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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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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14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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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DUMMY

“말씀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만, 총리님.”

브린타이나 왕국의 국왕 론크리스 프리징플레임 7세는 자신의 새카맣고 얇은 머리칼을 비비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다시피 제국은 카나반만을 침공한 것이 아닙니다. 3군단 놈들 때문에 저희 동부전선도 꽤나 애먹고 있어요.”


“예. 그러나 제국도, 폐하의 왕국도 아직 진심으로 결착을 지을 생각이 없으신 것 아닙니까?”


크리스는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로 조용히 카나반의 총리, 마누앙의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독대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곁에 장군들이나 대신들이 있었다면 귀가 따갑도록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의도가 단순히 아실레마와 유착했던 브린타이나의 과거를 들쑤시기 위함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오해를 살만한 발언이십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폐하’가 아닌 ‘폐하의 왕국’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흐음.”


어지러운 정세. 그것도 가장 급박한 상황인 카나반의 총리이지만, 직무조차 내던지면서까지 이 남자가 사신으로 파견 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크리스였다.


“모든 숲을 불태우며 전진하는 제국, 아니 아펜타우스의 의도를 브린타이나도 파악했겠지요. 같은 ‘악마국’으로서 제국과의 전쟁을 멈추고 같이 뜻을 따라야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폐하께서는 그렇게 갈라진 정론을 아직 규합하지 못하신 것 아닙니까?”


크리스의 눈이 웃는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장군들 중에서도 제국과의 전쟁을 반대하고 있는 자들이 꽤 있어요. 그런 온건파들을 수도와 중앙군에 남겨놓았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동부전선으로 보낸 겁니다. 그러니 전황이 교착될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폐하의 생각은 어느 쪽입니까?”


어떻습니까-가 아니라 어느 쪽이냐-고 물어온다. 그는 발 뺄 공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무게였기에 크리스는 대답을 주저하지 않는다.


“저는 동맹을 파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전쟁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요.”


“예, 말씀하신 ‘큰 그림’에 대해서는 우리 측 검성과 이야기를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무례하게 듣지는 마십시오, 저흰 말씀만으로 맺어지는 협력관계보다는 동맹에 대한 확신을 듣고 싶습니다.”


“그 확신을 통합군이란 형태로 심어달라는 말씀이시군요.”

카나반의 총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통합군이지, 지금 같은 상황에선 브린타이나 남부군 전체를 지원군으로 돌려달라는 요청과 다름없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크리스가 카나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 장미라니, 확실히 무거운 상대가 카나반을 택하였군요. 어찌 보면 세뮈엘에 대한 아펜타우스의 태도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예로부터 줄곧 앙숙관계로 묘사되지 않았던가요.”


“종교 분야는 잘 모릅니다만, 말씀처럼 제국2군단이 카나반 침공을 맡은 건 붉은 장미의 자원, 또는 독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누앙의 대답에, 그 이유를 되물으려던 크리스의 머릿속에 한 이름이 스쳐지나간다.


“아아, 딸 때문인가요?”


“더불어 그녀의 부관을 맡고 있는 댄 스파인 장군도 카나반 출신입니다.”


주제가 어긋난 것처럼 보이지만, 크리스는 마누앙의 묘한 몰아가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확답을 내줄 수는 없으나, 절반의 믿음정도는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결론을 내린 눈빛으로 마누앙을 바라보았다.


“말씀처럼, 국론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오스타이나 성의 압박 때문에 저도 섣불리 팔루뎀의 중앙군 모두를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동부전선이 웬만큼 정리되는 대로 통합군을 움직여보도록 하겠습니다.”


“.......폐하의 입장도 있으신데 여기서 더 무리하게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되겠지요. 그럼 그 말씀만 품고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혀 믿음이라곤 품지 않은 먹색 눈빛이었기에 크리스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릴 뻔 했으나, 미련 없이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는 마누앙의 뒷모습에 겨우 무례를 삼킬 수 있었다.


“본국으로 귀국하십니까?”


국왕직속기사단 ‘엑스클라마트’의 근위기사가 열어주는 문으로 걸음을 내딛던 마누앙을, 크리스의 목소리가 다시금 붙든다.


“아뇨, 니에브로 갑니다.”


“부지런하시네요. 그런데 니에브의 상황도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예.”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기는 카나반의 총리.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가야만 한다. 무언가 작은 변수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그 덧없음을, 크리스는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부지런한 사람이군.”


침묵이 찾아오자마자 어느새 뒤로 나타난 디미르의 목소리. 크리스는 양손으로 피곤에 지친 얼굴을 쓸면서 작게 웃었다.


