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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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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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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1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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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
20쪽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DUMMY

얕고 불편한 시선이 흐른다.

숲이 내려주는 안식의 가운데에서도 들뜬 목소리는 아무도 없었다. 선두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침묵과 무거운 분위기에 뒤따르는 모두가 중독되어 그대로 따르고 있었을 뿐.

그 선두의 중심에 로빈과 드렌턴이 있었다.

그들 주위를 감싸는 차가운 기류는 전장과 전투를 앞둔 긴장감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벽을 세워놓은 드렌턴이었다. 그리고 로빈은 그 벽을 뚫기 위해서 한참이나 망설여야했다.


“.......아저씨.”

그의 곁으로 말을 몰아 다가가며 로빈이 무거운 입을 열었지만,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는 드렌턴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아저씨 혹시 아버지에게 배신감이 들어?”


로빈 자신이 리반나와 리즈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를 향해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 크라트와의 대화가 없었다면, 그는 드렌턴 또한 이 감정에 휩싸여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드렌턴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깊은 한숨이 단순히 배신감에서 비롯된 분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 있었다.

드렌턴이 무거운 머리를 돌려 로빈을 바라본다. 그의 묵직한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이 로빈의 표정을 훑고 있었다.


“보아하니 뭔 이야기를 듣고 왔구만. 어디까지 들었어?”


“아무것도. 아저씨랑 리반나에게 직접 들으라고 해서 물어보는 거야. 굳이 이야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로빈의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크고 쓰라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드렌턴이다. 만약 자신의 호기심이 그의 또 다른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이라면, 굳이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유와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19년 만에 재회한 아내가 왕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햇볕이 새는 숲하늘을 천천히 올려다보는 드렌턴의 갈색눈동자는 길고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을 삼키지 않는다.


“배신감이라....... 그래, 굳이 따지자면 배신감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

그리고 높았던 시선을 그대로 로빈을 향해 내리꽂는 드렌턴.

“.......로빈, 나는 네 아버지 데르하와 아뮤르 한나가 비공식적으로라도 그들만의 아이, 그들만의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각자의 가정을 가지고 있는 몸,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또 그로인해 둘이 괴로워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 근위대장으로서도, 측근으로서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는 다시금 긴 한숨을 내뱉으며 시간을 훑는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리반나가 대리모이야기를 꺼낸 것이 그때쯤이었지.”


“대리모?”


예상치 못한 생소한 단어에 로빈의 표정이 온갖 감정으로 뒤섞인다.


“각자의 남편과 부인을 속이면서 아이를 가질 수는 없으니, 제3자를 통해 아이를 가지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었지. 당연히 나는 반대했어. 그런 개념자체가 있는 줄도 몰랐고, 도의적인 부분에서 크게 어긋났다고 생각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땐 이미 우리아이를 가진 상태였기 때문에, 일단 맹목적인 충성과 한나와의 사적인 친분을 혼동하지 말라고, 일단 우리아이를 낳고 생각해보자고 리반나를 설득했지.”


“그럼......, 리반나는 멋대로 대리모를......”


“아니, 그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내가 배신감이라고 부를만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계기이기도 해.”

의문이 담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빈을 향해, 드렌턴은 따가운 수염이 솟아오른 턱을 매만지며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우리아이를 낳으면서, 리반나는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됐었어.”


“......뭐?”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춰 세웠다. 다시 한 번 드렌턴의 목소리를 곱씹어보지만, 의문은 더욱 발을 넓혀만 갈뿐.

그러나 그 모든 의문은 급박하게 울리는 말발굽소리에 흩어지고 말았다.


“폐하!”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앞서가던 통신중대의 마법사. 무슨 일이냐고 드렌턴이 묻기도 전에 마법사가 비명에 가까운 보고를 올린다.

“교전 중인 크라트 경으로부터의 통신입니다! ‘붉은 장미’가 나타났으니 신속하게 퇴각전을 벌이겠다며 특무대의 투입을 요청해왔습니다!”


