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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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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1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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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글자
24쪽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DUMMY

자신의 독서와 차향음미를 방해하는 갑작스런 소란에 올란의 짜증이 솟구친다. 그리고 그 범인이 대문을 박차며 들어선 리즈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짜증은 분노로 격상되고 만다. 그러나 너저분하게 기른 검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거실에 나타난 리즈를 향해 고함을 쏴붙이려던 올란의 혀는 리즈의 선제공격에 의해 묶이고 만다.


“아저씨! 제국군이 바로 앞까지 와있어! 아델과 조엘은 어디야?!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돼!”


순간 머리까지 뻗쳐오르는 화를 간신히 눌러내고, 올란은 천천히 이 무례한 수인과도 같은 무법자를 살펴보았다. 시커먼 맨발에 거친 호흡, 흔들리는 야생의 눈동자.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아침에 있었던 딸과의 대화가 스쳐지나간다. 큰 소란에 다급히 계단을 내려오는 지든을 바라보며 올란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지든, 불청객은 쫓아내. 집안이 더러워지잖나.”


“아저씨! 나 누군지 알잖아?! 지금 놈들이 온다니까! 병신같이 고집부릴 때가 아니라고!”


“흥, 아델이 부탁했더냐? 그 같잖은 수작에 내가 넘어갈 줄 알았나? 너희들이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체념하고 더러운 오두막으로 돌아가라.”


“.......”


지든이 가로막았지만, 리즈의 싸늘해지는 시선은 올란의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선택하기 싫었던 최악의 상황이 다가온다. 피차 차분한 성격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조금은 이성적인 형태로 마주설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저 새빨간 눈동자는 이미 모든 목소리를 닫아두고 있다. 이제 조엘과 아델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

상대는 숙련된 기사다. 그러나 이쪽은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이점이 있다. 오직 한 번의 확실한 기회. 이 틈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잡아내야한다.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내오면서 웃음 외엔 그들에게 줄 수 있는 현실이 없었다. 이 비인간성이야말로, 그들의 위태한 행복의 그림자를 받쳐줄 마지막 비현실성.

살짝 따갑게 떨리는 손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서, 리즈가 지든의 만류 너머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리즈.”

계단 위에서 들려온 친구의 차분한 목소리에, 색을 입어가던 리즈의 적의는 눈 녹듯 흐려지고 만다.

“.......마을사람들을 먼저 부탁할게.”


아델의 얇은 미소. 리즈의 거친 눈썹이 잔뜩 뒤틀린다.


“하지만-”


“괜찮아. 부탁해.”


“........”


순간 리즈의 눈동자는 미세한 불안을 안고 친구의 평화로운 표정을 올려다본다. 혹시나 그곳에서 체념의 빛을 읽을까 무서웠지만, 아델의 단호한 표정은 리즈의 발걸음의 무게를 덜어주고 있었다. 반쯤 박살낸 대문을 향해 재빨리 뛰쳐나가면서, 리즈는 마지막으로 올란을 향해 시선을 흘린다. 그는 여전히, 불쾌함조차 내비치지 않고 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좀처럼 표정을 구기는 일이 없는 리즈조차도 그 완고함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먼지만을 남기고 평화를 되찾은 저택에서 올란의 낮은 목소리가 거실에 흐른다. 물론 그 대상은 계단을 내려오는 딸의 가슴팍이었다.


“내가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이제 아비의 말은 아예 흘려보내기로 작정했나보구나.”


“......”


날선 조롱에도 아델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천천히 걱정스런 표정의 집사를 지나쳐, 차를 음미하는 아버지의 곁에 선다. 그런 그녀의 얼굴조차 바라보기 싫은지, 짧은 콧방귀만 남기고서 시선을 주지 않는 올란. 그러나 그는 이어진 아델의 행동에, 결국 그녀에게 시선을 넘겨야했다.


“아가씨!”