“그러게. 저런 사람이 카나반의 지도자로 남아있었다면 그건 또 나름대로 재밌었겠어.”


그런 그녀를 향해 향기가 가득한 와인잔을 내밀며, 디미르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슬슬 우리 아버지와 담판을 지을 거야?”


그가 말한 아버지란 브린타이나 왕국을 상징하는 창,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 동맹을 구축하는 것으로 제국에 대항하자는 ‘강경파’인 크리스.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는 ‘온건파’의 중심에 ‘오열의 검성’ 그가 있었다. 다른 국가들에 비해 왕이 내각을 단단하게 휘어잡고 있는 브린타이나이지만, 대부분의 장군들에게 존경과 지지를 받는 검성이란 존재는 군권의 통일에 있어서는 분명 까다로운 상대.

당장 눈앞에 밀고 들어온 제국이란 공통의 적에 맞서서 검을 들고는 있으나, 그 ‘적과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에 있어서 커다란 이견을 보이고 있다는 점 자체가 훗날 커다란 불씨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크리스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디미르의 말대로, 언젠가는 담판을 지어야할 문제이자 상대.

크리스는 차분한 표정으로 잔을 비우고, 디미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중앙군의 장군들과 내각대신들에게 총회를 통보해.”




====================




“피난민?”


로빈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드렌턴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제국군이 숲의 북부에 있던 마을을 거점으로 나무들을 밀어버리기 시작했다는군. 미처 피난가지 못했던 주민들이 평원으로 빠져나온 모양이야.”


“아니, 베르달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못 들었을 리는 없잖아. 왜 아직도 남아있던 거야?”


“전략적가치가 없는 변방이니 제국이 건드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애초에 놈들의 목적은 숲의 파괴지 거점을 점령하는 게 아닌데, 시골사람들은 그걸 모르니까.”


로빈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긴다.

이건 자신의 불찰이다. 통신에 교란이 심했다는 변명은 소용없다. 일일이 파견을 보내면서라도 베르달 전역에 경고를 했어야했다. 막연하게 크라트가 처리를 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정작 그도 갑작스러운 기습에 정신이 없었을 게 분명한데.


“.......그래서, 사상자는?”


민간인 학살- 이라는 끔찍한 단어를 품고서 드렌턴에게 입을 열었지만, 되돌아오는 답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없다.”


“엉?”


별다른 방위군조차 없는 마을을 제국군이 휩쓸었는데 사상자가 전무하다?

이해를 바라는 로빈의 표정을 향해 드렌턴이 덧붙여 말했다.


“어느 기사가 미리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피난을 도왔다는 증언이 있었어. 덕분에 별다른 피해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하던데.”


“기사? 지방귀족이나 유지인가? 이름은?”


로빈의 질문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는 드렌턴.


“듣긴 했는데, 성도 없는 이름이라 까먹었다. 대신 흥미로운 이름이 들려오던데, 그 마을이 윌리안 가슈펠라르의 본가가 있던 곳이라더군.”

예상치 못한 이름에, 로빈은 물론이고 구석에서 에페를 닦고 있던 지나마저도 커다랗게 눈을 뜨며 드렌턴을 바라본다.

“가문이 무너진 뒤에도 윌리안의 작은아들이 본가에 계속 남아서 살고 있던 모양이야. 올란 가슈펠라르라고.”


“올란?!”


지나가 소리를 지르며 의자에서 일어난다. 덕분에 로빈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려야했다.


“아, 아뮤르, 너는 알겠군. 삼촌이니까. 뭐어, 좋은 감정은 없겠지만.”


드렌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흘린 것은 가슈펠라르 라는 이름에 어색한 감정이 있는 지나를 위한 나름대로의 배려였지만, 오히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그 또한 흠칫하고 만다. 까칠한 수염이 솟아있는 그의 턱 아래로 얼굴을 들이밀며, 지나는 다급한 표정과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딸이 같이 있지 않던가요?”




===============




베르달의 깊은 그림자에서 벗어난 얼굴들은 저마다 안심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위태한 평화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질책은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새로운 터전을 찾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무거운 의무감이 그들 앞에 놓여있을 뿐.

갑작스러운 등장에 중앙군 군영에서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구호품은 한정되어 있었다. 곧바로 수도로 연락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전화를 피해 도시로 몰려드는 얼굴들이 어디 자기들뿐이랴. 피난민들은 해이했던 안락함에 반성하며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전무했다.

