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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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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12.14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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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글자
18쪽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DUMMY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물론 8천명, 1개 여단 급의 해병대는 분명 지금의 아르바티앙을 제압하기엔 충분한 병력이다. 그러나 도시를 넘어 이 지역 전체를 평정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인원. 벤은 그들이 이미 경로가 노출되었고 긴 시간이 걸린다는 불안요소를 감수하더라도 상륙해온 바다를 통해 병력을 보충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틀렸다. 애초에 그들은 병력을 보충할 필요 따윈 없었던 것이다.


“보급의 현지조달도 아니고, 병력의 현지조달이라니. 편하긴 하겠네.”


벤의 목소리는 소파를 따라 늘어트린 다리만큼이나 여유로웠다. 카논과 함께 자히르의 집무실에서 내려온 뒤로 그는 계속 소파에 묻힌 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당장 적들이 벽을 뛰어넘어 올지도 모르는데 뭐가 그리 여유로워?”

탁자너머로 한심하다는 듯 벤을 바라보며 쿠키를 집는 고도. 그에 벤을 대신하여 입을 연 사람은 접대실 입구에 기대서있던 레이쇼였다..

“여유고 뭐고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아가씨. 당장 쳐들어온 놈들도 벅찬데 여기에 시체들까지 상대하라니.”


“그럼 빨리 아르다르로 돌아가던가 해야죠. 왜 이러고 있는 거예요?”


“아르다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야. 그리고.......”


말끝을 흐리는 레이쇼의 시선이 창가의 카논에게 향한다.

그녀에게 아르바티앙은 단순한 고향의 의미만을 지닌 도시가 아니다. 드라흐마가문 전체가 뿌리내린 곳이자, 그녀를 알고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남아있는 곳. 동시에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이 묻혀있는 곳.


“나는 여기서 내 이름을 안고 남아있을 거다. 너는 이미 폐하의 직속 참모.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이 말만을 남기고 전장으로 향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자꾸 가슴에 아른거려 카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가벼운 미소가 담고 있는 미련이 공화국에 대한 헌신적 충성 따위가 아님은 그 누구보다도 딸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는 화가 나있는 것이다.


아르바티앙은 드라흐마 가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민자와 방랑귀족들의 터전이 되어준 도시다. 공화국 내에서는 유일하게 관용적인 이주정책과 정착지원을 앞세워 그들에게 단순한 물질적인 풍요를 넘은 제2의 고향으로서의 안정을 제공해왔다. 끊이지 않는 전쟁과 봉사의 요구에 지친 영혼들에겐 달콤한 휴식처와도 같은 도시였다. 그중에서도 카나반이 아닌 아르바티앙을 위해 헌신한, 예디나 드라흐마를 대표로 하는 1세대 이주민들. 그들의 업적을 기림과 동시에 그 선조들의 유해를 도시 안에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지하묘지 ‘고요한 안식’. 이를 개방하여 관광요소로 자리 잡게 한 것도, 이런 관용의 역사를 기리고 도시의 진정한 존재이유를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숭고한 뜻을 뿌리에서부터 모욕하려하는 저 검은 물결을, 자히르는 드라흐마 가문의 가주로서, 그리고 아르바티앙의 영주로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단순한 명예나 책임감이 아니다.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뜻을 둔 곳이 곧 고향이다. 뜻을 두었다면, 심장처럼 품어라.’ 라는 가언이 가진 의미를 알고 있기에, 그리고 지금 저들이 하려는 행위가 도시와 도시의 모든 목소리들에게 어떤 상처를 안겨줄지 알고 있기 때문에, 자히르는 사지로 발을 들여놓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카논은 자신의 이름에 깃들어 있는 만큼이나 이 도시를 사랑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대로, 그녀는 이제 아르바티앙의 시민이기 전에 국왕의 기사다. 자신과 가족의 고향이 ‘망자’라는 타의적 이름으로 되돌아온, 그 고향을 만들어냈던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는 광경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수도로 돌아가 왕에게 봉사하는 것이 의무이며, 더욱 커다란 의미가 있음은 물론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멈추지 않고 눈에서 흘러넘치는 미련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바다로부터 흘러오는 바람소리만이 접대실을 가득 채운다. 아무도 사랑하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카논을 위로해주지 않는다. 그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함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도조차도 카논의 흐느낌 앞에서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투정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고향은커녕, 가족이나 미련 따위도 품고 있지 않은 고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카논의 반응이었으나, 차마 부정해버릴 순 없는 무거움이었던 것이다.

