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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039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10 21:03
조회
1,254
추천
31
글자
20쪽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DUMMY

리즈는 요 며칠간 엄마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을에서 가져온 온갖 물건들을 수레에 싣고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밤늦게 되서야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딜 가서 뭘 하고 오는 거냐는 딸의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는다. 심지어는 좀처럼 직접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던 마을에까지도 내려갔던 모양이다.


“네 어머니 왜 그러시는 거니, 갑자기?”


마을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엄마가 저녁마다 내려와 사람들에게 피난을 종용했다고 한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이런 숲속마을까지 제국군이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해온 주민들은 그녀에게 납득할만한 증거를 요구했지만, 철저하게 기사임을 속여 온 엄마가 제대로 답변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숲의 그림자가 해를 삼킬 무렵, 어김없이 빈 수레를 이끌고 오두막으로 돌아오는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며 리즈는 오늘에야말로 의중을 들으리라 다짐하며 자신의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것은, 다소 긴장이 깃든 표정의 엄마였다.


“리즈, 가슈펠라르 저택에 좀 갔다 와라. 가서 주인아저씨께 말씀 좀 드려봐. 마을사람들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귀족은 그가 설득한다면 사람들도 이해할-”


“엄마.”

지친 그녀의 목소리를 끊으며, 리즈는 대신 수레를 잡아끈다.

“납득하지 못하는 건 아저씨 네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엄마도 알잖아? 더 이상 마을사람들은 아저씨를 우러러보지 않는다고. 그림자에 침을 뱉으면 뱉었지.”


“......하아.”


한숨과 함께 피로를 내뿜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리즈. 평생을 같이 살아오면서 도움을 주고받았던 이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을 탓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째서 그렇게까지 기사임을 숨겨야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엄마의 생각을 알 수가 없는 리즈였다.


“......일단 아델한테 말해볼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리즈는 길어지는 그림자를 맨발로 밟으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선은 리즈의 뒤를 쫓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무거운 표정으로, 어둠이 삼키기 시작하는 북쪽의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1년 전부터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한 저택이었지만, 요즘엔 마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듯한 한기를 품고 있다. 자신의 출입을 달갑지 않아하던 경비병들이 그리워질 정도로 정원은 빛을 잃었고, 무분별하게 뿌리를 뻗치고 있는 생명들이 도리어 삭막하게 느껴진다.

회색으로 변색되어가는 벽, 군데군데 덩굴이 튀어나온 부분이 정리가 되지 않고 있었던 덕분에 타고 오르기엔 쉬워졌다. 물론 전만큼 재미있지도 않았고, 창문을 두드려도 곧바로 대답이 들려오지도 않았지만.


“아델.”

반겨주는 목소리가 없다. 차가운 침묵만이 흐를 뿐.

그러나 리즈는 누군가가 숨죽여 울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들어갈게.”

예상대로, 안으로 발을 딛는 순간 처음 리즈의 발끝으로 느껴진 것은 소름이 돋을 정도의 한기와 무거운 공기. 창문 밖으로 아직 완전히 모습을 감추지 않은 해가 보였지만, 그것만으론 방을 뒤덮고 있는 어둠을 걷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음영을 내뿜고 있는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명확했다.

“아델.”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이불 속에 파묻혀있는 이름을 부른다. 천천히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얼굴은 그야말로 참담한 보석이었다. 바람결 같던 금발은 잔뜩 헝클어졌고, 눈가는 붉게 부어올랐다. 그리고 아직도 투명한 눈물을 머금고 있는 새빨간 눈동자.

리즈는 조용히 다가가 이 상처받은 영혼을 안아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리즈.......”


평생을 감옥처럼 지내왔던 이 저택을 그나마 작은 놀이터로 만들어주었던 친구. 자유를 부러워하는 자신의 시선을 깨닫고 언제나 도리어 자신을 부럽다고 말해주던 친구. 복잡한 생각과, 그보다 더 복잡한 가슴을 언제나 묵묵히 들어주던 친구. 그리고-

그와 함께 언제나 곁에 있어주었던 친구.