물리적인 충격보다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올란의 머리가 더욱 고통스럽게 울린다. 풀려버린 표정의 그를 향해, 아버지의 뺨을 때린 아델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주변사람들의 목소리를 흘려보내고, 자신의 같잖은 아집을 위해 이성적인 판단조차 거부하는 당신이야말로 이 마을에서 가장먼저 정신을 차려야할 사람입니다.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이 빛바래가는 저택에서, 무너져가는 가문에서 더 이상 뭘 매달릴 게 있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행동, 그리고 떨리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지든에게 그것은 더없이 불길한 징조였다. 자신의 주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로서도 감히 예측할 수 없었기에, 늙은 집사는 몸을 던져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 그런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싸늘하게 일어서는 올란의 몸짓과 표정.


“뭘 매달릴 게 있냐고? 정신을 차리라고? 너에게 이 저택은 그저 네 약해빠진 몸을 뉘일 장소였을 뿐이고, 네 몸 속에 흐르는 이름은 물려받았을 뿐인 호칭일 뿐이겠지. 너는 당장 눈앞의 부덕한 감정에 빠져 시간과 역사라는 흐름을 망각하고 있다. 내가 가진, 우리가 가진 이 시간과 피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데에 수많은 선조와 적들의 피와 시간이 스며들어 있어. 나에겐 어떻게 해서든 그걸 유지할 의무가 있다. 지금 지하실에 갇혀있는 녀석은, 그 과정에서 새어나온 실수일 뿐이야.”


“그깟 귀족이 뭔데?!”

울부짖음에 가까운 아델의 목소리. 하지만 올란의 표정엔 작은 변화도 일지 않는다.

“뭐가 고귀한 혈통이고 뭐가 전통 있는 이름인데?! 그것만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해야하는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어?!”


“......네 방으로 올라가라.”


딸을 향한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차가움이었다.


“싫어. 조엘과 이 저택을, 이 저주받은 가문을 나갈 거야. 더 이상 가슈펠라르라는 이름을 위한 수단으로 살지는 않을 거야.”


“무력함 속에서 머리를 식혀라. 지든, 이 아이를 별실에 가둬.”


“싫어! 이거 놔!”


허리를 감싸오는 노인의 팔을 뿌리치기엔 아델의 몸은 너무도 허약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집사는 주인에 말에 복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옳다고 생각한 방향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할 지든이 아니었지만, 여기서 자신이 나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의 무력함을 합리화했기에 거칠게 반항하는 아델의 이끌고 별실로 향할 수 있었다.

한차례 짧은 폭풍이 지나간 뒤의 적막. 올란은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펴고 찻잔을 집어 들었다. 박살난 대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여름바람은 평화롭기만 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


혼란에 휩싸인 마을의 중앙. 사람들이 짐을 싣는 것을 도와주던 리즈가 회색으로 빛나는 검을 들고 언덕을 뛰어내려오는 엄마의 얼굴을 발견한다.


“조엘과 아델은?”


“마을사람들 먼저 도와주래. 좀 있다 다시 가보려고.”


생기와 희망이 없는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곤 쇠약한 노인이 다수. 이번만큼은 기사의 완력을 숨길 생각이 없는 리즈는 확실히 그들의 피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대충 시간은 끌 수 있을 거야. 사람들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필요한 것만 챙기도록 유도해.”


그녀의 단언에, 리즈는 마침내 자신의 엄마가 여태까지 숲에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해왔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곁눈질로 엄마의 검을 보면서 수군거리는 저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노력을 알고는 있을까. 그러나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


“.........”


두 기사가 동시에 북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 어느 때보다 확연하게 살갗에 맞닿아오는 불길한 느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위화감.

그리고 경악은 기사들의 표정을 넘어 마을사람들에게도 번지기 시작한다.


“뭐야, 저게?” “숲......숲이......”


불길도, 연기도 없었다. 불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소름끼치도록 새빨간 안개가 북쪽 언덕을 뒤덮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도에 닿은 나무들은 저마다 시커멓게 말라비틀어져 그대로 여름바람에 휘날려버린다. 그 처참한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아챈 얼굴은 오직 리즈의 어머니뿐이었다.


