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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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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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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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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DUMMY

“.......이상이 옥스토브라카 북부협곡전투보고서입니다.”


추위로 터져버린 손의 살갗과 아직 채 녹지도 못한 전투복의 핏자국들.

쉬지 않고 일주일을 내리달려온 반즈 스트라토스가 곧장 팔루뎀의 본궁으로 들어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반즈의 차림새가 단순히 그녀가 자신의 결의를 내비치기 위해 의도한 연출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 눈빛을 본 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이 평생을 같이 부비며 생활해온 영지의 병사들이 무엇을 위해, 그리고 무엇에 의해 희생되었는지, 그 해답을 빨리 듣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고위관료와 장관들, 거기에 지방영주들이 모두 참가한 회의 도중이었기에 꽤 많은 얼굴이 모여 있는 본궁회의실이었지만, 갑작스런 반즈의 등장과 그녀의 보고에 뭐라 반응을 보이는 자는 없었다.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는 침묵 속에서, 처음으로 입술을 뗀 것은 크리스의 차가운 목소리.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친히 중대규모의 지원군을 파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세 번밖에 견뎌내지 못했다는 뜻이군?”


“.......죄송합니다, 폐하.”


반즈는 보라색으로 변색된 입술을 강하게 깨문다.

크리스의 ‘고작 세 번’이라는 평가가 부당하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반즈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세 번의 공격모두 방어군 규모의 서너 배는 넘는 군세를 상대로 버텨낸 것이었고, 그 외에도 자잘한 도발이나 국지전을 포함해서 그녀와 그녀 아버지의 병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추위와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마지막엔 최정예 기병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예 기사에 의해 돌파당하긴 했지만, 방패병과 소수의 전투마법사로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그녀였다.

그럼에도 보고 내용에 특별히 자신들의 노고를 치하받기 위한 미사여구는 절대 넣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철저히 객관적으로 전황을 파악하고 결과를 보고했다. 그렇기에 국왕에게서 저런 평가를 듣는다 해도 어쩔 수 없으리라 달리는 말 위에서 수없이 다짐했건만, 욱신거리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이 분노는 무엇을 향한 감정이란 말인가.


“옥스토브라카 협곡은 천 명의 군사로도 만 명을 능히 대적할 수 있는 지형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을 터. 날씨와 보급이라는 문제는 오히려 적에게 더욱 거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방어와 경계에 실패한 원인이 무엇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조던의 딸 반즈.”


대화의 흐름상 왕이 원하는 대답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반즈는 혀를 끊는 심정으로 목소리를 낸다.


“지휘관의 역량부족입니다.”


“틀렸다.”

단호한 크리스의 목소리. 반즈는 고개를 들어 어떠한 표정도 띄우지 않은 채 좌중을 훑는 왕의 얼굴을 바라본다.

“가장 큰 책임은 나와 여기 있는 영주들, 그리고 모든 남부의 장군들에게 있겠지.”

경악의 탄식이 회의실 곳곳에서 흐른다. 그러나 자신을 책임의 선두에 놓고서 시린 눈빛을 내뿜는 왕을 향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남부군창설에 한자리 끼는 것을 통해, 훗날 공신의 대우를 받고 싶다는 목적으로 군을 이끌고 이곳에 머물러만 있던 영주들과 장군들. 그리고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과 옥스토브라카의 현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중대 하나밖에 지원해주지 못한 나의 판단. 이들이 ‘내 머릿속에 있는 이름’ 중에 하나를 지우고, 또 하나를 지울 뻔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 옥스토브라카의 영주 조던 스트라토스가 어떤 기질의 군인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였기에 출세가 보장된 남부군이라는 자리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변방의 방위에만 사활을 다하고 있던 것이겠지. 브린타이나는 유능한 지휘관을 하나 잃었다. 국왕으로서 이에 유감을 표하며 동시에 사과를 하지. 미안하다, 반즈 경.”


“화, 황공......감히 제가 어찌.......”


크리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만으로도 반즈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큰 소리로 감격을 표한다. 국왕이 누군가에게 사과를 한다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는 회의실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왕의 화살은 곧이어 그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사병을 이끌고 이곳에 온 지방영주들과 장군들, 나에게 협력을 해준 것에 대해서는 따로 감사할 생각이 없다. 당연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대들이 공적의 냄새를 쫓아 이곳에 펑퍼짐한 엉덩이를 붙여놓고 있을 때 조던과 같이 유능한 군인은 자신의 직무를 다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한다. 그는 당연한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는가. 동시에 너희들은 그에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터!”

