍.”

아침의 찬 공기를 마신다. 기분마저 상쾌해지는 것 같다. 어제 아침엔 굉장히 절망적인 기분이었는데. 미래의 말에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았다, 또 어제 미래의 조언에 기분과 행동을 바꾸게 됐다. 이렇게 보면 꼭 미래 손에 자신이 놀아나는 것 같지만, 리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가 해주는 말이 옳으니까. 상쾌한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웅도에 대한 일은, 미래 말대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임하니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이전에는 굉장히 지루하고, 진중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있었는데. 평소 하던대로 웅도에게 응석 부리기도 하고, 귀여움 받으려 안간힘 쓰기도 하니 마음만은 편하다. 무겁게 있는 자신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웅도도 지금의 자신을 훨씬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애들도 자신에 대한 어색함을 털어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지금은 웅도를 깨우러 가는 길이다.

‘철컥.’

“우…….”

즐거운 마음 한가득인 상태로, 리유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밝고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바로 앞으로 펼쳐져 있는 광경에 목소리가 절로 턱 막힌다.

웅도는 거실에서 자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반팔 티셔츠에, 이불을 덮고 베개에 누운 체. 머리는 여기저기 뻗치고 얼굴은 푸석푸석, 몰골이 따로 없지만 남자애인지라 원래 얼굴하고 그리 큰 차이는 없다. 그냥 딱 자다 일어나면 이 정도 얼굴이겠지 하는 모습. 하지만 놀랄만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자고 있는 웅도 옆에서 다소곳이 눈을 감고 자고 있는, 희세.

이불이 좀 큰 이불이긴 해서, 둘은 한 이불 안에서 잘 자고 있다. 희세가 웅도보다 조금 밑에서 자고 있고 또 턱 밑까지 이불이 덮여 있어 마치 웅도 품에 안겨 자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면 신혼부부의 일상적인 아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평소 이미지와는 다른 다소곳한 자세로 자고 있는 희세의 모습과, 자유분방하게 팔을 뻗고 다리도 이불에서 삐져나온 체 자고 있는 웅도의 모습이 교차돼 리유의 눈으로 들어온다.

‘쾅.’

“헤에…… 에에에에……!”

리유는 도저히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른 문을 닫고 문에 기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투명한 듯 흰 피부는 화악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을 가린 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의 열이 느껴진다. 리유는 스스로 자신을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리유도 적어도 일반적인 관념의 성 교육은 받았고, 저런 장면을 보고 충분히 부끄러워할만한 소녀다. 솔직히 초등학생 정도여도 저 장면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워질 수 있다. 리유는 너무 부끄럽고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

둘이 같이 자고 있다니─! 그, 그럼, 밤에?! 아니아니아니 설마설마설마 그 그 그 그럴 리가──!!

“아으으─ 응? 아침부터 일찍 일어났네 리유?”

“네, 네!”

리유는 잔뜩 부끄러운 소녀의 망상을 펼치며 빨개진 얼굴을 더욱 붉히며 서 있었다.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옆방 문이 열리며 담임선생님이 나온다. 기지개를 켜시더니 문득 서 있는 리유를 발견하고 방긋 웃으며 인사한다. 리유는 퍼뜩 고양이가 놀라서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모양새로 잔뜩 놀라 대답한다. 선생님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음?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어디 아파?”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으흥흥, 꼭 야한 거라도 보다 들킨 것처럼 당황하네. 설마, 진짜?”

선생님은 걱정스런 말투로 물어본다. 그러다 넌지시, 장난처럼 물어본다. 선생님의 말에 리유는 더욱 당황하게 됐다. 혹시라도, 지금 이 문을 열어 젖히고 안의 상황을 살펴보기라도 한다면……!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에에에에! 아니에요! 재, 재채기를 12번 연속으로 해서 그래요!”

“어머, 감기 걸렸어? 이런. 여행 중에 아프면 그것만큼 안 좋은 것도 없는데.”

