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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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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25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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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31화 - 2

DUMMY

“…….”

그럭저럭 큰 방에서, 나는 혼자 멍하니 앉아 있다. 허공을 공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나. 우리가 도착한 숙소는 전형적인 수학여행 오면 단체로 묵는 그런 곳이었다. 한 방에 5-6명 정도 잘 수 있는, 그 정도 크기의 방. TV도 있고, 의외로 부엌도 있고. 그렇게 작지도 않다. 구석의 가구에는 이불과 베개가 들어 있고, 유리문 뒤로 베란다도 있다. 아마 남고였다면 베란다 뒤로 넘어 다니고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중학교 수학여행 때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다.

“아아~ 심심하다~”

아무도 없는 방. 넓다. 혼자 방에 누워있으니 더욱 넓어 보인다. 커튼이 쳐 있는 베란다, 의자 네 개. 뭔가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런 생각이 든다. 교도소 있잖아. 교도소에서 되게 반항적이거나 혹은 강력범이거나, 하여튼 격리조치가 필요한 수감자를 독방에 가둬두잖아. 그리고 전통적으로 독방은 굉장한 형벌이고. 생각해봐, 혼자 뭐 하겠어.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무리 수감자라 한들, 같은 처지의 말벗이나 친구들은 필요한 법이지. ‘고독’은 인간에게 굉장히 큰 벌이지. 그리고 어째서 왜, 나에게 그런 형벌을 줬는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자연스럽게 다른 애들이랑 같이 배정되겠어?! 여자애들인데! 많이 지내다보니 이젠 성별까지 헷갈리는 거냐. 그런 건 절대 아니잖아, 정웅도. 가뜩이나 여자 문제(?) 때문에 지금 머리 터져 버릴 것 같은데.

숙소에 도착하니 배정된 방을 선생님께서 알려주셨다. 나는 당연하게 다른 여자애들과 같은 방을 쓸 수 없다. 당연하잖아, 남자앤데. 여자애들하곤 층부터 다르다. 일부러 나 혼자 남자애라 다른 방 배정하느라 애매하긴 했을 것 같다. 선생님들 방 바로 옆 방. 근게 그것도 좀 무안한 게, 나 혼자 이렇게 큰 방을 이틀이나 쓴다고 하니 참, 그렇다. 뭔지 모를 소외감도 느껴지고. 하지만 이 정도 소외감에 슬픔을 느낄 정웅도면 학기 초의 그 따돌림을 견딜 수 없었지.

‘까똑!’

“……아.”

혼자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살짝 잠들었나보다. 메시지 알림음에 반짝 눈이 떠진다. 휴대폰은 구석 콘센트에 충전 중이다. 나는 몸을 뒤집어 군인이 포복하듯 그쪽까지 기어갔다. 어째 수학여행이 아니라 그냥 자취방에서 뒹굴거리는 평범한 남고생 정웅도군 같은 느낌인데.

「밥 엄청 맛있어! 웅이는 밥 안먹어?」

“……뭐야.”

밥. 밥이라니. 그리고 ‘엄청 맛있어’라니. 벌써 먹고 있는 건가. 나는. 나는 뭔데? 넓은 방에서 혼자 방구석에서 찬밥처럼 식어가고 있는 나는. 크나큰 배신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밥을 먹고 있어?」하고 보내니 리유에게선 ‘응, 아까 와서 다들 먹고 있는데. 근데 웅이는 안 보여서.’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무리 혼자 있다지만, 어떻게 밥 시간인데 알려주지도 않냐. 다른 애들도 전부! 크앗. 다른 건 몰라도 밥은, 어떻게 남자애한테 밥 시간을 안 알려주고 저들끼리 밥을 먹을 수가 있어!

“크아아아!”

“??”

분노에 찬 나는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분노의 대상은 모두이다. 애들은, 리유 제외하곤 누구도 나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과, 선생님에게는 바로 옆방인데 그것 말해주지도 않고 그냥 가 버린 것. 사실 까먹었다는 건 핑계다. 밥 먹으라는 말을 잊은 게 아니라 내 존재를 까먹은 거겠지! 남의 눈에 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있는 힘껏 큰 소리를 지르며 식당 문을 박차고 열었다.