무거운 침묵에 회의실이 짓눌린다. 크리스의 목소리는 위압적이거나 호소력이 짙은 것도 아니었으며 내용과는 달리 질책의 색도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무심한 그녀의 표정과 밋밋한 그 목소리야말로 가장 거대하게 영주들의 가슴에 불을 내지르는 중이었다.

“단순히 남부군에 발을 들여놓는 것만으로 내가 인정하리라 생각한 자는 없다고 믿는다. 적어도 조던과 같은 군인정신이 남아있지 않는 한, 이곳에 너희가 있을 자리는 없을 것이다. 알겠나?”


“옛! 폐하!”


회의실의 벽을 무너트릴 기세로 터져 나오는 수십의 목소리. 개중에 자신도 모르게 영력을 실어 대답한 자도 있었다. 그에 크리스는 만족의 미소조차도 내보이지 않고서 손을 흔든다.


“잠시 휴정하겠다. 반즈 경, 고개를 들라.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자신의 왕이 휴정이라는 이유로 그녀와의 독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영주들은 빠르게 회의실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잠시 후 회의실에 남게 된 얼굴은 벤과 재규, 크리스의 곁을 지키고 있는 디미르, 그리고 고개를 들고 왕에게 다가서는 반즈뿐이었다.

“옥스토브라카의 방패병을 그리 쉽게 뚫을 수 있는 기병대는 북부에 없을 것이다. 아마 중앙군 소속의 정예부대정도겠지. 그런 그들을 직접 희생시키는 기만술을 쓴 그 지휘관이라는 자가 신경이 쓰이는구나. 정녕 처음 보는 얼굴이었나?”


“예.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다고는 해도, 아버지에게 일격만으로 중상을 입힌 기사입니다. 저나 아버지가 얼굴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의 실력자였습니다. 그런 자가 아직까지 무명으로 왕국에 남아있었다니, 이해하기 힘듭니다. 아버지가 외부세력을 끌어들인 것이 아닌지 의심했을 법도 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정예군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기만술을 펼치다니, 그 잔혹함은 검성이라면 용납하지 않을 일이기에-”


“내 왕위를 찬탈하고 내전의 불길을 당긴 반역자다. 다시는 그 입으로 그의 기사됨을 칭찬하는 말을 담지 마라.”


차갑게 빛나는 크리스의 눈빛. 디미르는 뒤에서 작게 웃었지만 마주하는 반즈는 경악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폐하.......!”


크리스의 말대로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는 엄연히 반역자의 이름으로 불리며 비난받아야 하지만, 기사들에게 있어서는 아직까지 무의식적인 우상의 대상으로 남아있었다. 현대의 ‘기사도’란 무엇인지 평생에 걸쳐 몸소 실천해온 그의 인성이나 강철보다도 굳은 그의 군인으로서의 심지는 다른 국가의 기사들에게까지도 경외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왕좌를 무너트리고 이른바 반역이라는 이름하에 실권을 장악하자 대부분의 반응은 경악에 가까웠다. 선대왕인 크리스의 아버지는 혼신을 다하여 보좌했던 그가 갑자기 그녀를 실각시키다니, 영주들 사이에서도 그 진의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북부에서 크리스의 복권을 지지하지 않고 검성의 깃발 아래 모인 많은 영주들과 대부분의 장군들은 아직 블라르가 ‘기사’와 ‘검성’으로서 가졌던 명성과 그 품격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다. 물론 크리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진 정통성과, 검성이 가진 인망의 정면대결이다. 여기에서의 승자가 곧 브린타이나의 미래가 될 것임을 직감했기에 크리스는 분단이라는 선택을 하면서까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협곡을 돌파한 뒤, 그들의 움직임은?”


“옛, 패퇴하는 저와 패잔병들을 향한 추격섬멸전이 짧게 이어졌으나, 옥스토브라카를 벗어나자 추격도 중지되었습니다. 아마 그곳에 거점을 꾸리고 본격적인 중앙군의 남하를 위해 곳곳에 교두보를 둘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알겠다. 남부군의 창설은 최대한 신속하게 마무리 지어야겠군. 옥스토브라카의 탈환, 그 선봉엔 반즈 경, 네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겠다.”


“영광입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힘찬 대답을 마지막으로, 반즈는 그대로 무너지듯 쓰러지고 만다. 군인으로서 전투에 패배했다는 굴욕감과 아버지를 잃었다는 압박감을 억누르고 눈도 붙이지 않고 말을 바꿔가며 달려온 처참한 시간이, 크리스로부터 답을 얻고 긴장을 놓는 순간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의 이성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기사로서 왕의 면전에서 실신한다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질책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크리스는 깊게 잠든 그녀를 위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벤과 재규가 앉아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예상된 범주 내의 움직임입니다. 허나 이걸로 어느 정도는 영주들과 장군들에게 자극이 되었겠죠.”