굳은 시선이 교차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짧았고, 튀어나가는 드렌턴과 그의 뒤를 따르는 다른 그림자들.


“지나!”

로빈은 그 그림자들 중의 한 이름을 부른다. 숲을 등지고 돌아보는 태양을 향해, 그는 망설임 없이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선다.

그리고 어떠한 시선도, 어떠한 놀림도 개의치 않겠다는 듯,

거칠게 그녀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지켜보던 부관들과 병사들이 크게 웃으며 환호를 내질렀고, 짧은 호흡의 나눔 뒤에 떠오른 지나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내지르는 주먹을 가볍게 피하면서, 로빈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조심해. 절대 무리하지 말고.”


“......하여간......”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반쯤 가린 상태였지만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여물고 있다는 사실을 로빈은 알 수 있었다.


“카논, 레이쇼. 참모로서 당신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관찰과 분석입니다. 철저하게 영력을 감추고, 나무 위나 수풀 사이에서 들키지 않게 조심하세요. 특무대가 실패하더라도 당신들만큼은 후일을 위해 귀환해야합니다.”


“옛.” “알겠습니다아.”


로빈의 당부에 경례를 올리는 카논과 고개를 끄덕이며 비죽 웃는 레이쇼. 말을 재촉하여 달려 나가는 그들의 뒤로, 그제야 로빈의 긴장 섞인 한숨이 새어나온다.


“검성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통신병! 카니아 시즈키치에게 전령을 보내! 교전지역에 적 검성이 나타났으니 퇴각하는 아군의 원호를 준비하라고!”


느긋하던 행군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발아래 깔려있는 것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훈련했던 대로만 하면 된다! 간격을 유지하고, 각자 맡은 임무를 잊지 마! 너무 흥분해서도, 너무 신중해서도 안 돼!”


선두에서 달려 나가는 드렌턴의 외침. 그 굵직한 목소리가 향하는 것은 뒤따라오는 모든 특무대의 얼굴이었다. 모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와중에, 작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잠깐, 잠깐만요, 여러분.”

드렌턴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을 잡아 끈 존재는, 후드 아래로 하얀 백골만 남겨놓은 망자 아뮤르 슈리안.

“여러분, 지금 검성을 죽인다는 생각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걸 위해 만들어진 특무대고, 그걸 위해 훈련을 해왔습니다.”


전투마법사 하파의 단호한 대답. 드렌턴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딱히 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짧은 침묵과 고민 뒤에 다시 들려온 슈리안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모두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온다.


“여러분 중 그 누구도 ‘검성’이라는 존재와 직접 검을 맞댄 적이 없죠? 200년이 지났고, 짧은 순간이었기는 합니다만 유일하게 검성과 검을 맞대본 제가 감히 단언하건데,”

그의 공허한 시선이 주변 동료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핀다.

“자칫하다가는 여기 있는 인원 전원이 몰살당할 겁니다.”


“단호하시군요. 듣자하니 생전에 검도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당하셨다던데, 너무 지레 겁을 드신 거 아닙니까?”


또 다른 망자, 오캄푸스의 비웃음이 섞인 되물음에 바로 옆에 있던 고도가 화들짝 놀라며 그의 무례를 욕했지만, 슈리안의 목소리에 흔들림은 없었다.


“아뇨,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아직 검성을 그냥 무지막지하게 강한 기사정도로만 인식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같은 기사인 우리와 마법사들만으로 충분히 죽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오캄푸스는 흥미롭다는 듯이 살점이 너덜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슈리안의 말을 기다린다.

“하지만 검성은......., 적어도 저를 죽였던 ‘학살의 검성’은, 기사라고 부를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 하지만 어느새 모든 것을 삼키고 있는.......”


“이른바 모순적인 존재라는 뜻입니까?”


