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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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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5.02.27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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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DUMMY

네 마리의 말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팔루뎀의 성문을 향해 다가선다. 급박한 상황에 이끌려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스친 재규는 선두의 크리스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성문 앞에 펼쳐진 광경은 모두의 사고를 훔치기에 충분했다.


널브러진 하얀 제복의 시체들. 군데군데 흔적을 남기고 있는 마력의 잔영물과 아직 불타고 있는 검문소. 그리고,


활짝 입을 벌린 성문.


자욱한 연기로 인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문 너머로 아직 전투 중인 군대의 함성과 비명소리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주어진 정보와 이어지는 상황을 빠르게 계산한 크리스의 두뇌가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디미르! 현재 도시방위군 지휘는 누가 맡고 있어?”


“도른 준장이야. 우리 집 영감탱이랑 사이가 좋지 않아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무슨.......”


가벼움을 달고 살던 디미르도 이런 상황에는 당혹감으로 얼굴을 적실 수밖에 없었다.


“중앙군도 우리가 팔루뎀을 거점으로 삼을 거란 걸 알고 있었겠지. 아마 보충이란 명목으로 도시에 입성하고 점령을 노렸을 거다. 병력을 규합해서 시청을 사수해야겠어. 따라와!”


크리스는 곧장 연기가 가득한 검문소를 돌파하여 도시로 진입한다. 지금 팔루뎀을 잃었다가는 자신이 브린타이나 내부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견고한 거점이 사라지게 된다. 처음으로 피어난 ‘내전’이란 이름의 불꽃이었지만, 크리스에겐 그런 참담한 감상을 할 틈조차 없었다.


“.......”


디미르도 곧장 그녀의 뒤를 따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결의나 분노보다는, 무언가를 향한 의구심만이 떠올라 있었다.


“별로 놀라시질 않네요?”


재규는 무심한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귀여운 소녀를 품에 안고 있는 카나반의 명예검성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요, 놀랐다기보다는, 오히려 납득이 가는데요. 몰아낸 왕에게 우호적인 도시와 장군을 중앙군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둘은 동시에 크리스와 디미르의 그림자를 따라 도시로 진입해 들어갔다.

하지만 디미르와 마찬가지로, 연기를 뚫는 벤의 얼굴은 코와 눈을 자극하는 매캐함보다도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였는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멈춰라!”


성문 앞 광장에 크리스의 영력이 실린 목소리가 넓게 울려 퍼진다. 그 웅장함은 서로의 목숨을 탐하는 데 정신이 팔린 병사들의 시선도 순식간에 잡아 끌만큼 무게가 있었다.


“.....폐하?” “폐하시다!”


몇몇 장교들의 시선이 감격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엉켜있는 것은 분명 같은 흰색의 제복이었지만, 크리스의 얼굴을 보고 활기를 되찾은 쪽은 남부군을 상징하는 황금색 휘장을 달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과 검을 맞대고 있는 상대는 중앙군을 상징하는 푸른 휘장. 남부군과는 달리 그들의 표정에는 기이한 다급함이 떠오른다.

이미 광장의 전투는 남부군이 압도하는 중이었다. 아마 교전 중이었던 중앙군의 목적은 이들의 발을 묶어두는 것이었을 터. 크리스와 디미르의 등장에 힘입어 방위군은 빠르게 중앙군의 잔당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휘관이 누군가?”


검에 눌어붙은 피를 털어내며 크리스가 모여드는 병사들을 향해 묻는다. 그녀의 부름에 커다란 경례와 함께 앞으로 나선 것은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여장교였다.


“옛! 대위 쟌 아시즈. 반역자들의 내습을 막지 못한 죄, 죽음으로 갚아 마땅하나 부디 검으로서 생을 다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허락한다. 현 상황을 보고해라.”


“카나반의 본격적인 군사도발이 예상되는바, 남부군의 증원이 필요하다는 전문과 함께 보충병이 입성하였습니다만,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통신을 교란하고 공격해오기 시작했습니다. 도시 내 몇몇 초소와 중계소는 이미 파괴당한 상태입니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유무선보고 모두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시청으로 곧장 향한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도른 장군이다. 그를 없애고 시청과 군부를 장악한 다음 나머지 방위군을 회유할 생각이겠지. 적의 지휘관은 누구냐?”


“카스나 젤라이 장군입니다.”