이어지는 이상한 시선. 식당의 모든 눈들이 나를 주목하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건 너무 주목이 되는데. 100여 명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거기다 더 창피하고 이상한 건, 우리 학교 애들이 아니야! 전혀 처음 보는 남자·여자 혼성 학생들인데다 교복까지 입고 있다는 점이 결정타다. 우린 교복 안 입고 왔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

“으아아아아아~~~!!”

약 2초 정도. 삶을 살며 가장 긴 2초였던 것 같다. 초인이 된 것도 아닌데 그 짧은 2초 동안 사람들의 멍한 표정이라던가 그런 게 다 보인다. 상황을 인지한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푹 숙이고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으아아─! 창피해 창피해 창피해!! 엄청난 혼란 상태가 돼 나는 어딜 가야 할지, 여긴 어디인지,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제정신이 아니게 됐다.


“아하하하, 진짜? 엄청 창피했겠다!”

“아우…… 몰라…….”

나는 아직도 화끈거리는 볼을 양 손으로 붙들고 소녀처럼 수줍게 말했다. 리유는 깔깔 웃으며 해맑게 웃는다. 요즈음 늘 불퉁한 표정이던 희세도 피식 웃는다.

“아 보통 식당 하나만 있지 않아?! 아까 들어올 때에도, 저런 고등학생들은 못 봤잖아! 난 우리 애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어어, 우리애기. 많이 창피했구나. 그럴 수 있어. 밥부터 먹자?”

“우씨…….”

불평스런 표정으로 잔뜩 아까의 당혹스러움을 말하니 희세는 지겹다는 투로 어린애 달래듯 말한다. 마냥 짜증스런 희세도 그렇지만 또 마냥 어린애처럼 나를 대하는 희세도 마찬가지로 짜증난다. 울컥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또 여기서 주저리 주저리 뭐라 하면 지는 것 같으니까(?), 어린애 같으니까 한 번 표정을 일그리고 칫, 한 마디 하고 밥으로 시선을 옮겼다.

특이하게 식당이 2개인 숙소여서. 거기에, 난 우리학교 애들만 온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건물이 큰가보다. 다른 학교 애들도 있는걸 보니. 식당은 적당적당한 뷔페식, 정말 뷔페처럼 가짓수 많고 맛난 건 아니고 맛도 그냥저냥, 반찬도 그다지 많진 않다. 넓은 둥근 그릇에 여러 음식들을 놓고 먹는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리 맛있어보이진 않는 음식들이지만 맛나게 먹는다. 애들은 나보다 한참 빨리 와 이미 다 먹은지 오래다. 다른 애들은 다 먹고 가서 보이지 않고 우리 테이블만 애들이 있다. 좀 눈치 보이는데. 빨리 먹어야겠다.

“당연하게 올 줄 알고…… 생각을 못 했어. 미안.”

“아냐아냐, 보통 그렇게 생각하니까. 선생님이 잘못이지.”

성빈이의 사과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뭘 해도 자기 쪽이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성빈이다. 착해서 그렇지. 내 대답에 성빈이는 방긋 웃는다. 아, 저 예쁜 미소. 마주 보고 있자니 절로 나도 미소가 지어진다. 이런 훈훈한 분위기를 잠자코 보고 있을 리 없는 희세. 굉장히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크흠.’ 하며 나를 노려본다. 명백한 주의. 나는 다른 여자에게 한눈 팔았다 아내에게 옆구리를 꼬집히는 남편이라도 된 것처럼 황급히 정색하고 눈 앞의 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왜.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성빈이 보고 미소 짓는 게 뭐 불법이야!? 그치만, 그러면 희세가 기분 나빠하니까. 희세한테 나쁜 감정 쌓는 것 또한 싫은 일이긴 하니까. 아 뭘 어떻게 해야하냐 그럼. 나랑 희세, 나랑 성빈이, 성빈이랑 희세. 이렇게 셋이 같이 있으면 뭘 해도 안 되겠어.