묵묵히 듣고만 있던 오즈카의 물음에 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죠. 모순적인 존재. 마땅히 눈앞에 있다면 크게 느껴져야 할 텐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검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절명한 것은 단순히 그가 강하고, 제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기사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할 적의나 영력의 파동,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제 말을 아시겠습니까? 그런 존재를 한번 겪어보지도 않고 바로 꺾으려고 한다면, 결과는 200년 전 저와 다름이 없을 겁니다.”


“그럼 좋은 생각이 있습니까?”

드렌턴이 물었다.


“.......아군 본대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선발대의 보존. 그것과 검성을 견제하는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선, 방법은 하나뿐이죠.”




===================




드높았던 웃음소리는 주위를 어지럽히던 비명과 함께 숲속으로 묻는다. 하지만 흥분으로 떨리는 그 미소만큼은 아직도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다는 듯 확연하게 엘라의 입가에 박혀있었다. 크라트의 목소리는 그녀의 귓가에 스치지도 못한다. 그 미소와 검은 시선이 고정된 곳은 오직 하나.


“오랜만이로구나.”


자신과 같은 매혹적인 목소리.

자신과 같은 가느다란 턱선과 하얀 피부.

자신과 같은 검은 눈동자와 새빨간 입술.

자신과 같은 불타는 듯한 머리카락.

하지만,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저 당당한 눈빛.


인생의 가장 거대한 적이자, 유일했던 우상.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온기의 딸이자 부인이었던 사람.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던 사람.



“돌아온 탕아를 위한 회초리는 따로 준비하지 않았는데.”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아니다. 위엄이 깃든 영력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델핀 드리브달’의 존재감은, 마치 언덕 위에 군림한 제왕처럼 높게 느껴지고 있었다.


“검으로도 충분해, ‘엄마’.”


엘라의 비웃음 섞인 대답에, 델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것이 좀처럼 보기 힘든 순수한 반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엘라가 유일했다.


“엄마라니. 너한테 그렇게 불리는 건 처음인 것 같구나. 카나반의 개가 되고나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니?”


“별건 아니고. 당신을 엄마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 또한 인정하지 않는 셈이니까.”


“그? 아아-”

벌겋게 찢어지는 델핀의 미소.

“우리 불쌍한 고딘 말이니?”

델핀에게 다가서던 엘라의 발걸음이 멈춘다. 동시에, 영력사출식 경갑에서 뿜어져 나오던 모든 움직임도 멈춘다.

“멍청한 사람이었지. 그깟 드리브달이라는 굴레 따위 과감하게 벗어버리면 그만이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끝까지 나와 너한테 집착을 했던 걸까. 정말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전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한 숲에 장미의 낮은 웃음소리가 넓게 퍼져나간다.

모든 표정을 지운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엘라는, 자신을 만류하려고 다가오는 듀라를 향해 돌아보았다.


“.......내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게. 병사들 데리고 퇴각해.”


“옛......?”


듀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끈다? 그녀가?

강함 그 자체였으며 최상위 포식자일 터인 그녀가?

그녀의 입에서, 이렇게 나약한 말이 나온 적이 있던가?

자신의 검에 대해서 이토록 확신을 가지지 못한 적이 있던가?


“그리고-,”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다시 발걸음을 움직이는 엘라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이에겐 미안하다고 전해줘.”


듀라가 그녀를 향해 소리치지만, 그의 목소리는 경갑의 소음과 연기에 묻혀 전장으로 흩어진다. 그 움직임만으로 귀가 터질 듯한 엄청난 도약. 장검과 소태도를 들고서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딸을 향해, 델핀은 가식적인 울상을 짓는다.


“오랜만에 만난 모녀사이에 좀 더 생산적인 대화를 기대했는데.”


“아~ 하나 있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엘라의 미소. 번뜩이는 눈동자와 함께 장검이 델핀의 정수리로 향한다.

“당신, 할머니 됐어!”


금속음조차 묻어버리는 영력의 뒤틀림이 주변의 나무들을 박살내며 숲을 뒤흔든다. 재빨리 퇴각을 준비하던 베르달의 용사들도, 전열을 가다듬어 그들을 추격하려던 아실레마의 군대들도, 피부로 느껴지는 영압에 넋을 놓고 근원지를 바라본다.


