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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204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12.29 19:05
조회
1,184
추천
39
글자
18쪽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DUMMY

침울한 도시의 표정보다도 더욱 뒤틀린 시선으로 귀족파의원들은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왕을 바라본다. 로빈이 겪은 모든 일을 감안하여 그간의 직무유기에도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리라 다짐했던 그들이었지만, 짧은 인사말 뒤에 왕이 꺼낸 안건은 도무지 인자한 얼굴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사도국인 카나반에서 혈마법을 용인해주자, 이 말씀이십니까?”


모든 귀족파의 당혹감을 대신하여, 란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망설임도, 그리고 길게 이어진 불길한 표정도 모두 예상했던 바였기 때문에, 손을 내저으며 대답하는 로빈의 목소리는 다소 가벼울 수 있었다.


“아뇨아뇨, 혈마법이나 악마숭배 자체를 용인하자는 뜻이 아니에요. 여러분도 제르나비 고도라는 마법대학생에 대해선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번 아르바티앙 습격당시 도시를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약자죠.”


“혈마법으로 대규모 망자를 조종한 그 악마계약자말입니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덕분에 망자관련특별법으로 요새 정신이 없는데.”


귀족파대열에서 농도 짙은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왕당파가 아니다.


“말이 가볍소!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르바티앙은 적의 손에 넘어갔을 겁니다! 오히려 우리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악마의 힘 따위 빌려서 얻어낸 공적을 대대적으로 치하라도 해줘야한다는 겁니까? 잊으셨나본데, 카나반은 아직 사도국입니다. 종교재판을 통한 파문도 우스울 마당에 혈마법특무대라니요?”


회의장이 들썩이기 시작하고, 로빈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말없이 혼란을 지켜본다. 그에겐 이 첨예한 대립을 제지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 방관의 틈을 찌르고 들어온 사람은, 마찬가지로 침묵하고 있던 란다.


“혈마법을 공식적으로 용인하지 않고서 어떤 형식으로 특무대를 꾸린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얇은 목소리는 회의실 전체를 휩쓸고 있는 비방과 반박의 물결에 비해 터무니없이 미약했지만, 진중한 표정과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날카로운 중심은 퍼져나가는 파동처럼 서서히 관심을 집중시킨다. 로빈은 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가 방관하고 있던 이유는, 이미 그의 머릿속으론 결론이 나온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계약의 첫 의도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불순했다는 사실은 맞지만, 어쨌건 제르나비가 악마와 계약을 했고 아직 그 계약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 그녀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악마의 힘을 이용하여 공화국의 제2도시이자 최대의 항구도시 아르바티앙을 지켜냈습니다. 그녀에게 우린 어떻게 반응해야겠습니까? 사도국이란 이유로 그녀를 파문하고 추방해야합니까? 이런 시국에, 그 안일함과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향하는 곳이 결국 어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를 밑밥으로 깔아놓고서, 그는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는다.

“이번 침략전쟁에 한해서, 특히 ‘붉은 장미의 검성’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의 힘을 이용하자는 말입니다. 국내엔 제르나비처럼 1:1로 권능의 일부를 양도받은 사도와의 계약자가 전무하지 않습니까? 이런 유용한 전력을, 이런 급박한 상황에,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배제한다는 건 실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

란다의 붉은 눈동자와 미간이 동시에 구겨진다.

“폐하, 이 공화국이 어떻게 세워졌으며 어째서 숲의 수호와 은총을 받아왔는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국가의 기저와 전통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중심사상을 ‘단순한 종교적 이유’라고 치부하시면, 세뮈엘님의 축복을 받으시고 정당성을 인정받아 왕좌에 오르실 수 있었던 폐하께서 스스로 부정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건 비약입니다, 란다 경.”

오로메의 부드럽고 느긋한 표정이 란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애초에 폐하께서 공화국의 이념에 뜻이 없으셨다면, 세뮈엘님께서 은총을 내리시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한 마법대학생의 임시적인 계약과 혈마법운용을 허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라의 기틀을 뒤흔들지는 않습니다. 폐하의 말씀처럼, 악마와의 계약이 종료되기 전에 그 힘을 당장 시급한 국방에 이용하는 편이 여러모로 현명하다고 생각됩니다만, 혹시 귀족파에선 더 좋은 의견이 있으신 건지?”


그녀의 사글사글한 미소에 반박할 수 있는 귀족은 없었다. 어색하고 치욕적인 침묵이 귀족파의 대열에 흐르기 직전, 란다의 입이 다시 열린다.


“제 걱정은 폐하가 악마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신다는 겁니다. 어이없는 실수에 의해 소환된 정체모를 악마에게 의지하는 이이, 결국 어떤 결론으로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에 대해선 곧 답이 나올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로빈에게 향한다. 방금 그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묻는 시선들이었지만, 그는 얇게 웃으며 턱을 매만질 뿐이었다.