“......저래선 저지물도 소용이-”


빠르게 침식되어가는 숲과 언덕. 리즈는 어머니의 탄식이 귀를 파고들고서야 그 언덕아래 무엇이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리즈!”

튀어나가려는 그녀를, 어머니의 굳센 손이 붙잡는다.

“가면 안 돼, 이미 늦었-”


“엄마.”

천천히 따스한 손을 맞잡는 리즈. 그녀의 표정에 떠오른 것은, 어머니가 여태껏 보지 못했던 딸의 확고함이었다.

“아직 안 늦었다는 거 알잖아. 빨리 갔다 올게. 마을사람들은 엄마가 필요할 거야. 도와주고 있어. 알았지?”


“.......”


천천히 또박또박 자신의 눈을 향해 말하는 딸을 보며, 결국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즈의 고집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다. 여기서 더 붙들어봤자 지체되는 것은 시간뿐.

어머니의 한숨을 허락으로 이해한 리즈가 곧바로 붉은 기운으로 뒤덮이고 있는 언덕을 향해 뛰쳐나간다. 영력이 다소 새어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는, 오직 하나만을 위해 달리고 있었으니까.




============




“아델!”


뛰어오르다시피 벽을 타고 올라 창문을 열었지만, 아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방의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든의 당혹스러운 얼굴.


“아저씨! 아델 어디 있어요?!”


다급한 리즈의 목소리에도 지든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죄송합니다. 아가씨는-”


“아저씨. 지금 창문열고 언덕 좀 봐 봐요.”

지든은 무언가 말하려던 입을 다문다. 리즈가 그녀답지 않은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그에게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계단 옆 창문의 커튼을 들추었고, 숨을 들이켜고 만다. 충격과 경악으로 굳은 그의 시선 옆으로, 다시금 리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델 어디 있어요?”




열쇠가 들어가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리즈는 지든을 밀치고 별실의 문을 발로 걷어찼다. 영력이 실린 묵직함에 탕나무문은 유리처럼 산산 조각나며 흩어졌고, 먼지 위로 놀란 리즈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라 있었다. 굵은 줄로 침대머리에 묶여있는 그녀의 손을 보고, 리즈의 눈이 순간적으로 불타오른다.


“......도대체 딸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의지와 눈물 모두를 삼키고 있던 올가미는 리즈의 영력실린 손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아델의 손을 잡고 다음으로 향해야 할 곳은 명백했다.


“지하실, 지하실에 있어!”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아델의 발엔 조급함과 신중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여기서 올란을 만났다가는 일이 굉장히 귀찮아질 예감이 들었기에. 그러나 지하실의 문을 걷어차는 순간까지도 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짙은 어둠.

그보다 더욱 짙은, 꺼져가는 생명의 냄새. 리즈조차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그 그림자의 품으로, 아델은 눈물을 흩뿌리며 내려간다.



“조엘!”



놓아가던 의식의 끈을 잡기에 그녀의 짧은 부름이면 충분했다. 조엘은 고개를 들고,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아델.”


가까이 오지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따스한 손이 자신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 가녀린 손끝으로 느껴지는 모든 상처와 피딱지에 아델은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린다.


“조엘......조엘......조엘.......어떡해.......어쩌면 좋아........”


아델은 터진 조엘의 입술보다도 더욱 고통스럽게 찢어진 자신의 가슴을 가눌 수가 없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조엘은 그녀의 손길이, 입술이, 그리고 온기가, 그 어떤 생명수보다도 달콤했다. 차마 아델에게 물러나라고 말할 수가 없어, 리즈는 그대로 고문용 꼬챙이를 내려쳐 조엘의 팔과 다리를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과 족쇄를 끊어내었다. 아델에게 자신의 더러움을 묻히기는 싫었던 조엘이었지만, 그녀의 위로 무너지는 몸을 지탱할 힘조차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팔 줘. 살짝 일어나봐. 시간 없다고.”


“.......미안.”