때문에 그들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채 자신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세 명의 그림자에게 관심을 줄 여력이 없었다.


“삼촌.”


사정청취를 위해 준비된 천막에서 명령을 받고 기다리던 올란은 익숙한 목소리를 쫓아 입구를 바라본다. 태양을 등진 그림자들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대답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그였지만, 후드를 벗으며 나타난 얼굴에 올란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야했다.


“폐, 폐하.......!”


존경에서 오는 당혹감이 아니었다. 허리를 굽히는 그의 얼굴에 스치는 건 분명한 공포와 굴욕감. 심지어 로빈마저도 분명하게 그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올란 경. 혹시 조사 받으시면서 수도에서 뵀던 적이 있던가요?”


자연스럽게 연상된 질문이었다. 前가슈펠라르 본가에 대한 재판이 얼마 전까지 진행됐다는 사실은 로빈도 알고 있었고, 참고인으로서 그 보다 적합한 대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대답하는 올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묘하게 뒤틀려있었다.


“아, 아뇨. 저와 딸내미가 몸이 좋지 않은 관계로....... 대리인을 보냈습니다.”


“아, 그런가요. 여기, 지나는 아시죠?”


올란은 그제야 마침내 처음 자신을 불렀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얼굴과 이름을 깨닫고, 그는 더더욱 밝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예, 물론입니다.”


“오랜만이네요, ‘삼촌’.”

교차하는 굳은 표정과 시선. 호의가 제거된, 힘이 실린 목소리로 내뱉은 호칭은 그들의 태도만큼이나 둘 사이의 벽을 실감케 해주는 것이었다.

“아델은 어디 있어요?”


한층 더, 올란의 표정이 뒤틀린다. 로빈이 앞에 없었다면 욕이라도 내뱉을 분위기였다.


“.......나가서 왼쪽 의무천막이다.”


지나는 올란의 대답이 마저 끝나기도 전에 뒤를 돌아 천막을 빠져나간다. 당황한 로빈은 드렌턴에게 올란을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그녀의 뒤를 쫓아 나와야했다.


“잠깐, 지나. 아델이 누구야?”


“사촌동생. 몸은 약하지만, 저 집안사람답지 않게 착한 애야. 마지막으로 만난 지 5년은 넘은 것 같네.”

의무천막은 부상자를 위한다기보단 피난민들의 쉼터로 변모해있었다. 어지럽게 여러 얼굴들이 흩어져있었지만, 가슈펠라르가 특유의 빛나는 금발은 쉽게 눈에 띄고 있었다.

“아델!”


자신을 부르는 그리운 목소리에 반응하며, 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렇지 않아도 축축했던 붉은 눈동자가, 지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왈칵 터지고 만다.


“지나 언니......?”


지나는 그녀의 곁으로 달려가 싸늘한 동생의 머리를 끌어안아 주었고, 아델은 지친 얼굴을 지나의 가슴에 묻는다. 지금 그녀가 흘리고 있는 눈물이 단순히 반가움과 안도감에서 오는 것이 아님은 곁에서 지켜보는 로빈도 느낄 수 있었다. 소개는 뒤로 미룬 채, 두 금발의 상봉을 지켜보고 있는 로빈의 뒤로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신들 누구야?”


반응한 것은 로빈뿐이었다. 그가 무의식적인 사과와 함께 뒤를 돌아보자, 무척이나 자유로운 차림새의 소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나보다도 더욱 심하게 뻗치고 갈라진 검붉은 머리와, 자신과 비슷한 색의 눈동자를 품고 있는 날카로운 눈매. 반쯤 찢어진 셔츠와 짧은 청바지 아래로 신발이나 양말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야생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로빈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전 로빈이라고 하는데, 지금 사촌끼리의 재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사촌?”


소녀의 거친 시선이 아델과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지나를 향한다. 마침내 납득의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당신이 마을 사람들을 도와줬다던 그 기사신가요?”


로빈의 질문은 자연스러웠다. 그저 순수한 느낌과 판단으로 내뱉은, 가벼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소녀의 반응은 심상치가 않았다. 커다랗게 눈을 뜨며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그녀.


“.......어떻게 알았어?”


“예?”


되묻는 로빈을 향해 경계심을 감추지 않는 소녀였다.


“내가 기사인거 어떻게 알았냐고?”


“어떻게 알았냐니....... 그냥.......?”


로빈의 입장에선 이렇게밖엔 답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 그대로 자신은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으니까.


