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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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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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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3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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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DUMMY

“아아- 이것이 바로 사회의 공기.......”


“.......뭐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입대 2주째인데 사회의 공기는 무슨......., 그리고 여기 아직 교장이거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토를 달아요. 너네 가슈펠라르 인간들은 그렇게 매사에 꼬투리를 잡고 도대체 뭔 재미로 사냐?”


교관들의 눈이 사라지자마자 셰르와 유진이 서로를 향해 눈빛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둘의 으르렁거림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기상나팔이 울린 순간부터 리즈의 얼굴은 줄곧 헤실헤실 풀려있었다.

3주차부터는 새롭게 도입되는 야외훈련이 시행됨에 따라 한 달간 베르메스 평원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그에 첫째 달 외출이 어쩔 수 없이 몰수되었고, 그 보상으로 다소 이른 2주차임에도 희망자에 한해 면회를 허가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100여 명에 이르는 생도들을 주말에 몰아서 면회를 시켜줘야 했던 탓에, 조별면회라는 웃지 못할 형태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근데 리즈 너는 아침부터 뭐가 그리 좋아서 실실거리냐? 별 거 아닌 것처럼 그러더니 오빠 온다는 게 그렇게 좋아?”


“에헤헤.......”


다소 퉁명스러운 셰르의 말에도 리즈는 배시시 웃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입소 후 처음으로 한산함이 느껴지는 연병장. 그 구석에 위치한 임시면회소는 명칭 그대로 ‘임시’로써 최소한의 기능만을 가진 곳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군용천막과 원형탁자가 전부인 그곳에서, 리즈는 줄곧 들뜬 시선으로 연병장 너머 교장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도 기사라고하지 않았어? 어디서 복무하는데?”


“본궁.”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서 유진을 향해 대답하는 리즈. 덕분에 유진은 그 그늘없음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어야 했다. 리즈의 대답을 한번 곱씹은 것은 셰르였다.


“본궁? 뭐 보급계 그런 건가?”


그러나 그는 대답을 듣지 못한다. 리즈가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아~ 왔다, 왔다.”


그녀의 말대로, 굳게 닫혀있던 훈련소의 아치형 대문이 철이 스치는 굉음과 함께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시에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마냥 코를 벌름거리는 리즈의 얼굴을 보고 유진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지만, 셰르는 다가오고 있는 그림자에 묘한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겨울이라고 해도 저렇게 후드와 목도리로 꽁꽁 싸맬 정도의 날씨는 아니다. 더욱이 면회를 오기로 되어있는 것은 리즈의 오빠 한 명뿐일 텐데, 다가오는 그림자는 셋. 정해진 면회인 외의 인원을 위병소에서 들여보내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둘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꺼내보기도 전에, 이미 그림자들은 천막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튀어나가는 리즈. 그녀가 거칠게 안긴 것은, 세 명 중 두 번째로 면회실에 들어서는 그림자의 품이었다.


“오빠~! 오랜만이야아! 아, 언니도 왔네?”


“이제 20일도 안 됐는데 뭐가 오랜만이야. 너 살이 더 빠진 것 같다? 훈련소에서 뚱뚱한 애들은 빠지고 마른 애들은 찌던데, 너는 좀 쪄야 하는데 거기서 더 마르면 어떡해.”


“에헤헤, 훈련이 빡세서 그렇지 뭐.”


셋 모두 얼굴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가리고 나타났는데, 용케 잘 찾아내는구나.

순간적으로 유진과 셰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 이분들은.......?”


리즈의 검붉은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후드 아래서 흘러나온 목소리. 그 안에서 약간의 당황이 스며 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면회가 조별로 이뤄진다는 통보는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우리 조원들. 저 눈매 사나운 놈은 셰르 시즈키치라고 하고, 저 가슴 큰 애는 유진 가슈펠라르.”


“눈매가 뭐?” “가,가슴.......”