“아뇨, 아, 알레르기요! 괘, 괜찮아졌어요!”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선생님은 이제 애들 깨우러 가야겠다.”

리유는 잔뜩 당황하면서도 어떻게 괜찮은 핑계를 대 둘러댔다. 하지만 선생님의 마지막 말에 리유는 금세 절망의 늪에 빠졌다. 애들 깨우러 간다면 필시, 옆방의 웅도 먼저 깨우고 위층으로 올라갈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선생님은 바로 계단으로 올라간다. ……웅도가 괜히 자기는 잊혀진 존재라고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어찌됐든 다행이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리유는 괜히,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부끄럽고 당황스럽다. 다시금 문을 열 용기도 나지 않는다. 한동안 웅도 방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 결국 어쩌지 못하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으음…….”

“으응……♡”

“……?”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의식이 반쯤 돌아온 상태. 하지만 쉬이 몸은 깨어나지 않은 그런 상태. 이런 상태에선 다른 사람들 말도 잘 들리고, 내 얘기나 내 욕 하는 건 더욱 잘 들린다. 가사상태라고 해야 하나. 아니, 죽은 건 아니잖아. 어쨌든 그런 상태. 말은 잘 들리고 감각은 살아있지만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않는다. 반쯤 잠든 상태여서. 이 상태에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깨어나려 하면 금세 깨어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그러지 않고 다시금 잠들곤 하지.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나는 무언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따뜻하다. 압도적으로 따뜻하다. 단순한 이불의 따뜻함은 아니다. 무언가 다른 것에서 열 에너지가 나에게 전달되는 것 같은, 그런 따뜻함. 거기에, 마치 태어나기 전, 좀 격한 표현을 하자면 자궁 속으로 돌아간 것 같은 포근함마저 느껴진다. 뭐지, 일개 수학여행 숙소 이불로 이 정도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니. 요즈음 숙박업계도 이만큼 발전한 건가.

근데 잠깐만. 분명히 나 혼자 자는데, ‘♡’는 뭐야. 내가 으음 하는데 누가 또 으응 하는건데.

“…….”

“!”

생각이 어느 정도 돌기 시작하니 정신이 맑아진다. 마치 컴퓨터 부팅 누르면 뭐라고 영어로 도스화면 지나고 그 뒤 윈도우가 뜨는 것처럼. 지금 막 뇌가 부팅하는 느낌이다. 눈을 반짝. 이 정도면 바탕화면 진입. 하지만 바탕화면 켜졌다고 성급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인터넷을 켜거나 하면 안 된다. 내 PC는 상당히 오래돼서 어느 정도 예열(?)을 해 줘야 한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엄청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으헉!’ 하고 소리쳤을테지. 희세가, 내 품에 있다.

너무도 평안한 표정으로, 같은 이불 안에서 나에게 바싹 붙어 자고 있다. 팔 쪽에 무한한 푸근함과 부드러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가슴이, 다리 쪽엔 매끈하고 따뜻한 허벅지가 닿고 있다. 그래서 그런 포근함을 느꼈던 건가. ……어. 어?! 어어어?!!

나랑 희세랑 같이 잤다고?!!


…….

어머니, 그리고 당신은 멀리 고향에 계십니다. 이내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폭죽이 내린 언덕 위에 올라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세워 우는 희세ㄱ…… 아니아니 이거 말고!



어머니께.

어머니, 안녕하신지요. 저는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와이프도 잘 있구요. 아직 스물 한 살 밖에 안 됐지만, 세 명의 가족의 가장으로서 어느 정도 사회인으로서의 의무감과 책임감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아들이 돼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아버지께도 사죄드리고 싶지만 차마 뵐 면목이 없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무엇보다 제 딸에게, 제 아내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죄인이라면, 남은 인생 모든 이들에게 속죄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어머니께, 아버지께, 와이프에게, 딸에게. 언제까지고 철없을 아들일 줄 알았는데, 지금은 조금은 어른이 된 느낌입니다. 나중에 어머니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때,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전개가 어디까지 폭주하는 거야!? 무슨 가상 편지인데 그거! 아니아니…… 잘 생각해봐. 기억을 잃은 게 아니다. 어제 술을 마시거나 그런 것도 아니잖아. 필름이 끊길 이유가 없잖아. 예전 미래네 집에서 술 마셨을 때에도 필름은 안 끊겼는데. 그러니까……

