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90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12.31 19:36
조회
1,329
추천
39
글자
21쪽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DUMMY

대지와 숲이 가지고 있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1년이라는 시간은 순간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의 찰나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가치를 가장 경시하면서도 가장 깊숙이 얽매여있는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는 개벽의 시간이기도 하다.

조엘은 본래 자신의 굴레가 아니었던, 가장 길고 참혹한 1년의 시간을 거쳐 마을의 입구를 밟고 있다. 전운이 가까이 드리운 마을은 이미 예전의 활기차고 아늑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오욕의 목소리와 거친 시선으로 찢겨진 자신의 존재보다도, 마을에 내려진 황폐한 재앙이 더욱 시리게 그의 가슴을 죄여온다.


생명의 흔적이 희미해진 이곳에서 그녀는 어떻게 살아가고... 아니, 살아남고 있을까.


언제나 마을광장에 나올 때마다 들었던 ‘어~ 조엘이냐!’라는 인사는 없었다. 언제나 입고 있었던 목이 늘어난 셔츠와 후줄근한 청바지가 아닌, 말끔한 귀족차림의 그에게 반갑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억의 파편들을 대신하고 있는 시선들은, 지난 1년간 그가 지겹도록 삼켜왔던 멸시였기에, 조엘은 어렵지 않게 그들이 속으로 품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땅은 아실레마가 전운을 몰고 오기 전부터 이미 죽어버린 것이겠지.

반역자의 본가. 그리고 그 본가의 귀족들을 우러러보며 살아왔던 마을주민들. 그들의 배신감으로 치장된 생존본능이 어떤 식으로 관계의 종말을 가져왔을지, 너무도 확연하게 조엘의 머릿속에 그려진다. 동시에 저택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조급함 위를 걷기 시작한다.


그나마 ‘도련님’이라고 불러주던 경비병들도 보이지 않는다. 지저분하게 넝쿨이 얽혀있는 저택의 입구. 굳게 닫혀있어야 할 금빛대문은 그 도금이 거의 벗겨진 채로 활짝 경계심을 풀어놓고 있었다. 조엘은 자신도 모르게 입구로 들어서며 문을 닫는다. 버릇이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그의 기억 속에서 완성된 모습으로 복원하고 싶었던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런 욕망은 정원에 들어서며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처참하게 시들어있는 꽃들과 고상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담장. 우아하게 그늘을 드리웠던 정원 중앙의 탕나무는 밑동이 절반쯤 잘려나간 채 바싹 말라있다. 그녀와 함께 허브를 기르던 화단은 이미 이름 모를 잡초가 사라진 시간을 대변하는 중이었다.


“.........”

조엘은 길게 숨을 내쉬며 저택의 정문 앞에서 멈춰 선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빠져나왔을 때 들려왔던 그녀의 울부짖음과, ‘그 사람’의 싸늘한 눈빛이 아직도 그의 망막에 남아있다. 미안하다고 소리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이 너머에 있다.

처음 문을 두드리면서도, 조엘은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대합실에 누군가가 남아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크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나타난 얼굴은, 이곳에 오는 내내 다물고 있던 그의 입술을 단번에 움직이게 만들 정도로 반가운 이름이었다.

“지든?”


“도련님?”


이 저택에서 ‘버리는 패’였던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불러주는 몇 안 되는 얼굴 중의 하나가, 그 깊은 주름을 잔뜩 구기면서 활짝 웃는다. 조엘은 자신도 모르게 늙은 집사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조엘의 이 질문에 참으로 많은 뜻이 담겨있음을 느낀 지든은 얇게 웃으며 비루한 손을 흔들었다.


“평생봉사를 다짐했는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노인의 미소에 묻어나오는 씁쓸함을 조엘은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흐린 눈으로 대합실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세월과 무관심의 파도에 휩쓸린 겉과는 달리, 저택 내부는 아직 집사의 손길에서 생을 유지하고 있던 모양이다.


“.......다들 어디 계셔?”


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 무심하게 보이기 위해 던진 조엘의 질문. 하지만 집사의 입은 무거웠다.