그런 친구의 품에서 아델은 모든 것을 놓고 흐느낀다. 아버지의 앞에서는 눈물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시간이었기에, 리즈에게 안겨 흘리는 눈물은 그 어느 때보다 짙을 수 있었다.


“아델 잘 들어.”

위로를 위한 침묵의 시간은 짧았다. 다가오고 있는 커다란 현실이 더욱 중요했기에.

“조만간 제국군이 이곳으로 몰려온데. 너희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을 설득해서 빨리 피난가야 한다구.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들이라도, 만약 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으면 너와 조엘만이라도 빠져나가. 내가 도와줄게.”


아델이 고개를 들어 리즈를 올려다본 것은, 제국군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 때문이었다.


“.......조엘과....?”


“그래, 이대로 있으면 조엘은 제국군이 오기도 전에 지하실에서 말라죽어버릴 거야. 너는 걔를 냅두고 똥배 나온 아저씨한테 팔려갈 거고! 정말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울고만 있을 거야?”


“........”

예전의 아델이었다면 하지만- 이라는 말로 입을 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린 그녀였다. 아버지가 자신과 조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가슈펠라르라는 이름의 굴레가 어떻게 모두를 무너트렸는지, 그 모든 진실을 깨달았기에 아델은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내일....... 내일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말씀드려볼게. 그래도 안 된다면.......도와줘......., 나를, 조엘을 구해줘.......”


“......응, 알았어.”


리즈가 짧은 침묵 후에 입을 연 것은 ‘마지막으로’라는 아델의 끈질긴 미련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상처받고 아파하면서도 어째서 이 아이는 ‘마지막’을 줄 수 있는 걸까. 평생을 아버지의 이름에 얽매여 살아왔으면서도 어째서 그를 배려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이라는 핏줄을 증명해줄 이름을 받아본 적 없는 리즈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아델의 미련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의 머리를 가슴에 묻어주었다.




===========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게냐, 너는!”

스프그릇이 뒤집어질 정도로 강하게 식탁을 내려치며, 올란이 영력이 실어 호통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델의 부은 눈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이 더욱 눈에 거슬렸는지, 올란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진다.

“제국군이 쳐들어와? 주변에 숲밖에 없는 이런 곳에 제국이 무엇을 얻을 것이 있다고 쳐들어온단 말이냐?! 오두막에서 빌어먹고 사는 거지년의 말에 현혹되다니,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제국을 핑계로 저 폐륜아를 어찌해볼 요량인가 본데, 다시 말하지만 저놈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버지! 그게 아니에요! 마을 분들을 설득해서 다 같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터무니없는 소리 말아라! 그렇지 않아도 우매한 놈들이 뒤에서 쑥덕거리는 꼴이 보기 싫은데 이제 미친놈 취급까지 받으란 말이냐?!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 집어치우고 방에 들어가!”


“아버지, 제발요!”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진정으로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델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의자로 다가가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로 돌아온 건 소름끼치는 시선과, 그보다 더욱 거친 아버지의 손등. 얼굴을 감싸며 쓰러지는 아델을 향해 황급히 지든이 다가오지만, 올란의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거지같은 새끼와 몸을 섞더니 아주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창녀 같으니......! 지든! 이 아이를 방에 데려가. 그리고 모레 수도로 떠나기 전까지 한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감시해.”


“애초에 조엘을 아들로 취급하지 않은 건 아버지셨잖아요! 왜 이제 와서 막으시는 건데요?! 조엘이 여태까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얼마나 방황했는지 아시냐고요!”


“지든!”


올란은 귀와 표정을 닫는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아델의 목소리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집사의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거두었다.


“.......아가씨.”