어제, 희세랑 밤늦게까지 이야기 한 건 기억이 난다. 한 새벽 1시 넘도록? 장난스럽게 ‘야, 근데 너 이렇게 늦게까지 있으면 내가 이상한 짓 할 지도 모르잖아?’ 하고 농담을 던지니 희세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해 볼 테면 해 봐. 어차피 넌 고자새끼니까 아무짓도 못 하잖아.’ 하고 대답했다. 묘하게 자존심에 스크레치이지만 전부 사실이라 별다른 반박을 할 수 없다. 얘기를 많이 해 사이가 많이 풀려 희세는 ‘……할 거면 상냥하게 해 줘♡’ 하며 심장 쿵쾅거릴만한 섹드립을 친다. 침을 꿀꺽 삼키고 일순간 굳은 표정이 돼니 희세는 죽을 것처럼 바닥을 탁탁 치며 웃으며 ‘아하하하핳하ㅏ핳ㅎ하!! 진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멍청해!! 하하하하핳ㅏ하ㅎ하!!’ 하고 말한다. 괜히 나만 부끄러워져선 ‘뭐! 네가 나쁜 거잖아, 그런 말 하는 게!’ 하고 억지로 말했다.

굉장히 졸려져서, ‘야, 얼른 가. 나 이제 졸려서 더 얘기 못 하겠다.’ 하고 말했다. 희세는 ‘너 자는 거 보고 갈래.’ 하고 대답한다. 헤롱헤롱 졸린데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져서 ‘나 자는 건 왜 보고 가?’ 하고 물었다. 희세는 ‘……자는 모습 보고 싶으니까.’ 하고 말한다. 약간 수줍은 듯한 그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졸음은 나를 덮치듯 엄습해온다. 여행으로 육신이 피로하고 정신은 희세하고 성빈이 신경쓰랴, 리유에 대한 것도 또 신경쓰랴 더욱 피폐해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순간 스윽 잠들었다.


그래, 그랬는데…… 그러곤 아침에 일어나보니 희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라……

“……으응─”

“어…… 어어…… 음…… 일어났어.”

“으응.”

희세는 움찔거리다 일어났다. 그리곤 묘하게 바로 뜬 눈이 나와 바로 마주친다. 나는 굉장히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하다 일단 말했다. 희세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다. 꼭 리유같이 천진한 웃음. 평소의 꾸밈있는 피식 웃는 모습이 아닌, 비유하자면 꼭 희나가 해맑게 웃는 것 같은 가식 없는 그 미소에 나까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잠깐만.”

“응?”

“그대로 있어봐. ……내가 왜 네 옆에서, 너랑 같이 이불 덮고 자고 있어?”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데.”

“……하아.”

희세는 퍼뜩 시큰둥한 눈빛으로 돌아와 묻는다. 얼음이 불 듯 냉랭한 그 말투에 나는 당황한 눈치로 대답했다. 내 대답에 희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희세는 의외로 그렇게 당황하거나 하지 않은 것 같다. 보통 여자애라면 ‘꺄악-! 이 변태새끼야!!’ 하면서 때리거나 상황을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나를 변태로 매도하거나, 그런 반응이 나올텐데. 희세는 잠자코 배게를 양손으로 집어든다.

“이 변태새끼야!!”

“야야야, 잠깐만! 설명을 들어, 설명을!! 아, 아!”

……왜 꼭 안 좋은 예상은 틀리는 적이 없는 건가.


“잘 잤어? 좋은 아침.”

