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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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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036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3.1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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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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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21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DUMMY

지난 한 달간 한결같이 그래왔듯, 베르메스 평원의 야외훈련소는 생도들의 목소리와 교관들의 호통으로 떠들썩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침체된 분위기 속에 흐르는 신음이나 푸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천막 밖으로 나와 속옷만 걸친 채로 활기차게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야외훈련의 마지막 날, 아르다르로 복귀하기 전 모든 장구류를 세탁 및 일광건조하라는 표면적인 명령 하에 주어진 달콤한 휴식시간. 정숙과 질서를 요구하는 교관들의 목소리도 평소와는 다르게 그다지 위압감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 또한 이번 야외훈련이 얼마나 이들에게 지독했었는지를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생도들의 마음속에서 수만 번 욕을 먹었던 그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자비로운 방관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벌써 한 달이라니. 시간 드럽게 빨리 가네. 뭐, 우리는 훈련 말고도 다른 일에 더 바빴지만.”


소란스러운 중앙공터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분대용 천막. 그 입구 근처에서 여태까지 그들에게 훌륭한 식탁이 되어주었던 널찍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하누를 씹고 있는 셰르의 한탄 섞인 목소리였다. 보급용 팬티 한 장만을 걸친 그였지만, 덕분에 입소 전 비리비리했던 그의 몸도 어느덧 굴곡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름 당당한(?) 그와는 반대로, 유진은 여전히 얼굴의 홍조를 걷어내지 못한 채 그와 등을 지고 바위에 앉아있었다. 셰르가 천막 안에 틀어박혀 있으려는 그녀를 교관들이 뭐라 할 것이라는 핑계로 끄집어내긴 했지만, 유진은 줄곧 무릎을 끌어안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훌륭한 압박감을 자랑하는 전투브래지어도 그녀의 부드러움을 완벽히 감추지는 못한 탓이었다.


“야, 그러고 있으면 오히려 다들 쳐다본다니까? 다 같이 벌거벗고 샤워도 했고 참호전투도 했으면서 아직도 뭐가 그렇게 예민하냐? 가슈펠라르 여자들은 다 그렇게 숙맥이야?”


셰르가 뒤돌아본 것은 특별히 유진을 훔쳐보려고 했다기보다는 대화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마저도 허락할 생각이 없는 모양. 거세게 셰르의 날카로운 눈매를 밀어내며, 그녀는 울먹임에 가까운 목소리를 높였다.


“이쪽 보지 마아! 너네 시즈키치 남자들은 그런 것밖에 모르지? 방탕하고 음란하고 불결해!”


유진의 반응이 당황스러운 듯, 셰르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볼을 밀어내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뭔 개소리야. 누가 널 만지거나 덮치기라도 했어? 여기가 어딘줄 알고 아직도 음란이니 불결이니......., 군인, 그것도 동기들 사이에는 성을 구분해선 안 된다는 것도 몰라? 전장에선 그저 동료일 뿐이라고. 네가 그렇게 의식할수록, 주변 동기들만 불편해져.”


“하, 하지만.......”


붙잡힌 손을 재빨리 빼어내어 가슴 사이로 묻어버리는 유진. 어느덧 목까지 닿아있는 금빛 머리카락에 가려 그녀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실히는 볼 수 없었지만, 셰르는 그녀의 반응과, 그녀의 여태까지의 행태로 인해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것을 곧장 입 밖으로 내뱉고 만다.


“.......야, 너 혹시 아직도 처녀냐.......?”


선혈보다도 짙은 유진의 붉은 눈동자가 셰르의 얼굴과 마주한다. 주먹이라도 날아올 줄 알고 움찔한 셰르였지만, 고통 대신 그의 감각을 파고든 것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터져 나온 유진의 목소리였다.


“그, 그, 그게 뭐 어때서?!”


아아, 역시 그랬던 거였나.

셰르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같은 공화국의 대표귀족가문이라고 해도, 음지에서만 활동하다시피 했던 자신과는 달리 유진은 말 그대로 ‘본가’의 귀녀. 남자경험은커녕 평생 외지인과의 교류조차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번 징집령이 아니었다면, 기사학원에서 1-2년 정도 더 생활하다가 사교계를 통해 얼굴을 알리고 정계에 입문하는 전형적인 본가귀족의 길을 밟았을 터.

유진이 지닌 기사로서의 자질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순진함, 그녀가 가진 시즈키치에 대한 증오심.

그 모든 건 처음부터 설계돼 있던 일종의 장치들이었던 것이다.