그의 마른 목소리가 누굴 향한 사죄를 담고 있는지, 리즈는 계단을 오르며 다음에 생각하기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조엘은 실로 오랜만에 덮쳐오는 그 생명에 눈을 찌푸렸지만, 하나의 그림자만큼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딜 가느냐?”


대문 앞에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는 올란. 그의 허리춤엔 싸늘한 회색빛 검이 여름을 등지고 빛나고 있다.


“아저씨! 밖을 보라고! 언덕을 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봤다.”


으르렁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리즈를 향해, 올란은 짧게 대답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다. 목적과 살의가 가득한 그 칼날을 향해 대항할 무기라고는 리즈가 들고 있는 꼬챙이뿐. 그러나 리즈 또한 물러날 기미는 없었다. 이제 영력을 감출 필요가 없다. 동시에 저쪽도 적의를 감출 필요가 없다.

점차 저택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불길한 기운. 나무들의 비명소리. 그 사이를 두고 대립하는 날선 두 시선.


그러나 올란의 표정과 뽑아든 검에서 체념을 읽어낸 눈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조엘 안 돼!”


예리한 침묵을 깨트리는, 아델의 울음 섞인 외침. 조엘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리즈와 올란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이다.

그는 남은 족쇄의 흔적을 질질 바닥에 끌며 올란에게 다가간다. 영력이 새어나올 틈은 없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올란보다도 지켜보는 리즈의 불안이 더욱 커져가는, 위태로운 몸짓이었다.


“........”


그리고 이어진 조엘의 다음 행동을, 아델과 리즈는 물론 지든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피가 들러붙은 마른 손을 천천히 올란을 향해 내미는 조엘. 그 더러운 손과, 탁한 조엘의 눈동자를 올란은 말없이 번갈아 바라본다.

무언의 대화.

올란은 그 대화를 마치고, 천천히 검을 들어올린다. 그러나 아델이 비명을 내지르며 뛰쳐나올 필요는 없었다.

검은,

그대로 조엘의 손에 넘어갔으니까.


리즈의 벙찐 표정을 스쳐지나가며, 조엘은 그녀만이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델을 부탁해.”


“뭐?”


대답은 듣지 않는다. 그의 무거운 발걸음은, 어느새 아델의 앞에서 멈춰있었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천천히, 그는 마른 입술로 아델의 숨결을 삼킨다. 진한 피의 비릿함이 번지는 키스 뒤에, 아델은 그가 남긴 말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안 돼, 조엘, 안 돼.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지금 같이 가면 되잖아, 응? 조엘?”

새빨간 눈동자 아래로 눈물을 쏟으며 조엘의 찢겨진 셔츠를 부여잡는 아델. 조엘은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가슴으로 안는다.

“조엘 이러지마........ 날 떠나지 마....... 그런 눈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지 마...... 제발........ 안 돼, 조엘......”


조엘은 애절한 아델의 표정과,

뜨거운 그녀의 눈물과,

따스한 그녀의 손길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을 붙드는 그녀의 새하얀 목을, 보여주기 싫은 거친 손으로 조심스레 감쌀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련을 잠재우는 건 약간의 영력으로 충분했다.

눈물을 머금고 무너지는 아델의 몸을 간신히 받쳐 드는 지든. 집사가 다급한 표정으로 조엘을 올려다보지만, 그는 이미 대문을 향해 등을 돌린 채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듯한 얇은 등과 그림자만을 남기고, 그는 되찾은 발걸음으로 올란에 앞에 멈춰 선다.


오고가는 시선은 없었다.

허락받지 못한 만용 따위가 아니었다.

조엘은 얇고 보잘 것 없지만 확실한 목소리로,

그리고 분명하게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델을 잘 부탁합니다. ‘아버지.’ ”




===============




“기사인가?”


여름바람에 휘날리는 생명의 재를 뒤로하고서, 델핀의 깊은 눈동자는 하얀 저택으로 들어서는 입구를 향한다. 망가진 정원과 언덕아래를 가르는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다.