“.......마님은 앓으시다가 올해 초에 돌아가셨습니다. 친척 분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 저택엔 주인님과 아가씨만......”

아가씨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조엘은 드디어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건강하게 남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웠다. 지든 또한 느슨해진 조엘의 표정을 읽었지만, 집사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올란님은 서재에 계십니다. 가서 인사를 드리시지요.”






“들어와라.”


노크에 반응하여 굵직한 목소리에 서재 안에서 흘러나온다. 지든은 한걸음 물러나 조엘에게 길을 터주었고, 돌아온 서자는 굳은 얼굴로 서재의 문고리를 돌린다.


“........”


분명히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올란은 조엘의 전신을 한번 훑는 것으로 1년만의 재회를 대신한다. 언제나 짧게 치던 금발을 푸석하게 기르고서, 턱을 뒤덮는 수염마저 덥수룩하다. 그러나 환멸을 담은 저 붉은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채였다. 그 사실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지, 아니면 그 반대로 생각해야할지, 조엘은 피식 웃으며 올란의 맞은편에 있던 접대용 의자로 다가선다.


“어떻게 되었느냐?”

1년 만에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건네는 아버지의 첫마디. 그가 무엇을 듣고 싶은지 조엘은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상세한 질문을 이끌어낸다.

“조사가 잘 되었느냔 말이다. 나와 아델이 연루되지 않았다고 제대로 증언했느냐?”


“예. 두 분 모두 혐의는 벗겨졌습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은 포함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 조엘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럼 귀족대표의 지위는 어찌되는 것이냐?”


아직도 그 허망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단 말인가. 조엘은 속으로 비웃는다.


“가주의 직위는 란다 경이 유지합니다. 반란 자체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판결이 나왔을 뿐이지, 윌리안의 직손에게 다시 권력을 쥐어주는 일은 없을 겁-”


“멍청하긴! 도대체 1년 동안 거기서 뭘 하고 온 거냐?!”

조엘은 격노한 목소리와 함께 날아든 책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단단한 모서리에 긁힌 그의 이마에서 붉은 줄기가 흘러내렸지만, 올란의 격정은 계속되었다.

“그걸 되찾으라고 기껏 보냈더니, 가지고 온 답이 고작 이거냐?! 그 얼빠진 멍청이에게 가주를 넘겨야한다고?! 1년간 놀고먹기만 했느냐?!”


“가주의 직위는 처음부터 희망이 없었습니다. 전 아버님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아델을 대신하여 강제로 끌려갔던 것뿐이잖습니까.”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또 다시 책이 날아든다.

“객사할 것을 건져내어 살려주고 그 은혜를 갚으라 보내놨더니, 이제 아들행색을 하려는 구나! 꺼져라! 이 저택에서 이제 네 자리는 없다! 당장 나가!”


“........”


조엘은 올란의 분노가 아무런 의미도, 향하는 방향도 잃었음을 알고 있었다. ‘인질’의 역할을 대신 맡은 자신이 가주의 직위까지 되찾아올 수 없다는 사실은 올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저 몰락한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 그 엉킨 가슴을 풀어낼 대상이 자신밖에 없는 거겠지.

알고 있었지만, 조엘은 씁쓸한 동정의 미소를 품을 수는 없었다.

문밖에선 예상대로 지든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집사가 품에서 황금빛 손수건을 내밀었고, 조엘은 고맙다고 말하며 턱까지 흘러내린 피를 닦아낸다. 그의 눈은 이미 이마가 찢어진 순간부터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사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 방향을 알고 있었기에, 손수건을 되돌려 받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주름을 움직인다.


“아가씨는 2층 접대실에 계십니다.”


“고마워.”


조엘은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얇고 늙었지만, 굳센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아가씨는......”

집사의 입이, 보기 드물게 주저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도련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기뻐해야하는 것인가?

하지만 어째서,

이 늙은 집사의 표정은 이리도 어두운 것인가.


