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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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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0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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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글자
19쪽

20화 - 2

DUMMY

‘뿍 뿍.’

‘시시시시시─ 쓰쓰쓰쓰씃─’

“아오.”

‘뿍 뿍’


매일 매일, 풀을 뽑는 것이 내 일이다. 풀을 뽑으면 그만큼 학교가 깨끗해진다. 선생님은 기뻐하시며, 한 시간 더 시간을 채워주기도 하지. 시간을 채우기 위해 풀을 뽑고 있는 거냐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아니야.


“엇.”

“아.”


……플래그를 세우기 위해서 하기도 한다.


는 개뿔. 그냥 그렇다고 생각이나 해 봤다. 현실은 어색해하면서 서로 마주친 손을 황급히 빼는 나와 성빈이지만. 장갑과 장갑이 맞닿은 건데 왜 그렇게나 과민반응을 보일까. 역시, 그 때의 일이 신경 쓰여서 그런 걸거야. 더위 때문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성빈이의 얼굴은 빨갛다. 땀도 줄줄 흐르고 있고. 괜히 나 도와주느라 고생이 많구나. ……근데 왜 이렇게나 어색한 건데!



꼭 교내 봉사활동이 풀만 뽑는 건 아니다. 선생님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면 되는 것이다. 뭐, 계절이 여름인 만큼 잡초를 뽑는 게 주된 일과이지만, 가끔은 강당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혹은 선생님을 따라 컴퓨터 작업의 단순노동을 돕는다거나. 심지어는 그냥 선생님 개인 심부름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개인 심부름은 좋지. 잠깐만 해도 30분, 1시간으로 적용시켜 주시거든. 어쨌든 그렇게 착실하게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성빈이와 함께.

방학이 돼선 어느 누구보다 성빈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냥 단순하게 계산해봐도, 100시간의 봉사활동을 ‘성빈이와 함께’ 채우라는 명령이니 방학 내 100시간은 좋든 싫든 성빈이랑 같이 있어야 하는 거다. 진짜 연인관계도 그만큼 오래 있지는 않겠다. 하지만, 아까부터 말하듯 왠지 모르게 성빈이랑 서먹서먹한 사이가 된 것 같다.


“오늘은, 정자년 도와주면 되겠다.”

“에, 담임선생님이요?”

“그래. 무슨 인력소도 아니고, 너희 둘 소문 듣고 요청이 들어왔거든. 도서관 정리.”

“아~”


선생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어 선생님이자 도서관 사서를 겸임하고 계시거든, 담임선생님은. 안 그래도 방학이라고 도서관 정리해야 한다고 수업중에 징징대시는 걸 들었는데. 그걸 우리를 이용하시려 하다니. 그래도 도서관 정리라면 밖에서 풀 뽑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적어도 실내니까 햇빛을 쐴 일은 없고, 도서관이니까 에어컨도 틀어져 있을 테고. 기껏 해봤자 책을 나르거나 하는 것밖에 없겠지. 후후, 기분이 좋은데.


“어째 무슨 퀘스트 깨는 것 같네요.”

“아직 창창하게 남아 있으니까 젊음을 만끽해. 어디보자. 이제 21시간 했네.”

“……넵.”


그래도 꽤나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1/5인가. 기가 죽은 나는 묵묵히 대답하고 걷는다. 성빈이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옆을 따른다. 그러고 보니까 선생님하고 농담 따먹기 하고 있는 사이에도 성빈이는 별 말 없이 내 옆에만 있었구나. 이렇게 어색하면 안 되는데…….


“어머! 왔구나. 고마워요, 다들. 좀 고생 좀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오히려 이게 낫죠, 밖에서 풀 뽑는 것보다야.”

“오호호, 웅도는 긍정적이구나. 응? 성빈이는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표정이 어두워요.”

“엣, 아, 아니에요.”


