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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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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0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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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글자
19쪽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DUMMY

“잔소리하러 온 거면 그냥 나가.”


“잔소리하러 온 거 아냐.”


로빈은 방문을 열면서 다소 놀라야했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인데 지나가 깨어있을 줄은, 게다가 강화복만을 몸에 걸친 채 검을 쥐고 영력의 흐름을 다스리는 훈련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곧 그의 시선은 지나의 복부를 감싸고 있는 붕대로 향한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그는 방금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후회해야했다.


“......좀 어때?”


“괜찮아. 가벼워.”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튀어나오는 지나의 대답. 여전히 그녀의 태양빛 눈동자는 이쪽을 향하지 않는다. 로빈은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채, 느슨한 검붉은 시선으로 그녀의 ‘훈련’을 지켜보았다.

훈련소에서부터 접해왔던 그녀의 검과 영력이다.

그러나 지금 지나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저 파동은 결코 그녀가 가지고 있던 흐름이 아니다. 어딘가 불안하고, 어딘가 아찔하면서도 조급함을 지닌, 지금 그녀의 눈동자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그녀였기에, 로빈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시 물을게. 좀 어때?”


“......어때 보이는데?”


같은 질문, 그러나 무게감이 더해진 로빈의 목소리에, 지나는 검을 내리고 천천히 로빈의 얼굴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표정은 결국 로빈의 발걸음을 잡아끌고 만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너도, 나도.”


로빈은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는다. 차갑게 식어있는 그녀의 몸을, 그는 그대로 자신의 가슴에 담는다. 지나는 그리웠던 온기가 다가오고 나서야 자신의 몸이 얼마나 한기에 휩싸여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숨과 함께 떨리는 그녀의 몸을, 로빈은 천천히 침대로 이끌어 앉아 함께 이불을 둘러 덮었다.


“.......너도, 할아버지도 걱정하고 있다는 거 알아.”

손을 맞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천천히 움직이는 지나의 분홍빛 입술.

“근데 나는 화가 나서 눈앞이 흐려진 게 아니야.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 모든 걸 떨치려고 해봤지. 그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의사가 도움이 될 거라고 책을 주더라. 음유시인 에스더가 전화에 휩쓸려 딸과 부인을 잃고 불렀던 노래가 실려 있었는데, 그 중에 이런 시구가 있었어.

「별처럼 사라진 목소리가 꿈속에서 만나자며 표정이 죽은 나를 잡아끌었다

나의 생명은 눈물과 함께 증발하였다

나의 온기는 미소와 함께 식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가슴은 강가에 묻어놓은 채 망각의 껍질을 이끌고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모든 걸 놓을 수가 없었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우리가 누렸어야할 미소가 떠오르고, 네 얼굴을 보면 미안하다고 밖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여기서 다시 미안해하지 말라고 한들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로빈은 알고 있다. 그는 묵묵히 미세하게 떨리는 지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결혼하기 전이니 그나마 다행이지.”


무심코 지나가듯 흘러나온 지나의 말.

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급격하게 굳어버린 표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로빈.”


“무슨 뜻이냐고.”


“로빈, 들어봐.”

일어나려는 그의 팔을 붙잡은 지나의 손과 젖은 눈동자.

“의사한테 들었잖아. 나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몰라. 왕에게 있어 혈통과 혈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지금이라도 약혼을 취소하고 마땅한 상대를-”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다.

무릎을 꿇고, 굳건한 손으로 자신의 양손을 마주잡은 로빈의 표정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의 검붉은 시선이 담고 있는 온도는 질책과 원망, 그리고 가련함까지. 그 수많은 감정이 뒤얽혀 지나의 가슴을 조여오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던 건,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더 미안해졌기 때문이야. 나와 함께해서, 나와 목소리를 나누었기 때문에 네가 고통 받은 것이라고, 계속 자책하고 자책했어. 또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할까봐 견딜 수 없었어. 내가 참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만은 나와 함께 가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네가 이렇게 나를 놓아버리면, 나는 평생을 네 생각으로 고통 받으며 살아가야 해.”

로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굵은 눈물이 맞잡은 손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난 내 후계를 위해 너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아니야. 너는 너 자체만으로 나에게 구원이었고, 나도 너에게 구원이 되어줬으면 해. 이 상실엔 나도 너 못지않게 가슴이 아파. 하지만 나에겐-”

로빈은 다정하게 지나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숨결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다.

“네가 제일 중요해.”