당황하는 두 표정. 그런 그들을 향해, 후드 속의 남자는 얇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 리즈 동기 되시는군요. 많이 모자라고 말썽만 피우는 녀석입니다만, 얘 좀 잘 부탁드립니다.”


셰르가 그의 손을 맞잡기 직전, 누가 모자르냐며 리즈가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의 후드가 벗겨지고 만다. 난처한 표정과 함께 드러난 검붉은 머리카락. 검붉은 눈동자.


“야야, 당기지마. 아, 죄송해요. 소개가 늦었네. 반갑습니다, 로빈슨 미트라블루스라고 합니다. 리즈 오빠 되는 사람이에요.”


“어.......” “어어.......”


셰르와 유진의 행동과 호흡이 정지한다. 모든 사고가 기억을 되짚는 데에 쓰인 덕분이었다.

익숙한 이름에, 익숙한 얼굴이다. 곧 그 익숙함의 출처가 대부분 신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정체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표정이 멈춰있는 것은 왜 ‘그’가 이런 곳에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회상은 곧, 몇 달 전에 온갖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왕녀에 대한 이야기에 다다를 수 있었고, 그로부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어어어어- 폐, 폐하.......”


“화,황공.......”


유진이 무릎을 꿇자 셰르도 엉겁결에 로빈의 손을 잡은 채 무릎을 꿇고 만다.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리즈가 크게 웃음을 터트린 것은 물론이었다.



“어째 어디서 많이 보던 광경이지?”


지나가 얇게 웃으며 후드를 벗었고, 마찬가지로 후드를 벗는 오즈카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려있었다.








“야외? 와, 우리 땐 그냥 교장에서 구르는 거뿐이었는데, 이제 별 걸 다하네.”


로빈의 장난기 섞인 감탄에 리즈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그치? 이게 다 벤이랑 언니네 할아버지 때문이라니까. 왜 꼭 나 입소할 때 되니까 이러냐고.”


“야야, 너넨 편한 줄 알아. 우리 땐 훈련 끝나기도 전에 최전방으로 파견까지 나갔었어. 네 오빠랑 진짜 거기서 뒤지는 줄 알았다.”


“아냐, 죽을 뻔한 건 지나 너 혼자였지. 너 파이튼 성문 앞에서 괜히 객기부리다가 실신했잖아아아악.”


낮게 비웃는 로빈의 볼을 꼬집는 지나.


“시끄러. 그래도 계급장 달기도 전인데 적 대대장까지 이겼잖아. 그거 엄청 대단한 거거든?”


“아! 정신교육시간에 들었던 거 같아! 그게 언니였구나.”


지나는 신기한 듯 얼굴을 내미는 리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다.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셰르와 유진은 여전히 혼란과 당혹 속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중이었다. 이런 자리가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개인훈련을 받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피어오를 때쯤, 지나의 태양 같은 시선이 셰르와 유진을 향해 빛을 발한다.


“그러고 보니, 카논에게 듣기론 둘이 요번 기수에서 가장 기대를 많이 받고 있다던데. 어때, 근위대 들어올 생각 없어?”


“아, 교관님을 아십니까?”


자신들의 조를 담당하고 있는 멘토의 이름이 나오자, 셰르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응, 걔네 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 제자라서. 어렸을 때부터 몇 번 봤었고 저번에 특무대에서도 같이 일했거든. 아무튼 근위대 잘 생각해봐. 들어오면 잘해줄게. 내가 또 후배들한텐 한없이 부드럽단다.”


“아...하하......예........”


지나의 미소는 분명 매혹적이었지만, 어째선지 그 속에서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기에 유진과 셰르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여야 했다.


“아, 오빠.”


“응?”


지나를 향해 신병들 괴롭히지 말라고 핀잔을 주려던 로빈은, 자신을 부르는 동생을 말에 바로 옆으로 다가와 있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표정에선 이미 미소나 웃음이 지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순간 그녀가 하려는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엄마는 어때?”


“.......”

