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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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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74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1.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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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
추천
33
글자
20쪽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DUMMY

단 한 번의 짧은 기합.

거대한 영압에 모든 수분이 증발한 대지는 바싹 말라버린 먼지와 함께 진동하고, 나무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리며 비명과 함께 쓰러진다. 생명을 허락하지 않는 목소리처럼, 그 기합이 닿는 모든 곳이 파괴의 흔적으로 물들어 간다. 만약 그 안에 영력이나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지 못하는 일반병사가 있었다면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지거나 살갗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태생과 자질을 갖고 수많은 전장을 거친 기사와 마법사일지라도, 영혼을 짓누르는 그 폭풍에 제대로 앞을 직시할 수 있는 눈동자는 없었다.

그 짧은 틈이, 자신들에겐 거대한 어둠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는 눈앞에 떠오른 장미의 미소를 통해 피부에 새기게 된다.


“할아버지는 건강하시니?”


사고할 순간마저 앗아가는 흑도의 불길한 빛. 기합으로 인해 잠시 놓쳤던 집중력의 작은 틈 사이를 도약해온 ‘붉은 장미’의 경악스러운 속도. 첫 사냥감을 자신으로 삼은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순간조차 없었다.

지나가 회색빛의 에페를 휘두른 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영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칠흑의 검을 막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 일렁이는 먹색의 불길은 마치, 이쪽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듯한-


-우직.


불편한 소리와 함께 지나는 감상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는다. 흐릿한 자신의 에페를 대신하여 장미의 검을 받아낸 그림자는 그녀의 큰할아버지, 슈리안. 그러나 회색 연철이 아닌 그의 검은 흑도의 영압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그의 오른팔과 함께 잘려나가고 만다. 비록 뼈밖에 남지 않은 팔이었지만, 슈리안의 턱뼈 위로 불편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래도 미세하게 흑도의 궤도를 틀어버린 것엔 성공했기에 지나에게 그 불길한 빛이 닿는 일은 없었다.

드렌턴의 대검이 장미가 있었던 땅에 내리꽂혔고, 무거운 영력의 파동과 함께 튀어 오르는 먼지와 흙더미를 방패 삼아 둘은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말했잖니. 검성의 검은 의식까지 빨아들인다고. 평범한 기사와의 싸움으로 생각해서는 안 돼.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공격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하지 말고 몸이 따라가는 대로 먼저 움직이렴.”


반듯하게 잘려나간 슈리안의 아래팔뼈를 바라보며, 지나는 감사하다는 말 대신 분홍빛 입술을 깨물면서 에페를 잡고 일어선다. 이미 드렌턴의 대검이 장미에게 붙잡힌 채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그런 근위대장을 구원하기 위해 뒤에서 다가가는 오즈카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지나는 오즈카 또한 지금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이 따라가는 대로 먼저 움직이라고?

이 몸은,

저 여자에게 접근하지 말라며 필사적으로 경고하고 있는데?


그러나 아무리 의식을 삼키고 몸을 굴복시킨다 해도, 그 존재를 향한 발걸음에 담긴 의지만큼은 흐려지지 않는다. 오즈카와 눈빛을 교환하고 도약하려는 그 순간, 먼저 장미를 덮친 것은 광기의 잔여물이었다.


“한 번 나에게 이빨을 들이민 것은 어미의 아량으로 봐줬다만, 두 번까지는 기대하지 마라.”


“그 목을 물어뜯을 수만 있다면야, 송곳니 하나만 남는다고 해도 상관없는데.”


다시 마주친 장미의 흑도와 꽃잎의 회색 검. 장미의 반대편 손에선 드렌턴의 대검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조각들의 사이로 엘라가 발을 날렸지만, 이미 약해진 그녀의 무릎은 쉽게 장미의 손에 붙잡히고 만다. 그녀의 무릎이 가루가 되기 직전, 크라트가 옆에서 시퍼런 눈과 함께 검을 찌르고 들어왔으나 흑도가 한번 빛을 훔치자 엘라와 크라트 모두 피를 흩뿌리며 나가떨어져야 했다.

호흡의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하파의 화염이 장미의 곁에서 타오른다. 그러나 델핀이 다시 한 번 기합을 내지르는 것으로 하파의 마력은 먼지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았고, 그 순간 상처를 입은 것은 하파의 자존심뿐만이 아니라 화염 사이로 파고들려던 지나와 오즈카도 마찬가지였다. 기합과 함께 새어 나오는 델핀의 목소리는 마치 칼날과도 같았다. 지나는 닿지도 않은 검에 베여 피로 얼룩지는 가슴을 내려다보고 혀를 찬다.


