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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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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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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3.2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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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
22쪽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DUMMY

“.......따라서 지금 그라우치 장군에게는 소환명령을 내린 상태로, 본인도 결코 불순한 의도가 아니었음을 입증하겠다며 단신으로 입궁할 것을 표명한 바, 라즈텔라무스 보르케의 재판은 장군이 증인으로서 입궁하는 대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로빈의 입이 멈추자마자 귀족파 측에서 거센 항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니? 몰래 지하조직과 연계한 것도 모자라, 훈련소 생도들을 대상으로 목적을 알 수 없는 포섭행위가 불순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라즈텔라무스 가문은 분명 라즈팔라무스 가문의 분가. 그 책임은 가주인 당신이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로메 경?”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살은 오로메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본인은 얇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홀짝일 뿐. 깊은 입가의 주름만큼이나 오랫동안 겪어왔던 일이기에 그녀는 이에 대응할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을 순순히 넘어갈 란다 가슈펠라르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총리께서 섭정을 맡았던 시절부터 오로메 경이 과도하게 분가의 사람들을 수도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요. 말이 좋아서 분가지, 선대의 서자가문 아닙니까. 그 정통성이 흐릿한 인간들을 본궁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용도로 무작정 불러들이더니, 결국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지요.”


“즉, 란다 경께서는 제가 단순히 핏줄이 이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제 곁에 두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나긋한 말투의 오로메였지만, 로빈은 회의가 시작하고서 처음으로 열린 그녀의 입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분명 침묵으로 일관했어야 할 상황. 그녀는 화가 난 것이다.


“아직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명 그라우치 장군의 아들이 수도 내에서 모종의 움직임을 벌여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인도 그라우치 장군도 이번 일이 밀라 시즈키치와 연관이 됐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극구 부인하고 있고,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나 증언도 나오지 않은 상태니까요.”


그러나 로빈의 중재도 란다의 혀를 멈출 수는 없었다.


“말씀대로 ‘아직’일 뿐이지요. 모든 정황증거가 갖춰져 있지 않습니까. 어설프게 가문의 비호를 받는 그런 사람들은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라우치 장군이 입궁을 하겠다는 그 선언부터가 미심쩍어요. 혹시 압니까, 그대로 북부군을 이끌고 수도를 향하고 있을지.”


“말씀이 지나치오, 란다!”

로빈으로서는 처음 접하는 오로메의 노성. 당황한 것은 로빈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곁에서 조용히 회의내용을 정리하고 있던 마누앙 또한 안경을 고쳐 쓰며 오로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서출이긴 하나 그 아이가 공화국에 가지고 있는 충성심은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북부군사령관의 지위에 오른 것은 그의 기사로서의 역량, 지휘관으로서의 역량 덕분이지, 저의 비호 따위가 아닙니다! 진짜로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면 그간 숱하게 기회가 많았지요! 그러나 그 모든 기간과 배척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전선을 지켜온 참군인에게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십니까? 그러는 란다 경이야말로 윌리안 일가의 몰락으로 인해 이름값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 아닙니까? 주제를 아셔야지요!”


늙은 여인의 거친 목소리나, 그보다 더욱 거친 언행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로빈과 총리, 그리고 의원들. 비난의 대상이 된 란다조차도 당황한 듯 헛웃음만 터트리고 있다. 그녀의 영력과도 같은 패기에 회의실은 침묵에 빠져들었고, 로빈은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이 기다리고 있었던 때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란다 경, 아까부터 자꾸 서출이니, 서자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본가의 핏줄이라는 게 그렇게나 중요한 겁니까?”


질문을 받은 란다는 비웃음을 터트리며 왕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러나 그는 곧 왕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고, 비웃음은 뒤틀린 경악으로 바뀌어 그의 목소리를 높게 만들고 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폐하? 귀족이란 공화국의 기틀을 이루는 존재. 애초에 공화국에서의 왕이라는 직책부터가 그 정통성과 역사성에 의존하여 받아들인 상징입니다. 헌데 그 공화국의 기둥인 귀족가문에 정통성을 요하는 것을, 폐하께선 이해하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의원과 귀족분들의 정통성에 의심을 품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 말은, 어차피 같은 피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서자를 등한시하시는 건가- 이 말입니다. 단순히 정식이나, 정식이 아니냐의 문제일 뿐, 딱히 그 정통성이라는 피가 옅은 것도 아니지 않나요?”


웅성대기 시작하는 회의실.

란다는 짧은 웃음과 함께 왕의 터무니없음을 질책한다.


