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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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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07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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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21화 - 2

DUMMY

‘타닥 타닥 타다닥.’

“후으.”


이 놈의 일거리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쭈욱 의자 뒤로 몸을 기대고 몸을 쭉 편다. 몸이 노곤하지만 오늘 안에 일을 끝내야 하니까, 잠시 동안의 휴식을 마친다.


선생님이 되기 전에는, 그저 선생님이라면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전부일 줄 알았다. 조금 더 귀찮은 게 있다면 담임을 맡거나 해서 아이들 상담하는 것 정도.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보이지 않는 데에 무슨 일이 그렇게나 많은 건지. 학생일 때엔 꿈도 못 꿨던 일들이, 임용고시를 마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 일, 일…… 요 몇 년은 그저 일에만 파묻혀 살아온 것 같다. 사람들은 공무원이 굉장히 한가하고, 5시 칼퇴근에 나중에 연금도 나오고, 공무원이니까 짤릴 걱정도 없고, 아주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나는 죽을 노릇이다. 내 일만 깔끔하게 끝낸다면 정말 개운하고 좋겠지. 하지만 학교 전체에 대한 일도 있고, 스스로 만들어낸 영어 교사로서의 일도, 선배 교사분들이, 나쁘게 말하면 나한테 떠넘기고 결국 내가 맡게된 일도 있다. 처음에야, 젊은 혈기로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과, ‘일 도맡아 하면 좋은 이미지로 출발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 닥치는대로 일을 맡아 했다. 하지만 이젠 한계다. 일은 익숙해져서 어떤 것도 다 해낼 수 있지만, 그래도 어지간해야지.




정혜라, 올해로 스물 아홉 살. 남자친구 없음. 스물 다섯 살에 임용고시 합격. 스물 여섯 살에 이 학교로 와서 올해로 4년 째,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다. 묶었던 머리가 내려와 다시금 고쳐 묶는다. 눈이 뻑뻑해서 잠시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빈다. 지금 거울을 보면 일에 찌들어 초췌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겠지. 후훗.

이 학교 기숙사는 원래, 선생님들이 하루에 한 번씩 당직을 서는 구조였다. 나 역시 첫 해 첫 학기에는 그렇게 했었고. 그러다 문득, 선생님들 사이에서 ‘아예 사감선생님을 정해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는 말이 나왔다. 물론 그건 나를 타겟으로 한 말이었고. 남자 선생님들은 전부 연배도 있으신데다 무엇보다 여자 기숙사인데 남자 사감을 쓰는 게 꺼림칙하다고 학부모들이 여길 게 뻔하니까. 여선생님들도, 나를 제외하곤 가장 어린 분이 서른 다섯, 이미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이이다. 나를 빼곤 기숙사에서 상주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럴 거면 그냥 나한테 ‘좀 부탁하네, 정 선생.’ 하고 말하지 무슨 민주주의마냥 그렇게 공론화 시켜서 말한담. 짜증나는 상황에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말해버렸다. 그렇게 기숙사 사감을 하게 된 지 3년. 가뜩이나 학교 일에 선생질에 바빠 죽겠는데 기숙사 사감으로서의 일까지 추가된 나는 그야말로 치열한 몇 년을 보냈다. 학생들하고 같이 살고 있지만 그 학생일 때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정자년이 들어와 선생님 막내는 땠지만, 일은 내가 독점해서 하고 있다. 이미 하던 일 정자한테 떠넘기기도 싫고, 그렇게 떠넘겨서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반발심리도 있었다. 무엇보다 정자 녀석, 어린애처럼 순박하고 착한 녀석인데, 이런 애가 나처럼 일에 찌들어 타락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일은 아직도 내가 다 한다. 정자 년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언니 쇼핑하러 가요!’, ‘언니 이번에 남자친구 만날 때 이 옷 입고 갈 건데, 예뻐요? 귀여워요?’ 하는 말이나 지껄인다. 그럴 땐 정말 때려주고 싶은데. 나이도 스물 다섯이나 먹은 년이 어쩜 하는 꼴은 여고생 같을까. 귀여워서 봐준다.