엘라는 길게 미소 지었다.

예전부터 줄곧 대련할 때마다 첫 합은 반드시 받아주던 엄마의 그 오만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를 받치고 있는 숲의 대지마저 두 동강 낼 작정으로 내리친 일격이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손의 감각이 알려주는 것이 무엇인지 엘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회색빛 장검의 아래에서, 어떤 미세한 떨림도 없이 빛을 빨아들이고 있는 존재의 정체는 너무도 익숙했기에 짜증나는 것이었다.


“어머, 축하한다.”


델핀의 웃음과 함께 나타난, 불길함의 결정체.

빛과 영혼을 모두 게걸스럽게 흡수하는 장미의 가시이자, 죽음보다 어두운 존재.

사도를 베는 검, 흑도(黑刀) 오미누스움브라.

형체조차 희미한 검을 앞에 두고 엘라는 탐욕스럽게 웃었다.


“축하선물로 그거 내놔. 예전부터 갖고 싶었는데.”


“폐하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건데? 한참 이르지, 딸아.”


어떠한 영력의 파동도 없이, 조용히 공간을 흐리는 흑도.

자신의 예리한 감각으로도 그 어둠의 깊이를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엘라는 소태도를 쥐고 있던 왼손목에 얇은 자상을 허용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보통의 기사였다면 한 번의 호흡을 가다듬고 재공격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라는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경갑의 도움으로 빠르게 델핀의 측면으로 파고든다.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가는 장검은 미끼. 흑도가 앞을 막는 순간, 소태도로 어머니의 복부를 찢을 것이다.

결코 눈앞의 장미를 얕본 건 아니다. 다만 여태까지 자신보다 강한 사람과 싸워본 경험이 드문 엘라로서는, 사소한 습관과도 같은 생각이었다.

공세를 놓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확실히 어색한 일이었으니까.


“크흑-”


흑도는 막을 생각이 없었다. 기사의 눈으로도 쫓기 힘든 엘라의 도약이었지만, 등을 향해 불길함을 내뿜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검은 기운.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과 경갑의 출력을 이용하여 간신히 몸을 비트는 것에 성공한 엘라였으나 온몸을 덮어오는 검은 존재를 피하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


검 위로 산이 내리꽂힌다 해도 이것보다 무겁고 치명적이진 않을 것이다. 날과 날의 대결을 버텨낸 이스누시아산 연철검과는 별개로, 이어진 모든 충격을 버텨낸 엘라의 두 무릎은 뒤틀리며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다리를 위해 부릴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쓰라리게 피어오르는 옅은 비린내. 엘라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화복이 아니었다면, 잘려나간 것은 피부가 아니라 살과 뼈였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검 자체를 막아도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파동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입술을 깨물고 싶었지만, 엘라는 살짝 뒤로 물러나 자세를 고쳐 잡아야했다.


“혈통만 믿고 노력 따위는 하지 않던 너의 검도, 이제 꽤나 무겁고 날카로워졌구나.”


찢어진 옆구리의 제복을 내려다보며 델핀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품고 있는 방향은 딸을 향한 칭찬의 기쁨이 아니었다. 보다 잘 여문 사냥감을 향한 맹수의 기대였다.

엘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경갑이 거친 김과 영력을 뿜어댔고, 주변 나무들이 모두 흔들릴 기세로 델핀을 향해 도약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검과 소태도의 어지러운 춤사위.

눈으로 쫓을 엄두도 나지 않을 그 맹타들은 하나하나가 빠르고 정확하게 급소만을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 모든 걸 흑도로 쳐내는 델핀의 제복도 서서히 군데군데가 찢겨나간다.

순간 자세를 낮춘 엘라가 장검으로 바닥을 내려친다. 영력의 파동으로 인해 화산이 폭발하듯 솟구치는 흙과 돌덩이들. 그들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 파고들어 델핀에게 달려들지만, 안구에 직접 흙과 돌을 맞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질렸다는 듯이 웃어야했다.