“.......다만, 흘러가는 시간은 도련님과 아가씨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엘은 가만히 서서, 이어지는 집사의 설명을 들었다. 필사적으로 주인을 변호하는 그의 목소리는 걸러내고, 유일하게 남은 ‘사실’하나만이 그의 머리와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



노크는 하지 않는다.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가 삐걱거리며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머금었고,

조엘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머릿결.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 아름다운 곡선이 새하얀 드레스를 돋보이게 만든다. 투명하고 하얀 손은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렸고, 여름바람에 휘날리는 기다란 속눈썹아래 새빨간 눈동자는 문을 열고 들어온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흔들린다.


“조엘!”


“오랜만이-”


조엘은 인사를 맺지 못했다. 침대를 박차고 달려와 자신의 품에 안긴 아델이 그의 목소리를 막은 것이다. 간신히 휘청거리지 않고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싼 조엘은,


1년 만에 웃을 수 있었다.


“미안해.”

하지만 조엘의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품속에서 들려오는 아델의 목소리가 눈물에 젖어있었던 탓이다.

“정말 미안해........나 때문에......., 나 때문에........”


“너 때문이 아니야. 덕분에 수도 구경도 실컷 하고 왔는데 뭐.”


물론 이정도 거짓말로 그녀의 눈물을 지울 수는 없었다. 더욱 더 깊이, 더 강하게 조엘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아델의 목소리에 원망이 담기기 시작한다.


“왜 이제 온 거야......?”


“.......미안.”


짧은 사과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외에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아델은 벌겋게 부은 눈과 함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조엘을 올려다보았다.


“많이 상했네.”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조엘의 턱을 쓰다듬는 아델. 조엘은 그 손길에 모든 것을 내던진 채 기대고 싶었지만, 빠르게 돌아온 이성이 결국 먼저 튀어나오고 만다.


“지든에게 들었어. 결혼한다며?”

그가 1년간 겪었던 모든 경험보다도, 지금 짓는 억지미소가 제일 괴로웠다.

“축하해.”


“.......”

아델의 얼굴이 굳는다. 그녀는 조엘에게서 손길을 거두고, 침대를 향해 뒤돌아선다. 그 끄트머리에 앉으며 돌아온 그녀의 얼굴엔 다시 미소가 피어있었지만, 조엘은 그 미소가 자신의 얼굴에 떠오른 고통과 비슷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대 얼굴도 몰라. 그냥 아르다르 귀족출신의 아저씨라는 것만 들었어. 말이 결혼이지 그냥 팔려가는 거지 뭐....... 아실레마가 더 밀고 내려오면 여기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 몸을 맡길 곳은 있어야 하잖아.”


분명 올란의 생각이겠지.

조엘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만다.


“.......그걸로 괜찮아?”


그녀의 곁에 앉으며, 조엘은 차마 시선은 마주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목소리는 그녀의 짧은 탄식이었다.


“아앗! 이마에 그거 뭐야? 또 아버님이 그러신 거지!?”


“어?”


무심코 이마를 만진 그의 손에 새빨간 액체가 묻어나온다. 평상심을 유지하도록 노력했지만, 그의 뒤틀린 마음이 상처를 통해 새어나오고 만 것일까.


“아, 여기 약이 있었을 텐데, 가만히 있어봐.”

그녀는 자신의 손수건을 조엘의 이마에 맞댄 채, 반대편 손으로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다. 어설픈 손짓으로 연고를 꺼낸 그녀가 조엘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고, 조엘은 자신의 상처를 뒤덮는 그녀의 손가락과 그녀의 목덜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좋고, 편안해지는 향기가 그의 코에 스친다.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빛과 바람을 등진 아델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숨결이 닿는 그 거리에서, 조엘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됐다.”


그의 눈높이로 내려온 그녀의 눈동자. 그의 굳은 얼굴 앞에 내려온 그녀의 서글픈 미소.

그의 입술 높이로 내려온 그녀의 반짝이는 붉은 입술.


어두침침한 감옥과, 사방에서 덮쳐오는 악의의 1년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축복이 바로 앞에 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


그의 흐린 눈동자에, 그녀의 놀란 눈동자가 비친다. 비스듬하게 엇갈린 콧날 아래로, 서로의 숨결이 맞닿는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흐르는 정적은 그에게 있어선 영원으로 지속되었으면 하는 시간이었다.