본인 입으로 안타깝다 했던 부하의 죽음을 도리어 분위기 반전을 위한 도구로 받아들인다. 동시에 천부적인 권위를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자신을 만족시키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남부군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통보한 그녀였다. 벤은 자신의 친구와는 너무도 대비되는 방식의 왕권을 부리는 크리스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북브린타이나의 새로운 지휘관에 대해서 신경이 쓰인다 하셨죠. 저야 조던이라는 기사가 어느 정도의 기량이었는지 모르니 묻겠습니다만, 그를 간단히 제압했다는 게 그리 신경 쓰일만한 일인가요?”


“조던 스트라토스는 분명 기사전에 있어서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기사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가 전장에서 가지는 무게감과, 그 스스로의 철벽과도 같은 단단함은 여기 있는 디미르는 물론이고 검성마저도 쉽게 제압하리라곤 장담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지요.”


자리에 앉는 크리스의 목소리에 이어 디미르가 얇은 미소와 함께 말을 덧붙인다.


“거기에 영감탱이의 방식이나 기사도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전술을 구사한 그 대범함은, 그 인간이 무명이라는 사실보다도 경계해야 할 점이야. 좀처럼 걷잡을 수가 없다는 뜻이거든. 이렇게 말하니 어째 우리 카나반의 검성님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


“죄송한데 저는 철벽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일격에 뚫어버릴 자신은 없는데요.”


벤의 어투나 표정에 농담기가 섞여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디미르는 크게 웃으며 벤의 덥수룩한 머리를 마구 헝클어주었다. 그의 얇지만 거친 손길을 제지할 힘도, 의지도 없었기에 벤은 묵묵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머리를 방치하고 있을 뿐.


“북부에 남아 검성의 깃발아래에 모여 있는 장군이나 영주들에 대해선 모두 파악이 끝난 상태. 어쩌면 조던의 예상대로 외부의 세력일 수도 있지요. 어쨌든 이런 식으로 변수와 같은 인물이 계속 나타난다면 이쪽의 대응책도 수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되도록 이런 말씀은 드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크리스는 턱을 괴고서, 차갑게 빛나는 푸른 눈으로 천천히 재규와 벤의 눈동자를 번갈아 마주한다.




“욘과 카나반의 직접적인 지원을 요청합니다.”




====================




“들어오게.”


노크소리에 대답을 하면서도 아스트로바톰의 총장이자 이론마법학회장인 디쿠젠 니바르토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펜과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지금은 검성이 되어버린 벤에게서 위임받은 전투마법사육성개정안을 마무리 지어야 했기에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과는 학기 중보다도 더욱 바쁘게 이어지는 중이었다.

서재의 문이 열리고, 가벼운 발걸음이 들려온다.

무의식적으로 들어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 디쿠젠은, 자신 스스로에게 놀랄 만큼 차분하게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무심한 반응에 더욱 놀란 것은 방문자 쪽이었던 모양.


“허? 별로 놀라지도 않는군?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그건 몰랐지만, 당신이 겨우내 어느 동아리방에 숨어 계시다는 건 알고 있었죠, 마스터 오캄푸스.”


굵은 주름이 뒤덮여있던 노인의 입가는 이제 허연 백골만이 남게 되었고, 풋풋하고 날카롭던 청년의 입가엔 주름이 가득하게 피어났다. 묘한 세월의 역설 속에서 다시 만난 스승과 제자는 그 시간보다도 어색한 미소를 품고서 손과 뼈를 맞잡는다.


“세월 참 빠르군. 네가 다짜고짜 여기로 쳐들어와서 혈마법을 배우겠다고 떼를 쓴 게 엊그제 같은데, 그 풋내기가 이렇게 쭈그렁방탱이가 되다니.”


“덕분이죠. 이렇게 성가신 자리라는 걸 알려주셨다면 애초에 시작도 않았을 텐데요.”


디쿠젠은 반쯤 비어있는 오캄푸스의 턱뼈를 보고 나서도 그에게 와인잔을 권한다. 그리고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는 오캄푸스. 역시나 그가 홀짝인 향긋한 포도향은 그대로 줄줄 새어나가 그의 옷깃을 적시고 만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도 둘은 함부로 분위기를 깨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내내 쉬지 않고 움직일 예정이었던 디쿠젠의 손과 눈은 멈춘 상태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더욱 활발하게 기억을 헤집는 중이었다.