“응, 푹 잤어. 오늘이 벌써 마지막이네. 흐흥흥.”

“그러게. 미래 넌 오늘은 쌩쌩하네?”

“아하하, 어제같은 우를 범할 순 없으니까! 일찍 잤지요! 새벽 2시!”

“……충분히 늦게 잔 것 같은데.”

식당으로 들어서 애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앉으며 인사했다. 성빈이는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성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전에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하고 오후 즈음 학교에 도착해서 해산하겠지. 미래는 다크서클 없이 한결 밝은 표정으로 밥을 먹고 있다. 내 물음에 하핫 웃으며 대답한다. 나보다 더 늦게 잔 것 같은데. 대체 어제는 얼마나 잠을 안 잤길레.

“리유는? 일찍 잤지, 아마?”

“어? 응, 응…….”

“에에. 왜 또? 어제처럼 삐칠려고?”

“아, 아니야! 그런 거…….”

“으응? 나 참.”

나는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리유의 활기찬 인사를 받으리라 생각했는데. 리유는 어째선지 소심하게 나를 쳐다보지 않고 밥을 먹고 있다. 먼저 말을 거니 리유는 흠칫 놀라며 눈을 들어 나를 본다. 그러더니 화악, 얼굴이 붉어져서 시선을 땐다. 뭐야, 또 시작? 어색해질까봐 먼저 운을 떼니 리유는 새침하게 대답하곤 시선을 밥으로 옮긴다. 확실히 삐친 건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이건 또.

희세는 베게로 흠씬 나를 때리고 방으로 올라갔었다. 뭐, 어제 많이 얘기해서 어색해진 건 아니지만. 눈짓으로 인사하니 새침하게 ‘흥’ 하는 느낌으로 눈을 돌린다. 아아, 것 참. 다른 애들 앞에선 잘 본색을 안 드러내지, 희세도.

아침을 먹고 조금의 시간을 줬다. 이제 숙소에서 짐을 다 챙겨서 나와야 하니까. 담임선생님은 방마다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애들이 놓고 나온 짐은 없나 하고 챙기신다. ……물론 내 방은 빼고. 어째서! 바로 옆방인데, 제일 먼저 하고 위층 올라가면 안 되나?! 뭐, 나밖에 없어서 뭘 놓고 나와도 워낙 확 눈에 띠니 놓고올 일은 없지만. 애초에 짐도 별로 안 가져왔고. 모든 걸 끝내고 버스에 탔다.


“으응. 참 쓸데없는 것 같은데. 그냥 집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기왕 온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구경하자. 응?”

“그래, 뭐…….”

“뭐, 문학관도 나쁘진 않잖아.”

불평스런 내 말에 성빈이는 긍정 한가득인 말투로 말한다. 옆에서 희세 또한 대답한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들리는 곳은 어떤 문학관. 서라벌에서 우리 학교까지 돌아가는 길에 어느 마을 어떤 문학관이라는데. 솔직히 아무 상관 없다. 문학관이라니. 도대체 뭘 하라는 말인가. 책 보라고? 그 사람 인생 보라고? 그 사람 작품? 인터넷에 치면 다 나오는데! 도통 이런 곳을 왜 와서 왜 보는지 의미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뭐, 성빈이랑 같이 유적지 다니면서 그런 내 마음가짐에 대해 핀잔을 들었으니까. 그러려니 납득하려 한다. 성빈이와 한 마디 얘기해도, 희세는 더 이상 대놓고 기분나쁘다거나 하는 표정은 짓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도 한 마디 내뱉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문학관 구경을 하려 했지만 웬걸, 10분만에 모든 관람을 마쳤다. 보면서 느낀 점은, 정말 문학소녀가 아닌 이상 문학관 구경은 할 게 못 된다는 점. 애초에 내가 이 작가에 관심이 있던 것도, 이 작가 작품을 하나 읽어본 적도 없는걸. 판타지니 로맨스니 하는 재미있는 글도 아닌 교과서에 실리는 순수문학 같은 건 진지하게 읽지도 않는 나인데 이런 문학관에서 뭘 보고 느끼겠는가. 문학관 자체는 뭐, 그 사람 친필 원고도 있고, 그 사람 연대별로 작품이라던가, 인생굴곡? 이것저것 자세하게 써있지만 어떠한 감응도 받지 못했다.