양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로빈은 천천히 그녀의 숨결에 입을 가져간다. 지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아니, 거부할 수 없었다. 자신이 뱉었던 말에 후회는 들지 않았다. 결국 눈앞의 이 남자도 자신의 진심만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알면서도 그렇게 말해야했던 자신을, 로빈은 위로해주고 있는 것이니까.


“........미안해.”

자신의 섣부른 배려에, 지나는 이렇게밖에 사과할 수 없었다. 로빈은 그런 지나의 목소리로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듯,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그녀로서는 너무도 그리웠던 고동과 온기.

그의 말대로, 지나는 조금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특무대에선 안 빠질 거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생기를 되찾은 그녀의 눈동자에, 로빈은 짧게 웃으며 하얀 코끝에 입을 맞춘다. 지나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서로가 곁에 있고 싶었던 마음만큼, 그 상처는 컸다. 그러나 은빛 반지에 담긴 빛은 달빛 아래서도 결코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그들이 그 아래에서 했던 맹세는 지나의 생각처럼 가볍게 무를 수 있는 깊이가 아니었다. 태생적 한계와 주변의 시선과 목소리를 모두 견뎌내고 다다를 수 있었던 둘만의 시간. 다시는 무너트리지 않으리라, 로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짐한다.



“로빈.”


노크와 함께 들려오는, 묵직한 오즈카의 목소리. 잠시 서로의 체온에 안타까운 이별을 고하며 로빈이 대답한다.


“어, 들어와.”


“.......아닙니다. 그냥 보고 드리겠습니다. 올리의 척후대로부터 베르달의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로빈과 지나의 시선이 마주친다. 오즈카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명확했다. 지나는 서둘러 제복을 챙기며 에페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고, 로빈은 방문을 열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즈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특무대를 소집해. 그라우치 장군에게 통신을 보내서 군을 베르메스 평원으로 움직이라고 전해줘. 벤이 잘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




토끼의 가죽을 벗기던 여인의 손이 멈춘다. 후덕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이 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흐른다. 하지만 그녀의 굳은 표정에도 깊은 숲은 여전히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엄마, 왜 그래?”


숲감자를 다듬던 딸, 리즈의 부름에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표정만큼은 여전히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딸의 부름에 대답하는 대신 앞치마를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거친 손에 들려나온 것은, 다름 아닌 리즈가 평생 동안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했던 금화였다. 그 반짝임에 리즈의 눈이 매료되기도 전에 낮은 목소리가 먼저 이성을 되찾아 준다.


“리즈, 지금 바로 마을에 내려가서, 엄마가 말하는 것들 싸그리 다 사와.”


“뭘 사오라고? 잡화점 구잔아저씨 가족은 저번 주에 피난 간 모양인데.”


“아무튼 비어있는 가게를 털든가 해서 되도록 많이 가져와. 수레도 하나 살 수 있으면 사오고.”


“아, 뭐 땜에 그러는데?”

투정에 가까운 리즈의 목소리에 그녀의 어머니는 불같은 표정으로 딸을 노려본다. 그 뒤에 이어질 ‘잔말 말고’로 시작될 잔소리를 예상했기에, 리즈는 선수를 친다.

“혹시, 언덕너머에서 불어오는 이상한 바람 때문에 그래?”


어머니의 입술이 멈춘다. 그녀는 대신 놀란 눈으로 자신의 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상한 바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불길함이다. 하지만 이렇게 먼 거리에서 후각과 함께 시야를 어지럽히는 불길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상당히 감이 날카로워야만 가능할 터.

그녀가 놀란 건 자신의 딸이 그 정도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자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딸에게 간파 당했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너, 알고 있었어?”


흔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하지만 리즈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엄마가 기사라는 거? 응, 안 지 꽤 됐지.”


“그런데 왜......., 묻지 않았어?”


“엄마가 나에게 숨겨야만했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천진난만한 표정과, 숨김없는 대답.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딸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할지, ‘엄마’는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굳어버린 어머니의 입술을 대신하여 움직인 것은 리즈의 활기찬 맨발.

“아무튼, 뭐뭐 사오면 돼?”




=================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그리고 얼마큼의 눈물이 자신의 아래로 스며들었는지 가늠해볼 의지조차 암흑 속에 가라앉았다. 감각이 정지된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남아있는 건 터진 입술사이로 느껴지는 씁쓸한 비린내뿐. 처음 이후로 몇 번이나 터지고 굳는 과정을 반복한 입술은 결국 부어오른 채로 곪아버렸지만, 감각처럼 마비되어버린 감정으론 이제 계단위로 문이 열리는 소리마저 두렵지 않았다.

열린 문틈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얇은 빛보다도 먼저 그의 감각을 일깨워준 것은, 구둣발에 의해 또다시 터져버리는 입술이었다.