“뭐, 뭘 그렇게 쳐다봐?”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모양. 셰르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다시금 몸을 감싸는 유진을 향해 짧은 한숨을 시작으로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남자들이 네 몸을 쳐다본다고 해서 그게 꼭 너를 향해 가지지 말아야 할 생각을 품고 있다는 뜻은 아냐. 네가 가진 여성미에 이끌리는 것은 남자들이 가진 본능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네 생각처럼 그들이 짐승이라는 소리는 아니지. 충분히 이성적인 생물이거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남자’가 아닌 ‘전우’로서 애들을 대해줘. 그럼 그럴수록 놈들이 널 보는 눈도 점차 순화될 테니까.”


차분한 셰르의 목소리에 유진은 커다란 붉은 눈을 끔뻑이며 그를 돌아본다. 그의 말이 정답이라는 사실보다는, 여태까지 헐뜯고 비방만 주고받았던 그가 처음으로 조언다운 조언을 해왔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그럼 넌 어떤데?”


“내가 뭐?”


스스로 내뱉은 질문에 놀란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 그러나 그녀는 뒤돌아보려는 셰르를 다시 밀어내면서도 자신의 혀를 멈출 수가 없었다.


“넌 어떠냐고. 그렇게 싫어하는 가슈펠라르 사람인데, 나를 여자나 동기로 봐줄 수 있어?”


“당연하지. 훈련소에선 어느 가문 출신이냐, 남자냐 여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잖아. 내가 가슈펠라르 가문에 그리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너는 충분히 훌륭한 동료라고 생각할 수 있지.”


“.......”


유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일종의 굴욕감이었다. 서로의 가문을 욕하면서 떠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성숙한 척을 하는 그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여자로서는......., 글쎄. 애초에 넌 그닥 내 취향도 아니고 말이지. 내 취향은 예를 들면....... 카논 교관님 같은?”


“뭐어?”


수치심도 잊은 채 아예 몸을 돌려 셰르를 노려보는 유진. 하지만 셰르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자신의 무죄를 증명한다.


“아니, 그냥 외견만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거지. 내가 교관님께 흑심을 품었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무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적어도 난 널 그런 시선으로 볼 일이 없으니까.”


“......그거 잘됐네.”


유진의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갑옷처럼 감싸고 있던 팔도 마침내 느슨해진다. 전투브래지어의 압박이 부족했던 탓에 그녀의 풍만한 윗가슴이 그대로 공기 중에 노출되었고, 근처를 지나던 몇몇 남자생도들의 시선을 빼앗았지만 그뿐이었다. 셰르의 말대로, 그들의 시선은 일회성이 짙었으며 지금까지 부끄러워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다.


“봤지? 이게 반복되다 보면 이제 쟤들도 감흥이 없어지는 거야. 네 검만이 너와 쟤들을 잇는 유일한 접점이라고.”


유진으로서는 처음 접하는, 셰르의 부드러운 미소. 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누 따왔어. 둘이 딱 붙어서 뭔 얘기?”


하누상자를 가득 안고서 나타난 리즈. ‘따왔다’는 말은 이 하누들이 교관과 생도들 사이에 벌어진 카드게임의 전리품이었다는 뜻이리라. 한겨울 낮에, 그것도 속옷차림으로 도박판에서 육포를 따오는 왕녀라니.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왕의 표정이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셰르는 상자를 받아들며 문득 머리에 스친 생각을 물었다.


“근데, 우리 왕녀님께선 맘에 두고 계신 사람이 없으시나?”


그의 경어는 장난이라는 절반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었지만, 대답하는 리즈의 표정은 예상치 못한 진중함을 품고 있었다.


“있는데.”


“뭐어?!” “뭐어?!”


하누상자 위로 경악하는 두 생도의 표정이 떠오른다.

단순히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을 것처럼 보였던 리즈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래 보여도, 리즈는 이 공화국의 3순위 왕위계승자.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가 만약 리즈와 정식으로 연을 맺는다면, 이는 술잔과 함께 시작하는 생도들끼리의 안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뭐야? 누군데? 같이 훈련받는 생도야? 아니면 수도사람?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는데?”


자동소총처럼 입을 떠벌리는 유진. 그녀는 어느새 눈을 빛내며 리즈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긴 뒤였다. 본인은 이 분야에 하등 지식이나 관련도 없으면서 남의 연애사엔 이렇게 흥분하여 달려든다. 기수에서 1,2위를 다투는 기사라고는 해도 어쩔 수 없는 열여덟의 소녀라고, 셰르는 얇게 웃으며 생각했다.