셰르와 유진의 시선까지 집중되고 있긴 했지만, 로빈은 결국 짧은 한숨에 이어 입을 열었다.

“뭐, 2주 전이랑 별다를 건 없어. 공적인 부분에서의 혐의는 대부분 무죄로 판결났지만, 드렌턴 아저씨랑은 좋게 대화가 이어지질 않나봐.”


자신의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던 리반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대리모를 부탁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이르면서, 드렌턴은 로빈의 아버지나 지나의 어머니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가 데르하나 한나보다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은, 그 사실을 자신에게 상의조차 하지 않고 수락한 리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정황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똑바로 리반나를 마주할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녀가 그런 희생을 하게끔 만든 유일한 생명을, 그녀의 모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그 작은 목소리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도륙해버린 일은 피하거나 잊을 수 없는 진실이니까.

마주하면, 서로의 상처를 들춰낼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마는 그럼 계속 별궁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야? 아저씨는?”


“응, 계속 별궁에 계셔. 아저씨는 출근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나나 지나하고 얼굴 마주하기가 불편한가 봐. 언제 날 잡아서 삼자대면이라도 해야지 원.”


“.......흐응.......”


서서히 일그러지는 동생의 표정이 보기 싫었는지, 로빈은 리즈의 코를 살짝 잡아당기며 화제를 전환한다.


“모레부터 평원에서 야외훈련한다며. 나야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일단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네 몸 걱정부터 해. 내가 뭐라고 했지?”


“잘하려고 튀지 말고 못하지도 말고 딱 중간만 해라.”


“그래그래.”

그리고 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 검붉은 시선이 향한 곳은 굳어있는 셰르와 유진이었다.

“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기분들도 왕녀라고 봐주지 말고 따끔하게 부탁드려요.”


“예,옛!” “화,황공.......”


지나와는 달리 진심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후드를 눌러쓰는 로빈. 그의 소맷자락을 잡는 리즈의 얼굴은 눈물이 맺히기 직전이었다.


“면회 또 올 거지?”


“너 살 좀 찌우면.”


마주 웃는 남매.

다시금 품에 안겨 오는 동생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로빈과 두 근위병은 천막을 빠져나간다.


“꼭 와! 언니랑 오즈카도!”


아이처럼 방방 뛰며 손을 흔드는 리즈. 그 얼굴은 만족감에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여전히 복잡한 것은 뒤에 남겨진 두 명의 귀족자제들의 얼굴.


“자, 그럼.”

자신들을 향해 뒤돌아서는 왕녀의 천진난만한 표정에 셰르와 유진은 순간적으로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 검붉은 눈동자 아래 떠있는 미소는, 분명 그녀가 언니라고 불렀던 검성의 손녀와 비슷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둘이 이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야 돼~?”






====================






되도록 시선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새벽을 틈타서 말에 오른 것은 괜찮았지만, 대통령경호실장 재규는 도복 대신 입은 반도식 면옷이 영 불편한 모양인지 연신 목 언저리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아, 좀 가만히 있어봐. 쪽팔리게 섬나라 촌놈이라고 광고라도 하려고 그러냐?”


그런 그를 쪼아대고 있는 남자는, 에일로피아 국제무역기구의 대표이자 욘의 대통령 그륜. 그의 차림은 반도인이라고 하기에도 전혀 위화감 없이 가벼웠기에, 처음 그들을 마중나간 드렌턴은 그륜을 굉장히 신중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외성부터 이곳 본궁까지 이르는 동안 이어진 그륜과 재규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 생각이 상당히 빗나가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욘의 문화수준은 반도와는 격이 다르다고 자랑하시던 분이 이제와서 촌놈이라뇨.”


“시끄러. 넌 일단 그 쓸데없이 기다란 머리칼이나 잘라라. 보는 내가 답답하다.”


“아니 몇 년 동안 아무 말 없다가 왜 갑자기 지랄이십니까?”


“뭐? 지랄? 넌 돌아가면 파문이야, 이 새퀴야.”


