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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0,904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3.0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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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19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DUMMY

놀랍게도, 먼저 반응한 쪽은 지나의 에페가 아닌 남자의 검이었다. 아뮤르 지나라는 이름과, 적의를 감출 생각이 없는 그녀의 영력이 남자가 가진 기사의 피를 이성보다 먼저 일깨워준 것이다. 눈앞의 여인이 가지고 있는 기사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자신이 검을 내리치는 순간까지도 에페를 완전히 뽑지 않고 있는 그녀의 여유가 무엇에 기인하고 있는지 고민해볼 틈은 없었다.


“?!”


검신이 지나의 정수리에 닿기 직전, 그녀의 손이 손잡이를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먼저 감싼다.

짧은 기합조차 필요 없었다.

그의 손가락들이 검의 손잡이와 함께 지나의 손안에서 짓뭉개졌고, 참을 수 없는 격통의 비명을 내지르려던 그의 입도 지나의 반대편 손에 의해 봉쇄당한다. 어느새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타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눈동자에 압도당한 그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시끄럽게 굴지 마. 안 그래도 피곤에 절어있는 애들을 깨우고 싶진 않거든.”

다시 한 번 조여 오는 지나의 손. 우득-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남자의 표정이 한층 더 진하게 구겨진다.

“자, 그럼 물을게. 넌 누구지? 누구의 사주로 이곳에 기어들어온 거야?”


그와 확실하게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지나. 무언의 동의를 구하는 그 의도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다.

낮은 신음과 함께 그의 입이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의 어투와 표정은 감사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무슨 짓이냐......! 나는 교관의 자격으로 이곳에-”


“먼저 검 뽑은 주제에 개소리하지 말고.”

지나는 거짓말하는 아이를 타이르듯 그의 코를 손가락으로 튕겼지만, 부러진 코뼈와 함께 왈칵 터진 코피는 ‘타이른’ 결과치고는 너무 잔혹했다.

“네 잠입을 도운 생도는 이미 신병을 확보해서 증언까지 받아놓은 상태야. 형편이 좋지 않은 생도들만 골라서 이리저리 쑤시고 다닌 모양이던데. 다른 손도 못쓰게 되기 전에 그냥 말하는 게 나을 걸.”


여전히 느슨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명백한 협박의 의도가 스민 그녀의 입술에도 남자는 굴복하지 않는다.


“.......변호사를 요청한다. 정식으로 재판을 받겠어.”


“야외훈련소도 엄연한 군영. 이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군법으로 다스려. 군법상 반역죄는 어떻게 다뤄지는지,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뭐어, 그것도 네가 진짜로 카나반의 국민이거나 군인일 때나 해당하는 이야기지만.”

미소가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지나의 눈동자가 불타오른다.

“만약 둘 다 아니라면, 적국의 첩자일지도 모르는 외부인이 군사시설을 침입했다는 소리잖아? 그럼 그냥 즉결심판해도 되거든?”


마침내 지나의 에페가 소름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회색빛 검신을 뽐내며 모습을 드러낸다. 압도적인 무력과, 거기에 어떠한 변명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결국, 남자의 눈동자가 체념으로 흔들린다.


“.......하,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탈주기사의 신분으로는 어디에 발을 붙일 수도, 가족을 부양할 수도 없어!”


“탈주기사.......? 너, 탈영병이야?”


지나는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에페를 거둔다. 적국의 간첩, 고용된 용병, 혹은 지하조직에 몸담고 있는 조직원, 그 수많은 가능성들을 뛰어넘은 대답이었기에.


“중위 헤일러 시안. 동부군 출신으로, 시즈키치 가문에서 사병으로서 복무했었다. 야노르 시즈키치의 실각 이후 가문의 사병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계약을 마치고 아르다르로 이주했어. 자식들 교육문제도 있었고, 아내가 더 이상 기사로 복무하는 건 싫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징집대상자에 다시 포함됐다고! 그게 말이 돼? 기껏 수도에 자리를 잡았더니 다시 입대하라고?


“그래서 탈주를 결심하고, 중개인을 알아본 건가.”


어느새 어둠을 뚫고 나타난 셰르였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리즈와 유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시안의 격정이 이어진다.


“그래! 그저 도망치기만 해서는 이 땅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한낱 장교나부랭이에 불과한 나의 망명을 허락해줄 곳을 찾기는 힘들었어. 그러다가, 나의 이런 형편을 어디서 듣고 왔는지 어떤 남자가 욘으로의 이주를 도와준다며 나에게 접근해왔지. 자기를 대신하여 훈련소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기사들을 찾아달라고 하더군.”