“면담을 보냈으니까요.”





===================





동아리방의 문이 살며시 열리고, 먼저 그 사이로 나타난 것은 더위로 살짝 달아오른 이리스의 오동통한 뺨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해방이라는 표정으로 내내 열기를 붙잡아 두던 후드를 벗어 던지고는 자연스럽게 소파의 한쪽을 차지한다. 동시에 여전히 책무더기에 파묻혀있는 데로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손을 들어보였지만, 악마는 그 특유의 검은 시선을 한 번 흘려주었을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문이 닫히고, 이리스의 뒤를 이어서 벤과 고도가 방으로 들어선다. 그들의 시선은 목표가 분명했다. 평소처럼 악마의 앞에 서고, 그의 검은 시선을 얻기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건 고도의 분홍색 입술.


“너, 정체가 뭐야?”

수없이 물어왔지만 언제나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답을 들을 때가 왔다. 아니, 들어야한다고, 고도는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약간의 불안을 잠재우며 악마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계약자였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 정도 규모의 망자를 일으켰다는 건, 아펜타우스의 권능을 빌렸다는 소리겠지.”

마침내 악마의 시선을 얻는 데에 성공한 고도.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굳건해진다.

“그리고 너는 나를 통해서 가볍게 그의 혈마력을 제압했어. 계약자의 대가를 받았다는 이유로 같은 악마에게, 그것도 피의 군주 아펜타우스에게 서슴없이 반기를 들었단 말이야. 더 이상 너를 단순히 혈마력만을 제공해주는 악마라고 생각할 수 없어. 그러니까 다시 물을게. 너, 정체가 뭐야?”


“니 새끼 뒤에 있는 새끼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텐데.”

데로의 즉답.

그리고 그 즉답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도는 천천히 뒤돌아본다. 벤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그저 악마의 검은 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새끼는 스스로의 목숨을 이용하여 니 새끼의 계약을 반강제로 이끌어냈다. 난 그걸 도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철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감히 내릴 수 없었던 선택이겠지.”


“확신이라니? 무슨 확신?”


고도의 바닷빛 눈동자가 다시금 악마를 향한다. 결국 데로는 책을 덮는다. 그는 천천히 등받이 위로 팔을 올려놓아 장시간의 독서가 초래한 어깨 결림을 해결하며 탄식을 뱉는다.


“내가 니 새끼에게 받은 대가가 무엇인지 말이다.”


계약자 스스로도 모르는 악마의 ‘대가’를, 벤은 알고 있었다?

악마가 계약자에게 요구하는 대가는 곧 그 악마의 정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개념이다. 왕립교회의 악마사전에서도 찾지 못했던 ‘블데로’라는 이름이 무엇을 관장하고 이 세계에 뿌리내렸는지를, 벤은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째서 벤은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보다도,

어째서 벤이 그 사실을 이용하여 자신의 계약을 이끌어낼 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던 걸까.

모욕감과 호기심의 애매한 경계를 넘나드는 고도의 시선이 천천히 데로에게로 돌아선다. 기다렸다는 듯이, 악마는 검은 혀를 흔들며 그녀의 사고를 조롱한다.


“니 새끼 스스로 물어봐라. 나에게 처음 계약을 요구했을 때, 그리고 저기 있는 새끼가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을 때, 니 새끼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냐?”


대학생활, 버려진 인생을 유일하게 지탱해주던 길이 사라진 순간,

그리고 눈앞에서 벤이 망자의 손길에 찢겨져나가기 직전.

모든 것을 버리리라 다짐하면서까지 추구했던 그 모든 것이 뒤집어졌을 때,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던 존재는-




“ ‘절망’을 관장하는 군주, 블데로티우스. 인류가 반도의 주인으로 자리 잡은 이후, 더 이상 자신의 권능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존재를 감춘 태초의 악마. 인간과의 접점이 전무했으니 악마사전에 이름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


벤의 무덤덤하고 나직한 목소리. 하지만 그 무심한 입술사이로 나온 내용에 고도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든다.


“......‘절망의 악마’라니, 들어본 적 없어.”


“말했잖아. 인류와의 접점이 아예 없었다고. 아티카에서 살던 시절에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서 도서관을 뒤져봤는데, 역사서나 사전에서는 이미 존재자체가 잊힌 모양이더라. 설화집에서나 간신히 이름을 찾을 수 있었어.”



절망을 관장하는 악마 블데로티우스.

고도는 그런 개념과,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마법대학의 사전이란 사전은 모두 탐독한 그녀의 뇌에 남아있지 않은 이름이란, 그야말로 학계에서 지워진 존재라는 뜻.

심지어 학회장이 빌려준 혈마법서에서도 그런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설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태초의 존재. 그런 악마가 어째서 이런 소년의 모습으로, 이제야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흔쾌히 자신의 절망을 먹어주었는가.