“근데 이젠 뭐한데? 어디 보러 갈 리는 없고.”

“그냥 자유시간이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뭐, 별 일 없으면 놀겠지?”

“오, 웬일이래. 천하의 근미래가 선생님 말을 들었어?”

“아하하, 누가 보면 꼭 나 문제아 같다는 것 같네요? 그렇게 도발할 입장이 되시나요, 오·라·버·니?”

“어어…… 뭐 있니 너?”

“우후후.”

김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여자애 네 명이 나 밥 먹는 부담스런 분위기를 탈피하고자 한 마디 했다. 계속 헷갈리게 반말과 존댓말을 오가는 미래. 내 시비에 음흉하게 웃으며 나를 도발한다. 정작 도발하는 건 본인이면서. 글세, 그다지 미래에게 켕기는 게 있는 건 아닌데, 미래의 저 태도는 무엇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뭔가 불안하긴 하다. 미래가 저렇게 미소 지으며 입을 다물면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건데.

“밥 다 먹고 우리방 놀러와! 다같이 같은 방 쓰고 있거든!”

“다같이면…… 네 명 다?”

“응! 아, 여기 네 명하고, 정희하고, 반장 이렇게 여섯 명.”

“으음…….”

리유는 특유의 활달한 목소리로 말한다. 눈을 반짝이는 게 꼭 놀러왔으면 하는 표정. 묵묵히 밥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라고 수학여행 와서 크고 아름다운 방에서 혼자 찬밥처럼 식어가고 있을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채영이는 조용한 편이니 그닥 끌리진 않지만 정희는 재미있는 애니까.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나한테 되게 새침해졌지만. 그래도 희세가 떽떽대는 것에 비하면 양반이지. 성격이 쿨하니까. 문제라면 역시 성빈이하고 희세인데. 같은 공간에 두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문제가 생기게 되니까. 별달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래, 갈게.’ 하고 대답했다. 리유는 ‘응응! 히히히, 재미있겠다!’ 하고 좋아라 한다. 별다른 감흥 없이 밥을 마저 먹으며 애들 반응을 살피는데, 성빈이는 잔잔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희세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 힐끔 나를 쳐다본다. 미래는 아까부터 ‘재미있을 것 같은 음흉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뭔가 좀 불안하지만, 거의 다 먹은 밥을 마저 먹는다.


“…….”

“……뭐야 이건.”

“응? 뭐가?”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정희를 보고, 나는 한 마디 입을 뗐다. 불만스러운 표정의 나. 주위를 슥 둘러보고, 다시금 정희를 보고 말한다.

“분명 난 논다고 하고 올라왔는데.”

“놀고 있잖아, 다들.”

“……이게?”

정희의 심드렁한 대답에 나는 주위를 살펴봤다. 중앙에 떡하니 있는 TV. 중학교 수학여행 때는 숙소가 안 좋아서 작고 불편한 TV였는데, 요즘은 이런 숙소도 다 디지털TV인가보다. 화면도 크고 화질도 좋다. 화면에 비치는 음악방송. 남자 아이돌들이 나와 춤을 추고 있다. 팔뚝도 배도 근육근육 하다. 성빈이와 미래와 리유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보고 있다. 희세는 의외로 TV에는 관심 없이 채영이와 얘기하고 있다. 채영이 역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희세와 얘기하고 있다. 둘이 친했었나. 공통점이 있다면, 책 읽는 거 좋아하는 거 정도. 정희는 책상 위에 까놓은 과자를 먹으며 느긋하게 만화책을 보고 있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수학여행에 만화책이라니.

밥 먹고, 방에 가 편한 옷으로 축구 유니폼 바지로 갈아입고 여자애들 방으로 올라왔다. 조금 긴장된 기분이 들지만…… 이제와서 징그럽게 뭐 이래! 1년 가까이 여고에서 살았으면서. 당당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 앉아 앉아.”

“어.”