선생님이란 직업이 힘든 건, 아이들 앞에서 힘든 티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됐든 나는 어른이고, 이 아이들을 이끌어갈 선생님이다. 예전처럼 그림자도 못 밟는 그런 시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최소한 길을 비추고 인도해주는 사람이 아프다고, 힘들다고 징징댄다면 뭐라고 생각하고 따를 생각이 들겠는가. 아파도 안 아픈 척, 힘들어도 밝게 웃으며 지난 4년을 버텨왔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스물 아홉 살이 됐다.


“후후후…….”


실없이 혼자 웃는다. 분명 임용고시에 합격해 선생님이 될 적에는, ‘나는 아이들한테 상냥한 선생님이 돼야지.’ 하는 다짐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 나는 애들에게 무슨 이미지일까. 일에 치여 굉장히 까칠한 나. 같은 여자로서, 여자애들이 징징대는 건 정말 꼴도 보기 싫은 나다. 여자라는 핑계로, 약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변명할 수 있다니. 나는 이렇게 이 악물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사생들에게, 학생들에게 까칠하게 대한 것 같다. 뭐, 애초에 여자애들이 여선생님을 무서워하고 남선생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만. 나도 학생 때 그랬고.

그러다 꼬꼬마가 들어왔고, 꼬꼬마한테는 관대하게 대하는 것 같다. 그냥, 덩치 큰 남동생이 있다면 그런 느낌일 것 같아서. 묘하게 덩치는 큰 남자앤데 귀여운 면이 있어서. 그렇다고 이상한 감정 느끼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어리잖아, 솔직히. 12살 아래인데. 게다가 한참 혈기왕성할 때인지라, 가끔 힐끔힐끔 날 보면서 얼굴 붉히는 거 보면 정말 귀여우니까. 괴롭히는 맛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녀석한테, 위로 같은 걸 받았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우스워서 그렇다.


‘왜 남자친구 없어요?’ 하는 꼬꼬마의 질문. 역린을 건드리는 말이지만, 「남자친구」라는 말은 정말 나한테 하나의 아킬레스건이다. 남자친구라…… 이젠 감각마저 희미해진 것 같다. 학교를 다니던 중 소개 받아 사귀게 된 남자친구. 비록 요즘 말하는 짐승남이나, 상남자 같은 맛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순수한 면도 있고, 아이 같지만 누구보다 나를 생각해주고 위해주는 마음에 깊이 사랑했었다. 그러다, 임용고시 준비하는 몇 년동안 떨어져 지내느라 사이가 서먹해지고, 서로 극도로 힘든 상태에서 결국엔 파국을 맞이하게 됐지만.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좀 마음이 쓰리다. 아하…….

‘남자친구’라는 잡생각 때문에, 일에 집중이 되질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잠깐만 쉬는시간 가지지 뭐. 오늘 안에 못 끝내면…… 나도 모르겠다. 아아, 이젠 몰라. 아무렇게나 일거리를 책상에 올려 두고 컴퓨터 모니터를 끈다. 침대 위로 몸을 날린다. 아아─ 힘들어.

일에 파묻혀 산 지 4년, 이제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형태였는지도 가물가물 하다. 내가 사랑 받은 적이 있었을까. 내가 사랑 했던 적이 있었나. 선배 선생님들 눈치 보는 것에, 일 잘 못하는 것에, 일 익숙해지는 것에, 그것만 신경 쓰고 그것에만 모든 것을 바쳐온 4년. 후회는 없는데, 뭔가 답답하다. 사랑……. 사랑 받고 싶다.