“ ‘좋아한다’라....... 글쎄, 좋아한다기보다는-”


하지만 그런 유진의 눈빛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리즈의 표정엔 부끄러움이나 가슴 아픈 짝사랑의 연민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리즈가 말을 마친 그 순간까지도, 셰르와 유진은 그 이유를 도무지 유추해낼 수가 없었다.




“그만이 내가 사랑할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일 테니까.”




================




거대한 분수를 품고 있는 은빛 광장. 모든 훈련생도들이 도시밖에 나가있는 탓에 훈련소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나 위병소는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특별히 추운 날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내려앉은 도시의 분위기 탓인지 광장을 오가는 인파는 평소보다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곳을 지나는 모든 얼굴들에 신경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한산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분수 가까이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 신문을 탐독 중인 청년에게 신경을 쓰는 시선은 전무했다.

굳은 표정으로 청년에게 다가서는 한 남자를 제외하고.


청년은 신문 너머로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경을 고쳐 쓰며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헤일러 시안 중위님. 예정에 딱 맞춰 오신 것은 훌륭한데, 결과물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


청년의 과도하게 식은 목소리에도 시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밀봉된 봉투를 넘길 뿐.

마력을 주입하여 빠르게 인장을 해제한 청년은 내용물을 빠르게 훑어본 뒤에 짧은 한숨을 내뱉는다.


“그 부부를 제외하고는 이 3명이 전부입니까? 영내 훈련소에는 잠입하기가 어려우니, 영외에 있을 때 최대한 모집해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중간에 한 교관으로부터 의심을 받았소. 이것도 마지막 날에 무모하게 잠입해서 얻어낸 결과요.”


“의심?”

청년의 날카로운 눈빛이 빠르게 광장의 구석구석을 훑는다.

“.......아시겠지만,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품으시면 욘에 있는 아내와는 영원히 이별하시게 됩니다. 아시죠?”


“물론.......”


청년은 그대로 시안의 눈을 마주한 채, 한참을 그곳에 흔들림이 없는지 살펴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신 명단을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시안의 인사나 의견은 상관없다는 듯이, 그대로 신문을 놓고 일어나 광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청년. 서두르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발걸음이었지만 그의 눈은 긴장을 놓고 있지 않았다.

전차역을 지나, 상업구역의 골목길로 들어설 때까지도 그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앞만을 바라보고 나아간다. 그런 그의 주위로, 네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것은 너무도 순식간이어서 위화감조차 들지 않았다.


“추적은 없습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의심을 받았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지요.”


그림자 중의 하나가 청년에게 건넨 말이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 억누르고는 있지만 미묘하게 흐르고 있는 영력은 그들이 모두 기사라는 증거. 청년은 그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봐야겠습니다. 아버님께는 그리 일러두세요. 적어도 근위대급 인물 하나 정도는 엮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내가 근위대 한 명 소개시켜줄까?”

청년의 표정이 굳기도 전에 네 명의 그림자가 동시에 검을 빼어든다.

뒤쪽 골목입구에 나타난 새로운 목소리는 네 기사의 위협은 안중에도 없는 듯, 얇은 검을 이리저리 흔들며 다가서고 있었다.

“꽤나 조심성 있게 행동하는 건 좋은데, 기척을 완벽히 지울 줄 아는 기사를 상대할 수도 있다는 걸 예상하셨어야지.”


새빨간 혀끝을 깨물며 빙긋 웃어 보이는 지나. 정면으로 햇빛을 받을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골목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청년은 그 목소리에 등진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네 명의 기사가 지나와 주인의 사이를 막아섰지만, 그들이 섣불리 4:1의 싸움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사가 아닌 청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피부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래도 눈앞에 있는 기사가 어느 정도의 존재인지는 알 수 있지?”

바람마저 멈춰버리는, 낮아진 지나의 목소리.

눈으로 보일 리가 없는 영력의 흐름이 마치 족쇄처럼 기사들의 의지를 묶어버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영력의 크기와 강함.

머뭇거리는 부하들의 생각을 읽어낸 청년이 내릴 수 있는 명령은 하나뿐이었다.


“.......무기를 거둬라.”


“하지만 도련님.......”


“그녀의 이름은 아뮤르 지나. 너희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만, 공화국에서 엘라론이나 카니아 다음으로 검성에 근접한 기사를 상대로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않으면 나보고 너희에게 개죽음을 명하라는 뜻이냐?”


“.......”