“.......더러운 놈.”

흐려진 눈을 통해 그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경멸에 찌든 목소리와 침 뱉는 소리만으로 그 주인을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건 아델의 울부짖는 소리, 아마도 지든이 필사적으로 그녀가 지하실로 내려오려는 것을 제지하는 중이겠지.

이번엔 복부를 파고드는 묵직한 고통에, 조엘은 마른 신음을 내뱉는다.

“퍼트리고 싶겠지. 외치면서 다니고 싶겠지. 이 집안은 반역자를 가주로 둔 것뿐만이 아니라, 서자가 누이를 겁탈하는 막돼먹은 집안이라고. 그렇게 나를 물먹이고 싶더냐? 하지만 유감이구나. 네가 다시 빛을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곱게 죽여줄 생각도 없다. 내 그거 하나만은 장담하지.”


매일매일 내려와서 같은 말과 같은 강도의 고문을 가하는 아버지에 대해 딱히 원망이 피어오르진 않는다. 단순히 원망만으로 이 퀴퀴한 지하실에서 버틸 수는 없었으니까.

만약 아버지가 하루에 한번 찾아내려오는 것으로 자신의 분을 풀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곳에서 물과 음식 없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일주일이 지났다는 뜻이다. 고통과 암흑과는 별개로 그를 괴롭히고 있는 건, 위에서 흐느끼고 있을 그녀의 얼굴.

단 한번이라도, 다시 그 눈동자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조엘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생명을 붙들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네 계략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은 우리 선에서 함구하기로 결정 났다. 네가 더럽힌 누이는 다음 주에 수도로 가게 될 거야. 기껏 신나게 떠벌여놓았으니 순결을 가지고 따지고 든다면 별 수 없겠지만, 식만 올리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뒤이어 흐르는 낮은 비웃음.

조엘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흐릿한 그림자를 쫓는다. 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새어나오는 분노까지 모두 억제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의 움직임을 눈치 챈 듯, 다시금 올란의 발길질이 이어진다.

“이게 다 너의 무능함 탓이다. 나는 너 따위 반쪽짜리한테 무려 일 년이라는 시간을 줬어. 하지만 네가 그곳에서 해온 것이 뭐가 있더냐? 가문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동안 빈둥빈둥 놀고만 있지 않았느냐?”


“......그러는.......”

마른 입술 사이로, 기적에 가까운 목소리가 흐른다.

“........그러는 당신은....... 그녀의 행복을 위해 뭘 했는데........?”


“닥쳐라! 어디서 감히 행복을 운운하느냐?!”

이미 부러진 코 위로 영력이 실린 주먹이 날아든다.

“네놈만......! 네놈만 제대로 했다면.......!”

고통과 함께 의식도 희미해져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풀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올란의 주먹이 멈췄고, 조엘의 몸은 힘없이 늘어진다.

“.......아델이 집을 나설 때까지는 살려두지. 하지만 네놈은 물 한 모금 입에 못 댈 줄 알아라.”


계단 위로 사라지는 발걸음소리, 곧이어 굳게 닫히는 문.

조엘은 다시 암흑에 몸을 맡겼고, 항상 그랬듯 한 얼굴만을 떠올리며 의식을 놓았다.





“아버지, 제발!”

몇 번을 뿌리쳐도, 아델은 끈질기게 올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고 있었다.

“말씀대로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제발, 제발 조엘을 살려주세요...!”


“멍청한 년! 아직도 모르겠느냐?! 저 녀석은 너와 우릴 속인 것이다! 단지 나에 대한 분노만으로 이성을 잃은 놈이란 말이야!”


“아니에요, 아버지! 우린 서로 오랫동안-”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굴을 감싼 채 쓰러진다. 지든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 다가섰고, 올란은 딸의 뺨을 내리친 자신의 손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너도 그렇다. 너희는 남매란 말이다. 아무리 저놈의 생각에 넘어갔다고 해도, 그렇게 가벼이 남매사이에 가랑이를 벌리다니........”


“주인님!”


낮게 흐르는 아델의 흐느낌과, 지든의 질책이 담긴 부름에도 올란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다음 주에 식을 올려할 얼굴이다. 상처가 남지 않게 잘 관리해줘라.”


“.......예, 알겠습니다.”

올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서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 방향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던 지든은 주인의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아델에게 다가온다. 주인의 명령대로 그녀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살며시, 떨리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가씨. 고통스러우시겠지만, 마음을 접으셔야 합니다.”

대답 없이, 눈물로 바닥을 적시고 있는 아델.