도서관에 가니 낑낑대며 책을 정리하고 계신 선생님이 보인다. 키가 그리 큰 편이 아니셔서 맨 윗칸은 책을 넣는 걸 힘들어하신다. 담임선생님은 애매하게 존댓말을 쓰셔서, 오히려 우리 쪽에서 더욱 부담을 갖고 예의 바르게 말하게 된다. 이걸 의도하시는 것인지도 모르지. 선생님은 천사처럼 웃으며 성빈이를 보고 말한다. 성빈이는 살짝 당황하며 대답한다. 흠. 확실히 이상하네.


“우선은─ 서고에 가요.”

“넵.”


여전히 거북한 존댓말이지만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건 어째 유치원 선생님이 천사처럼 애들한테 하는 말 같아서 그리 거부감이 들진 않는다. 선생님을 따라 서고를 향한다.


“이건 새로 들어오는 책이구, 이건 원래 있던 책이에요. 음─ 일단 오늘은!”

“…….”


아까 전에 나, 도서관에서 일하니까 예감이 좋다고 했는데. 그거 취소. 좀 어마어마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고에는 빼곡히 책들이 놓여 있다. 먼지 쌓여 있는 옛날 책들도, 새로 들어와 반질반질한 책들도 많이 있다. 우리 학교 도서관에 이만큼 책이 많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니 애초에 다 입시다 뭐다 해서 책 읽지도 않는데 이만큼이나 구비해 둔 이유가 대체 뭐야? 누가 읽는다고. 장학사 아저씨 오시면, ‘음 이 학교는 학생들 복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구먼!’ 하는 소리 들으려고 하는 의도인가.


“으핫! 허엇……! 크핫!”

“웅도, 엄살 심하네요?”

“아뇨! 무거우니까 무겁다고 하죠!!”


책을 잔뜩 지고 얼굴이 빨개진 나를 보고, 선생님이 웃으며 말씀하신다. 나는 억울해서 잔뜩 얼굴에 힘을 준 상태로 말했다. 얼추 들어봐도 10kg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 무게인데! 애초에 선생님도 이만큼 못 드니까 사감선생님한테 나랑 성빈이 빌려온 것이면서! 나는 조금 억울한 마음에 일부러 선생님의 안 좋은 점을 건드리고자 말을 꺼냈다.


“선생님 이번에 결혼하신다고 들었는데…….”

“에, 엣?! 누, 누가 그래요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할까요! 아하하하!”


담임선생님은 눈에 띄게 당황하시며 진땀을 빼신다. 확실한 사항이구나. 하긴, 담임선생님하고 제일 친한 사감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건데. ……친한지 어쩐지 솔직히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담임선생님이 사감선생님한테 엉겨 붙는 느낌?


“사감선생님이 그러시던데. 약혼을 하네 헤어지네 어쩌네.”

“우와아아아앙! 그것까지 알아?! 아아, 앙대에!! 아무한테도 말 하면!”

“네네, 안 말해요, 그런 거. 선생님 본인이니까 물어보는 거죠.”

“히이잉! 그치만! 나 아직 스물 네 살 팔팔한 처녀인데! 지금 결혼하는 건 느낌 이상하구, 벌써 아줌마 되긴 싫은데! 그치만 그이가 너무 좋기도 하고! 결혼하는 건 두근두근 상상하는 것만으로 좋기도 하지만! 아우우…….”


선생님은 내 말에 기어이 소녀 감수성이 폭발해서 스물 네 살 꽃다운 처녀가 아닌 한 명의 여고생 같은 말투와 느낌으로 나에게 매달려서 특유의 징징대는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아니, 본인보다 7살이 어린 남학생한테 그런 거 말한다고 내가 뭘 알겠습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염성 터지는 선생님을 보고 난감하게 웃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주책 같은 느낌은 안 들고 어울리게 귀여우시다. 그냥 ‘네, 네’ 하면서 대답만 했다.


“도서관에 이런 책은 왜 놓나 모르겠어.”

“응…….”


성빈이에게 불평이라도 하듯 말한다. 성빈이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책을 넣으며 대답한다.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기분이 나빠지거나 하진 않는다. 분명 어색해서 그런 걸 거야, 분명 의식해서 그런거야 하고 열심히 마음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다. 아니, 그 전까진 분명 괜찮은 사이였는데? 남자애가 이 정도에서 풀이 죽으면 안 되지. 끈질기게 말을 걸어야지.