크리스는 짧은 탄식과 함께 미간을 구긴다. 젤라이라면 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판도나 공성전 당시 카나반군에 의해 패배한 장군이자, 사절로서 팔루뎀에 방문한 벤과 일행을 습격한 장본인. 그 책임을 지고 좌천당했을 터인 그가 멀쩡히 장군의 신분으로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


“복직을 대가로 검성에게 충성을 바치게 된 거겠죠.”


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디미르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의견을 모으기 위해 크리스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시청으로 이어지는 도시의 중앙대로를 향해 뻗어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피어오르는 연기들은 분명한 전투의 흔적.


“시청을 담당하고 있는 경비병의 규모는?”


되돌아온 왕의 시선이 쟌을 향한다.


“중대급입니다. 소란을 듣고 외곽의 병력이 지원을 와줬다면 좋겠습니다만, 말씀드렸듯이 통신이.......”


“서둘러야겠군. 부상자 후송은 미룬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무기를 들어라! 민간차량을 차출해서라도 빠르게 이동한다!”


크리스의 목소리에, 부상으로 신음하던 병사들까지 일어나 눈을 빛내며 그녀를 따르기 시작한다. 왕좌에서 내쫓긴 왕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이 기사가 된 이유, 그들이 병사가 된 이유가 자신들을 부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비록 국가관과 왕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벤은 눈앞의 이 여인이 자신의 친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왕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흥미로웠다.

로빈이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것에 비해, 크리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받들라 명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그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모두를 적 또는 아군으로 판단할 뿐일 터. 왕국의 왕이라는 절대적인 위치와 상징성을 이용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그저 적을 만듦에 개의치 않았고, 그랬기에 오히려 모두 떠나가고 남은 아군은 복종에 가까운 태도로 그녀를 섬길 수 있다. 때문에 비록 ‘적’에 의해 왕좌에서 내쫓긴 지금도 저렇게 당당하게, ‘아군’의 맹목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 왕국 내에 한정되지 않는다. 비록 어제의 적국일지라도, 자신의 품에 넣을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겉으로만 보면 차가운 군주의 전형적인 위세지만, 사실은 참으로 불꽃같은 여제가 아닌가.

라고, 벤은 생각했다.




============




“예, 들어오세요.”


언제나 그렇듯, 서류더미에 파묻힌 로빈의 목소리는 피곤에 찌들어 있다. 재촉하듯 밀어붙이는 마누앙의 업무방식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는 그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퇴근시간만 되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업무들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이것이 자신의 능력인지, 아니면 조련하는 총리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칙칙한 왕과 총리의 한숨만 가득한 집무실에 새롭게 찾아오는 손님을 반기는 것만큼은 언제나 로빈의 몫이었다.


“어, 카논? 무슨 일이에요?”


점심시간 직후, 나른한 겨울 햇살에 빼앗겨가던 왕의 의식 앞에 나타난 얼굴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갑자기 죄송합니다. 다급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어.......”


“보고? 카논은 지금 교관으로 파견 나가있는 거 아니었어요?”


“예. 야외훈련장에서 곧바로 복귀한 참입니다. 실은 왕녀님께서-”




리즈와 생도들, 그리고 신분을 위장한 교관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로빈은 짧은 한숨과 함께 턱을 괴었다. 그 뒤 그의 검붉은 시선이 향한 곳은 총리의 굳은 얼굴이었다.


“총리님, 귀족가문이 지하조직과 결탁해왔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질책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노가 서린 시선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누앙은 왕을 향해 대답하는 것에 잠시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자신이 답하려는 내용이, 이 왕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알고 있었기에.


“예. 대표귀족가문은 물론이고 다른 지방귀족, 혹은 수도권의 귀족가문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 상권을 나눠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제론 지하조직을 통한 이권 다툼의 결과물입니다. 단순히 무력을 동원하는 경우도 있고, 자금을 변통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귀족이나 상인조합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크게는 국가차원으로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군수업체가 좋은 예가 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어째서 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거죠?”


굳어가는 로빈의 표정. 마누앙의 예상대로다.