“바로 그 ‘정식’이 중요한 겁니다, 폐하. 예로부터 귀족들 간의 혼례와 가문의 양도는 가장 궁합이 맞는 가문과의 짝짓기를 통해 완성되어왔습니다. 그로써 보다 우수한 기사로서의, 마법사로서의 인재들을 배출하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마구잡이로 서자를 만들어내고, 또 그들을 정식 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그 ‘우수한 핏줄’은 옅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 어째서 아실레마제국의 기사가 강하고, 그 수가 유지되어올 수 있었는지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기사는 무조건 기사와 아기를 낳아야한다. 그것이 제국의 법. 그리고 지금의 제국을 있을 수 있게 한, 국가 차원의 ‘기사양산화.’

그러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는 빛을 더해간다.


“그럼 제 동생인 엘리자베스는, 그 아이도 서자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되어야 합니까? 하지만 이상한데요, 그녀를 정식왕녀로 승계하는 것에 세뮈엘님도, 여러분도 반대가 없으셨잖아요? 그건 오로지 왕족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까? 오히려 제 귀에는 독재에 가까운 특수성으로 들리는데요?”


“그건.......”


란다는 곧바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로빈의 말대로, 리즈는 분명 세뮈엘과 의회의 공식승인을 받은 왕녀. 하지만 왕이 오히려 저렇게 그 특수성을 물고 늘어진다면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기세를 탄 로빈의 입이 다시금 굳은 목소리를 터트린다.


“여러분 모두 왕녀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시겠죠. 조엘 가슈펠라르 말입니다. 그의 비극은 단순히 그가 서자였고, 그로 인해 배척받았다는 점에서 시작하고 끝나버렸죠. 여러분은 그 이야기에서 느끼는 바가 없습니까? 무려 그 장미의 검성을 잡아내는 것에 큰 역할을 했던 그가, 서자라는 이유로 평생을 기사임을 숨기고 본가의 정원사로 남아있었습니다. 대답해보세요 란다 경. 정말로 그는 ‘피를 옅게 만드는’ 서출에 불과했습니까?”


“.......”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러분, 정말로 서출과 서자가문이 귀족의 정통성을 더럽히는 존재들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런 현실과 뜻을 일깨워준 분이 계셨죠. 그녀가 가져온 안건을 정식으로 이 자리에서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오세요.”


로빈의 말에 회의실의 입구를 지키던 드렌턴과 지나가 문을 열어주었고, 한 여인이 회의실로 들어선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 청아한 콧날과 그 사이로 붉게 타오르는 맑은 눈동자.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하얀 팔의 피부는 깨끗했으며, 정복이랍시고 입은 흰색 셔츠와 붉은 치마는 오히려 매혹적인 느낌을 살려준다.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그녀가 로빈의 곁에 설 때까지 회의실의 남녀 모두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얼마 전에 대표가문신분으로 선출되었기에 의회 출석은 처음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맑은 목소리.

여인은 짧게 심호흡을 한 뒤에, 천천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귀족들의 얼굴을 살핀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그녀의 미소는, 성별과 나이, 왕당파와 귀족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고를 빼앗기에 충분했다.




“제 이름은 아델 가슈펠라르. 전(前) 가슈펠라르 본가의 가주인 윌리안 가슈펠라르의 손녀이자, 조엘 가슈펠라르의 누이동생입니다. 첫 출석부터 건방지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서출차별금지법안’의 첫걸음을 내딛으려 합니다.”





======================





산과 언덕의 사도 바스엘의 은총을 그대로 내리받은 험준한 협곡. 구불구불하고 좁은 진입로에 방어진을 구축한 남브린타이나군은, 그 숫자는 적었지만 지형이점을 최대한 살린 진형과 운용으로 중앙브린타이나와 남브린타이나를 잇는 주요 길목 중 하나인 ‘옥스토브라카’를 사수할 수 있었다. 협곡 전체에 걸쳐 휘날리고 있는 눈보라와 그렇지 않아도 경사진 진입로를 뒤덮은 얼음길 덕분에 중앙군의 남하속도가 처참할 정도로 지체되고 있다는 사실도 주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말고 그 자리를 사수하라’는 론크리스 국왕의 지침이 있었기에 세 번의 공격을 모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남부의 방어군이었다.

애초에 방어군의 규모는 2개 대대급도 되지 않는 1500여명. 그러나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옥스토브라카의 영주, 조던 스트라토스라는 남자의 다혈질적인 기질을 잘 알고 있는 크리스의 당부가 주효했기에 가능한 전과였다.