기사들은 결국 검을 바닥으로 내려놓는다. 그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우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서는 지나.


“흐흥, 꽤나 카나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침입자인가 본데, 체포되기 전에 얼굴 좀 보여주지?”


끝까지 자신에게 뒤돌아서있는 청년을 향한 일종의 협박. 기사들은 입술을 씹으며 지나에게 길을 터주었고, 그녀는 어렵지 않게 청년의 뒤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망설임 없이 지나를 향해 뒤돌아선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너는.......”


청년의 얼굴은 분명 익숙하다. 하지만 지나는 곧장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탓하고 있었지만,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존재감이 옅었던 얼굴이었으니까.


“변호사는 따로 선임하지 않겠습니다. 스스로 하죠. 다만, 이들은 제 명령에 따랐을 뿐,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니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네 명의 기사들은 동시에 반발했지만,

그것이 북부군사령관 그라우치 장군의 아들이자 아스트로바톰 이론마법학과 졸업반 차석에 빛나는, 라즈텔라무스 보르케의 두뇌가 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





“검성이 직접 중앙군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다고 한다.”


크리스의 통보는 짧았지만, 그 목소리가 일으킨 반향은 거대했다. 브린타이나 왕국을 상징하는 그 어떠한 휘장도 걸려있지 않은 백색벽의 회의실. 30좌석에 가까운 자리를 꿰차고 있는 얼굴들의 색깔은 그 출신만큼이나 다채로웠으나, 왕의 입에서 나온 내용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똑같았다.


“검성이 직접, 그것도 중앙군이라니! 제국과의 전쟁도 끝나지 않은 마당에 이 무슨 생각 없는 행동이란 말입니까?! 왕국의 동부를 통째로 내어주겠다는 뜻이 아니고서야!”


“이것은 명백한 내전의 의도. 곧바로 비난성명을 발표하시고 요격하시지요, 폐하!”


“검성이라고 해도 이제는 이빨 빠진 사자에 불과합니다. 이쪽엔 디미르 경이 있으니,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귀족들과 장군들이 침을 튀겨가며 왕국의 검성을 욕하고 크리스를 부추겨 세운다. 하지만 그들의 입과 혀를 제지하지는 않으면서도, 크리스의 눈빛은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대들이 발 벗고 합류해준 점에 대해선 깊이 감사한다. 하지만 수년간 정비해온 중앙군에 비해서 남부군은 아직 제대로 규합조차 되지 못한 상태. 블라르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빠르긴 했지만, 애초에 급박한 것은 우리 쪽이다.”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단순히 그녀가 가진 권위가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말대로 아직 남부의 귀족이나 영주들조차 완벽히 규합하지 못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폐하, 폐하께서 이곳 팔루뎀을 수복하시고 남부세력을 규합 중이라는 소식을 그들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아직도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그저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있는 잡배들이라는 뜻! 검성의 군대를 무너트리고 그들에게도 죄를 물으심이 마땅합니다.”


지방색이 강한 귀족들. 게다가 오랜 기간 전쟁을 앓아온 국경에서 대대로 살아온 자들이니 어느 정도 호전적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들의 직선적인 사고는 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는지라 그는 얇게 웃으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오르 경, 그대의 생각은 잘 알겠다. 그리고 자네를 비롯한 남부군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적은 지금 남하 중인 검성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크리스의 말에, 열을 올리던 시오르는 물론이고 많은 귀족들과 영주들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온다.

검성이 동부전선은 아예 구상에서 배제한 채로 중앙군을 이끌고 남하한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제국과의 일종의 협상을 마쳤다는 뜻. 그것이 단순히 내전이 끝날 때까지의 불가침조약인지, 아니면 대대적인 제국과의 협력관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크리스의 판단은 명확했다. 그리고 그 판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믈렌 소령의 목숨을 건 탈출.

“모두 들었겠지만, 친제국파인 검성이 정권을 찬탈하였음에도 제국은 초소를 습격하고 아군장병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바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서로 죽일 궁리만 하고 있는 것조차도 제국은 거대한 기회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도를 무시하면서까지 검성은 중앙군을 이끌고 짐의 목을 끊으러 오겠다는 거다. 이 어디에 라티스의 뜻이 있다는 건가? ‘오열’은 그저 제국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애초에 검성은 왕국에 충성을 맹세한 자가 맞는 것인가?”

분노가 스민 크리스의 목소리.

모든 표정은 침묵한 채로 왕의 눈빛을 가슴에 담는다.