반겨주는 건 정희 혼자. 과자를 집어 먹으며 손짓한다. 여자애들은 모두 TV에 빠져 나 같은 건 쳐다도 보지 않는다. 희세만은 채영이와 함께 구석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힐끔 방으로 들어오는 나를 쳐다보다 ‘흥!’ 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홱 돌려 다시금 채영이랑 얘기한다. 그 기세에 덩달아 나를 쳐다보던 채영이도 깜짝 고개를 돌려 희세를 본다. 크음. 정희가 권한 대로 정희와 마주보게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애들이 나를 쳐다보지 않은 건 크게 짐작가는 게 있다. 지금 TV에서 아이돌 특집인지 뭔지 하고 있다. 그것도, 남자 아이돌 특집. 키 크고 잘생기고 멋진 녀석들만 잔뜩 나오는데 현실의 오징어인 나는 안중에도 없겠지. 뭔가 씁쓸한데. 나름대로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자애들한테 조금이나마 인기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의식하던 성빈이와 희세 둘 다에게 외면받으니 기분이 그렇다.

물론 TV를 보는 셋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리유는 정말 별다른 감정 없이 신기하고 멋있는 남자 아이돌들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성빈이는 수줍은 소녀와도 같이, 마치 그 아이돌이 진짜 자기 앞에라도 있는 것처럼 청순하게 부끄러워하며 좋아라 환상을 담아 TV를 보고 있다. TV 보는 모습마저 귀엽다. 미래는…… 그러니까 저 모습을 남자애로 바꾸고, TV에 나오는 게 애니라면 딱 평범한 오타쿠 같다. 건전한 아이돌 팬덤 문화를 순식간에 상스러운 오덕 문화로 바꾸는 것 같은 느낌. 여자애답지 않은 괴성을 지르며 ‘아아아앜! 존잘!! 미친 아아아엨ㅋㅋ’ 하며 지 혼자 얼굴을 가리고 웃으며 눈을 감고 입을 가리고 난리도 아니다. 아이돌 특집 보는 것보다 미래의 리액션 보는 게 더 재미있을 정도다.

“너는 저거 안 보냐?”

“저딴 거 봐서 뭐해. 그리고 난 저런 남자 아이돌들 싫어. 기지배도 아니고, 남자새끼들이 얄상해서 저게 뭐야.”

“맞아, 난 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데 쟨 아닌 것 같은데.”

“응? 오. 오오오. 쟨 좀 쩌는데.”

“그치그치그치? 우와아아, 팔 터질 것 같애─♡♡”

“오오. 오오오. 와. 쩔어.”

정희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과자를 먹으며 만화책을 보며 깔깔대며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희의 말에 심히 동감을 했다. 그래, 요새 아이돌들은 여자애도 아닌데 화장도 하고 여자애 뺨치게 다리도 얇고 그러잖아. 왜, 아주 여장을 하고 나오지! 하지만 뒤이어 나온 근육질의 아이돌을 보고 한 마디 꺼내니 정희마저 TV에 넘어가 버렸다. 정희와 별로 친하지 않은 미래인데 아이돌 하나로 갑자기 급친해져서 둘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TV화면을 뚫어져라 본다. ……난 깊은 소외감을 느낀다.

“야, 나 간다.”

“오오! 좀 더! 좀 더 벗어! 파티야 파티!”

“야, 그래도 공중판데 설마 벗…… 우와.”

“에에…… 와.”

내 방에서 혼자 찬밥처럼 식어가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게 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자애들은 내 말은 듣는 건지 어쩐 건지 TV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성빈이도, 미래도, 리유도, 정희마저. 희세랑 채영이는 깊은 토론을 하고 있는지 속세의 일엔 관심이 없다. 더욱 깊은 상처. 항상 난 혼자였어 오늘도 혼자야.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으니까 혼자야……

깊은 상실감을 느끼며 내 방으로 돌아간다. 이게 무슨 수학여행인가.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란 말이다. 뭔가 좀 더 가족적이고…… 서로 소통하며 이야기하고 깔깔 까르르 웃을 수 있는…… 그런 거. 허탈하게 방문을 열고 불을 켰다. 그리고 처연하게 TV를 틀고 본다.