그 무거운 공기를 날리며 모두의 시선을 빼앗은 건 어느 전투마법사의 얼굴이었다. 갑작스럽게 접대실의 문을 열고 나타난 그 얼굴은 벤과 고도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분명, 보르케라고 했던가.

아르보리스의 영주이자 장군인 그라우치의 아들로, 실무경험이 필요하다는 장군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인해 벤이 곁에 두게 된 대학동기생이었다. 학교에서도 자주 보던 얼굴이었기에 벤은 선뜻 장군의 요청을 수락했지만, 고도는 보르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그녀가 예전에 말했던 ‘만년차석’이 바로 그였음을 알게 된 것은 보르케와 사촌지간이라는 덴쿠레의 설명을 들은 후였다.


“검성님, 휴식 중에 죄송합니다.”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을 칭호로 자신을 부르는 보르케를 향해 벤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무슨 일인데?


“후방통신중대에서 시즈키치가의 영지와 교신에 성공했습니다. 이곳의 영주님께 보낼 전문이 와있는데, 본궁에 안 계셔서 검성님께 대신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




“시즈키치가의 사병 이천삼백?”


자히르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가 평소에도 자주 지어보이던 편안한 미소가 아닌,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도시의 외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앙망루. 아래로는 절벽과도 같은 까마득함으로 성벽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런 곳에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다한 벤으로서는 기껏 힘들게 갖고 온 정보가 그의 비웃음으로 인해 한없이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미간을 구기고 만다.


“지원군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르다르까지 중계소를 세운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중앙군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르다르와 아르바티앙 사이에 통신이 두절됐기 때문이잖습니까. 어떻게든 두 거점이 연계만 할 수 있다면 방도가-”


“말로 달려도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어느 세월에 그 사이로 중계소를 운용할 수 있을까요. 통신이 복구되어서 혹시나 상황을 타파할 방도가 생긴다고 해도, 애초에 그 때까지 버틸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시즈키치의 지원군과 연합하여 방어전을 펼쳐야죠.”


자히르는 연기가 솟아오르는 도시에서 눈을 돌려 풋내기 검성을 바라보았다. 벤은 그 붉은 눈에서 단호함과 함께 깊은 절망, 그리고 묵직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도시를 지키고 싶은 사람은 다름 아닌 저와 제 부하들입니다. 지원군?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굵게 만들어준다면 뭐라도 환영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검성께서는 곧 이곳에서 벌어질 일이 단순한 수성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저들은 처음부터 이 도시를 죽이려고 왔습니다.”

벤은 섬뜩할 정도로 굳은 자히르의 얼굴이 창가에 기대 눈물을 흘리던 카논의 얼굴과 겹쳐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검을 맞대야 하는 상대는 성벽 밖에서 몰려오는 제국의 해병뿐만이 아닙니다. 지하에서 기어 올라올, 한때 우리의 가족이었던 자들. 비록 목적을 지배당했다고는 해도 우리의 조상이었고 위대한 영혼을 지녔던 자들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소멸시켜야하는 겁니다. 기적이 일어나 그 모두를 죽여 가며 막아냈다고 칩시다. 남아있는 우리가, 그리고 이 도시가, 예전의 그 ‘아르바티앙’이 맞는 겁니까?”


아르바티앙이라는 도시에 한해서는 감정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자히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벤은 여기서 그를 진정시키기보단, 부추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제 눈에는 이미 이 도시에 회생불가라는 딱지를 붙이고 손을 놓으려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도시의 역사는 더럽혀지고 잊히겠지요. 하지만 도시는 과거라는 역사로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이곳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겠다는 환경과, 그들을 환영하는 최소한의 의지만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사람들은 모여들 겁니다.”