“욘?”

지나가 다급하게 시안의 멱살을 끌어당긴다.

“그가 욘 정부의 사람이었나?”


“모, 몰라! 차림새도 반도인이었고, 말에도 지방색은 없었어....... 얼굴은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 제대로 못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말만 믿고 그렇게 가족의 미래를 도박해도 되는 건가?”


경멸과 뼈가 담긴 셰르의 목소리에. 시안은 짧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답을 시작한다.


“그가 내민 선금이, 내가 기사로 복무하던 시절의 10년 치 봉급이었다고. 게다가 아내는 이미 욘에 이주를 완료한 상태야. 내가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겠어?”


지나와 유진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진다.

욘은 타국이나 타민족의 이주나 망명에 따로 제한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중립국으로서의 근간을 조금이라도 위태롭게 할 만한 존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탈영병’이란 존재가 그 기준에 부합할지 하지 않을지는 제3자가 판단하기엔 굉장히 애매한 상황. 그러나 대상자에게 이런 월권행위에 가까운 요구를 했고 또한 실제로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는 시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카나반뿐만이 아니라 욘에게도 거대한 문제로 다가올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와의 접촉은 어떻게 하지?”


지나가 묽어진 위협을 새롭게 다잡으며, 시안을 향해 거칠게 입을 열었다.


“.......욘에 있는 아내의 신변을 보장해 줄 수 있나?”


“욘의 대통령께서 지금 본궁에 머무르고 계신다. 협조만 해준다면, 아뮤르의 이름으로 너와 네 아내의 안전을 보장할게.”


카나반의 기사였던 자로서, 아뮤르의 이름이 지닌 무게는 물론 잘 알고 있다.

시안은 조용히 주변으로 모여든 기사들의 눈동자를 하나하나 복잡한 감정을 담아 마주한다.

짧은 한숨이 이어졌고,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함과 험악함만은 계속 유지할 것만 같았던 케타르디노 상회의 사무실도,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무겁게 얼어붙고 만다. 총리까지는 문전박대할 수 있는 명분과 용기를 지닌 그들이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국왕이란 존재는 더러운 거리에서의 경험이 화려한 케타마저도 당황케 만들고 있었다.


“우리 총리님이 신세를 많이 지셨다죠?


느긋한 로빈의 물음에 케타는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접대자’로서의 그녀의 피가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마누앙에게 시선을 던진다. 즉,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느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그를 배려한 조치였지만, 총리의 먹색 눈동자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결국, 케타는 다소 뒤틀린 어투로 로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예에, 어찌나 신세를 많이 졌던지, 어떨 땐 한 달 매출의 8할을 총리님이 책임지시기도 했죠.”


“하하, 그렇군요.”


예상대로, 로빈의 날카로운 시선이 총리의 양심을 파고든다. 그러나 마누앙은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래, 고귀하신 분께서 어쩐 일로 이런 냄새나는 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물론 로빈의 방문이 돌발상황임엔 분명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왕이라는 직책은 총리보다도 더욱 확실한 정부의 대변자. ‘법치’의 기준에서 보면 범죄조직일 뿐인 자신들을 왕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 해석해도 좋게 다가올 수가 없다. 케타의 눈동자가 다시금 경계심으로 가득 찬 이유였다.

그리고 그 적개심은 고스란히 어투에 섞여 로빈의 귓가를 찔러왔고, 그는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아아, 걱정 마세요. 싸우려고 온 건 아니니까. 그냥 얼굴을 맞대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게 뭡니까?


느긋하고 허술해 보여도, 한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왕의 얼굴이다.

케타는 그의 앞에서 긴장을 놓거나 여유를 부릴 생각이 없었다. 짧게 이어질지, 길게 이어질지 모르는 앞으로의 대화에서 조금이라도 방향이 엇나갔다가는, 이 거리가 순식간에 피로 물들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찻잔을 비우고 머리를 앞으로 숙이는 왕의 얼굴은 이미 표정이 지워져 있었다.


“많은 지하조직들이 오랫동안 정부고위층이나 귀족가문과 은밀하게 결탁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총리님께서 선택한 당신들이니, 그 능력이나 영향력, 그리고 야망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겠죠.”

이것은 칭찬으로 들어야 하는가.

마누앙의 시선이 다소 복잡해졌지만, 로빈의 입술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 ‘케타르디노 상회’를 대표로 생각하고, 국가와 공화국 기사의 대변자로서 묻겠습니다.”