“맘대로 하십쇼. 어차피 경호원들 다 각하 싫어하니까, 궁내에서 있었던 추문 몇 개 터트리면 재선은 힘드실 겁니다.”


“와, 너 지금 나 협박하니?”

말에서 내려 본궁으로 접어드는 순간에도 욕설과 한숨이 오고 갔고, 드렌턴은 머리를 감싸며 그들을 대합실로 안내했다. 곧바로 계단으로 향하지 않는 그의 발걸음에 의문을 가진 재규와 그륜이었지만, 그 의문은 대합실 구석에 위치한 흡연실로 접어들면서 납득으로 바뀌게 된다.

“아아, 붉은 나무. 반갑습니다. 욘의 대통령 그륜입니다.”


“반갑습니다. 민감한 사항과 민감한 모임이기에 새벽으로 시간을 미룬 점 사과드립니다.”


로빈이 내민 손을 가볍게 맞잡으며, 그륜은 구면인 벤과도 가볍게 목인사를 나눈다. 그의 경박한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아아, 차가운 아가씨도 오랜만. 일이 복잡해졌다고 들었는데, 일단 몸은 멀쩡한가 봐?”

그가 내민 손을 잡기는 했지만, 크리스의 표정은 노골적인 경계심을 내뿜고 있었다. 그라우치 장군과 로빈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을 터이고, 브린타이나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아직 대외적으로 발표가 되지 않은 상황에 어떻게 이 남자는 자연스럽게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웃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얘기는 좀 나누셨어?”


푹신한 소파에 반쯤 누우며 해맑게 웃는 그륜 덕분에, 재규는 대신 무례를 사과하며 머리를 감싸야 했다. 대통령의 질문에 대신 답을 한 것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디미르였다.


“아뇨, 저희도 도시외곽에서 대기하다가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뭐-”

드렌턴이 흡연실의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신호로, 안에 있는 여섯 명의 눈빛이 번뜩인다.

“시간 끌 거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 볼까.”






“뭐어, 오열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는 넘어갔다고 봐야겠네요. 당신 남동생이 귀족들의 지지를 받을만한 인물이 됩니까?”


그륜의 말에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 크리스.


“어디까지나 허수아비일 뿐, 실권은 블라르가 가지게 될 겁니다.”


“그러면 블라르 트리스탄테, 그러니까 오열의 검성이 귀족들의 완벽한 지지 없이 독단적으로 군을 움직여 정권을 장악했다는 뜻이군요?”


“예.”


그륜이 흥미롭다는 듯 얇게 웃으며 자신의 삐죽 올라온 수염을 쓰다듬는 것으로 둘의 대화가 끝나자, 벤이 그 틈을 파고들며 입을 연다.


“말로 귀족들을 회유하든, 아니면 피로 귀족들을 협박하든 일단 오열의 검성이 확실하게 중앙을 장악하기 전까진 움직일 시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크리스에게는 죄송한데, 여기서 카나반이 ‘동맹’이라는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지, 아니면 지켜봐야 할지 아직 판단을 세울 수가 없거든요.”


“이해합니다. 저도 아직 블라르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니까요. 표면적으론 친제국파인 검성을 중심으로 한 군부의 정변이지만, 공식적으로 그가 표명한 입장은 아직 없으니......”


그래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는 않은 크리스였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일 뿐, 무조건적인 협력이 필요한 지금 상황에 두 국가의 수장을 자극하는 우는 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벤의 말대로, 카나반은 중앙군의 회복이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 섣불리 크리스의 복권지지를 선언해버린다면 전선을 늘리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크리스가 니에브로 넘어가지 못한 건 정황상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당장 카나반에서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적대세력으로부터의 은신 정도뿐.


하지만,

여기서 중립국인 욘의 존재는 어떻게 다가올 수 있는가.


그 흐름을 깨달은 벤의 먹색 시선이 느긋한 그륜에게 향한다.