지든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는 쓰러져있는 아델을 부축해 일으켜,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이게 이끈다. 아델은 아버지의 모습이 시야에 남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그를 불렀지만, 올란은 묵묵히 물이 담긴 유리잔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딸의 모습과 목소리가 사라지자 그는 조용히 식탁에서 유리잔을 들고 일어나 계단으로 향한다. 습기와 어둠을 빨아들이고 있는 지하실의 문을 열고, 천천히 깊은 계단을 밟아 침묵이 감싸고 있는 공간으로 발을 내딛는다. 살갗이 말라가는 역한 냄새가 그의 코를 스친다. 족쇄와 쇠사슬의 희미한 윤곽만을 남기고 있는 조엘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올란은 그 정수리를 향해 잔의 물을 부었다.


“.........”


피딱지와 뒤엉킨 입술. 흘러내리는 물을 핥을 기력조차 조엘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머리를 식혀주는 느낌에 눈을 뜨고, 눈앞의 ‘아버지’를 힘겹게 올려다본다.


“너희에게 남은 건 완벽하지 못할 시간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너를 아델의 오라비라 인정하지 않아도, 세상은 너흴 더러운 눈으로 쳐다보겠지. 그런 곳에서 너희가 서있을 땅이 있을 것 같으냐?”

격앙은 묻어있지 않았지만, 충분히 무거운 말투. 올란은 내용물을 모두 쏟아낸 잔을 조엘을 향해 가볍게 던졌고, 유리는 조엘 머리 뒤의 벽에 부딪치며 아름답게 박살난다.

“세상의 눈을 피해 행복을 좇겠다고? 평생을 귀족이란 비호아래 살아온 아델이 그런 방랑에 가까운 생활에 행복할 수 있다고 보느냐? 그 아이의 몸이 약한 건 네가 가장 잘 알겠지. 너는 결국 그녀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내가 하려는 것은 가문을 위해 그 아이를 팔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안락한 삶을 주고자 하는 것이야. 이런 나를, 과연 아무것도 없는 반쪽짜리인 네가 욕할 수 있겠느냐? 너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보장해 줄 수 있느냔 말이다.”

조엘은 갈라진 입술을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말라버린 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올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네가 품은 감정이 그녀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빛의 아래에서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비록 더러운 패륜아이지만, 그렇게까지 멍청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으니.”


미련 없는 아버지의 뒷모습. 조엘이 그 모습에서 느끼는 벽은 단순히 자신을 패륜아라 부르는 반쪽짜리 아버지의 고집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어둠과 침묵만이 짙게 남는다.

하지만 조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시선으로 그 한가운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리즈는 자신이 벤 탕나무 그루터기 위에 걸터앉아 초조하게 언덕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점심때가 다가오고 있다. 아델이 말했던 ‘마지막’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과가 나왔을 시간이다. 리즈가 모습을 보이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아델의 말에 그녀가 직접 보고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리즈였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는 지금의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향으로 결론내릴 수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 아델의 아버지와 힘으로 맞붙어서라도 둘을 꺼내 와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이제 언덕 아래 마을만을 향해 있었다. 북쪽에서 풍겨오던 묘한 기운이 어제 저녁부터 사라진 탓이었다. 엄마가 괜한 걱정을 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런 곳에서 제국군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없어 보이니까.

슬슬 저택에 내려가 보는 것으로 마음이 기울어 갈 때쯤, 리즈는 기척을 느끼고 숲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가져간 수레는 어디에 팽개쳐놓고 왔는지 가벼운 몸으로 나타난 어머니였다. 평소보다 이르게 돌아온 그녀를 향해 리즈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곧바로 멈춰서고 만다.


어머니의 표정은,

자신이 여태까지 봐왔던 다정한 엄마의 모습이라곤 모두 증발한 긴박감이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뛰어오는 그 몸짓에서 리즈는 등이 빳빳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입에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빠르게 언덕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리즈, 제국군이 왔다.”





==========================





선발대의 중앙에서 직접 군을 이끌고 나아가던 ‘붉은 장미의 검성’은 갑자기 선두에서 들려온 비명소리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침묵을 미덕으로 삼는 그녀의 군단에 어울리지 않은 소란이었기에, 그녀는 부관이 보고를 위해 다가올 때까지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장군님, 숲속 곳곳에 함정이 깔려있는 모양입니다.”