휴대폰을 들어, 거울모드로 바꿔 얼굴을 살핀다. 덕지덕지 떡져서 동백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반짝거리는 기름진 머리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부럽지 않을 만큼 윤택한 질을 자랑하는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 피부. 볼 쪽에는 트러블도 많이 생긴 것 같다. 정말 두렵게, 슬슬 생기고 있는 것 같은 눈가 옆 주름. 아아, 이제 끝났어. 난 이제 아줌마야……

솔직히 외모에는 자신감이 넘쳤었다. 학교 다닐 때엔, 그렇게 꾸미거나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조금 꾸민 것만으로 충분히 과에서 외모로는 탑이었다. 지나다니기만 해도 웬만한 선배들이 다 밥 사주겠다, 차 사주겠다, 수작질을 거는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흐흥.’ 하며 여성스럽게 웃으며 따라가기만 하면 뭐, 밥이고 커피고 알아서 넙죽넙죽 사주는 걸. 그 때는 빛나는 때였지, 내 외모가. 맨얼굴로 가도 정말 예쁘고, 화장까지 하면 진짜진짜 예쁘고. 대학 전체 미인 대회에 나가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성화를 했었는데. 그 때 나갈걸, 후회가 되네.

지금은 이제, 서서히 추락하고 있다. 몰락이라고 표현해야 정확할까. 피부는 점점 생기를 잃고 탱탱함을 상실해가고 있다. 머리카락조차, 예전의 그 부드러운 결이 안 나고 팍팍한 기분이다. 그 탱탱하고 찰지던 엉덩이와 허벅지도 조금 처지는 기분이고, 나름대로 글래머라고 자부하던 가슴도, 예전엔 거울에 비쳐보면 정말 여자인 내가 봐도 모양이 예쁘고 탱글탱글했는데 지금은 뭔가 아줌마 가슴처럼 무작정 크기만 하고 축 처진 느낌이다. 아아, 이런 게 노화라는 거구나─ 새삼 느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기숙사 사감 짓은, 정말 못해먹을 짓이다. 나는 점점 젊음을 잃어가고 전성기의 외모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옆에 지나가는 학생들은 정말 이제 자라나는 뽀얗고 예쁜 녀석들이니까. 정말, 여자인 내가 봐도 한참 귀엽고 싱싱하고 예쁘다. 요즘 애들은 발육도 빨라서, 벌써 나만큼 가슴이 되는 녀석들도 있고. 이래서 남자들이 젊은 여자 젊은 여자 하는 건가 하는 생각과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꼬꼬마의 ‘선생님은 아직 젊고 예쁜걸요!’ 하는 겉치레 말은 기분은 좋지만 내부 실정을 보지 못해서 나오는 말이다. 꼬꼬마 네 녀석이 내 대학시절 미모를 봤어야지. 후후…….


“하지만! 흐흐흐…….”


나는 실없이 웃는다.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꺼내본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짙은 눈썹. 오똑한 코. 꾹 다문 입. 뭔가 눈에 힘이 가득 들어간 표정이지만 이게 평소 표정이란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남자. 이번 주 주말에 소개팅이다.

아! 말도 안 돼, 소개팅이라니! 그게 가능한 거였어? 나한테 가능한 일이야, 그런 청춘 같은 일이! 나, 이제 끝난 거 아니었어?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아니 느껴본 적도 없었던 같은 기대감과 설렘이 마음을 간지럽힌다. 예전 남자친구가 그리워, 다른 남자따윈 쳐다도 못 보겠어─ 하는 열녀같은 스타일은 내 성격이 아니다. 그건 그것대로, 아련한 추억으로 오롯이 남겨두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래, 냉소적인 생각은 필요 없다. 정혜라, 넌 충분이 젊고 예뻐. 미래로 한 걸음 성큼 걸어가는 거야!

소개팅 받은 남자는 나보다 두 살 많다고 한다. 그럼 31살. 그런데도 이렇게 동안이란 말야! 사진만 보면 20대 중반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 게다가 이렇게나 잘 생겼다. 요새 유행하는, 계집애 같은 여리여리한 스타일의 남자애들은 내 타입이 아니다. 난 남자다운, 특히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에 굉장히 느낌이 꽂히는 타입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남자, 정말 이상형이다.