“성빈이 너는 책 꽤 읽는 편이지 않아?”

“응, 맞아.”

“신간 들어오면 좋겠네, 그럼?”

“……응. 사실 좋아하는 신간 들어와서, 기분 좋긴 해. 내가 직접 정리하고 있으니까 그것도 더 뿌듯하고.”

“호오…….”


성빈이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진 않지만 훨씬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적어도 나를 경계하거나 무시하는 투는 아니다. 그냥 어색해서 나를 못 쳐다보는 것일 뿐이지. 나는 긍정적이고 천사 같은 마인드의 성빈이를 보고 사뭇 느끼는 바가 크다. 내가 아는 여자애들은 되게 책을 많이 보는구나. 희세는 말할 것도 없이 독서광이고, 미래는 다른 의미로, 좋은 책은 아니고 휴대폰으로 텍스트 파일 받아서 로맨스나 BL이나, 혹은 인터넷으로 그런 걸 많이 본다. 어쨌든 보긴 보니까. 아, 한 명 예외가 있긴 하네. 리유. 책이든 뭐든 읽는 거랑은 담 쌓은 애지, 리유는.


“…….”

“…….”


겨우 대화의 물꼬를 텄는데 다시금 정적으로 되돌아간다. 성빈이는 묵묵히 일하고, 나 역시 책이나 나르고 있다. 이, 이래선 안 되는데. 어떻게든 어색하지 않게 말을 해야하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좋지 못한 결말 쪽으로만 흐르는 걸까. 성빈이는 가는 팔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책을 들어 열심히 일을 한다. 안에서 일하는데도 땀이 조금 비칠 정도로. 천천히 농땡이 부리며 해도 되는데, 저렇게나 열심히 하다니. 여유 있게 하던 내가 다 부끄럽다. 성빈이는 정말 성실한 애지.


“저기.”

“응?”

“……좀 말할 게 있는데.”


나는 넌지시 성빈이를 불렀다. 성빈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치곤 황급히 시선을 내린다. 내 쪽을 보곤 있지만 나랑 눈도 못 마주친다. 아니, 내가 무슨 범죄자야? 아니면 성빈이가 무슨 죄 지었데? 이런 건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무슨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도 아니고.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굳혔다.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역시……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어, 어, 어떤 걸? 뭐, 뭐를?”

“……파티 때 있던 일.”

“…….”


성빈이는 내 말에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른다. 붉은 물감이 촤악 퍼지듯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빨개지는 얼굴. 너무 부끄러워서인지 고개를 푹 수그린다. 이러니까 굉장한 죄책감이 엄습한다. 꼭 여자애 울린 것 같잖아. 아니, 외부에서 보면 그런 느낌일 것 같은데, 정말! 선생님이 보면 ‘웅도, 여자애 울리면 안 되요!’ 하면서 중간에 끼어들어서 더욱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다행이 선생님은 혼자 서고에서 낑낑대며 책을 정리하고 계신다.


“……어디서부터 기억하고 있어?”

“난 전부 다…… 기억 나는데. 취하긴 했어도.”

“으으…….”


성빈이는 한동안 부끄러워하다 간신히 고개를 들고 말한다. 얼굴이 너무 빨개져서 굉장히 가련해 보인다. 눈은 울먹울먹한 게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다. 내 말에 성빈이는 또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수그린다. 이번엔 손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한다. 버티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나만 되게 난감하게 됐다. 우, 우나?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도 일단은 한 쪽 무릎을 굽혀 성빈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 그러니까! 괜찮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네가 창피해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 괜찮아.”

“……안 괜찮아! 내가 창피하다고!”

“아, 미안.”


성빈이는 내 위로한답시고 한 말을 듣고 고개를 팍 들고 쏘듯이 말하고 다시 얼굴을 손에 파묻는다. 굉장히 미안해지네. 하긴,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건 성빈이 본인이겠지. 성빈이는 아예, 쪼그리고 앉는 자세에서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폭 앉아 버렸다. 얼굴도 정말 우는 것처럼 굽힌 무릎에 대고 손으로 엎드리듯 머리를 가린다. 아아, 이거 참…… 난감하네. 이럴 것 같아서 일부러 의식되고 어색해도 말하지 않았는데. 최악의 경우의 수로 가고 있구나.