“함정?”


델핀의 아름다운 눈썹이 더욱 격하게 일그러진다. 그 자체가 마치 중죄인 것 마냥, 부관은 참혹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린다.


“예, 처음엔 짐승을 잡기 위해 사냥꾼이 설치해놓은 덫인 줄 알았는데, 빈도나 규모로 보아 명백한 대인저지물입니다. 아마도 우리 군을 향한 것이 아닐까하는......”


검성의 눈이 빠르게 전방을 훑는다. 차라리 마력지뢰와 같은 저지물이라면 마법사나 기사들이 식별하고 해체할 수 있지만, 철저히 발을 묶는 걸 목적으로 하는 이런 간소한 함정들은 진군속도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는 요소.


“그 마을에 아무것도 없다는 보고가 확실한가?”


천 명으로 이루어진 선발대대가 함정 따위에 진군이 방해받았다는 사실보다도, 델핀의 짜증은 정보의 불확실성에 쏠려있었다. 보고하는 부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그......, 척후대에선 분명 군대나 기사의 징후는 찾지 못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만....... 다시 척후를 보내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선두에 사상자가 나오더라도 진군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일러라. 마법사!”

그녀의 부름에 짙은 후드를 둘러쓴 노인이 옆으로 다가온다.

“선발대로 합류해 숲의 ‘정화’를 시작하세요. 함정자체를 무력화시키면서 움직일 겁니다. 병사들이 다소 부상을 입는 건 상관없으니 진군속도는 절대 늦추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노인이 말을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갔고, 델핀의 짧은 한숨과 함께 병사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




“적 2군단의 구성은 두 개 사단급, 약 4만이다. 거기에 ‘붉은 장미의 검성’이 이끄는 본대가 5천이니, 예비대까지 잡는다면 총 군세는 약 5만정도 될 것이다. 우리가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베르달 전역에 흩어져 ‘작업’중이었지만, 그녀의 본대가 움직였으니 이제 곧 결집하겠지.”

강렬한 태양과 여름의 하늘 아래서도 베르메스 평원의 죽은 땅은 여전히 빛을 잃은 상태였다. 과거 이곳에서 윌리안 가슈펠라르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을 때는 베르달에서 아르다르를 향해 말머리를 달렸었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입장이 되어버렸다.

붉은 탕나무 깃발이 휘날리는 군영의 중심인 지휘소천막에서, 크라트는 다시금 푸른 눈빛을 청중들을 향해 흩뿌린다.

“이쪽의 베르달군을 포함한 중앙군과 그라우치 장군의 북부군, 시즈키치 가문을 비롯한 귀족들의 사병들을 비롯하여 전체적인 군세는 얼추 비슷할 거다. 전장을 숲으로 가정한다면 객관적인 우위는 우리 쪽에 있지. 그러나 실질적인 전투력은 한참 열세다. 그 이유는 다들 알고 있겠지.”


물론 알고 있다. 그 이유를 위해 모인 얼굴들이니까.

‘특무대’의 일원들 중 몇몇이 이번 임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문제는, 그 경험의 ‘목표’였던 얼굴이 바로 옆에 앉아있다는 사실이었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적국 출신의 장군을 이렇게 최전방에 대동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지 모르겠습니다.”


왕실참모의 일원이자 특무대로 소집된 카논의 적갈색 시선은,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드레스를 걸친 채 손톱을 다듬고 있는 엘라에게 향해 있었다. 정작 그녀를 잡기 위해 상처 입는 걸 피하지 않았던 자들은 우호적인 것에 반해, 그렇지 않은 자들에겐 의심이 담긴 시선을 받고 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엘라는 짧은 미소와 함께 다시 손톱에 열중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목소리는 크라트에게서 대신 튀어나온다.