짧은 침묵과, 교차하는 시선들.

사무실의 모든 시선은 책상에 박혀있었지만, 신경만큼은 로빈의 혀에 집중되고 있었다.

“케타르디노를 비롯한 지하조직들 중에서, 현역 기사나 생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이용하여 매수하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당황한 것은 로빈이었다.

수많은 대답의 방향성들에 대해선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그리고 빠르게 부인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순간 멈췄던 로빈의 입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 케타가 다시금 그의 찻잔을 채워주었다.

“물론 그런 방법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닙니다. 훈련생도나 초임기사를 상대로 후원을 넣어서 이쪽을 위해 일하게 만드는 건 꽤나 효율적인 일이죠.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전 별로 그러고 싶지 않더군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다른 조직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죠.”


“.......그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차로 혀와 입술을 적셨지만 로빈의 목소리엔 다소 망설임이 깃들어 있었다. 이미 마누앙으로부터 그녀는 물론이고 이 사무실의 인원들, 더 나아가 비슷한 탄생배경을 지닌 지하조직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였으니까.

로빈의 혀끝에 감도는 그 미세한 머뭇거림을 읽어낸 케타는 굵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연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 따위가 아닙니다. 그건 이미 왼쪽 시력과 함께 증발해버렸어요. 단지, 그들이 거쳐야 하는 길을 한번 미리 걸었던 ‘선배’로서, 그나마 기사라는 존재로 가련한 그들이 남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죠.”


“.......”


로빈은 섣불리 그녀의 대답에 반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런 지하조직의 간부층을 이루는 자들은 한때 국가에 봉사했다가 검을 놓은 자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 과정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잡았던 검을 놓는 것 자체를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카나반에서, 당연하게도 불명예전역자들은 물론 상이기사에 대한 복지와 예우는 전무하다시피하다. 그렇게 버려진 자들이 공화국에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복수의 개념으로, 그들이 더러운 돈을 써서라도 자신들과 같은 굴레에 얽매이려는 후배들을 ‘탈출’시켜주는 것이 주목적이 아닐까-하고 로빈은 생각했었다.

하지만 케타는 그들이 기사라는 존재로 남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말에 대한 신뢰성은 제쳐두고라도, 어째서 그녀는 범죄조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으면서 이런 감성적인 발언을 내뱉은 것일까. 혹시 동정을 호소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로빈의 머리에 스칠 때쯤, 다시금 케타의 날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데, 왜 그걸 우리에게 물으십니까? 뭔가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면 정식으로 수사라도 해보시죠.”


저 차가움은 되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계속 목소리 아래에 깔려있던 것일까.

하지만 첫 대면과는 달리, 로빈은 저 무심한 눈동자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었다.


“수습기사대상자 중에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자를 대상으로 일종의 계약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밀라 시즈키치라는 이름은 들어보셨지요?”


“그 암살자 말입니까.”


“예. 저는 이번 사건을 밀라 시즈키치 사건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대표귀족가문 출신의 전도유망한 기사였던 그녀가 어째서 조국을 배신하고 자신을 목숨을 버려서까지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국을 배신이라. 단순히 당신을 향한 개인적인 원한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폐하께선 자연스럽게 본인을 곧 국가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논점을 흐리지 마시오. 조사과정에서 밀라 시즈키치가 개인적으로 폐하와 연관된 점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소.”

짙어지는 악의와 조롱사이로, 마누앙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때 같이 동원된 다른 암살자들은 시즈키치 가문의 기사들이 아닌, 그 출신을 알 수 없는 자객들뿐이었소.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철저히 ‘계획되고 사주된’ 습격.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원인이지, 이미 밝혀진 결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총리님.”

달아오르려던 마누앙의 혀를 제지하며, 로빈은 총리의 얼굴빛이 다시 식는 것을 확인한다.

“좀 더 정확한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원을 파견한 상태입니다만, 우리 중앙정부로서는 이런 뒷세계의 흐름에 대해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수사에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번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습니다만, 제가 직접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케타의 표정이 마누앙과 같은 생각을 품고 뒤틀린다. 마누앙의 표정이 줄곧 불편했던 것은 사전에 로빈으로부터 그의 생각을 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저 제가 ‘모르는 일이다’라고 했을 뿐인데 그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거친 세계에서 잔뼈가 굵다는 당신이니, 도박을 할 상대와 하지 말아야 할 상대쯤은 구분하실 수 있으시겠죠.”