잃었던 그의 시간이 되돌아온다. 가장 커다란 보상으로, 그는 놓았던 모든 감각과 감정을 입술에 담아 그녀에게 전했다. 그것으로 완벽하게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떼어진 입술 위로 떠오른 그녀의 표정을 바라볼 이성만큼은 겨우 남길 수 있었다.


“미, 미안해!”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매만지고 있는 그녀를 뒤로 하고, 조엘은 황급하게

방에서 빠져나온다. 문을 등진 채로, 이마를 감싸고 쓰러지듯 주저앉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다.


“도련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조엘을 향해, 지든은 표정과 어투 모두를 지우고, 나직한 목소리만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반쪽이라고는 해도, 두 분은 남매이십니다. 결코 인정받을 수 없고, 축복받을 수 없는 길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도련님이 더욱 잘 알고 계시겠지요. 부디 그 불길은 도련님 안에서만 잠재우고, 아가씨께는 피어오르지 않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 다시금 피어오르기 위한 꽃입니다. 이런 곳에서 꺾여서는 안 됩니다.”


뜨거운 태양. 찬란한 여름빛.

하지만 서로의 입술이 남기고간 그 자리는, 더없이 허전하고 싸늘하기만 했다.



차가운 여름이었다.






======================





“베르달 근방에 나가있던 척후대로부터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아실레마가 베르달숲을 전부 태워버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회의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혼란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영력을 실은 로빈의 목소리가 다시 의원들의 시선을 바로잡는다.

“제국 본토의 숲에서부터 카나반에 이르기까지. 이는 단순히 보급로 확보라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반도에서 숲이라는 존재를 아예 지울 생각인겁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대답하는 귀족의 목소리는 없었다. 곧이어 로빈을 대신하여 입을 연 것은, 아스트로바톰의 총장인 디쿠젠 니바르토.


“애초에 제국의 목적은 정복전쟁이 아니었던 겁니다. 피의 군주 아펜타우스에 적대하는 모든 사도의 영향력을 반도에서 지워버리려는 의도입니다. 숲의 사도 세뮈엘이 그 중심에 있지요.”


“그럼 적이 아르바티앙을 노린 것도, 가도를 감싸고 있는 투르탄숲과 오데라숲을 밀어버리기 위함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란다의 질문에, 디쿠젠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카나반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국가들도 아실레마 제국의 움직임을 200년 전 대전쟁이라는 틀에만 갇혀서 판단해왔던 것입니다. 황제는 200년 넘게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검성을 아우를 수 있는 유일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는 그들이 숭배하는 악마인 아펜타우스 하나뿐. 제국이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이번에 아르바티앙에 있었던 망자사건은 그 목소리의 일부이지요.”


노인의 설명에 이어서 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 의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펜타우스의 계약자들을 상대할 사도계약자가 전무한 우리로서는 제르나비 고도와 같은 전력을 반드시 붙잡아야합니다. 악마라는 선입견은 잠시 벗어두고, 위태로운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서 약간의 타협점은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총장님의 분석덕분에 특무대 건은 긍정적으로 결론이 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본궁을 나서며, 로빈이 디쿠젠을 향해 건넨 말이었다. 그에 학회장은 농도 짙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젓는다.


“황공합니다. 왕이라는 직책으로 마법대학에 손을 내민다는 일은 언론에서 먹잇감으로 삼을만한 내용인데, 폐하의 용기에 감탄할 뿐이지요.”


“저에 대한 사견보다는 당장 눈앞의 문제가 중요하죠, 뭐. 말씀하신 악마분석반설립과 예산에 대해서는 총리님이 돌아오시는 대로 협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럼-.”


서로 허리를 굽히는 총장과 왕.

로빈은 노인의 뒷모습이 분수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그곳에 서있었다. 새로운 목소리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됐어?”


옆으로 다가온 벤의 피곤에 찌든 먹색 눈동자를 향해, 로빈은 마찬가지로 피곤에 찌든 얼굴로 웃었다.


“응, 빠르게 통과될 거 같아. 고도는?”