성빈이는 저번 박물관 때와 마찬가지로 그럭저럭, 꼼꼼히 문학관에 있는 글들을 읽어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범적인 모습에 괜히 부끄러워진다. 희세는 더욱 열정적이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희세답게, 문학관은 완전 자기 무대인 모양이다. 아, 평소 읽는 책들이, 나는 보통의 재미있는 소설이나 로맨스 소설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완전하게 순수문학. 그것도, 도서관에서 다 빌려서. 하긴, 로맨스 소설이라면 보통 텍스트본을 휴대폰에 넣어서 보지.

두 사람의 엄청난 기세에 나는 질려버렸다. 애초에 관람할 것도 그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나이기에. 잠자코 둘러보는데 어째 리유랑 미래는 보이질 않는다. 이 녀석들, 편하게 빠른 포기를 하고 나간건가. 그렇다면 나도 질 순 없지. 지체하지 않고 문학관을 나왔다. 어차피 볼 건 다 봤다.


“오, 저기 있네.”

1층으로 내려와 문학관 입구를 나섰다. 문학관 앞은 잘 꾸며놓은 공원처럼 돼 있다. 저 쪽 벤치에, 미래와 리유가 앉아 있는 게 보인다. 나는 혼잣말하며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근데 뭔가 모습이 이상하다. 미래는 심각한 표정으로 리유를 보고 있다. 리유는 내 쪽에서 보면 고개를 등진 체 미래에게 말하고 있다. 뒷모습이라 얼굴을 볼 순 없지만, 어째서인지 굉장한 분노가 느껴지는 기분. 말하자면, 리유가 미래에게 화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리유가 화내고, 미래는 묵묵히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어째 괜히 이상한 싸움에 휘말리는 건 아닌가 하면서도 궁금하다. 리유가 저렇게 화낼 애가 아닌데. 거기에, 미래도 저렇게 심각한 표정 짓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저만큼 진지한 표정은 그 때 한 번 봤지. 나한테 고백할 때. 그리고 나에게 거절하는 말 들을 때.

“……어떻게 할 수가 없는걸, 나는…… 나는……!”

“……리유야.”

가까이 다가가니 리유의 격정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미래는 얼굴이 내 쪽 방향이라 나를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리유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내가 다가오는 걸 잘 모르나보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진지하고 심각한데. 괜히 끼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슬쩍 발을 돌리려 했다. 좀 진정되고 와야지, 생각보다 심각하잖아.

“그치만, 그치만 웅이가 좋은데!”

“……!”

“……잠깐만, 잠깐만 리유야.”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 리유가 어깨를 들썩이며 하는 말이 귓전에 박힌다. 흠칫 놀라게 된다.

물론 리유가 나 좋다고 하는 말은 분명 많이 들었지. 많이 들은 수준이 아니라 으레 리유가 하는 말인데. 나는 그걸 진지하게 들은 적은 전혀 없다. 리유는 어디까지나 여동생, 좀 더 가면 딸 같은 존재니까, 적어도 내 또래 이성으로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들으니 또 이상한 기분이다. 그걸 또 왜 미래에게 말하고 있는 건지. 미래는 리유를 쳐다보다 문득 리유 어깨 너머로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더니 리유를 진정시킨다.

“나한테 말하지 말고, 뒤 돌아서 말해. 더 이상 피하지 말고.”

“……?”

작지만 또렷하게, 미래의 말이 들린다. 뒷모습이지만 리유가 어리둥절해 하는 게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윽고 리유는 뒤를 돌아 나를 본다.