물론 이런 말로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같이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자히르를 위로할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그의 입에서 원하는 답은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드라흐마님께서 알고 계시고 지켜왔던 아르바티앙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 이곳에 남아 이곳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지켜주셔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도시의 지하에 매장된 역사가 아니라 이 도시 위에 세워진 미래를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히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삼키고 있던 분노는 드라흐마 가주로서의 분노였을 뿐, 아직 도시는 끝나지 않았다. 도시의 벽돌하나라도 남아있는 한, 시장으로서, 영주로서 그를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천여 명의 병력이 증원된다고 해서 전황이 크게 뒤바뀌지는 않는다. 여전히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영혼들이 땅 아래 묻혀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적의 위협적인 공성병기들은 완성되기 시작하여 점차 그 모습을 지평선에 내보이고 있다. 당장에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이었던 망자를 향해 무기를 휘둘러야하는 병사들의 사기부터 신경써야할 것이다.

자히르는 천천히, 벤의 먹색 눈동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좋은 수가 있으십니까?”


변수라는 계책만으로 이 자리에 오른 검성을 향해 작은 희망을 가져보는 그였으나, 돌아온 벤의 대답은 예상대로 허망했다.


“아뇨, 이 상황에서 좋은 수라는 게 있을 리가 없죠.”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웃는 자히르. 마침내 돌아온 그 매력적인 미소를 향해 벤은 작은 죄책감을 느껴야했다.


‘좋은’ 수는 없다.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는 도무지 새벽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어나 있어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드렌턴의 잔소리를 듣고 침실로 내려왔지만, 불길한 침묵은 좀처럼 그를 꿈속으로 놔주질 않는다.


“.......하아.”


척후조로 나가있는 크라트의 딸, 올리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는 ‘움직임이 없다’라는 단편적인 보고 뿐, 대전쟁 이래 공화국 최대의 위기임에도 그에 맞지 않는 평온함이 하루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지루한 긴장감이란 표현도 존재할 수 있구나- 라고 로빈은 오늘 깨달았다.

그는 결국 침대에서 벗어나, 맨발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문밖에 서있을 오즈카와 야담이라도 나눌 생각이었다. 하지만 살며시 열린 문틈사이로 보이는 것은 오즈카의 커다란 등짝이 아니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원한 두 눈동자.


“지나?”


그 이름을 불러주자, 두 태양이 밝게 빛나며 새빨간 미소로 화답한다.


“오즈카랑 당직 바꿨지롱.”


“뭐어? 왜?”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로빈에게, 지나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은 입술로 그의 뺨에 인사를 남긴다.


“너 못자고 있을 줄 알았지. 할 얘기도 있고 해서.”


“어? 할 얘기? 뭔데?”


하지만 로빈은 지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열렸던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버리고서, 에페검을 비롯한 그녀의 제복을 능숙한 손길로 벗겨낸 것이다. 짓궂은 그의 손길에 지나의 저항은 짧았다. 어느새 셔츠 하나만 남기고서 로빈의 부드러운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였다.

이 달콤한 입술과 부드러운 손길에는 도무지 면역이 생기질 않는다. 오히려 닿으면 닿을수록 맛보고 싶고, 그를 원하는 가슴의 고동은 날마다 커져간다. 셔츠 아래로 들어온 그의 손은 너무도 따듯해서, 마치 몸의 일부처럼 굴곡을 훑으며 그녀의 신음을 낳는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이어지는, 지나의 귓불을 향한 로빈의 장난.


“....읏...”

로빈으로선 새어나오는 야릇한 신음을 삼키며 눈을 흘기는 그녀가 너무도 귀여워서 빼먹을 수가 없는 과정이었다. 웃음이 섞인 짧은 사과와 함께 로빈은 천천히 온기를 남기며 그녀의 하얀 목까지 숨결을 새겨놓았고, 그에 따라 풍만한 곡선을 유린하던 손도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지나는 두 손으로 로빈의 얼굴을 잡았다.

“아, 오늘은 안 돼.”


지나의 단호한 표정이 없었다면 로빈은 단순한 투정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한 번도 이 단계(?)에서 멈췄던 적은 없었기에 이어진 로빈의 목소리엔 약간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왜? 어디 아파? 아, 혹시 그날이야?”