능글맞은 왕의 웃음. 케타도 덩달아 미소 짓기는 했지만, 그녀의 안에서 로빈에 대한 경계심은 한층 수준이 높아져 버린 상태였다.


“즉, 폐하께선 저희 케타르디노 상회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시군요.”


케타의 입에서 본론이 나오자, 사무실은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끝을 맺지 않았음에도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어수선해지는 주변 분위기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로빈은 다시 한 번 찻잔을 깨끗하게 비우며 미소를 머금었다.


“무기와 마약밀매. 은퇴한 기사들의 불법인력중개. 수많은 폭력사건과 더 나아가서는 암살과 대부업까지. 여기 있는 총리님께서는 섭정시절의 경험들을 참고로 순기능을 더 높게 쳐주셨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당신들은 법치국가에 정면으로 반하는 집단. 아시겠습니까? 저는 지금 국왕이라는 직책으로는 굴욕에 가까운 제안을 하려는 겁니다.”


케타는 크게 웃었다.

그건 무례함을 곁들인 비웃음이 아닌, 진실한 유쾌함에서 비롯된 웃음이었다.

눈앞의 왕은 그의 말대로 국왕이라는 직책에 있는 자로서는 할 수 없는, 하지 말아야 할 거래를 위해 직접 이곳에 찾아왔다. 그리고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고귀한 혈통, 도덕이라는 중심에 있어야 할 그가 부조리와의 타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케타는 이 상황이 너무도 유쾌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




“론크리스는 현재 팔루뎀에 그 거점을 두고 반란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 중앙군에 비견할만한 세력이 결집된 것은 아니나, 남부와 남동부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녀의 깃발 아래 왕위찬탈에 동조하기로 합의한 모양입니다.”

브린타이나의 수도, 강이 품은 도시 디나스아리얼.

그러나 강바람이 닿지 못하는 왕좌 위의 얼굴은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미세하게 일그러져있었다. 반강제적으로 왕위에 오른 뒤로 눈앞의 검성과 수많은 독대를 해왔지만, 그가 목소리에서부터 내뿜는 영력은 도무지 밝은 얼굴로 맞대할 수가 없는 압박이었다.

“듣고 계십니까, 폐하?”


“아, 예.”


자신이 그의 말을 경청한다고 해서 이미 검성이 미리 결정한 사항에 대해 반대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은 그저 검성에게 혈통과 이름을 빌려주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의도로 누나의 왕위를 넘겨받은 것도 아니지만, 결국 모든 죄책감과 비판을 안고 가야 하는 목소리가 자신의 역할이라는 굴욕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오열의 검성’ 블라르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경청과 서명.

그것이 그가 론프리스 프리징플레임 8세에게 바라는 전부.


“카나반을 통해 수도 서쪽의 마을을 습격한 것은,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시간을 번다는 목적이었을 겁니다.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어수선한 틈을 타려는 속셈, 하지만 이에 대응하지 않고 중앙군을 결집시켜 놓은 것이 결과적으론 빠르게 반란을 제압할 수 있는 한 수가 되었군요.”


“.......제압이요?”


프리스에게서 반문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검성은 힐끗 그가 앉아있는 왕좌를 바라본다. 딱히 위협적인 시선은 아니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도 프리스는 침을 삼키며 허리를 세워야 했다.


“예, 제압입니다. 반란의 불씨는 타오르기 전에 짓밟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요. 당연하다고 생각한 수순입니다만, 뭔가 다른 의견이라도 있으십니까?”


여기서 의견을 물어오는가.

기회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블라르가 생각하고 있는 구상이 무엇인지 정도는 머리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프리스였다.


“명목상으론 단순한 반란제압입니다만, 그 주체가 누님이라는 점에서 이미 내전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습니까? 제국과의 평화협상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섣부르게 군을 움직여도 되는 것인지요.”


“제국은 우릴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설명이 없는 확답. 그리고 확신에 찬 푸른 눈빛.

그 주저 없는 대답과 눈빛의 이유를 물어도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역할은 하나뿐.


“제가 어떤 왕명을 내리면 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장의 명령서를 내미는 블라르. 빠르게 그 내용을 훑어본 프리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국왕은 고개를 들어 검성의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기사’는 그 어떠한 표정도 담지 않은 얼굴로 짤막하게 그 명령서의 내용을 요약해 주었다.




“저를 지휘관으로, 중앙군의 출정을 허락해주십시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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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63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75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8 28 21쪽
»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203 26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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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25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31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53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47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8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84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22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9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62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303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6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80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8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93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33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301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46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22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64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43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24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74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35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9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35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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