차라리 1학기 끝나고 미래네 집에서 뒷풀이 했던 게 더 수학여행 느낌인 것 같다. 그 때, 죽였지. 다들 술 마시고, 옷 벗고…… 따, 딱히 이번 수학여행 때도 그런 걸 기대한 건 아니다. 사실 기대하긴 했는데. 미래라면 분명 술을 반입해 왔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아까 잔망스럽게 미소짓던 것도, 그 쪽 얘기일 줄 알았는데. 나 술 약하다는 걸 미래는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으니까. 미래는 술 잘 마시는 편인 것 같고.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여자애들은 아이돌에 빠져서 나 같은 건 찬밥이다.

‘똑똑똑.’

“계세요!”

“……?? 어, 있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어지는 맑고 명랑한 목소리. 가늘고 높은 맑은 목소리는 분명 리유의 목소리다. 근데 ‘계세요’는 뭐야, 대체. 당황스러워 TV를 음소거 시키고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르게 하게 된다. 철컥 문을 열고 리유가 들어온다.

“뭐하고 있었어!”

“TV.”

“왜 놀다 안 가구 내려왔어! TV만 봐서 삐쳤어?”

“아니, 그냥 할 거 없어서.”

“다시 가자아~ 애들 심심해하고 있어.”

“…….”

리유는 마치 어린아이 꾸짖는 것 같은 투로 말한다.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리유가 그러니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귀여워 미칠 것 같은 느낌만. ‘저 어른이에요!’ 하면서 어른 흉내 내려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 희세가 저러면 정말 무서워서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줘.’ 하며 바로 따르게 될 텐데. 리유는 ‘흥!’ 하며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눈썹을 치켜세우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한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아빠미소가 지어진다. 손을 뻗어 리유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가.”

“히잉! 왜에! 여기서 혼자 이러는 게 재미있어! 애들하고 같이 놀자아~”

“아니, 안 가.”

자신만만한 리유의 태도는 순식간에 징징대는 어린애로 바뀐다. 하지만 난 그래도 단호하게 대답한다. 분명 올라가도 똑같을 게 뻔하다. 내가 없다고 바뀌는 건 하나 없다. 올라가서도 또 똑같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을 생각을 하니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나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 앉아 리유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너가 여기서 놀아. TV나 보자.”

“흥흥! 아이돌 특집 끝났어. 이제 히이가 TV 뺏어서 이상한 드라마 보고 있단 말야.”

“응? 이상한 드라마?”

“응. 7번이었는데.”

리유는 그렇게 말하곤 내 옆 리모콘을 들어 채널을 돌린다. 희세가 즐겨 보는 드라마. 나에게 보기를 강요하는, 그 드라마. 더빙판이다. 그 드라마의 엄청난 팬인 희세는 더빙판에도 엄청난 애증을 자랑한다(?). 좋아하는 것 같은데 싫어하면서 또 좋아하는 그런 느낌. 아마 지금쯤 눈이 돌아가서 애들한테 이 드라마 설명하고 있겠지. 리유가 사실을 알려주니 더욱 올라가기 싫어지는데.

“역시 안 올라가는 게 낫겠다. 너도 여기 있어.”

“우우웅…… 애들하고 같이 노는 게 좋은데.”

“왜, 원래는 둘이 같이 놀았잖아. 왕따 동지었는데.”

“푸흡. 히히히. 그렇네.”

내 말에 피식 웃는 리유. 아득하게 기억이 난다. 맛나게 밥을 먹는 애들을 뒤로 하고 운동장 구석 언덕, 풀숲에서 ‘와아!’ 하고 나타난 리유가. 그게 벌써 반년도 넘은 일이구나. 그 때 리유는 꼭, 유기견 같은 느낌이었는데. 분명 귀엽고 예쁜데 애들한테 철저히 외면당해 작은 몸을 덜덜 떨며 마치 비라도 맞은 것처럼, 발길질에 체인 것처럼 불쌍하게 있던 리유였는데. 무슨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한테는 별다른 경계 없이 다가왔다. 같은 왕따라서 그런가. 하하.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친구도 훨씬 많고 좋지?”

“응응! 웅이 덕분이야, 정말! 히히힛!”