키도 182로 굉장히 크다고 한다. 직업은 시청공무원. 아, 그런 식의 소개를 받으니까 새삼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스펙……이구나 하는 생각.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데다 직업도 괜찮다. 사람이 어떤지는 직접 만나봐야 하겠지만, 뭔가 굉장히 좋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일등신랑감이네. 나는, 나는…… 음, 나도 일등신붓감이지. 얼굴 예뻐, 몸매 좋아, 거기에 학교 교사! 이렇게나 열정적으로 시키지도 않는 일까지 다 하는 성실한 교사! ……시키지도 않은 일 다 해서 가정에는 충실하지 못하고 학교에선 치이고, 집에선 시어머니 잔소리에 남편하고도 불화를 겪겠지. 그치만 직장은 죽어도 그만두지 못할 테고, 결국엔 이혼…… 으아아! 무슨 생각이야, 소개팅 하기도 전에!

말이 좋아 소개팅이지, 이 나이 정도 되면 연애가 아니라 결혼이다. ‘선’ 비슷하게 돼 버리는 게 현실이다. 결혼…… 아직 생각해본 적 없는데.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세상에 어찌 남편이랑 같이 더불어 살아갈까. 학생들 앞에서야 잔뜩 어른인양 행동하지만 아직도 집에 가면 아빠한테 애교부리고 엄마한테 생떼 부리는 철없는 딸인걸. 부모님은 그게 더 좋다고 하시지만. 결혼…… 아마 그 쪽에서 먼저 얘기하겠지, 남자니까?


─혜라씨, 전 결혼을 전재로 진지하게 혜라씨와 만나고 싶습니다.


라거나─!! 그런 말 들으면 어떡하지? 튕겨야 돼? 아니아니, 여대생도 아니고, 알 거 다 아는 나이인 여자가 그러면 정말 튕기는 건줄 모르고 알았다고 가버릴 수도 있잖아. 문득 또 웃음이 나올 것 같다. 겨우 만나기로 한 것 가지고 이렇게 소녀처럼 두근거리고 있다니. 천하의 정혜라, 이 정도까지 갔나 싶다. 그래도, 확실히 기대가 되긴 한다. 얼마만에 만나는 남자야. 하필이면 학교도 여고라, 정말 남자라곤 나이 40 50 먹은 중년 아저씨들밖에 못 봤으니까. 뭐, 고등학생 밖에 안 되는 남자애들 본다고 달라질 건 없긴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하자, 일.




─결전의 날. 내 방엔 거울이 없기에, 학교 화장실에 와 비쳐보고 있다. 어차피 옷이야 전날 코디를 다 맞춰 놨으니까, 지금은 최종 확인이다. 적절하게 깔끔한 세미 정장. 젊어 보이게 입고 싶지만, 나이도 나이인데다 여선생님 같은 이미지를 한껏 뽐내고 싶으니까, 이렇게 입었다. 헌데 이렇게 입으니까 발랄한 여고 선생님이 아니라 무슨 회사 다니는 여자 같은 느낌이 강하다. 안경 쓰고 가슴까지 커 보여서 그런가. 안경을 고쳐 쓰고 가슴 쪽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뭔가 잔뜩 신경 쓰인다. 대학교 때라면 최대한 밝은 옷에, 안경도 벗고 렌즈도 끼고, 머리도 볼륨 풍성하게 넣고 속된 말로 갖은 지랄을 다 하고 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나이가 아니지. 하지만 또 역설적이게 어려 보이게 입고 싶기도 하다. 절충안이라고 이렇게 했는데 도리어 30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이 모습은 뭐야. 휴우. 그래도 머리 틀어 올리지 않아 다행이다. 머리까지 그렇게 단단히 묶었으면 진짜 회사 다니는 악덕 여상사 같은 이미지였을 것 같아. 안경은 벗고 렌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이대로 가려고 한다.