“감히 제가 판단하건데 순기능이 더욱 컸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전쟁이 지속되는 데도 국가부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늘어나거나 국방비를 줄이지 않아도 됐던 이유는, 귀족들의 자금이 뒤를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이 자금을 모으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앞서 말씀드렸듯이 군수업체를 예로 들자면, 만약 국가에서 하나의 산업체를 지정하여 국유화한다면 단기적인 효율은 기대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군납비리 등을 통한 품질의 저하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여러 개의 지하조직과 접선해서 부분계약체결이란 형태로 유인하여 그들끼리 경쟁을 붙인다면 질과 국방비절약 모두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총리의 확신에 찬 먹색 눈동자와 입술이었지만, 로빈은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국 영세민들의 목을 쥐어짜서 귀족들의 배를 불리고, 그 귀족들을 다시 국가가 쥐어짜는 구조라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 과정 중에 당연한 듯이 불법을 저지르는 무리를 국가차원에서 눈감아주고 있었다고요? 결과를 보세요! 카논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랜 기간 그렇게 힘을 키운 그들이 이제 국가기관까지 매수하려 한다는 뜻이잖아요? 이번 징집령에 부족함이 있었음은 인정합니다만, 이렇게 과감히 틈을 파고들 정도로 공권력이 얕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가볍게 넘길 수가 없습니다.”


“폐하, 아직 생도들을 회유하려는 그자들의 정체가 공화국 내 지하조직이라는 확증은 없습니다.”


“밀라 시즈키치가 지하조직의 사주를 받지 않은 것이란 확증도 없죠.”


마누앙은 깨달았다.

로빈의 분노는 하나의 방향성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밀라 시즈키치의 암살미수사건,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받았던 목소리는-,


“이해해달라고는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폐하, 그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하여 탄압을 하신다면, 그 타격은 고스란히 귀족, 그리고 폐하와 공화국이 짊어지게 됩니다. 불결한 유착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번만큼은 폐하께서 넘겨주셔야 합니다.”


마누앙의 말은, 작게는 거리에서의 행패, 크게는 귀족들을 뒤에서 주무르고 있는 그들을 묵인해달라는 요청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간언함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는 총리였으나, 이번만큼은 그조차도 혀끝에 남아있는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에게나 로빈에게나, 일종의 치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로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마누앙의 말대로, 훈련소까지 침투하여 기사를 회유하려는 움직임이 지하조직이 꾸민 일이라는 확증은 없다. 분명 꺼림칙한 존재들이지만, 필요악이라는 점에 이견은 없다.

다만 그가 고민하고 있는 방향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카논, 훈련소 내에서 이번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와 왕녀, 그리고 왕녀의 동기 두 명과 확인된 피해자 생도 둘입니다.”


“지나를 교관으로 새롭게 파견 보내겠습니다. 그녀와 함께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봐 주세요. 위병일지까지 조작할 정도면 훈련소 내 상층부도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요? 확실한 꼬리를 잡을 때까지 일단 숨죽이고 있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표하며 뒤로 물러서려는 그녀를 로빈이 불러 세운다.


“아, 저기 카논.”


“예?”


“그......., 리즈는 어때요?”


질문은 짧았지만 로빈의 표정과 어투엔 실로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런 ‘오빠’로서의 표정을 보니, 이런 상황임에도 카논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왕녀님께선 ‘평범하게’ 과정을 수료하고 계십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잘 좀 부탁드릴게요.”


“옛.”


어느 쪽을 부탁한다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카논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평범하게-라........’


자신이 부탁한 그대로 동생은 이행하고 있는 거겠지. 어떻게든 그녀를 기사로 임관시키기 위해 했던 약속이지만,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에 로빈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면,

‘당사자’에겐 아직 이 약속에 대해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




벤의 짧은 주문과 함께 단단한 바닥을 뚫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의 줄기가 튀어나온다.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연약한 굵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줄기에 휘감긴 병사들은 비명을 시작으로 모두가 같은 반응을 내보이게 된다.

줄기에 닿은 환부로부터 썩어들어가는 피부. 제복이나 전투화, 심지어 강화복으로도 그 ‘독’의 침투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성이 남아있는 기사는 번져가는 독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다리나 손을 잘라내지만, 그것만으로 생존을 허락받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작은 소녀의 손이 심장을 박살 내고 있었으니까.

전투마법사로서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본래 아센 하파가 담당했던 왕실전투마법사육성을 친구에게 부탁받았기에 오캄푸스로부터 지속적으로 과외를 받아온 벤의 마력운용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워져 있었다. 거기에 일반병사는커녕 기사들조차도 느낄 수 없는 존재감과 기동력을 앞세워 벤을 보조하는 소녀는 그를 향한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적 전투마법사의 포격을 일일이 맞받아치면서도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하고 있으니, 디미르는 다소 놀란 눈으로 벤을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 꽤 하잖아?”