“……블라우스 벗은 것도 기억나?”

“어.”

“……희세한테 막말한 것도?”

“……응.”

“……너 껴안은 것도?”

“……어.”

“……흐으으으으으…….”


성빈이는 굉장히 띄엄띄엄 머뭇거리며 물어본다. 고개는 들지 않고, 푹 숙인 그대로. 나는 엉거주춤한 애매한 자세로 마찬가지로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세 번째 질문까지 다 대답하니 성빈이는 괴상한 앓는 소리를 내며 더욱 몸을 동그랗게 만다. 부끄러움에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째서!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어, 그게…… 죽을 것 같아서 술 조금만 먹었잖아.”

“으으…… 너무해.”


성빈이는 갑자기 고개를 팍 들고 원망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나는 조금 난감해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성빈이는 볼을 부풀리며 귀엽게 말한다. 평소의 의젓한 누나 같은 느낌의 성빈이와는 되게 상반돼서 신선한 귀여움이 느껴진다. 이제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 성빈이. 하지만 여전히 내 시선은 피하고 있다.


“넌 어디까지 기억나는데? 꽤나 마셨잖아.”

“……너한테 토한 것까지.”

“아. 다 기억하는구나.”

“……뭐!!”

“아니야. 푸흡.”

“……웃지 마!”


내 물음에 성빈이는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나는 괜히 웃음이 나서,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웃게 됐다. 성빈이는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웃지 말라고 성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성빈이가 더 귀엽고 웃겨서 웃음이 더 나온다.


“……시집도 못 갈 거야…….”

“아니, 아니야, 아무한테도 안 말하니까. 그런 거, 어차피 우리들끼리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니까. 나도 굉장히 부끄러운 꼴 많이 보였고.”

“……너는! 너는 뭐 없잖아! 나, 나는……! 여자앤데 웃통도 벗어 버리고! 아으으…….”


성빈이는 내 말에 화난 듯 다그치며 말한다. 말하고선 자기가 더 부끄러운지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나는 성빈이의 말에 일순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성빈이나 희세에 비하면 그렇게 부끄러운 건 없지만. 그렇다고 여자애들 앞에서 헤벌레 하고, 동갑내기 여자애한테 애교 부리고 앙탈 떨고, 여자애가 발로 밟는다고 풀발기하는 그런 건 확실하게 부끄러운 일이다. 다만 그런 걸 일일이 입에 담기가 부끄러울 뿐이다. 남자애가 그렇게 다 말하면 찌질해 보이기도 할 테고. 성빈이도 아마, 자기 입으로 차마 더 말하기 부끄러워서 말을 잇지 못하는 거겠지.


“……미안해.”

“아니, 괜찮아. 얼마든지 화 내도, 내 잘못이니까.”

“……네 잘못은 아니잖아. 그냥…… 너무 창피해서, 나도 모르게 심통 부린거야.”

“아니야, 내 잘못이 크지. 아무리 그래도 여자앤데, 놀리듯이 별 생각 없이 말해버리고.”

“…….”


뉘우치고 죄 지은 표정으로 사과하려는데 또 성빈이는 먼저 사과를 한다. 어째 나랑 성빈이는 계속 이렇게 부딪히게 되는 것 같다. 지금은 서로 사과를 못 해서 안달이다. 내 진지한 말에 성빈이는 입을 다문다.


“토해서 미안. 옷 다 버리고, 그것 다 치워줬잖아. 정말정말 미안.”

“그건 희세한테 더 고마워 해야지. 희세가 너랑 미래랑 씻겨주기까지 했는데. 옷도 다 입혀주고.”

“아아…… 진짜 미안해…… 고개를 못 들겠어…….”


성빈이는 내 심드렁한 대답에 다시금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인다. 하긴, 그건 정말 큰 반전이긴 했지. 성빈이처럼 예쁜 애가 토를……으으, 상상하지 말자. 그냥 성빈이는 지금 귀여운 성빈이인 그대로 좋은 거야. 성빈이가 무슨 요정도 아니고, 똑같은 사람인데. 그 정도 작용도 없으랴. 딱히 미래가 토한 건 별로 이상하지 않은 건 아니다.