“아아, 씨이발 추워라아아. 보충만 제대로 받았어도 그냥 이대로 밀고 올라가는 건데.”


거칠게 삐죽 솟아있는 수염만큼이나 걸죽한 목소리. 기사답지 않게 두꺼운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있음에도 조던의 덩치는 목소리나 성격에 비해선 그리 위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대한 도끼를 움켜쥐고 언제나 최전선에서 영력을 내뿜는 그의 지휘방식이야말로, 지휘관으로서 가장 무모하면서도 가장 병사들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평범한 덩치는 그리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나 적의 칼을 대신 맞아주고, 얼마나 적 기사의 얼굴을 짓뭉개주는가. 그것이 조던의 유일한 관심사.


“그놈의 기회주의자 영주들이랑 장군들이 문제야. 다들 곧 창설되는 남부군에 끼어들고 싶어서 안달이라 이런 변방엔 신경도 안 쓰고 있잖아. 남침경로가 한둘도 아니고, 그나마 폐하께서 중대하나 지원해줘서 망정이지.”


영주 조던의 딸이자, 그의 부관을 겸임하고 있는 반즈의 투정이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입맛을 다시며 계곡을 바라보는 조던.


“천, 아니 오백만 더 있었어도 내가 먼저 선빵을 뚫었을 거다! 그럼 다른 군바리들도 정신 차리고 너도나도 국경으로 몰려들 텐데! 폐하께선 그걸 생각을 못하시니, 에잉.......”


“2천으로 무슨 북진을 하겠다는 거야, 정신 차려 아빠. 폐하의 전언이 없었다면 진즉에 멋대로 나섰다가 쳐발리고 팔루뎀으로 쫓겨나가서 빼애액 울다 지쳐 엎드려 빌고 있었을 걸.”


악담을 퍼붓는 딸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조던.


“야, 이년아. 넌 딸년이 돼가지고 패기 있게 애비를 따라나서진 못할망정?”


“아퍼 이 노인네야! 그게 패기냐?! 노망이지! 닥치고 앞이나 봐. 또 왔어.”


시계를 가릴 정도의 눈보라는 아니었지만, 협곡의 끝자락에서 일렁이고 있는 하얀 물결을 완벽하게 식별해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태까지 저곳을 통해 나타난 군대가 우호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

조던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병사들은 천막에서 빠져나와 대열을 갖추는 중이었다. 좁은 진입로를 막아서는 방패병들과 기사들, 그리고 원활한 마력운용을 위해 얼어붙은 손을 필사적으로 녹이는 전투마법사들.

방한장비이나 필수품의 보급이 더디진 않았다. 그러나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시도 때도 없이 찔러오는 적들 덕분에 병사들의 피로는 계속해서 누적되어온 상태였고, 매서운 겨울바람은 다가오는 군대보다도 먼저 그들의 의지를 꺾어버린다.

이런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당기는 것이야말로 이 무식한 지휘관의 첫 번째 역할.


“야이 년놈들아! 똑바로 서! 요번에도 잘 버티면 내가 폐하께 직접 고해서 우오다 한 병씩 돌려주마!”


살결이 터질 듯한 추운 날에 식도부터 싸르르 열기를 퍼트려주는 증류주 한 병보다 소중한 것이 있을까. 자신들의 대장이 허세는 심하지만 헛소리만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병사들은 거친 환호로 그에 응답했다.

최전방의 병사들에게 근무 중 음주를 보장하는 아버지의 외침 뒤로, 반즈는 표정을 지운 채 눈폭풍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방패병들! 장갑외피를 적셔라! 오늘도 방패를 놓치는 놈은 저녁근무에 취사담당까지 시킬 거다! 마법사들은 시계확보가 어려우니까 광범위하게 보호막을 형성해! 기사들은 내 명령이 나올 때까지 무조건 대기다! 먼저 적의 규모를 파악한 다음.......응?”

명령을 마치지 못한 그녀를 향해 몇몇 병사들과 기사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러나 반즈의 시선은 눈보라 너머 협곡으로 접어들고 있는 적군에게만 향해 있었다. 아버지인 조던마저 의아한 표정으로 딸을 돌아보았는데, 그제야 자신이 멍하니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반즈는 황급하게 아버지를 향해 다가온다.

“아빠, 저거 좀 이상한데.”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럽고 차분했다.

“선진의 진군속도가 너무 비정상적이야. 대열까지 무너트리고 있잖아.”


“.......자세히 말해봐라.”


자신보다 딸의 눈이 더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조던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묘사를 통해 상황을 구상해내기로 한다.