“순환식인가. 나를 지치게 만들고, 틈을 봐서 내빼려는 수작이구나. 감히 나를 상대로 탐색전이라니 꽤나 화가 나는데?”


다시 달려드는 엘라의 검을 받으며 델핀은 부드럽게 웃었다. 곧바로 그녀의 흑도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수차례 엘라를 향해 적의를 뿜기 시작한다. ‘광기의 꽃잎’은 그 광기에 가까운 본능만으로 사방에서 조여오는 그림자를 모두 막아내는 것엔 성공하지만, 균열이 일기 시작한 자신의 연철검을 눈치 채지 못하고 결국 부러지는 검의 파편 사이로 파고든 흑도에게 어깨관통상을 허용하고 만다.

델핀은 곧이어 검을 잡지 않는 손으로 보고 있지도 않던 자신의 등 뒤를 향해 주먹을 내지른다. 그 주먹은 그대로 이리스의 가슴에 명중했고, 인형의 합금골격을 부수며 폐를 찢었다. 소녀는 마른 흙바닥을 향해 괴로운 듯 피를 토하며 쓰러져야 했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라는 오캄푸스의 말을 따르고 있던 고도. 그녀가 주문을 외운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전투마법사로서의 실전경험이라곤 없다시피 한 고도를 최강기사와의 전투에 투입한다는 건 무리가 있다. 기사들과의 호흡, 치고 들어갈 적기, 그 모든 것에 어색한 그녀가 오히려 아군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악마의 힘이라는, 특무대에 유일한 변수가 될 수도 있는 그 카드를 최대한 노출하지 않고 눈으로 먼저 경험을 쌓게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오캄푸스의 생각이었다.

그가 간과했던 점은, 가장 차갑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고도가 저 작은 인형소녀에게 가지고 있는 유대감이었다.


“이리스!”


붉은 줄기가 바닥을 가로지르며 장미에게 달려든다. 그것에 닿는 꽃과 풀은 곧바로 생기를 잃고 색을 잃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두꺼운 악의. 악마라는 존재의 불결함도 잊은 채, 고도는 단 하나의 분노를 위해 난생처음으로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 마력을 내뿜었다.

크라트의 도움을 받으며 흑도로부터 벗어나려는 엘라. 그런 딸을 향한 ‘붉은 장미’의 시선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기에, 고도는 붉은 혈류가 델핀을 집어삼킬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어?”


하지만,

그녀의 붉은 분노는 너무도 허무하게 흑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고도의 바닷빛 눈동자 위로 장미의 비웃음이 흐른다.


“카나반에 악마계약자라-, 놀랍구나. 그러나 나에게 ‘악의’는 통하지 않는단다, 꼬마야.”

모든 혈마력을 빨아들인 흑도를 사랑스럽게 쓰다듬는 델핀.

“이 존재 자체가 ‘악의’와 ‘적의’로 가득 차있거든.”



낮은 땅의 울림과 함께 북쪽의 숲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와 숲을 뒤덮으며 나타난 수천의 병사. 검은 제복의 위로 제국의 용깃발이 펄럭인다. 서쪽에서 되돌아온 아실레마의 선발대였다.

드렌턴은 피로 축축한 입술을 깨물었다.

광기의 꽃잎과는 다르다. 저 장미는 결코 무모하지 않다. 피가 끓는 일 없이, 겨울처럼 차갑고 냉철하다. 오히려 탐색전을 당한 것은 이쪽이었다. 그녀는 검성이란 자신의 존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그에 대한 이쪽의 반응을 살펴본 것이겠지. 결국엔 자신이 군단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붉은 장미’니까.


“이 지긋지긋하게 푸른 숲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너희들이야말로 카나반의 ‘최선’이라는 소리겠지? 터무니없지만, 결국엔 나를 향한 검.”

차갑게 번지는, 얇은 미소.

“여기서 모두 죽어줘야겠어.”


붉은 장미의 뒤로 제국의 병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동시에 카나반의 특무대 또한 자연스럽게 드렌턴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로빈이 이끄는 본대는 제시간에 못 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곧바로 퇴각했다가는, 퇴각 중인 베르달군의 후미가 검성에 의해 박살나겠지. 게다가 도망간다고 해도 장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아.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해.”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대원들을 훑는다.