“내 덕은 무슨, 네가 열심히 다가간 거지.”

“으으응! 아니, 아니야.”

둘이서 놀자고 해도 곧이 듣지 않고 계속 위에 올라가 친구들하고 같이 놀자고 하는 리유를 보고 참, 장족의 발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성장한 딸을 보는 마음으로, 훈훈한 마음으로 리유에게 말하니 리유는 정색하고 고개를 내젓는다.

“웅이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난 계속 피했을 거야. 나는 정말, 바보처럼 피하려고만 했는데. 웅이가 말해줬어. 모두에게. 정말 고마워, 정말. 정말 좋아해, 그래서 정말. 정말루!! 좋아해!!”

“……그래.”

리유는 진지하게 말하다 끝에 가선 어린아이처럼 수줍어 하면서 ‘와아아아─’ 하고 무마하려는 것처럼 말한다. 웃으며 내 품으로 와 포옥 안긴다. 나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훈훈한 기분이 들어, 아니 그 기분이 더욱 증폭돼 달달한 마음이 돼 품에 안긴 리유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줬다. 착하네, 우리 딸. 다 컸네, 우리 딸. 나중에 아빠하고 결혼하자고 말하겠지. 크으─ 그치만 리유야, 아빠는 말야. 너하곤 결혼할 수 없단다. 왜냐하면, 아빠니까. ……음? 뭔가 이상한데?

“아─ 뭐 수학여행 같지도 않네.”

“왜, 난 재미있는데. 히히.”

“그러냐.”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고 자리에 누웠다. 리유는 내 옆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밝게 웃으며 말한다. 나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표정으로 바둥거리며 말했다.

“있잖아, 웅아.”

“응?”

리유의 부름에 나는 휴대폰을 보던 시선을 옮겨 리유를 올려다봤다. 어쩐 일인지 다시금 진지한 표정의 리유. 아까의 살짝 미소가 담긴 진지한 표정과는 상반되게, 무언가 껄끄러운 것 같은 진지한 표정이다.

“웅이는 히이랑 비니, 좋아해?”

“흣. 아니, 왜 갑자기…….”

“좋, 좋아하는 거야?!”

“말 좀 들어보고 착각하쇼,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말고.”

리유의 의외의 질문에 나는 숨이 덜컥 막혔다. 내 대답에 리유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 돼 나를 내려다본다. 그 표정에는 온갖 경우의 수가 조합되는 신묘한 우주를 느낄 수 있었다. 여자애들 망상은 순식간이니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최악의 수를 상상하는 리유를 제재했다. 여기서 최악의 수라면…… 일부다처제? 미친, 중동이냐 여기가.


“……그렇게 된 거야. 죽겠어, 나도.”

“……아.”

말을 마치자 리유는 뭔가 아쉬우면서 허탈한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말하는 김에 그냥 다 말해버렸다. 리유라면 믿을만한 애니까. 뭐, 너무 천진난만해서 웃으면서 ‘있잖아! 히이 웅이한테 고백했어? 그럼 이제 웅이랑 사귀는거야! 와!’ 하면서 다 말해버릴 것 같기도 하지만…… 설마, 그 정도로 천진난만한 건 아니겠지. 믿는다. 리유, 입이 헤플 것 같은 느낌이지만 정말 중요한 건 말하지 않는 타입이니까. 지금까지 봐 온 리유는. 그리고 뭐, 미래는 워낙 놀려먹는 거 좋아해서, 또 눈치도 빠르니까 자기가 알아서 파악했지만. 리유는 말해주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차라리 말을 해주면 눈치껏 잘 대처할 수 있겠지.

“그, 그럼 둘 중에 누구……?”

“아니아니, 솔직히 내가 뭐 잘났다고 누굴 골라. 그냥 난감할 뿐이야. 그─ 그런 거 있잖아. 꼭 고백했는데 차이면 되게 어색해지잖아. 그럼 둘 중에 누군가하곤 어색해질 수도 있다는 건데…… 그건 너무 싫다. 그래서 그런가, 결정을 못 하겠어.”

“……응.”