벤이 내민 아이스크림 용기를 받아들고, 둘은 분수가 내려다보이는 계단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똑같지 뭐. 자기한테 선택권은 애초부터 없는 거 아니냐고 툴툴대고 있어.”


동시에 터지는 짧은 웃음.


“그나저나 ‘절망의 군주’라니, 그런 빈틈투성이 얼굴주제에 엄청난 거물이었네.”


“내말이. 어떻게 내 피로 그런 녀석이 소환된 건지 모르겠어.”


인간의 문명과는 얽히기를 거부했던 절망의 악마. 그를 새로이 악마사전에 등록하면서도, 왕립교회는 어째서 그가 사도국인 카나반에, 그것도 왕의 측근인 벤의 피를 통해 강림하였는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데로 본인이 ‘모른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그 답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벤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절망의 악마와 계약한 거니까, 고도라면 은근히 신나할 거 같은데.”


“아, 안 그래도 그 말 하더라. 학회장님한테도 어찌나 다시는 자기 무시하지 말라고 윽박을 지르던지.”


“하하.......”


말만 들어도 그 광경이 눈에 그려지는 로빈이었다. 어쩐지 총장의 표정이 어둡다했는데, 그 때문이었나?


두 청년의 눈앞에 펼쳐진 도시는 아직 전운의 그림자에서 완벽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회색이 찬란한 여름, 그 한가운데에서, 벤은 결국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친구의 운명을 되짚는다.


“.......지나는 어때?”


“........똑같지 뭐.”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향한, 왕의 얇은 미소.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곧 ‘왕비의 역할’을 다할 수 없는 그녀에 대해 따지고 들겠지. 지나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더 괴로운 거고....... 하아......, 내가 그녀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폐하께선 하던 대로, 있는 그대로 그녀 곁에 있어주시면 됩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노인의 목소리에, 로빈과 벤은 동시에 화들짝 놀라며 계단 위를 돌아본다. 익숙한 그 얼굴의 이름을 먼저 내뱉은 쪽은 로빈이었다.


“검성님!”


“허, 이제 검성이 아니지요. 검성은 옆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은퇴한 노인네, 또는 한센이라고 불러주세요.”

반가운 마음에 계단을 오르던 로빈의 걸음이 순간 멎어버린다. 그 이유를 노인은 알고 있었기에, 은은한 미소를 풀지 않을 수 있었다.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손녀에게는 더더욱 그러하고요.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마음에 따라, 그리고 이끌리는 마음에 따라 결정한 일이니, 폐하께서는 그저 그녀의 곁을 지켜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로빈은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노인의 굵직한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따위의 소리를 지껄였다간 이 노인은 분명 격하게 화를 내리라.

그리고 이는 자신을 향한 지나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도 되었기에, 로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나의 병문안 오신 건가요?”


무거운 친구의 입술을 대신하여 벤이 한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아뇨, 당분간은 혼자 둘 생각입니다. 오늘 온 것은 다름 아니라 폐하와 검성께 공적인 용무가 있어서.”


“공적인 용무?”


“예에.”

의문으로 먹색 눈을 빛내는 벤을 향해, 한센은 얇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요번에 혈마법특무대를 구성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아, 예. 이제 곧 의회에서 통과될 거예요. 무슨 의견이라도.....?”


노인을 향해 되물으며, 벤은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한센의 얼굴에서 당혹감을 읽은 순간이었던 것이다. 연륜에 어울리지 않는 망설임 끝에, 노인은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그......, 특무대의 명단에 추천하고픈 인물이 있습니다만.......”