“부당하다는 것 압니다. 주인님이 이성을 잃으셨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어차피 허락되지 않는, 축복받지 못하는 마음이셨습니다. 이참에 깔끔하게 정리하시고, 그로써 도련님의 생명도 지켜주셔야 합니다.”


결국 아델은 집사의 품에서 참고 있었던 눈물과 통곡을 터트리고 만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 그를 그리워했던 시간, 그리고 그 마음을 서로 확인했던 시간.

그 모든 시간이 환상처럼 싸늘한 현실의 무게 아래 조각나고 말았다.

눈물 밖에 그녀가 흘릴 수 있는 것은 없었으며, 가련한 입술로 읊을 수 있는 건 조엘의 이름뿐이었다.


창문 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리즈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검붉은 머리를 쓸어 넘긴다.




==================




압도적인 아름다움. 그보다 더욱 압도적인 위압감.

아실레마제국의 좌검성 델핀 드리브달을 바라보는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먹먹한 감상이다. 군단의 선두에서 별다른 무장도 없이 말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적은 의지를 잃고 아군은 목숨을 다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남쪽을 향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숲과 언덕이 붉은 장미를 반겨주고 있었다.


“이토록 빠르게 베르달숲을 초토화시키다니, 아펜타우스님도 굉장히 흡족해하실 겁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먹색 후드를 둘러쓴 남자. 깊게 눌러쓴 그림자 덕분에 알아 볼 수 있는 거라곤 하얀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는 그의 턱뿐이었지만, 그 안에서 스며 나오는 목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분이 주실 은총에 비하면, 이런 수고는 작은 것이죠.”

델핀은 얇게 웃으며 대답한다. 마법사를 향한 눈빛이 결코 순수한 호의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또한 그 시선을 눈치 채고 있을 터. 상호간의 불쾌감은 협력이라는 이름 아래로 자연스럽게 묻어 두고 있었다.

“헌데, 그분과 계약하시려는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노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 다시금 가려진 그 눈동자를 바라보는 델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노인은 질문의 내용을 덧붙이기로 한다.

“제국 내에 그랜드마스터를 비롯하여 마법사신분의 계약자는 여럿 있지만, 기사로서 그분과 계약하려는 인간은 당신이 처음이지 않습니까. 그분이 기사를 싫어하시는 것도, 그리고 그런 기사들에게 계약의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시는 지 아시면서도 그분의 환심을 사려는 검성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마법사협회의 주된 의견입니다.”


“애초에 마법대학과 마법사협회가 저를 지지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일일 뿐이니, 너무 괘념치 마세요.”


슬쩍 비껴 흘러가는 듯한 그녀의 대답에 노인은 다시금 추궁을 위해 입을 열려고 했으나, 언덕 아래에서 나타난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만다.


“척후대로부터 보고입니다! 언덕너머로 적의 군세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주민들이 다수 남아있는 작은 마을 하나가 확인되었습니다.”


“마을?”

미소를 지우지 않는 델핀.

“수상한 점은 없더냐?”


“옛, 마을 바깥에 있는 커다란 저택을 제외하면 별 특징이 없는 마을입니다.”


검성의 시선이 다시 지평선을 훑는다. 언덕 너머에 있다던 마을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숲. 결정과 명령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틀 내로 그 마을을 거점으로 삼는다. 거기서부터 숲을 밀고 나갈 거야.”


느긋하게 짧은 숨을 삼키고, ‘붉은 장미의 검성’은 말머리를 돌린다.




“전군 이동한다.”


작가의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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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1.08 00:40
    No. 1

    벤 왜 안나와요 ㅠㅠ 저 남매커플은 왠지 안이어질거같고... 왕가혈통은 로빈형있으니까 그분 자손한테 이으라하면되지 뭘!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08 01:56
    No. 2

    동결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벤은 다시 굴러가는 중이라...ㅠ
    혈통을 형님부부가 이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토우칸은 기사가 아닌데 카니아는 기사의 피가 너무 강해서 어찌 될런지요 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비련후천기
    작성일
    15.01.08 02:12
    No. 3

    그 마을이 남매랑 수상한 기사 모녀가 사는 마을인가 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08 02:47
    No. 4

    앗 비련후천기님 오랜만입니다 ㅎㅎ
    안타깝게도 그 마을입니다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1.08 08:18
    No. 5

    리즈 엄마의 정체가 궁금하네요.
    잘 도망갔을까요. 사건이 발생해야할테니 아직도 숲에 남아있다가
    아실레마제국 검성과 마주칠것 같아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08 13:41
    No. 6

    앗 불의검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리즈엄마는......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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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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