“그륜 님. 그러고 보니 그륜 님께서 카나반에 직접 오신 이유를 듣지 못한 것 같네요.”


“아, 그랬던가요?”


셔츠를 풀어헤치고, 그로써 드러난 자신의 무성한 가슴털을 벅벅 긁기 시작하는 그륜.


“예. 근데 지금 보니, 각하께서 방문을 결정하신 시기가 굉장히 미묘하게 와 닿네요. 시간과 노력이 곧 돈이라는 신념의 각하께서 장난삼아 헛걸음을 하실 리는 없고....... 혹시 각하께선-”

그 흐린 눈동자로 그륜의 눈을 꿰뚫어보기 위해, 벤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브린타이나에서 정변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과, 그리고 크리스 님이 그 도피처로 니에브가 아닌 카나반을 선택하리란 것을 예상하고 이렇게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핫핫핫!”

밀폐된 흡연실을 짧고 굵게 강타하는 그륜의 호탕한 웃음소리.

“과연 눈치 하나는 죽이시는군요. 예, 그 말씀대롭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크리스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자신과 디미르조차 감지하지 못한 불온한 움직임을, 바다 건너 이 경박해 보이는 남자가 먼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겐 경고의 편지 한 장이 없었다는 뜻이잖는가.

만약 이곳이 사석이었다면 크리스는 분노가 담긴 검을 뽑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잠재운 것은 벤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럼 각하께선 크리스 님과 카나반 둘 모두에게 제의할 거래가 있다는 말씀이겠죠?”


“예! 그 말씀도 맞습니다! 그런데 일단 제가 확인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죠.”

그륜의 시선이 향한 곳은,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크리스의 얼굴.

“아가씨께선 만약 카나반이 복권을 지지해준다고 한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내놓을 생각이셨습니까?”


갑작스럽게 본심을 뚫고 들어온 그의 질문에 냉정한 크리스조차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디미르와 시선을 마주쳤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제 복권을 지지하는 대가로, 팔루뎀과 그 일대의 양도를 제의할 생각이었습니다.”


로빈은 크게 놀란 눈으로 벤과 얼굴을 마주한다. 팔루뎀이란 도시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경악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해양과 내륙을 잇는 물류의 길목. 동시에 주변 평야는 에일로피아 남서부 최대의 곡창지대.

그뿐만이 아니다.

팔루뎀과 그 일대는 베르달과 더불어 국경유지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고, 소량이나마 이스누시아산에 버금가는 질 좋은 철광석을 얻을 수 있는 광산도 존재하고 있다.

그런 거점을 무혈로 얻을 수 있다면, 카나반 입장에선 장기적으로 굉장히 고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것이다.


“흐음, 과연.”


그리고 그런 크리스의 답을 예상했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는 그륜. 벤은 그 음흉해 보이는 장사꾼의 미소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각하께서 제의하실 거래는 어떤 겁니까?”


“아아, 뭐 간단합니다.”

과연 그 대답에 얽혀있는 이익관계도 간단할 수 있을지, 그의 표정만으로는 감히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카나반이 아가씨의 복권을 지지하게 된다면, 욘도 그 지지에 동참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륜의 말에, 크리스와 로빈 모두 숨을 죽인다.

3천 년이 넘는 반도역사에, 욘이 이토록 중립국이란 개념과 멀어지는 선택을 하려던 적이 있었나?


“다만, 복권이 성공하여 브린타이나가 카나반에게 팔루뎀을 양도하게 된다면-”


다시금 번지는,

장사꾼의 황금빛으로 빛나는 미소.





“도시의 모든 교역권을, 우리 욘에게 양도해주셨으면 합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ㅠ

어느덧 세 번째 연참도 끝났습니다.

시작할 때는 긴가민가해도 항상 끝은 보게 되는 게 연참의 매력인가 봅니다.

끝까지 관심가져주시고 응원해주신 독자분들 덕에 완주가 가능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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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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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1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0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9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0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5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5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7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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