자신의 대검은 이미 박살났고, 남은 것은 보조무기인 환도뿐. 특무대의 주력이라고 볼 수 있는 엘라는 이미 무릎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어깨의 출혈도 가볍지 않다. 심지어 마지막 무기라고 생각했던 고도의 혈마법까지 통하지 않는 상황.

그러나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숲의 지형을 이용해서 천천히 후방으로 빠지는 식으로 시간을 끌자. 엘라론과 크라트, 그리고 하파가 최대한 장미의 발을 묶어라. 오캄푸스님은 이 아가씨를 데리고 적 포격에 대한 보호막에 집중해 주십시오. 꼬마, 움직일 수 있겠어?”

드렌턴의 물음에, 고도의 품에 안겨있던 이리스가 짧고 붉은 기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럼 나머지는 최대한 간격과 대열을 유지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델핀이 달려든 것은 그 직후였다. 엄청난 영압을 일으키며 흑도가 춤을 추었지만, 날카로운 흐름의 마수에서 검을 받아낸 것은 어느새 장검을 되찾은 엘라와 차가운 눈빛의 크라트. 나머지 눈동자들은 동시에 좌우로 넓게 간격을 벌려 몰려오는 제국병사들을 향해 무기를 고쳐 잡고 있었다.


“시간을 끌어보겠다? 이거 진짜로 얕보인 모양인데.”


뒤틀린 미소와 함께 도약하려는 장미의 앞을, 다시금 꽃잎과 늑대가 막아선다. 드렌턴의 작전은 델핀의 반격은 생각하지 말고 그녀의 발을 묶기만 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반격은커녕 단순히 그녀의 공격을 막는 것 자체에 필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엘라와 크라트는 알고 있었다.





수천의 군대로 소수정예의 기사와 마법사를 제압하기 위해선 포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하지만 숲과 나무를 방패삼아 유기적으로 간격을 조율하는 그들을 감싸기란 제국군에게도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틈을 붕괴시킬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은 꽃잎과 늑대, 그리고 능숙한 전투마법사에게 묶여있는 상황. 아실레마 2군단 선발대의 부관들은 서서히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낮고 우직한 목소리가 영력에 실려 숲을 가로지른다.


“병사들을 나누어 퇴각 중인 적 부대를 추격해라! 놈들은 시간을 벌려는 것뿐이다! 기사와 마법사에게 맡겨두고 부관들은 병력을 인솔해서 적 부대의 뒤를 밟아라!”


소리를 지른 본인도 말에서 내려 전방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그 구릿빛 얼굴을 알아챈 눈동자가 있었다.


“오즈카!”


지나가 대열을 이탈하여 혼자 돌진하는 그림자의 이름을 불렀지만, 오즈카는 이미 ‘적의 장군’을 향해 단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무거운 영력이 실린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며, 댄은 그립다는 듯, 다가온 이름을 부른다.


“오랜만이구나, 오즈.”


“.......당신, 당신 때문에......!”


주변으로 감싸오는 적병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단검을 휘두르는 오즈카. 그러나 그 날카로운 날은 아버지에게 닿지 않는다.


“재회의 인사치고는 좀 거칠군.”


댄이 모든 영력을 집중하여 검을 휘둘렀고, 뒤이어 그 무게감에 휘청거리는 오즈카의 복부를 걷어찬다. 충격에 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오즈카는 쓰러지지 않고 아버지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어머니는-”


“아아, 가엾게도 말이지. 나를 따라서 왔으면 좋았을 텐데. 멍청한 여자.”


분노로 구겨지는 오즈카의 얼굴. 이미 적병에 반쯤 둘러싸인 그의 무모한 돌진을 제지한 것은, 오캄푸스의 광범위 폭발마법과 지나의 손길이었다.


“오즈카! 죽을 셈이야?! 머리 좀 식히고, 간격 유지해!”




오캄푸스와 함께 보호막에 집중해달라-는 드렌턴의 요구였지만, 고도는 자신의 옆에서 주문조차 외우지 않고 마법을 흩뿌리는 오캄푸스에게 자신의 미약한 마력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고 있었다. 분명, 대원들을 향해 날아드는 적 마법사들의 폭격은 예사롭지 않다. 정예전투마법사의 잘 훈련된 마력과 정확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오캄푸스는 그런 마법들을 막기 위해 보호막을 치지 않는다.

쏟아지는 마력의 흐름을 느끼고, 그 하나하나를 최소한의 마력으로 요격하면서도 동시에 빠르게 전장을 읽으며 필요한 적소에 공격마법과 범위마법을 때려 박고 있다. 실로 엄청난 시야와 판단력. 과연 마법사계의 검성이라 불릴만한 그랜드마스터다.