“멋대로 블라우스 벗어서 미안.”

“아니야, 그건 좋았어.”

“……으으, 변태야!”

“아이, 좋았으니까 좋았다고 하지.”

“……뭐, 한창 때 남자애니까. 알았어.”


성빈이는 내 말에 눈을 흘기며 볼을 더욱 붉힌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약간 능글맞게 말했다. 사실 약간 의도한 대답이지. 희세였다면 분명 ‘변태새꺄!’ 하면서 노발대발 했을 텐데. 바다 같이 넓은 마음씨의 성빈이는 내 야릇한 농담마저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단지 저런 이유로 본인의 수치심을 이해하고 넘길 수 있다니. 역시, 성빈이는 착해.


“……맘대로 껴안아서 미안. 욕하고 막말한 것도, 미안.”

“응, 그것도 나쁘지 않았어. 뭔가 신선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특히, 어린애처럼 앙앙 울었던 거.”

“아아, 그런 거 일일이 말하지 마!! 창피하다구!! 아으으……!”

“아하하.”


성빈이의 말에 나는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능글맞게 대처했다. 솔직히 껴안아 준건 오히려 내 쪽에서 황송한 일이지. 그 때, 굉장히 기분 좋았거든. 좋은 향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고. 성빈이는 더욱 부끄러워하며 소리치듯 말한다. 그래놓곤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열을 식힌다. 이거, 은근히 놀려먹는 재미가 있다. 더 놀렸다간 정말 재기불능까지 부끄러워하는 성빈이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위험한 세상에 눈을 뜬 걸까, 나.


“응, 그런 것 때문에 의식하는 것 같아서, 성빈이 너말야.”

“……응, 의식하고 있었어. 부끄러운 일이니까. 하필이면 그것도 다 기억도 나고.”


슬슬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판을 차린다. 성빈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다. 이제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본다.


“부끄럽기야 확실히 부끄럽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잖아? 그냥 흑역사이자 젊은 날의 부끄러운 추억으로 내버려 두고, 지금은 지금대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솔직히, 100시간 형벌이어도 너랑 같이 하니까, 굉장히 즐거울 줄 알았는데. 네가 늘 어색해하고 피하니까, 도리어 압박감이 장난 아니라고 해야 하나.”

“……나 때문에 지루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앞으론 어색해하지 말고 친하게 얘기했으면 좋겠어.”

“……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


성빈이는 차근차근히 말하는 내 말에 살짝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에게 되묻는다. 그 와중에 자기가 나한테 피해 입혔나 걱정하는 거야. 대체 얼마만큼 사려 깊은 여자애인거야, 얘는. 나는 나도 모르게 매너손은 커녕 몹쓸 손을 뻗어 성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 같아서. 리유한테 하든 나쁜 손버릇이 그대로 나와버렸네. 하지만 성빈이는 그리 불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을 뿐이다. 그러더니 다짐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나는 훈훈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예전에 기숙사에서 내 알몸 다 본 적도 있잖아. 난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어휴, 얼마나 끔찍한데. 그것도 서로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잖아.”

“……으으, 왜 그 말은 꺼내서!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아하하. 지금 반응 보니까 뭔가 본 것 같은데?”

“안 봤어, 몰라! 멍청이 변태야!”


어째 더욱 훌륭한 신사가 된 것 같은 나다. 지금은 이렇게 능구렁이처럼 능숙하게 야한 얘기를 꺼내는 훌륭한 변태다. 음, 자리와 직함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던데. 이러면 결국 다 여자애들 잘못이야. 자꾸 나보고 변태 씨 변태 씨 하니까 정말 변태가 됐잖아. 짓궂은 농담에 성빈이는 더욱 부끄러워하며 불평한다. 나는 그런 성빈이가 귀여워 해맑게 웃는다.