“선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후방의 대열이 흐트러지고 있어. 본대로 보이는 바로 뒤의 부대도 간격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처럼 달려들고 있고. 이건 마치.......”


“추격전인가.”


조던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방패병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선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으로 확연하게 다가오고 있는 진동. 계곡에 부딪치며 이리저리 울려 퍼지는 고함소리는 분명 그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방어진 앞으로 뛰쳐나온 반즈는 점차 확연해지는 눈앞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중앙 쪽에 남아있던 어느 군세, 또는 영주가 폐하를 따르기 위해 남하하려다 중앙군에게 뒤를 붙잡혔다- 라는 게 지금 보이는 상황을 설명해주기에 가장 적절하겠지?”


“이쪽을 흔들기 위한 기만일수도 있다. 네가 판단하기엔 어때?”


“여기서도 붉은 흔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두에서 쫓기는 군대의 후미가 처참하게 박살나고 있어. 기만이라고 보기엔 너무 희생이 큰데.”


“음.”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있는 협곡이었기에 딸의 눈이 더욱 정확히 참상을 읽어낸 것이리라.

조던은 영력을 싣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부관들을 불러 모았다.

“섣부르게 반응하지 않겠다. 쫓기고 있는 저 선두의 군세가 접근할 때까지 최대한 대열을 흩트리지 말고 대기한다. 기만이라면 우리가 길을 열지 않은 걸 보고 태세를 전환하여 공격할 것이고, 진짜 도주 중인 아군이라면 개의치 않고 사거리 안에 들어오겠지. 선두의 모든 병사들에게 이리 알려라.”


“옛.”


가까워지는 말발굽과 비명소리에도 남부군의 진형은 조던의 명령대로 굳건하게 그들을 맞이한다. 그러나 의심이 가득했던 조던의 표정과는 달리, 하얀 풍경 사이로 점차 확실히 보이기 시작한 선두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말들과, 그들보다 더욱 숨을 몰아쉬는 하얀 제복의 병사들. 만신창이의 몸을 붙잡은 채 달려오며 내뿜는 절망과 희망의 경계선은 싸늘한 태도로 맞이하기엔 너무도 급박했다.

그러나 조던은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살려달라는, 길을 열어달라는 절실한 목소리가 미약한 영력에 실려 방어군의 전체로 번져 나갔지만 조던의 입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 마침내 그들이 전투마법사의 사거리에 들어섰고, 그들을 감싸고 있는 어떠한 보호막도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지만 조던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한다. 동요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방패를 잡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부관들과 반즈의 눈치를 보면서 명령을 기다리는 그들의 혼란을 읽었음에도 조던은 도끼를 꼬나든 채로 정면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

방패병들이 추위와는 다른 의미로 손과 턱을 흔들기 시작한다. 지금 비키지 않는다면, 저 불쌍한 군대는 이대로 방패의 벽에 꼴아박고 마침내 지친 걸음을 멈추게 되리란 사실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서리가 눌어붙은 최전방 병사의 눈에도 그들의 절박한 표정이 보이게 되고 나서야, 조던의 힘찬 목소리가 전장을 강하게 찢으며 터져 나온다.

그러나 그 내용은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 있었다.


“적이다! 방패병! 응집하라! 마법사들은 포격을 개시해!”


병사와 마법사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그들은 대장의 명령에 의심을 갖기엔 너무도 그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았고, 그의 결정이 언제나 옳았다는 것을 피를 증거로 새겨온 자들이었으니까.

방패들 사이에서 기병을 꿰뚫기 위한 창과 바리케이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발포되는 화기와 화살들. 그들 위로는 눈보라로도 식힐 수 없는 파괴마법들이 날아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군대의 선두가 양쪽으로 갈라진 것은 그와 동시였다.


지친 군대의 피부를 뚫고 나온 것은 적의로 눈을 태우고 있는 중무장한 기병대. 기사들은 숨겼던 영력을 터트리며 고함을 내질렀고, 머리 위로 날아든 포격마법들이 보호막과 요격으로 인해 공중에서 요란하게 폭발하기 시작한다.


무기와 무기,

사람과 사람,

말과 방패가 충돌하며 협곡은 끔찍한 비명과 굉음으로 뒤덮인다.