눈물이 그렁그렁. 금방이라도 ‘와앙─’ 하고 울어버릴 것 같은, 천진한 어린애 같은 얼굴. 투명한 흰 피부는 잔뜩 빨갛게 달아올랐다. 한눈에 봐도 잔뜩 감정이 달아오른 격앙된 상태.

“히이나 비니한테는 상대도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어, 늘 그러니까! 웅이는 나를 그렇게 안 보니까! 그치만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데……! 늘 상대도 안 되니까, 난 어린애 같고, 웅이한테 폐만 끼치고, 늘 도움만 받으니까! 그치만, 그치만……! 나도 히이나 비니한테 지지 않을만큼 웅이가 좋은걸! 웅이를 뺏기고 싶지 않은걸! 그치만, 그치만!! 나, 이제는 모르겠어, 뭐가 어떤 건지. 웅이는 좋은데, 히이랑 비니도 좋은데. 뺏기고 싶지 않은데. 나로썬 어떻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고…… 흐윽…… 흐으, 흐윽…… 으아아앙─!”

“어어, 어어어…… 울지마 울지마…….”

리유는 감정이 폭발해서 생각들을 정리하지 않고 쏟아내듯 나에게 퍼부으는 기세로 말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정말로 리유가 나를 ‘좋아한다’ 는 거.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게 그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like’ 말고 ‘love’. 리유는 잔뜩 말하다 결론을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해졌다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어버린다. 나는 잔뜩 당황해서 손을 어지러이 흔들며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 안 그래도 리유가 엄청 크게 ‘웅이가 좋은걸!’ 하고 외쳐서 나름대로 패닉상태에 빠졌는데. 다행히 다른 애들은 다 문학관 안에 있어서 나랑 미래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점인데. 뭔가 리유가 나 좋아하는 마음 잔뜩 무시하고 울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잔뜩 미안해졌다. 무척 서럽게 앙앙 우는 리유를 보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병신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다 천천히 리유에게 다가가 일단 리유를 안아줬다. 리유 눈물이 가슴팍에 닿아 옷이 젖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포옥 안아줬다.


작가의말

좋아하는 문학가가 있다면 두보와 박지원과 윤동주가 있습니다.

두보는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그 감정이 몇천년의 시공을 뛰어 저에게까지 절절하게 느껴져서.

박지원은 몇백년 뒤의 사람들에게도 교훈을 줄 수 있는, 거기에 단편인 글들을 많이 써서.

윤동주는... 그냥 윤동주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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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01화. 멀어진다 +8 15.07.12 1,565 26 21쪽
147 2014 크리스마스 스페셜 /// 정말로...? - 02 +27 14.12.24 1,659 29 28쪽
146 2014 크리스마스 스페셜 /// 정말로...? - 01 +8 14.12.24 1,522 24 25쪽
145 끝화. +32 14.08.20 2,277 35 32쪽
144 32화 - 5 +28 14.08.13 2,004 49 18쪽
143 32화 - 4 +11 14.08.12 1,712 36 20쪽
142 32화 - 3 +13 14.08.09 1,814 29 21쪽
141 32화 - 2 +4 14.08.07 1,625 38 18쪽
140 32화. 잡아라, 사랑의 망설임을! +13 14.08.06 1,698 37 21쪽
» 31화 - 6 +16 14.08.04 1,889 31 21쪽
138 31화 - 5 +12 14.08.02 1,964 38 23쪽
137 31화 - 4 +11 14.07.31 1,854 36 19쪽
136 31화 - 3 +10 14.07.28 1,609 33 18쪽
135 31화 - 2 +17 14.07.25 1,562 39 23쪽
134 31화.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앞으로 나아갈 때. +8 14.07.21 1,877 39 20쪽
133 30화 - 4 +18 14.07.10 1,576 38 19쪽
132 30화 - 3 +16 14.07.09 1,586 44 22쪽
131 30화 - 2 +17 14.07.06 1,754 49 22쪽
130 30화. 우유부단. +10 14.07.06 1,637 4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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