작가의말

주말엔 조금 여유가 있습니다. 늘 생각하지만 편의점에서 글 쓰면 굉장히 이득 보는 기분이라서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9

  • 작성자
    Lv.20 역주행
    작성일
    14.03.01 13:33
    No. 1

    초s 각성! 이 성빈이는 이제 웅도겁니다. 웅도 마음대로 할 수 있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3.01 14:04
    No. 2

    후훗, 괴롭히는 맛이 있어... 아, 너무 위험한 발언인가요? 뭐, 그렇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역주행
    작성일
    14.03.01 14:44
    No. 3

    음, 이 맛은... 부끄러워하는 맛이구나!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3.01 15:20
    No. 4

    ...저 대사를 치려면 성빈이 볼을 핥아야 한다는 말인데. 뭔가 달콤한 크림 같은 맛이 날 것 같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역주행
    작성일
    14.03.01 15:28
    No. 5

    작가님께서는 히로인의 맛(!?)까지 상정하고 글을 쓰시는 겁니까... 무서우신 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3.01 15:39
    No. 6

    아뇨, 전 여자애 맛을 본 적이 없어서...(??) 그냥 상상일 뿐이죠, 어디까지나 상상.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역주행
    작성일
    14.03.01 16:10
    No. 7

    별 거 없어요. 당장 자기 팔 들어서 물어보나, 여자 물어보나 그게 그맛. 소설보면 무슨 전기가 오르는 듯 짜릿하니, 달아서 미쳐버리느니, 하는데 솔직히 달기는 커녕 짭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3.01 16:56
    No. 8

    그래도 저는, 저만의 깊고 어두운 환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분명 달 거야.(?) 알아요, 아는데... 흑.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역주행
    작성일
    14.03.01 17:13
    No. 9

    딥다크판타지... 는 그냥 판타지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3.01 17:26
    No. 10

    후후후... 근데 어째 이렇게 하니까 댓글란이 채팅창이 됐네요. 시간차 채팅이라 설레고 좋네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0 dsafsdas..
    작성일
    14.03.01 19:30
    No. 11

    수습하고 가는구나ㅜ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3.01 19:46
    No. 12

    그렇지요, 그냥 가다간 너무 어색하니까요. 아니면 더 질질 끄는 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역주행
    작성일
    14.03.01 19:45
    No. 13

    채, 채팅!? 시간차!? 어머...(?)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3.01 19:47
    No. 14

    우홋. 그렇게 부끄러워하실 것 까지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0 똑딱똑딱
    작성일
    14.03.01 20:04
    No. 15

    근데 역주행씨의 뎃글을 읽다보니 의미심장한 구절이 보입니다. 그게 그맛? 오히려 짭니다? 당신은 맛을 본것입니까 정녕?!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3.01 20:29
    No. 16

    ......!! 저도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흐음... 아뇨, 여자친구가 있다면 다 핥아보지 않을까요? 아닌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olfam
    작성일
    14.03.01 22:13
    No. 17

    저번화에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는' 표현이 있더라구요 여기에 대신 쓰고 갑니다
    절반이 역주행님이네요...
    요새는 호구주인공보다는 다 알고 밀당(?)하는 주인공이 트랜드던데
    글쓴이분은 쭉 호구주인공으로 가실건가요 아님 요새 트랜드에 맞추실건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3.01 22:26
    No. 18

    오오, 오타 지적 감사드립니다.
    요즘은 그런 주인공이 대세군요! 그렇다면 그것도 구미가 당기네요. 마침 슬슬 웅도도 알아가는 기분이고, 그렇다면... 후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널그리워해
    작성일
    14.08.24 13:04
    No. 19

    으음 살맛이 살맛이겠지요.어차피 사람 몸인데 다릉가요 역주행님!?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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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20화 - 3 +17 14.03.02 3,028 52 20쪽
» 20화 - 2 +19 14.03.01 2,584 52 19쪽
79 20화. 큰 일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 1 +13 14.02.28 2,445 53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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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19화 - 3 +24 14.02.25 3,564 118 23쪽
76 19화 - 2 +31 14.02.25 3,477 102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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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18화 - 3 +21 14.02.23 2,172 58 19쪽
72 18화 - 2 +19 14.02.22 2,243 4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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