고도가 악마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소년의 입가엔 어둡고 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궁금한가? 의문투성이겠지. 인간이란 종족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절망을 머금고 살아가는 새끼들이었다. 내가 권능을 부릴 틈도, 부릴 이유도 이 땅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지. 그래서 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시간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서 나를 끄집어낸 것이, 바로 저 새끼의 피.”

코딱지였잖아- 라고 벤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데로의 눈빛에 제압당하고 만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 세계에 구현될 물리적 신체조차 제대로 다잡지 못했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 황금대야에 몸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궁금했지. 왜 내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곳에 있는 걸까. 그리고 이 모든 게 정말로 단순한 우연의 산물인가.”

데로는 그 물음에 스스로 대답하기 위해 책을 들어보였다.

“난 그 답을 너희 인간새끼들에게서 찾기로 했다. 니 새끼들의 지식, 니 새끼들의 역사, 니 새끼들의 사상. 왜 내가 다시 강림해야했는지 그 이유를 이것들에게서 찾기로 했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

어느새 의자를 끌고 앉아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벤과 고도를 향해, 데로는 얇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니 새끼들, 인간은 굉장히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 시작한 이래로 이토록 종으로서의 생명을 불태우는 새끼들은 나는 본적이 없다. 실로 흥미로웠다. 필요성이라는 질서를 무너트리면서도 니 새끼들 세계에서 하나의 변수를 던져주고 싶어졌다. 이해하겠나, 제르나비 고도?”


처음으로 악마에게 이름을 불린 순간,

고도는 전신에 돋은 묘한 소름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니 새끼가 나의 ‘사도’가 되어 이 균형이라는 사치에 절망을 선사해주었으면 하는 거다.”

덮었던 책을 펴고, 악마는 인간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 시작으로, 허락되지 않는 악마의 힘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니 새끼들의 왕. 그 새끼의 생각부터 들어보도록 할까.”





====================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길을 걷다 무심코 부딪친 게 아니다. 실수로 발을 밟거나 진로를 방해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두터운 후드 아래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연신 사과를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과 마주하는 모든 행인들.

한여름의 복장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두터운 후드와 망토, 전신을 감싸고 있는 가죽옷. 모두의 시선에 대해 사과를 하면서도 그 시선을 주목시킬 수밖에 없는 차림이었지만, 장본인은 도저히 그들을 벗어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얼굴과 몸을 내보인다면, 지금보다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비명과 경악이 그의 주변을 휩쓸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르다르 내성의 주민들이 ‘그 존재’를 모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신문을 통해 수없이 들었고, 그들을 위한 특별법제정이 준비 중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그러나 듣기만 하던 존재를 길에서 우연찮게 직접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일그러지는 표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표정과,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아이와,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트리는 아낙네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사과의 목소리뿐이었다.

살과 피부를 대신하여 후드가 감추고 있는 신체라고는 하얀 백골이 전부. 눈동자가 있어야할 자리엔 푸르스름한 빛이 감싸고 있는 공허가 가득했으며, 반쯤 떨어져나간 턱뼈 아래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오로지 영력의 잔재로만 이루어진 파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두터운 망토와 옷 아래로 감춰진 몸도 다르지 않았다. 뼈와 뼈를 이어주는 최소한의 근육과 인대도 없이, 오로지 남아있는 생명과 사고로만 존재하고 있는 ‘망자’.

아르바티앙에서 무덤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시민으로서 카나반에 남을 것인지 선택하라는 상담원의 설명은 충분히 인지했다. 이 모습으로 이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시선을 받는 일인지, 그리고 스스로를 인간이라 인식하면서도 결코 인간과 섞일 수 없을 그 미래를 자세히 듣고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남기로 선택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한 번 이 땅에 의식을 가지고 서있기를 선택하였다. 그 이유를 묻는 상담원을 향해, 자신을 뭐라고 대답을 했던가.

혈마력의 잔영이 아직 남아있는, 그 흐릿한 의식 속에서 자신은 뭐라고 선언하여 그녀를 납득시켰던가.


그 모든 내용을 정확히 기억해낼 수는 없었지만, 그의 기억과 발걸음이 이끄는 곳은 너무도 명확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으와악!”


자신을 향해 다가온 경비병의 반응은 너무도 자연스러웠기에, 그는 상처받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비병이 검을 빼어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다름 아니라 요번에 아르바티앙에서 일어난 망자인데,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경비병을 향해 꾸깃꾸깃한 종이를 내밀었다. 신분증명서였다. 천천히 증명서의 내용과 그의 하얀 백골을 번갈아보던 경비병의 얼굴이 점차 난처한 빛으로 바뀌어간다.