“내 아내에게 불만이라도 있나, 중위? 이미 귀화에 대한 적법성판결은 끝났고 제국에 대한 정보제공도 마다하지 않은 그녀다. 그럼에도 자네와 같은 시선이 있을까봐 딸아이까지 수도에 인질로 남겨놓은 채인데 여기서 더 그 이야기를 꺼내야겠나?”


“어머, 상냥하기도 해라.”


엘라의 얇은 웃음에 카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돌렸지만, 레이쇼의 농담 섞인 위로 외에 그녀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여기 있는 루디와 아뮤르, 스파인과 하파, 그리고 올리 같은 경우는 엘라론이 베르달을 침공해 왔을 당시 비슷한 임무를 맡은 적이 있다. 귀중한 경험임에는 분명하나,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이번 목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식하게 달려드는 막무가내가 아니야. 신중하고 영악하면서도, 더욱 위협적인 상대다.”

너무하다고 울상 짓는 엘라를 애써 무시하며, 크라트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망자라는 변수도 존재한다. 확인되진 않았지만, 적중엔 분명 아르바티앙에서 망자를 일으킨 놈과 같은 아펜타우스의 계약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전장을 압도하지 못하고 우리가 물러나게 된다면, 다음날 우리가 쓰러트린 적과 쓰러진 아군까지 다시 상대해야하는 경우가 벌어질 수도 있어.”


긴장이 섞인 침묵.

모두가 크라트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불편한 흐름을 깬 것은 계속해서 잠자코만 있던 로빈이었다.


“그에 대항해서 우리 쪽에서 내밀 변수의 카드가 바로 혈마력특무대. 그 중심에 네가 있는 거야, 고도.”


“.......하하.......”

어색한 몸짓과 어색한 표정으로 구석에 앉아 이리스를 끌어안고 있던 고도는 갑작스런 로빈의 지명에 더욱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쩔 수 없다’라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로 이곳에 와있는 그녀였기에 기분이 상쾌할 리가 없다. 보이는 건 우락부락한 병사들의 표정과 마치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마냥 자신을 흘겨보는 마법사들의 시선들.

그리고 그 모든 불편함을 같이 견뎌줄 유일한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고도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벤은 어디가고 없는 거예요? 여기 있어야하는 거 아닌가?”


질문을 듣자마자 되려 답답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로빈이었다.


“아, 그러게요.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그가 부재중이더라도 적이 베르달 남부까지 불태우기 시작한다면 우린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단순한 영토수복차원의 문제가 아니야. 베르달의 숲이 마른다면, 그 지역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은총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크라트의 말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만, 새로운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을 뿐이었다.


“폐하.”

막사 안으로 들어선 병사가 갑작스레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목을 움츠렸지만, 간신히 용건만큼은 내뱉을 수 있었다.

“어느 망자가 폐하를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만......”


“망자?”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슈리안을 향한다.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을 휘휘 내젓는 그였다.

“이름이 뭐라던가?”


작가의말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세번째 연참대전을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완주를 목표로 알차게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45 소망의빛
    작성일
    15.01.11 01:44
    No. 1

    힘내십쇼!! 재밌게 보고 항상 응원합니다. 첫 댓글이 응원글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11 01:47
    No. 2

    소망님 봐주시고 격려까지 ㅠ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1.11 02:54
    No. 3

    귀엽다 해골할아버지 ㅋㅋ 아 정신은 20대인건가요? ㅎㅎ
    벤은 어디서 또 음흉한계략을 꾸미고는건지...
    근데 벤은 마법사로서 어느정도죠?
    아 그리고 연참대전 기대할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11 03:17
    No. 4

    동결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순수 전투마법사로서의 벤은...... 글쎄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1.12 09:05
    No. 5

    아델 짜증나는 캐릭터네요. 기회가 와도 못잡고요.
    실상 평범한 우리네 모습일테지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12 12:25
    No. 6

    불의검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언제나 타파를 마음에 품지만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얽매여있는
    말씀대로 평범한 우리네 모습일지도 모르겠군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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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0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4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0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1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6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7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4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1 39 24쪽
»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7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7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3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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