그 중심엔 방패벽의 앞으로 튀어나와 무자비하게 도끼를 휘두르는 조던이 있었다. 기병들의 창과 무기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지만, 그의 두터운 갑옷과 강화복을 뚫고 상처를 내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추격당하는 것으로 위장했던 후미는 어느새 뒤이어 달려드는 2진을 위해 양쪽으로 길을 터주었고, 마법사들의 반격과 함께 기마 돌진의 제2파가 조던의 방어군을 덮쳐온다. 그들이 이곳에서 겪었던 그 어느 돌진보다도 매서운 기병대의 위용이었다. 고립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기사와 병사들은 그대로 방패벽을 뛰어넘어 말을 희생시켰으며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는 벽의 균열을 넓히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든다. 순환식으로 벽을 운용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보였지만, 정면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전열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야, 딸아.”

난전의 상황에서도 명확하게 사고의 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목소리. 반즈는 반쯤 부서진 대검을 내던지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차갑게 피를 뒤집어쓴 조던의 안광을 바라보았다.

“너라도 빠져나가라.”


“아빠, 또 지랄 같은 개소리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라 좀. 단순히 이곳이 뚫린다는 게 문제가 아니야. 놈들은 단순히 위장을 한 게 아니다. 진짜로 자기 병사들을 죽이면서 우릴 속이려 들었어. 블라르가 앞뒤 꽉 막힌 병신이긴 해도 이런 짓까지 용납할 놈은 아니야. 아예 그의 눈치를 보지 않는 용병이나 해결사, 또는 외부인이 지휘를 맡고 있을 거다. 뭔 소린지 알겠냐? 우리 생각보다 판이 커졌다고. 이 사실을 폐하께 알려드려야 한다고 이년아.”


“같이 가면 되잖아. 왜 나만 지랄인데?”


“못 간다.”


“뭔-”


개소리냐-는 말이 이어지지 못한다. 아버지의 굳건한 손은 어느새 도낏자루에서 벗어나 그의 허리를 짚고 있었고, 그 거친 손바닥 아래로 보이는 것은 분명한 갑옷의 균열과 붉은 선혈.

검성의 창도 견딜 수 있다고 떠벌이던 아버지의 철벽을 단 한 합에 뚫어낸 자가 있었다는 사실보다도, 반즈는 그 광경 자체에 충격을 받은 듯 다시금 아버지의 노성이 울릴 때까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야! 정신 차려! 스트라토스의 우월한 핏줄을 이대로 끊기게 둘 거냐? 빨리 꺼지라고!”


여유로운 목소리였지만, 반즈는 알고 있다.

그가 지금 저렇게 목소리에 영력을 싣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는 사실을.

비명소리가 점점 둘 사이의 시선을 채우기 시작하고, 하얗던 협곡은 점점 붉게 그 모습을 새로이 단장하고 있다. 급격히 와해되는 방어선. 점점 잦아지기 시작하는 기병의 돌파. 다급해지는 소란에도, 반즈는 한참을 아버지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고마웠어.”


그리고 그것이, 25년간 자신의 어리광을 봐주고 자신에게 검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탈선을 붙들어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인사.


“멍청한 년.”


조던은 곧바로 멀어져가는 딸의 뒤로 미소와 함께 욕을 내뱉는다. 그녀의 마지막 인사는 분명히 떨리고 있었으므로.




“감동적인 인사는 다 나눴나.”


기다렸다는 듯이 조던의 그림자를 밟으며 나타난 목소리. 옥스토브라카의 영주는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별 볼일 없는 말, 별 볼일 없는 풍채.

흐릿하고 여유로운 먹색 눈동자에 아무렇게나 기른 너저분한 머리. 그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낼 생각도 없었는지 하얀 얼음조각이 맺혀 있다. 수염조차 나지 않은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 살결이 품은 창백함만큼이나 그가 들고 있는 창의 끝은 분명 깊이가 있었다. 그 작은 날이 머금고 있는 붉은 피의 주인이 누구인지, 조던은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네가 지휘관이냐? 감히 내 허릿살을 가져가다니, 이 대가는 클 거다.”


“뒤룩뒤룩 두껍기만 하지 별것도 없더만.”


마치 일상대화를 나누는 듯,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느긋한 어투. 크게 창을 휘둘러 어깨에 걸치는 여유를 부리고 있는 그였지만 조던은 좀처럼 그 사이에서 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검성이 이런 작전을 허용할 리가 없었을 텐데, 너 해결사냐?”


“아닌데.”


“그럼 제국군?”


“아닌데.”


“그럼 씨발 대체 누군데?”


도끼를 다잡는 조던.

그에 맞추어 천천히 창을 겨누는 청년.

점점 거세지는 눈발 속에서도, 조던은 청년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 ‘그냥 렌’이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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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4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0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4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0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1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6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7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4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7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7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3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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