이런 그가 어째서-


“왜 검성과의 전투에서 가만히 있었나, 그게 궁금한가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공허한 시선과 마력이 담긴 손짓. 거기에 자신의 의중까지 꿰뚫어봤단 말인가?

부끄러움보다는 경악과 존경심이 솟구치는 고도였다.

“그녀가 들고 있는 까만 검은 사도를 베는 검이라 불리는 흑도, 오미누스움브라. 주인의 영력과 생명을 갉아먹는 대신 주인을 향한 적의를 모두 빨아들이는 불길한 녀석이죠. 적의가 담겼다면 마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파 대위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녀에게 직접 마력을 폭파하는 대신 주변에서 견제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즉, 저걸 들고 있는 이상 마법사는 ‘붉은 장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하, 하지만-”


“아, 이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고도의 목소리를 가로채며, 오캄푸스가 낮은 신음을 흘린다.

“장미께서 화가 나신 모양이니.”




깨부수려하면 간격을 벌리고, 그렇다고 이쪽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은 채로 끈질기게 달라붙고 있는 딸과 늑대. 귀찮은 그들의 뒤를 잡았다 싶으면 어디선가 공격마법과 발광마법이 날아와 시야를 방해한다. ‘붉은 장미’ 델핀은 자신이 먼저 파고들지 않으면 부하들이 그들의 대열을 흩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슬슬 짜증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짜증은, 곧바로 얇은 미소가 되어 그녀의 입가에 스친다.

그녀가 앞으로 도약한다. 그리고 예상대로, 숲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던 꽃잎과 늑대가 양쪽에서 튀어나온다. 자연스럽게 영력을 가르는 흑도. 엘라가 고통이 더해져가는 어깨로 인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흑도를 막아서고, 옆에서 크라트가 찌르고 들어온다. 여기서 둘을 한꺼번에 물리치는 순간, 바로 앞에서 폭염마법이 터진다.

같은 흐름이었다. 이 어지러운 시계를 틈타 딸과 늑대는 다시 모습을 감출 것이고, 자신이 다시 튀어나오기를 기다리겠지. 그러나 델핀은 언제까지고 이 흐름에 같이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폭염을 뚫고 장미의 모습이 다시 숲을 가로지른다. 곁에 있던 나무의 껍질이 구겨질 정도의 도약. 갑작스러운 빠르기에 곧바로 나타난 엘라와 크라트였으나, 델핀은 웃으며 땅을 향해 흑도를 내리쳤다.

굉음이 숲을 울린다. 나무의 높이를 넘어 솟구치는 흙과 돌의 잔재들. 전의 기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파동에 그녀를 바로 뒤에서 따르던 제국병사들은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지만, 델핀은 개의치 않는다. 이 ‘위협’으로 딸과 늑대는 다시 모습을 감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습을 감추지 못한 그림자가 하나 남아있었다.

델핀은 솟았던 흙더미가 땅에 내려앉기도 전에 다시금 폭풍을 일으키며 도약한다. 그녀가 멈춘 곳은, 주문을 외우고 있던 전투마법사의 눈앞.

하파는 당황하여 다시 한 번 폭발을 일으키지만, 그녀의 마력은 흑도를 향해 주인의 의지와 함께 빨려 들어간다.


“어떤 향이 나느냐?”

얇은 미소.

델핀은 조심스럽게 하파의 목을 끌어안는다.

“죽음이라는 꽃에선 말이지.”


흑도가 피를 머금고, 하파의 머리는 여전히 델핀의 품에 안겨있었지만, 그녀의 몸은 그대로 바닥을 향해 무너진다. 표정이 멈춘 마법사의 입술을 핥으며, 장미는 뒤로 다가오는 엘라와 크라트를 향해 웃었다.



“이제 도망치지 못하겠지. 자, 내 즐거운 악의를 얼마나 버틸 수 있겠니?”




드렌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리스를 간신히 받아내어 품에 안았다. 상처 입은 ‘인형’의 폐는 계속해서 피를 내뿜고 있었던 모양이다. 괴로운 듯 켈록거리며 붉은 생명을 뱉어내는 아이의 눈동자엔 눈물이 잔뜩 맺혀있다. 그러나 드렌턴은 그 이상으로 인형소녀를 배려해줄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힘겹게 델핀의 검을 받으며 상처를 늘려가고 있는 엘라와 크라트를 찾아낸 것이다.