리유는 내 말에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한다. 뭔가 우울해 보이는데. 괜히 말했나. 그 밝고 귀여운 리유가 이렇게 풀 죽은 표정을 하면 나까지 기분이 안 좋아진다.

“왜, 나 사귀지 말까?”

“아, 아냐! 왜, 왜.”

“기분 안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나, 나 기분 안 좋은데 왜…… 히이하고 비니 마음 들어줘야지.”

“아아. 그렇긴 한데…… 아아~ 모르겠다~~ 으아아아~”

“…….”

리유의 말에 나는 앉았던 상체를 다시 눕히고 방바닥을 열심히 청소하며 발버둥쳤다. 리유는 피식 웃는다. 하지만 여전히 약간의 어두운 느낌은 가시질 않는다.

“나, 이제 올라갈래.”

“응? 안 놀고?”

“응, 이제 잘래. 졸려.”

“……뭔가 네가 말하니까 되게 납득이 가는데. 그래, 자. 애들 시끄러워서 못 자지 않으려나.”

“괜찮아, 난 잘 자니까. 갈게.”

“응~”

리유는 어두운 느낌은 많이 가시고, 다만 기운 없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한다. 역시, 내가 성빈이와 희세와의 관계를 말해서 그것 때문에 기분 상한 걸까. 정확한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니까. 별달리 리유를 잡을 명분도 없고, 해서 리유를 보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유리멘탈 글 쓰는 사람 김태신입니다.

자칭 “송시열 쇼크”(?)로 인해서, 며칠 동안 글을 안 썼습니다... 하하. 사실 쓰기 싫어져서요. 으앙...... 모르겠네요. 어쨌든 다시 열심히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되게 더운데, 다들 힘내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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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7

  • 작성자
    Lv.83 디벨롭
    작성일
    14.07.25 23:15
    No. 1

    재밋게보고있슴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25 23:25
    No. 2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0 똑딱똑딱
    작성일
    14.07.25 23:40
    No. 3

    리유도 웅이한테 진지하게 고백할 거 같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수라장이 매우 재밌네요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28 22:32
    No. 4

    수라장... 저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에 매우 취약해서... 조잡한 글이 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밀레시안임
    작성일
    14.07.26 00:31
    No. 5

    저도 요즘 상황이 극악으로 내팽겨쳐지고 있는 최악인지라 이제서야 몰아서 보고 있는대 근래 작가님 심정에 대한 코멘트보고 검색을 좀 해보았습니다. 의욕 떨어지신다는 말에 격려와 위로를 드리며 그방향으로 계속 꿈을 꾸고 계시다면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28 22:33
    No. 6

    ...친구네 가게가 이사를 가서, 가구를 나르는 노동을 도와줬는데요. 이 여름에 그것 하나 날랐는데 팔이 빠질 것 같아요. 괜히 사람들이 사무직 사무직 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아하하. 안 되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6 rosemary..
    작성일
    14.07.26 01:02
    No. 7

    리....리유.... 희세찡....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28 22:33
    No. 8

    소설 속 웅도의 스트레스를 쓰는 사람이 그대로 겪고 있습니다. 어떡하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4.07.26 01:21
    No. 9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28 22:33
    No. 10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31 아싸라뵤
    작성일
    14.07.26 14:41
    No. 11

    우리딸 리유는 아니되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28 22:33
    No. 12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7 화제
    작성일
    14.07.28 12:27
    No. 13

    재밌게 보고있어여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28 22:34
    No. 14

    감사히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널그리워해
    작성일
    14.08.26 00:06
    No. 15

    자네가 희세 울린 놈인가 엉? 이자슥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졲갸
    작성일
    14.12.25 11:09
    No. 16

    작가가 자기글에 소신이 잇어야지
    자신의 글 안에서 자신은 신이 됩니다.

    매번 댓글 답변 달아주는거에
    리유랑 이어질일 없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남의말에 흔들려서 이어지면 당신은
    자기 자신의 말 조차 지키지 못하는 줏대없는 인간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5 호섭이
    작성일
    15.09.26 08:56
    No. 17

    잼잇네요 댓글들이 일년 전이군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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