발길질 한 번이었다.


엘라는 이미 한 번 충격을 받았던 무릎에 격통을 느꼈지만, 비명만은 간신히 참아낸다. 경갑은 이미 부서지고 찌부러져서 그 파편이 종아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곧이어 심장을 노리며 들어오는 흑도를 받아내는 것엔 성공했지만, 움직이지 않는 무릎은 더 이상 그녀를 세워줄 수가 없었다.

뒤로 쓰러지기가 무섭게 목을 짓눌러오는 검은 군화. 그 위로 떠오르는 새카만 검신과 그보다 더욱 짙은 어머니의 눈동자.

자신의 목을 같이 꿰뚫는 한이 있더라도 그 발등을 찍어버리기 위해 소태도를 들었지만, 장미의 무릎에 의해 팔꿈치가 봉쇄당하고 만다.

곧바로 엘라를 덮쳐오는 것은, 죽음보다도 깊고 어두운 장미의 목소리였다.


“멋대로 어리광이나 부리면서 제국과 폐하를 등지고, 그렇게 아무런 의지도 목표도 없이 설렁설렁 살아가면서 나를 뛰어넘겠다고? 내가 왜 너에게 그토록 증오를 샀는지 고딘이 이야기해주지 않았니? 넘어야 하는 존재를 향한 증오조차도 없으면, 너는 그대로 쓰레기처럼 이 세계에서 낙오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 하지만 이제 보니 알겠네. 너는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야.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지.”

엘라가 짐승처럼 몸부림을 치지만, 목을 죄여오는 그림자는 더욱 짙어져만 간다.

“너는 드리브달이라는 이름의 중압감을 견디기에 나약했을 뿐이었구나. 어느 나라에 몸을 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 피를 이어받은 자로서 존재해줬으면 했는데, 넌 그저 내 이름을 피해서 도망친 것뿐이었어.”

델핀의 얼굴에서 표정이 증발한다.

망설임이라곤 보이지 않는 눈동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바로 그 눈동자 앞에, 일렁이는 흑도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어미로서 마지막 선물이다. 너를 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마.”


눈을 감을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면,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 덕에, 새롭게 떠오르는 차가운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흑도는 엘라의 가슴을 꿰뚫는 대신, 주인의 머리 위로 날아든 검을 쳐낸다. 동시에 우직한 손이 느슨해진 ‘붉은 장미’의 전투화 아래에서 엘라의 목덜미를 낚아챘고, 그 충격에 엘라는 잠시 기침을 내뱉어야 했지만 장미의 마수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었다.


“멋대로 미안하다고하고 사라질 생각하지 마라.”

장미와 꽃잎의 사이를 막아서는, ‘늑대’의 커다란 등, 그리고 시린 목소리.

“오늘 로즈 기저귀담당은 너니까.”


엘라는 고통스러운 목과는 별개로, 그에게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물 따위를 흘릴 정도로 유약하지도 않았다.

흔들리는 무릎을 붙들고, 그녀는 세 개의 검집 중 내용물이 남아있는 가운데 것의 단추를 누른다.

주인의 부름을 받고 회색빛 검이 튀어나온다.

기침은 멈췄고, 검을 다잡는 데 짧은 심호흡이면 충분했다.


숲의 바람을 뚫으며 새롭게 나타난 그림자는 크라트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기사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망자들.


이미 전장에서는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지만, 새로운 전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모든 시선을 받으면서도 델핀은 흑도를 이리저리 흔들며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흐흥, 대 검성 특수부대, 뭐 그런 건가?”


장미의 검은 눈동자가 모든 얼굴을 하나씩, 천천히 훑는다.

눈동자가 멈추고,

미소가 식는다.





“.......참으로 얕보였구나.”






그 순간,


드렌턴은 깨닫는다.


그녀를 죽이자고 했던 본래의 목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를.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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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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