“.......영력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그녀의 말이 멈추는 바람에 선발대의 움직임도 멈춘다. 부관은 그제야 자신들을 마주한 채로 굳건히 서있는 그림자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팔다리에 끊긴 족쇄의 흔적이 있습니다. 탈주한 죄인인가 봅니다.”


“도망치지 않는 죄수라. 빛이 꺼져가는 눈으로 왜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사수!”


그녀의 아름다운 부름에, 황홀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소총수 한 명.


“쏴봐라.”


“옛.”


바람은 얇다. 대상은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조준에 긴 시간은 필요 없었다.

짧은 총성이 숲의 흔적 위로 울려 퍼지고, 그림자의 어깨에선 피가 솟구친다.


그러나 그림자의 두 발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듯, 델핀의 입가가 찢어진다.


“내가 직접 가보지.”


그녀는 부관과 참모들이 만류하기도 전에 말에서 뛰어내린다. 오직 그림자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는 델핀의 곁으로, 늙은 마법사의 목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검성님, 같잖은 시간 끌기라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 그 장단에 맞춰주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냥 곧바로 점령을 명하시는 것이-”


“그 터무니없음을 알면서도 죄인의 신분으로 도망치지도 않고 저기에 계속 서있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가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마지막으로 그걸 깨트릴 때의 희열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노인은 흐린 눈동자로 검성의 미소를 바라본다. 단순히 악독한 취미라고 하기엔,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도 흔들림이 없었다.





고통의 감각은 마모되어 이제 조엘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않는다. 그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결코 모든 것을 놓치지 않는다.

아직 남아있는 여름바람의 향기. 손질이 필요한 정원의 모든 나무와 꽃들.


요번 여름은 그에게는 너무도 차가웠지만, 어찌되었든 꽃은 피고 나무는 솟았다.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았을 뿐, 그들은 색을 잃지 않았다.

색을 잃은 것은, 저택과 자신의 눈동자뿐.


그가 평생을 묶여있었던 곳.

그녀가 평생을 묶여있었던 곳.

그리고 그녀와 함께했던 장소.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 어느새 흘러가버려서, 결코 잡을 수 없는 것들.

그 어느 때보다도 흐려져 있는 그의 눈동자였지만,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음에 그는 다가오는 붉은 장미에게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무엇에 미소를 짓나, 죄인?”


분명 아름다운 목소리다. 하지만 조엘은 그 선율에서 독을 품은 가시를 느낀다.


“.......시간.”


“흐음, 네가 저들에게 벌어준 시간 말이냐?”


장미의 시선이 저택의 안을 훑는다. 하지만 조엘의 미소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는 갈라진 입술을 마른 혀로 한 번 쓰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지나간 시간이다.”


“아, 추억. 그거 좋지. 반송장과도 같은 그 식은 생명에 어울리는 회상이겠구나.”


“눈물로 넘치더라도, 빛이 있을 거다. 내가 그 길을 함께 걷지 못하더라도 발을 디딜 모래는 되어줄 수 있겠지.”


“낭만적이군.”


델핀은 서서히 자신의 세검을 빼어들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겠다는 듯이, 밤보다도 짙은 그림자를 품은 흑도(黑刀). 그녀는 천천히 그 끝을 조엘의 어깨를 향해 세웠다. 마치 물속을 가르듯,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것처럼 검끝은 그대로 조엘의 어깨를 관통한다.

하지만 조엘의 미소를 지울 수는 없었다.


“신음조차 없다니, 재미없구나.”

다시 검을 거두는 그녀. 조엘의 어깨에선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 검은 검신에 색이라고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지금 말을 타고 도망치려는 저들을 쫒아가서 모조리 잡아 죽이면 조금 재미가 있으려나.”


얇은 미소와 함께 조엘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델핀.

하지만 조엘의 미소를 지울 수는 없었다.


“좋아.”


델핀이 너덜너덜한 그의 그림자를 지나쳐, 정원으로 한걸음 내딛는다.