“정혜라씨?”

“네, 안녕하세요. 정혜라입니다.”


약속장소인 시내의 카페. 가게에 들어서니 사진 속 그 남자가 혼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말끔한 정장차림. 실제로 보니까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훨씬 더 잘 생겼다. 무엇보다 어깨가! 넓어! 떡대가 있어! 아아, 진정 진정.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발정해버리면 안 되지. 여기선 최대한 도도하고 시크한 느낌으로 조정을 해야…… 소위 말하는 ‘밀당’을 해 줘야. 하지만 나도 모르게 인사하며 방긋 웃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잘 생긴 남자 앞에선 절로 미소가 나와 버리잖아.


“박정민입니다.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신데요?”

“에에, 에이~~ 아니에요! 정민씨도 실물이 훨씬 좋으신데요?”

“하하하, 과찬이죠.”


서로 주거니 받거니 잘들 노는 것 같다. 그래도 칭찬해주니까 나도 모르게 어깨가 절로 으쓱하는 것 같다. 정민 씨는 바로 주문을 해 주신다. 단 걸 좋아해서 캬라멜 마끼아또나 코코아 같은 걸 시키고 싶었지만 나이도 있고, 첫 대면이니 뭔가 있어 보이게 정민 씨가 시키는 에스프레소로 통일했다. 방긋 웃는 정민 씨. 아, 정말 잘 생겼다.


“…….”

“…….”


음.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네. 정민 씨가 쳐다보니 난 방긋 웃기만 했다. 남자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길 기다리는 조선 처녀의 순박함?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천하의 정혜라, 이 정도까지 와 버리다니! 과에서 오빠들, 동기들, 심지어는 남자 후배들까지 후리고 다니던 그 정혜라가! 으아아, 말도 안 돼!

그도 그럴 게, 4년동안 남자 한 명 안 만났잖아. 남자친구를 사귄 기간까지 합친다면 6년 가까이 된다. 남자하고 만났을 때 무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거의 거세되다시피 될 만 하다. 치열하게 세파에 부딪히며 내 연애세포는 그야말로 소멸의 경지에 이른 것이구나. 새삼스럽게 그 현실을 느끼니 막막하고 난감하다.

처음 이렇게 남자를 만났을 때에 무슨 말을 했어야 하지. 남자 쪽에서 먼저 말을 걸 때까지 가만히 있던 내가 아니었다. 생각해내라, 예전 전성기의 정혜라를! 그러니까, 귀엽게 말하면서 살짝살짝 야한 농담도 섞어 말하면서 간을 보기도 하고, 애교도 떨기도 하고 어떨 땐 이지적으로 말하기도 하면서 치고 빠지듯 하면 그야말로 남자들이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면서 몸을 배배 꼬는데. 그거 보는 재미에 살았었는데. ……근데 지금은 그렇게 못 하겠어! 오히려 내가 더 달아오른 것 같아. 정민 씨가 힐끗 보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


“어떤 일 하신다고……”

“아, 넷! 하, 학교 교사요…… 이 쪽 성빈여고에서 영어 선생님 하고 있어요.”

“아, 네. 선생님이면 힘드시겠네요, 애들 말 잘 안 듣죠.”

“아휴…… 말도 마요, 요즘 애들은 진짜 싸가지도 없어서…… 후우. 한숨밖에 안 나와요.”

“하하.”


말하면서 속으로 뜨끔 했다. ‘싸가지’라니, 너무 교양 없어 보이지 않았을까. 정민 씨 눈치를 보니 그렇게 기분 나빠 하거나 어색해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정민 씨는 가볍게 웃으시고 빤히 나를 쳐다보신다. 뭐, 뭐지, 내가 말을 걸어야 하나.


“정민 씨는, 시청 공무원이라고 하셨죠……?”