그가 다른 국가의 내전에 휘말려 죽기라도 한다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에 디미르는 벤의 전투참여를 만류했었다. 그에 대해 ‘실전감각을 쌓아야 한다’며 앞으로 나선 벤을 처음엔 집중해서 보호하리라 마음먹었었는데, 이제 보니 보호를 받기는커녕 혼자서 모조리 싸잡아 드실 기세가 아니신가.


“마력을 너무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카나반의 마법사가 반(反)자연계마법을 구사하다니, 그것도 대인마법으로 보이는데. 이런 전투에서는 포격마법이나 광범위마법이 효과적이잖아.”


기사의 목에서 검을 뽑아내며, 크리스가 벤에 대해 짤막하게 평했다. 그에 디미르는 히죽 웃으며 왕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긴다.


“나한테 이야기하지 말고 본인한테 직접 말하지 그래?”


“.......이 정도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애초부터 발전을 기대하긴 힘들겠지.”


디미르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에페를 찔렀고, 희생자가 된 병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을 감싸 쥔 채 무너진다.

처음 시청 앞에서 전투 중인 중앙군과 경비중대를 봤을 때 디미르와 크리스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감정은 ‘안도’였다. 수적인 열세와 외곽과 두절된 통신에도 불구하고 시청경비중대가 도른 준장의 지휘 아래 훌륭하게 버텨주고 있었던 것이다.


“시청을, 시청을 먼저 점령하란 말이다! 왜 밀어붙이질 못하나?!”


푸른 휘장의 중앙군 사이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디미르는 짧게 웃고 만다. 도시방위군의 통신체계를 무력화시킨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직접 선두에서 끈질기게 버티는 도른 준장과 갑자기 남문경비대를 규합해서 추격해온 국왕의 등장은 젤라이로서는 대응하기 힘든 변수였을 것이다.


“디미르.”


자신을 부르는 왕의 진중한 목소리에 디미르는 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녀가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벤의 요격에 공중에서 폭파하는 마력의 뒤틀림 사이로 과감히 몸을 도약한다. 거대한 규모의 전투는 아니었지만, 좁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은 충분히 어수선했기에 그의 그림자를 눈치챈 시선은 많지 않았다.

에페가 바람을 가르며 디미르의 몸보다도 먼저 지면에 내리꽂혔고, 그 얇은 검신이 내는 후폭풍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영력의 파동이 푸른 휘장의 군대를 덮친다. 얕게는 피부, 깊게는 팔다리나 안구가 찢겨나간 병사들의 비명이 만들어내는 혼란 속에서도, 디미르의 새파란 눈동자는 오직 하나의 얼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트리스탄테!”


아무래도 눈이 마주친 순간 저쪽은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디미르는 간만의 재회를 만끽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한 번의 도약과 한 번의 검짓만으로 젤라이를 감싸고 있던 기사와 병사를 찢어버렸고, 간신히 공격을 막아낸 젤라이의 검을 가루로 만들었다. 평범한 검으로는 차기 검성으로 가장 유력한 기사의 일격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던 탓이다.


“자, 잠깐-”


본능적인 외침이자, 본능적인 눈빛.

디미르는 미소로 그에 답한다.

에페의 날카로운 검끝과 함께.



지휘관을 잃은 충격도 잠시.

중앙군은 쟌을 앞세워 돌격해온 크리스에게 그대로 돌파를 허용하고 만다. 아직 피를 내뿜고 있던 젤라이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왕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도른 준장의 앞이었다.


“준장, 괜찮나?”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직접 검을 휘두르며 파고들어와 건넨 왕의 첫마디.

디미르와 쟌은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검성에 대립하는 장군이라 할지라도 그가 아직 실각한 크리스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도른이 검을 거두지 않은 채 크리스에게 한걸음 다가섰고, 디미르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는 순간-


“.......황공합니다, 경계에 실패한 군인을 위해 친히 검을 잡으시다니......, 이 불충을 부디 목숨으로 갚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물론, 허락한다.”


마침내 크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그녀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었지만,

오히려 자주 보여주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어울린다고

벤을 포함한 그 자리의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연재주기에 대해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ㅠ

내적인 슬럼프가 아닌 외적인 슬럼프랄까요.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보상없는 집착이라는 평가를 듣는 마당에

결국 카페에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ohe.jpg< 요즘 제 심정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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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69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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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3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106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29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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