“......평생을 감추는 법만 연습하며 살아왔는데, 그냥 느꼈다고? 아델네 아저씨도 여태까지 눈치 채지 못했는데? 너 뭐야? 조금 쎈 기사야? 감별사야?”


“아, 아뇨-”

의혹이 가득한 얼굴을 들이미는 소녀를 향해,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저으며 대답한다.

“그냥 왕인데요.”





==============================




여름 하늘. 따스한 빛. 불타는 태양과, 죽어있는 베르메스 평원.

이 모든 걸 다시 누릴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이걸 축복받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저주받았다고 해야 할지, 이 원대한 질문은 누구에게 물어봐야 좋을까.

누구보다도 예리한 나의 이성이 다시 그 존재를 내뿜은 순간, 나는 어지러운 시야나 혼란스러운 주변상황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라는 존재가 다시 이 땅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이 공화국에게도 커다란 축복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런 생각을 내 이름과 신분, 잔류여부를 묻기 위해 다가온 조사원에게 말했다면, 아마 그녀는 나를 자기애적 과대망상에 빠진 미친놈으로 취급하고 다시 무덤에 쑤셔 박아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난 정중하게 그녀의 화장과 의상을 칭찬해주며 잔류희망란에 서명을 새겼지만, 반쯤 썩어있는 내 피부와 살갗으로 여자를 꼬시는 것까진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정상인이라는 오해를 받고나서야 시민증과 영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어딘가에 ‘영주’할 생각 따윈 다시 한 번 죽었다 깨어나도 없겠지만.


박살난 내 2의 고향 아르바티앙. 그리고 나의 고향 아르다르. 그 모두가 별다른 흥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의 풍경이나 눈에 담으면서 붉은 모래의 가도 위를 걷고 있었는데, 결국 붉은 비명이라는 익숙한 여관에서 신문하나를 사서 펼쳤다.

마침내 나는 그곳에서 흥미를 되찾을 수 있었다.


전쟁.

제르나비 고도.

혈마법.

악마.

아르바티앙의 망자들.


정확히 무슨 기사였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다섯 개의 단어를 품고서 나는 아르다르에 입성했다. 여관에서도 그렇고, 외성의 검문소에서도 그렇고, 내 뒤틀린 외견과 증명서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분위기였는데(물론 나를 향한 혐오와 두려움의 시선은 끊이질 않았지만), 본궁까지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근위병에게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꺼지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답을 내는 것에 있어서는 거리낌이 없던 내 현명함마저도 그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머지않아 본궁주변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하더니 출병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회라고,

나는 확신했다.


그래서 기자들 품에 섞여서 무작정 군대를 따라 베르메스 평원으로 따라나섰다. 어찌됐든,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나면 되니까. 적어도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까- 라는 예상이었다.


생각보다 기회는 쉽게 찾아왔다. ‘그들’ 중에 망자도 껴있다는 소문이 기자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나는 반쯤 썩어문드러진 내 몸에 감사하며, 이 ‘특권’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몰래 침입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접근하는 식의 모험은 하지 않았다. 그저, 썩은 얼굴, 신분증명서, 그리고 ‘특무대’라는 단어면 충분했으니까.


온갖 의심과 혐오의 시선을 견뎌내고 나서야 드디어 이곳에 서게 되었다. 비록 무섭게 생긴 근위병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긴 했지만, 이제 한 마디면 그를, 그녀를, 그들을 만날 수 있다.


“폐하는 회의 중이십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근위병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역시 이런 얼굴을 대하면서 표정까지 온건하게 관리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이해한다. 아마 내가 저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구토를 하고 있겠지.

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신분증명서를 넘기며, 최대한 밝고 유쾌한 기분을 담아 입술이 없는 입을 열었다.


“아아아, 다름이 아니고. 혈마력특무대에 대해서 폐하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거어기 아래 보시면 아스트로바톰 인증서도 써져있어요. 잘 보세요, 좀.”


근위병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나와 증명서를 번갈아 훑어보더니, 어수선한 분위기가 사라진 천막을 힐끗 뒤돌아본다. 긍정적인 신호다. 나는 존재할 리가 없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아 드디어. 마침내,

만날 수 있다.

희열의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지금 살아생전처럼 날뛰었다간 저 무서운 칼을 맞겠지.


“폐하, 어느 망자가 폐하를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만.......”


안에서 들려오는, 근위병의 쳐진 목소리.


“망자?”

그리고 곧바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이름이 뭐라던가?”


‘그’의 물음에 근위병이 대답하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두 손을 모으고 작게 웃고 말았다.





“제르나비 오캄푸스라고 합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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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0 3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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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1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6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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