“.......이 모든 더럽고 추잡한 의혹과 부조리를 반도 전체에 밝힘으로써 시작할 것이다.”


“시작...하시다니요? 무엇을 말입니까, 폐하?”


불안보다는 기대, 그리고 흥분이 번지기 시작하는 눈동자로 시오르는 자신의 왕을 바라본다. 그러나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시선들 중에서도, 크리스가 직접 마주하고 있는 것은 가장 구석에 앉아 느긋하게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카나반의 검성이었다.

지금부터 자신이 말할 모든 내용이, 다름 아닌 저 머리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내 동생의 정통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부정하는 것은 검성의 전통성이다. 그가 마땅히 왕국의 검성자리에 오를만한 인간이었는지 뿌리부터 밝혀내어 처단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한 시작으로, 더럽혀진 군부를 싸그리 밀어버리고 내가 직접 새로운 군과 내각을 구성한다. 그 자리의 주인공은 지방이든 귀족이 아니든 상관없다. 지금 이 자리에, 그리고 앞으로 나와 함께 할 목소리들에서 찾을 것이다. 알겠나? 나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브린타이나 왕국의 기저를 다듬겠다는 뜻이다.”


“폐하, 그 말씀은....... 복권을 넘어 새로운 국가관의 정립을 추구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시오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는다. 그러나 그를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없었다. 그 우락부락한 얼굴에 떠오른 것은, 감격에 가까운 표정이었으니.


“디나스아리얼의 왕좌에 집착하지 않겠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한 브린타이나의 탄생을 포고할 것이다. 남부의 모든 귀족과 영주, 그리고 마을 곳곳마다 나의 목소리를 퍼트려라! 나와 함께 하는 자는 새로운 왕국의 기틀로서 그 영광을 후세에 전달할 수 있을 것이나, 방관하거나 검성, 즉 제국에 동조하는 자는 반드시 끝까지 물색하여 핏방울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증발시켜버릴 것이다!

브린타이나의 고동은 이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림자 속에서 왕국의 미래를 옭아매고 있던 모든 족쇄를 끊어버리고, 불꽃은 다시 맹렬하게 타오를 것이다!”




자신의 푸른 눈동자마저 뜨겁게 불태운 그녀의 선언은,

브린타이나 남부는 물론이고 반도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팔루뎀을 중심으로 수많은 새로운 얼굴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었다.

침묵하고 있던 자, 움츠리고 있던 자, 방관하던 자,

그리고 역사에서 잊혀져가던 자.


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번 겨울은, 그리 차갑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도말고는 이래저래 모두 바빴던 13막도 막을 내립니다.

물론, 소식이 없다고해서 놀고먹고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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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3.14 01:20
    No. 1

    아오... 벤 ㅋㅋㅋㅋㅋㅋㅋㅋ 도대체 몇명을 데리고 살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체가 뭐냐! 이제슬슬 네놈의 장체를 드러내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3.14 01:26
    No. 2

    역시 왕은 절대왕정이지 ㅋ 입헌군주제나 민주주의 따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3.14 01:33
    No. 3

    에볼루션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ㅎㅎ
    죄많은 남자 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3.16 09:13
    No. 4

    라즈텔라무스 보르케가 누구죠? 죄성한데 기억이 잘... ㅠ.ㅜ
    그나저나 우리의 벤 역시나~~~~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3.16 19:04
    No. 5

    불의검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기억이 나지 않으시는게 당연합니다 :)
    1막과 2막 막간에 처음등장하고는 듬성듬성 이름만 나오던 녀석이니까요ㅠ
    답해드리자면, 보르케는 덴쿠레의 사촌으로, 고도에게 밀려 이론마법학과 차석을 도맡아 하던 전투마법사 지망생입니다. 경험을 쌓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나름 검성인' 벤을 보조하고 있었지요.(실상은 그냥 심부름꾼)
    그의 아버지는 카나반 북부거점도시인 아르보리스의 영주이자 북부군 사령관 라즈텔라무스 그라우치 장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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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3.16 15:49
    No. 6

    벤 개능력자... 개부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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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3.16 19:04
    No. 7

    동결님 오늘도 감사드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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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5.03.16 21:56
    No. 8

    역시 끝내주는군요. 최고 ^^=b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3.16 23:22
    No. 9

    앗 주정님 오랜만입니다!
    언제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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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용석손권
    작성일
    16.09.30 22:40
    No. 10

    아..1부 막간에 나왔던 그 보르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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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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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34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4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0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4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0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299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3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1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6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8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7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4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1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4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4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2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3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7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7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3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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