왼쪽으로 파고드는 제국군을 훌륭하게 막아내고 있는 지나와 오즈카이지만, 지나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은 드렌턴도 알고 있었다. 급박한 흐름, 본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도록 되어있던 카논과 레이쇼마저 내려온 상황. 오른쪽은 오캄푸스의 저지력이 없었다면 애초에 뚫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제 장미를 묶어두고 있는 저 둘마저 무너진다면, 더 이상 ‘붉은 장미’의 학살극을 잡을 수 있는 시간 따윈 남지 않게 된다.

적어도,

고도와 지나만큼은 살려서 돌려보내야 한다.

이것이 드렌턴이 최종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특무대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다. 우선 로빈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가 자책하면서 슬퍼할 꼬락서니가 눈에 선했지만, 적어도 곁에서 그를 위로해줄 따스한 목소리 하나쯤은 남겨야 한다. 그리고 특무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고도는 살아나가야 한다. 똑똑한 그녀라면, 어떻게든 파훼법을 찾아낼 테니까.

이리스의 눈물과 입가의 피를 닦아내면서, 드렌턴은 마지막 명령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숲의 서쪽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이번에는 정말로 숲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가 흔들리고, 숲의 울음소리가 넓게 퍼져나간다. 낮은 짐승의 울부짖음, 지축을 뒤흔드는 울림, 높게 치솟는 마력과 영력의 파동.

그 이질감은 델핀의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그 누구도 답을 내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적의 지원군.......?’


로빈이 이끄는 본대는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다. 서쪽에 주둔 중인 아군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드렌턴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순간 의문을 품으며 멈춰선 것은 델핀과 제국군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이 울림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드렌턴은 짧은 탄식과 함께, 숲의 그림자 사이로 나타난 그 정체를 볼 수 있었다.


중무장한 수인들.

황금빛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슈테인울프와 하운더의 무리.

그들을 뒤에서 지휘하고 있는 수인 비스트마스터들.

나무의 호흡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황금빛과 드루이드들.


이색적이고 기묘한 조합의 군대가 제국군의 좌측면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 정체와 목적이 불분명한 군대의 등장으로 인해 제국군의 부관들은 당황하여 반격을 위한 재정비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장군. 측면이 무너집니다.”


얇은 미소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델핀을 향해 댄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서요? 그냥 다 죽여 버릴 수도 있는데?”


“장군.”


굳은 댄의 표정. 결국 델핀은 어깨를 으쓱하며 흑도를 거둔다.


“알았어요, 알았어. 무너진 측면은 버리고 본대를 이끌고 물러납시다. 뭐, 오늘만 기회는 아니니까.”


그녀의 검은 시선은 나무 사이로 파고들고 있는 두 그림자를 끈질기게 쫓고 있었지만, 결국 빠르게 미련을 버리고 뒤돌아서야 했다.



물러나고 있는 제국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드렌턴은, 이리스의 기침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며 다가오는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거대한 사슴의 등을 빌리고 있는 드루이드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검은 말이 고개를 비집고 나온다.


“이야, 이거 늦을 뻔했네.”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후드 아래로 숲의 빛을 받아 드러난 것은, 더욱 익숙한 얼굴.




“고생 많았어.”


자신에게 달려오는 이리스를 안아 들며, 벤이 웃었다.


작가의말

아센 하파, 아르다르 출신, 아르다르 수도방위대 선임전투마법사, 향년 31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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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1.20 22:17
    No. 1

    헐 하파... 하긴 검성이랑 붙었는데 네임드 하나가 죽긴 해야겠군요....
    벤 오랜만! 벤은 그러고보면 조커 비슷하군요...
    그리고 망자는 신경이 없을텐데 아픔을 느끼나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21 01:16
    No. 2

    동결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ㅠ
    망자는 신경은 없지만 감각은 남아있기에, 슈리안이 잘린 팔을 보고 신음을 흘린것은 아프다기 보다는 기분이 나빠서입니다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1.21 08:25
    No. 3

    벤이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 결정적 한방을 날리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21 11:55
    No. 4

    불의검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ㅠ
    벤도 일단 직위는 검ㅋ성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1.21 13:49
    No. 5

    검성은 검성으로 막는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21 14:18
    No. 6

    으잌 에볼루션님 오늘도 감사드려요!
    근데 막상 만나면 1초컷 당할 것 같은 예감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배고파요
    작성일
    16.08.20 02:19
    No. 7

    반지의제왕..... 한장면이 생각나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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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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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34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0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4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59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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