“네, 그렇지요. 작년에 합격해서 이번부터 다니게 됐습니다.”

“잘 됐네요, 힘드셨겠어요. 저는 어떻게 운이 좋아서 임용고시가 금방 됐는데.”

“대단하시네요, 저는 4수 해서 붙었는데. 정말, 대단해요.”

“아, 네, 운이 좋았죠.”


다시 한 번 뜨끔. 이거, 엄청 잘난 척 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군대까지 갔다 온 남자인데 4번이나 재수해서 30살에 겨우 붙은 건데. 나는 단번에 됐다고 자랑하는 것 같잖아. 아유, 이 멍청이, 바보. 이럴 거면 그냥 차라리 입 다물고 가련한 조선 처자 같은 이미지를 연기하는 게 낫겠어!


“저희 나이쯤 되면 솔직히, 그런 거 따질 수밖에 없잖아요? 직업이라든지, 학벌이라든지, 집안이 어떻다든지.”

“네, 넵, 그래요.”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나는 홀짝 커피를 마셨다가 엄청난 씁쓸함에 뱉어 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는데 정민 씨의 말에 커피를 꼴깍 마시고 씁쓸한 표정을 얼굴로 표현하며 대답했다. 이 미친년아, 표정 관리, 표정 관리! 정민 씨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치만 전, 그런 것 따지지 않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냥 순수하게, 친구처럼 혜라 씨랑 얘기하고 싶어요.”

“네, 네! 저도 좋아요, 그런 거.”

“4년 동안 여자 한 명 안 만나고, 아니죠, 여자가 아니라 거의 사람 한 명 안 만나고 골방에만 틀어박혀 공부만 해서…… 솔직히 제가 잘 리드하거나 얘기는 잘 못하겠지만…… 오늘 하루, 최대한 즐겁게 해 드리게 노력할게요. 감사합니다.”

“아, 아뇨! 저, 저도 4년 만에 남자 처음 만나는 거라…… 오,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려요. 고마워요.”

“네. 음─ 그럼 무슨 얘기 할까요.”

“하하하.”


정민 씨는 그렇게 말하고 내 대답에 멋쩍은 듯 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나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커피를 마시며 정민 씨를 바라본다. 아, 멋지다, 이 남자…… 학벌이니 직업이니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얘기하자니. 실은 이미 엄마한테 다 들었지만, 정민 씨 댁은 꽤나 잘 사는 집이라고 들었다. 아버님 되시는 분은 고위직 공무원, 어머님은 초등학교 교사라고 하신다. 오히려 스펙 비교를 하면 우리 집이 더 처량한데. 우리 집은 아버지는 택시기사, 어머니는 자영업. 지극히 평범한 서민층인데.

저 쪽에서 먼저 그렇게 말해주니까, 마음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키 크고 얼굴만 잘 생긴 게 아니라 마음씨도 착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아니! 왜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거야, 정혜라!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그렇게나 남자가 궁해?! 이럴 땐 설령 그런 마음이 들어도 아닌 척, 아무것도 아닌 척 굴어서 내 쪽으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해야지!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이렇게 홀딱 반해버리면 내 쪽이 너무 불리하잖아. 고개를 살짝 내젓고 정신을 집중한다.


작가의말

오늘도 결국 한 편... 시즌제의 희망은 어디로 간 것인가...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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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19화 - 2 +31 14.02.25 3,477 102 21쪽
75 19화. 뒷풀이! - 1 +15 14.02.24 2,326 57 20쪽
74 18화 - 4 +15 14.02.23 2,144 58 17쪽
73 18화 - 3 +21 14.02.23 2,172 58 19쪽
72 18화 - 2 +19 14.02.22 2,243 49 20쪽
71 18화. 시험공부를 여자애랑 하면 과연 집중이 되나? - 1 +31 14.02.22 2,437 54 18쪽
70 17화 - 4 +19 14.02.21 2,374 52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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