“글쎄요......, 지금 저택엔 한 분 밖에 안계십니다. 원하신다면 만나셔서 이야기는 나눠보실 수 있으시겠지만, 거주까지는......, 모르겠군요. 지금 요양하고 계신 분이 마침 가주시니, 부탁을 드려보시죠.”


“아, 감사합니다.”


그가 이 도시에서 받아보는 첫 친절이었다. 그는 연신 삐걱거리는 허리를 굽혀 경비병의 난색을 받았고, 커다랗지는 않지만 새하얀 외벽이 인상적인 저택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집사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을 처음 대면하고서는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몰골을 보고도 안색하나 바꾸지 않은 그녀의 침착함 덕분이었다.

대합실은 조용했다. 아무런 그림자도,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주를 만나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집사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작은 복도를 지나 침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가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게.”


집사의 노크에, 문 너머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는 넘어갈리 없는 침을 삼키며, 짧은 한숨과 함께 문고리를 돌렸다.


요양을 위한 침실은 아늑하고 따듯했다. 커다란 창으로 여름의 빛이 여과 없이 따스함을 흩뿌리고 있었고, 침대는 구석이 아닌 그 빛의 가운데에서 여름을 만끽하는 중이다. 편히 있으라는 집사의 인사와 함께 문이 닫혔고, 그는 용기를 실어 걸음을 내딛으려 하였다.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너무도 그립고 익숙한 영력의 파동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는 마치 눈앞에서 모든 기억과 세월이 되감기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이 땅위에 존재를 세웠다. 그 거대한 공백을 이어줄 작은 고리라도 찾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그였다. 하지만 그 첫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그는 그 고리를 온몸의 생명으로 느끼고 있었다.


침대에서 책을 덮는 저 노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은 분명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목소리, 이 영력의 파동, 깊은 눈빛.

그것들은 명확하게 그의 감각 속에 남아있는 익숙함이었다.


그는 천천히, 굳었던 걸음을 옮겨 노인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이 익숙함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한센?”


노인은 그 이름과,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눈이 휘둥그레진다. 다가오는 백골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잔재는, 그에게도 분명 익숙한 흐름이었다.


한센은 책을 무릎 위로 떨어트리며, 믿을 수 없는 그 이름을 읊는다.


“......슈리안 형님....?”


작가의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9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4.12.29 19:18
    No. 1

    흐얼 검성할부지 횽아네.

    음 음 근데 이리스는 얼마나 귀여운건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2.29 19:20
    No. 2

    엌 동결님 빠른 감상 감사드려요!

    이리스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콱 깨물고 괴롭히고 싶을 정도로 귀엽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8 百花亂舞
    작성일
    14.12.29 19:48
    No. 3

    아...좋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2.29 19:54
    No. 4

    헠 난무님 오랜만입니다!
    언제나 감사드려요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아우더워
    작성일
    14.12.29 21:16
    No. 5

    으허 ㅋㅋㅋ 검성의 형이였다니 ㅠ 조상일줄 알았는데 ㅋㅋ 재밋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2.29 21:40
    No. 6

    앗 상망님 오랜만입니다!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4.12.30 01:04
    No. 7

    망자... 개념이 참 독특하네요. 인지능력이 정상적이란건 그 능력도 쓸 수 있는건가요?
    언제 다시 대지에 몸을 눕히나요. 생전에 가졌던 영력의 양만킄 살다 가는건가요.
    여하튼 그걸 포용하는 공화국도 재밌고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2.30 01:42
    No. 8

    우왕 불의검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망자는 말씀처럼 살아생전의 사고와 기억을 가진 채, 인위적인 조작(혈마법 등)에 의해 못다한 생명(영력)을 다하려 돌아온 존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남아있는 육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안에 깃들어서 생전에 마저 쓰지 못한 영력을 소모하면서 생을 이어가지요.
    단지 정상적인 인간이 먹고 자는 것으로 생을 이어갔던 것에 반해 망자들은 오로지 남아있는 영력으로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연비가 나쁩니다...
    기대 수명은 죽었던 당시의 나이와 남아있는 영력의 그릇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인간처럼 길게 존재를 유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 힘(영력)을 소모한다면 더욱 그러하지요..

    공화국은 포용한다기보단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그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형국입니다. 본래 망자의 이주나 혈마법을 통한 죽은자의 부활을 허용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상황으로 대규모의 망자가 발생하였고, 게다가 그 실체는 본래 공화국의 국민이었던 자들이니, 무작정 배척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죠 ㅋㅋ
    대부분의 망자는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에 합의했지만, 남아있기로 한 망자들 덕분에 의회는 차별금지법부터 시작해서 특별영주권, 안전보장권 등등의 특별법으로 골치를 썩게 되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 수작수집
    작성일
    17.05.06 15:58
    No. 9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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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5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7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0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0 39 21쪽
»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5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5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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