자신의 사고보다도 빠르게, 조엘은 장미를 향해 검을 내려친다. 평생을 묵혀두었던, 평생을 억눌러왔던 자신의 모든 ‘반쪽짜리 피’가 담긴 일격이었다. 전신의 모든 관절이 뒤틀리고, 모든 상처가 검은 피를 내뿜는다. 검을 잡았던 손가락은 이미 모두 부러져버렸으며, 잔뜩 힘을 주었던 턱 위로 갑작스런 영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이들이 흘러내린다.

모든 시간을, 그리고 모든 생명을 남기지 않기로 각오한 남자의 한 합.


흑도의 검신 아래에서 델핀은 웃었다.

너무도 가볍게 그 참격을 막아낸 것과 동시에, 먹색 검끝이 조엘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검이라곤 처음 잡아본 듯한 그 어색함. 하지만 반쪽짜리 기사의 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격이로구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고맙구나.”

섬뜩한 그녀의 눈동자가 저택의 남문으로 빠져나가는 말소리를 쫓고 있었다.

“저들의 가치를 몸소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네 소중한 영혼의 팔다리를 잘라 대령하도록 하지. 제국검성의 앞을 막아선 속죄로는 부족하지만, 너의 마지막 시간을 절망의 나락에서 곱씹으며 보내도록 만들-”


델핀은 익숙한 감촉에 크게 미소 지었다. 다시 조엘을 돌아본 그녀의 표정엔 짜릿한 즐거움이 떠올라있었다.

부서진 이로 자신의 왼팔을 물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그녀에게 황홀함마저 안겨주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어둠의 위협도 이 남자에겐 소용이 없었다. 깨진 이의 단면으로 살가죽을 놓지 않고 있는 이 짐승과도 같은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는,

장미의 팔을 물어뜯기 위해 흑도가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허어. 내가 누구에게 물린 것은 딸내미가 세 살 때 이후로 처음인데. 피를 흘린 건 30년 만이고.”

결코 치명상이라곤 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사라지는 심장의 박동 중에서도 장미의 팔을 끈질기게 씹는다. 그 탁했던 눈동자는, 어느새 굵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름은?”


멀어지는 말발굽소리. 하지만 그녀의 호기심은 서서히 턱힘이 빠지고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다.


“.......”


분명 대답할 기력은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눈은 마지막까지 델핀의 팔에 미련을 두고 있었을 뿐, 어떠한 표정도, 어떠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밝힐 이름이 없나? 내 몸에 상처를 입힌 것만으로도 그대는 역사서에 이름이 오를만하다. 내가 대신 전해주지.”


“.........”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유감이라는 짧은 장미의 속삭임과 함께 그의 멈춘 심장이 흑도에게서 벗어난다. 쏟을 피 따윈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정원의 입구에서 무너지는 조엘의 몸. 고개를 돌릴 수 없었기에, 그의 눈동자는 정원을 거꾸로 담고 있었다.


“........마지막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


생각보다 맑은 그의 목소리가 의외라는 듯, 흑도를 집어넣는 델핀이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뭔가?”


그는 침을 삼키고 싶었지만, 목 근육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이 정원의 꽃과 나무만은, 없애지 말고 그대로 방치해줘.”


“흠, 이유는 묻지 않겠지만, 약속할 순 없겠는데. 애초에 우린 이 땅에 모든 생명을 지워버리기 위해 온 거라.”


밝은 델핀의 미소.

조엘은 간신히 눈동자를 움직여, 그녀의 깊은 시선을 바라본다.


“부탁한다.”


갈라지는 목소리. 델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그녀는 잠시 조엘의 얼굴과 정원을 번갈아 훑더니, 재미없다며 혀를 찼다.




잠수하는 의식 속에서 언덕을 뒤덮는 병사들의 소리가 땅을 울린다.

그러나 남은 감각이 없는 조엘에게 그 진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암흑이 잠식해가는 시야와

손과 볼에 남아있는 그녀의 온기 뿐.


마지막으로 그 미세한 그녀의 흔적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조엘의 생명이 허락한 목소리는 짧은 한마디가 전부였다.




“........안녕.”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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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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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34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4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0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4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0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1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6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7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4 28 13쪽
»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7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7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3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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