“그래, 요즘에도 몰래 혈마법을 연구한다지?”


그런 침묵을 깬 오캄푸스의 가벼운 목소리는 디쿠젠이 예상했던 바였다. 그가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아리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 동아리장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간단하게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들이 같이 품고 있는 제르나비 라는 이름이 그에겐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디쿠젠으로선 놀라울 뿐이었다.


“고도와 이야기를 해보셨군요.”


“그래애. 참으로 우연이지? 나와 같은 이름을 지닌 아이가, 나와 마찬가지로 악마와 계약을 하고,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을 너로부터 그대로 이어 듣다니 말이야.”


“하지만 그 마지막은 결코 같지 않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그럼 다행이고.”


낮게 흐르는 망자의 웃음소리. 디쿠젠은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옛스승의 푸른빛을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머금었던 와인을 삼킨다.


“.......알고 계셨죠?”


“뭘?”


웃음이 내리깔린 대답.

자신이 무얼 묻는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확인하는 것은 과연 그다운 심술이다.


“마스터의 혈마법 연구를 고발한 게 저라는 거.”


“흐음, 그랬나?”


마치 일곱 살 제자의 도둑질 고백이라도 듣는 듯한 오캄푸스의 태도와 목소리. 디쿠젠은 오랜 스승의 반응을 보고서 희끗한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말을 한 번 삼킨다.


“.......그 사실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그렇다 쳐도, 어째서 저에게 이유조차 묻지 않으신 겁니까?”


“네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낭만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낭만가.....요?”


오캄푸스는 몸을 숙여 디쿠젠의 손과 얼굴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하더니, 이내 크게 웃으며 뼈밖에 남지 않은 가슴을 두드린다.


“어디보자, 반지가 없는 보아하니 아직 결혼도 안 한 모양이고, 끝내 네가 답을 찾지 못했으니 그 아이에게라도 위임해서 실마리를 풀어낼 생각 아닌가? 애초에 나를 고발한 것도 네가 원하던 방향으로 연구가 이뤄질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서였겠지. 만약 그 끝에 가서 모든 게 드러났다면, 네가 다시 시작할 기회조차 남지 않았을 테니까.”


“.......”


디쿠젠은 반박하지 않고 조용히 먹색 눈으로 스승의 턱뼈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바르토, 아무리 너라도 알 수 있겠지. 그 아이가 악마계약자라는 신분 따위에 얽매여서 혈마법에 매달려 있을 만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말이야.”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를 이렇게라도 묶어두는 건 그저 제 욕심 때문이었지요.”


“그럼 왜 그 아이에게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는 건가? 그 아이가 계약자라서? 단순히 그 책에 담긴 내용만으로 혈마법을 연구하라고 과제를 내어주면, 그 아이는 모든 방향에서 완벽하게 그걸 탐구해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겠지. ‘그런 아이’니까 말이야. 너, 진짜로 그 아이를 ‘고작’ 혈마법마스터로 만들고 싶은 건가? 너무 이기적인 욕심 아닌가.”


“.......”


“난 개입하지 않을 거야. 이미 이 땅에서의 내 생명은 끝났으니까, 이 나라에서의 내 역사는 더 이상 이어지면 안 되거든. 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무슨 선택을 하든 적어도 보조는 해줄 생각이야. 그 방향을 정하는 건 그녀의 스승이자 총장인 네 몫이다. 그냥 조용히 닥치고 썩어가는 살이나 떼어내면서 살려고 했는데, 이 말만은 하고 싶어서 잠깐 들렀어.”


오랜 스승이 잔을 내려놓고 서재를 빠져나갈 때까지도 디쿠젠은 그 어떠한 인사도 없이 조용히 망자의 사라지는 그림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그의 말도 물론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자신은 지금 옛날 스승에게 저질렀던 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 뿐, 대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디쿠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괴롭히던 서류를 내려다본다. 아센 하파가 전사한 뒤로 혼란에 빠졌던 중앙군의 전투마법사 육성계획은 벤에 의해 간신히 다시금 틀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중점을 잡아주고 끌어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학생’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 선생의 입장이었을 뿐, 학회장이자 총장이라는 직함이 무색할 정도로 자신은 다른 일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자격이 없다.

라고, 그는 스스로를 자평했다.


디쿠젠은 씁쓸하게 웃으며 쌓여있던 서류 중의 한 장을 골라낸다. 보류라는 붉은 글씨로 주석을 달아놓은 아센 하파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망설임 없이 펜으로 그 이름에 가로줄을 그었고, 위에 새로운 이름을 새겨 넣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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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34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70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5 2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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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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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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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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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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