곧바로 무신경한 로빈의 볼을 꼬집는 지나. 로빈은 장난과 함께 부드러워진 그녀의 표정을 보고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지나는 로빈의 양 볼을 꼬집던 손을 떼어내어 그대로 그의 목을 휘감는다.


“아니, 아픈 건 아니고. 놀란단 말이야.”


“놀라? 누가 놀라?”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로빈을 올려다보며, 지나는 쿡, 하고 짧게 웃었다. 그녀는 대답대신, 따듯한 로빈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천천히, 아랫배를 향해 그의 손을 이끈다.


“얘가 놀란다구.”


로빈은 자신의 손이 덮고 있는 지나의 따스한 살결과,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 지나를 바라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


로빈의 낮은 목소리에, 새로운 목소리를 품은 지나의 얼굴이 행복으로 물든다.


“.....응...”


로빈은 그대로 지나에게 입을 맞추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지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다. 더없이 행복한데, 어째선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고마워.”


그런 그녀의 행복을 닦아주며, 로빈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의식하지 않고 본능처럼 튀어나온 말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도 깨닫지 못했지만, 지나의 미소가 짙어지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의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태양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는데,

그곳에선

어떤 운 좋은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면서도 멍청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 겁니까? 아르바티앙 쪽은 시작한지 한참이나 되지 않았습니까?”


쥬넨의 목소리는 듣는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그 무모한 용기를 칭찬받아야 마땅할 정도로 격앙되어 있었다. 과거 ‘늑대’가 앉아 있던 그 집무실에서 쥬넨의 검붉은 목소리를 받아낸 얼굴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래서 더욱 위협적인 가시를 지니고 있는 장미였다.


“불만인가요, 쥬넨 경?”


제국 남군의 총사령관이자 임시 2군단장, ‘붉은 장미의 검성’ 델핀 드리브달. 망명해온 적국의 근위대장을 망설임 없이 부관으로 맞이한 건 과연 그녀다운 처사라고 생각되는 일이었지만, 이 처사가 맹목적인 편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쥬넨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하게 그녀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아르보리스의 그라우치 장군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은 상태. 적의 중앙군은 검성께서 충분히 격파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들에게 방어전을 준비할 시간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아르보리스의 북부군과 중앙군이 모두 수성전에 돌입한다면 이쪽이 아르바티앙보다 늦어질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참아낼 수 없다는 게 바로 근위대장이 아닌 ‘기사로서’ 쥬넨의 성격. 델핀은 그런 그의 성격마저 흔들리게 만드는 매혹적인 미소로 쥬넨의 이성을 뒤흔들어놓는다.


“그대는 내 검을 의심하나요?


“.......물론 아닙니다.”


그 미소가 위압적인 무게는 결코 아니었지만, 쥬넨은 마른 침을 삼켜야했다.


“아뇨, 의심하는 건 좋은 태도입니다. 이 세상에 확실한 건 그 어느 것도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어째서-”


더욱 밝아진 델핀의 미소가 쥬넨의 목소리를 끊는다.


“쥬넨 경. 물론 두 거점을 동시에 공략하자는 당신의 의견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더없이 훌륭한 생각이었죠. 하지만 경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잘못.....?”


표정으로 되묻는 그를 향해, 델핀은 하얗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에 거대한 생각을 그린다.


“국가를 이루는 가장 큰 거점 두 곳을 철저히 짓밟는다. 그것으로 국가로서의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죠. 경의 그 생각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당신은 공화국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이 국가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죠.”

그녀의 손가락이 계속 허공을 휘젓는다. 약간의 집중으로, 쥬넨은 그것이 나무의 형상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국가라는 형태의 기능을 지우는 것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사라지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뿌리 자체를 지워낼 수는 없어요. 말씀드렸듯이, 세상에 확실한 건 그 어느 것도 없으니까. 저는 그걸 황제폐하께서 200년 전 하신 유일한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반복할 생각이 없어요.”

손가락을 거둬들인 그녀의 표정은, 쥬넨마저 얼어붙게 만들만큼 차가운 미소를 품고 있었다.



“전 바로 그 뿌리를 지우는 일부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이건, 경의 생각보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이랍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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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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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1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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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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