작가의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2014년 마지막 글이 되겠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일과 목표로 삼으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길 빕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0

  • 작성자
    Lv.67 아우더워
    작성일
    14.12.31 21:03
    No. 1

    오첫댓인가 ㅋㅋㅋ po검성의형님wer이 특무대로 합류하는건가요 ㅋㅋ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2.31 21:06
    No. 2

    으앗 상망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보람찬 한해였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4.12.31 21:29
    No. 3

    특무대에 조상님추천 ㅋㅋㅋㅋ 200년이면 한세대를 60년쯤으로 보던가요 ㅋㅋ 3세대전이니까... 허허허헣허헣 작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앞으로도 연재 잘 부탁드립니다! 변수의굴레에 N이 뜨면 기분이 좋아요 흐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2.31 21:32
    No. 4

    동결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1.01 11:46
    No. 5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01 14:02
    No. 6

    불의검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즐거운 한 해였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6 ACHT.W
    작성일
    15.01.01 15:46
    No. 7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시길.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01 16:30
    No. 8

    ACHT.W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9 Fragarac..
    작성일
    15.04.23 14:40
    No. 9

    지나의 일은 안타깝지만 자업자득이니.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4.23 15:50
    No. 10

    Fragarach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업자득.....맞지요 ㅠ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3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4) +8 15.04.06 934 26 25쪽
142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3) +4 15.04.01 936 27 20쪽
141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2) +6 15.03.27 970 28 19쪽
14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 +8 15.03.22 1,155 30 22쪽
139 (막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4 15.03.18 1,064 25 24쪽
13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3) +10 15.03.13 1,031 28 21쪽
13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2) +8 15.03.09 1,197 26 19쪽
13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1) +10 15.03.04 969 27 21쪽
135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0) +4 15.02.27 1,321 38 19쪽
134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9) +9 15.02.22 1,165 29 20쪽
133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8) +7 15.02.18 1,321 29 20쪽
132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7) +6 15.02.13 1,266 28 19쪽
131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6) +6 15.02.09 1,201 31 19쪽
130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5) +8 15.02.06 1,363 35 19쪽
129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4) +6 15.02.03 1,300 31 19쪽
128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3) +12 15.01.31 1,300 33 20쪽
127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2) +15 15.01.30 1,504 40 17쪽
126 (13막) 고동을 시작하는 불꽃이 족쇄를 끊는다 (1) +9 15.01.29 1,342 28 19쪽
125 (막간) 지나가야할 시간 +14 15.01.28 1,177 32 12쪽
12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2) +8 15.01.27 1,360 35 21쪽
12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1) +10 15.01.26 1,283 31 18쪽
122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0) +8 15.01.24 1,390 30 20쪽
121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9) +8 15.01.23 1,309 34 20쪽
120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8) +12 15.01.22 1,491 41 15쪽
119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7) +6 15.01.21 1,337 28 18쪽
118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6) +7 15.01.20 1,319 33 20쪽
117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5) +4 15.01.19 1,324 30 20쪽
116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4) +10 15.01.17 1,444 27 18쪽
115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3) +13 15.01.16 1,438 40 18쪽
114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2) +13 15.01.15 1,541 43 17쪽
113 (12막) 어느 이름 없는 죄인의 유산 (1) +6 15.01.14 1,378 29 19쪽
112 (막간) 따스한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15.01.13 1,415 28 13쪽
111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0) +11 15.01.12 1,382 39 24쪽
110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9) +6 15.01.10 1,255 31 20쪽
109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8) +6 15.01.07 1,295 36 19쪽
108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7) +8 15.01.05 1,453 33 24쪽
107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6) +9 15.01.02 1,567 38 18쪽
»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5) +10 14.12.31 1,330 39 21쪽
105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4) +9 14.12.29 1,184 39 18쪽
104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3) +2 14.12.26 1,224 39 17쪽
103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2) +7 14.12.24 1,294 45 17쪽
102 (11막) 차가운 여름에도, 꽃은 피어나고 나무는 솟았다 (1) +4 14.12.22 1,439 32 16쪽
101 (막간) 피지 못한 목소리는 달길 따라 조각배 태워 보내고 +3 14.12.20 1,515 41 15쪽
100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1) +10 14.12.18 1,456 39 25쪽
99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 +6 14.12.16 1,534 45 21쪽
98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9) +6 14.12.14 1,318 43 18쪽
97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 +6 14.12.12 1,468 40 20쪽
96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 +4 14.12.09 1,426 44 17쪽
95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 +3 14.12.07 1,504 50 16쪽
94 (10막)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5) 14.12.05 1,628 42 2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